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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저작비평회] “한국 ‘건국’의 기원을 찾다” 질의응답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2.09.05 BoardLang.text_hits 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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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9월(통권 33호)

[제6회 저작비평회] 

 

“한국 ‘건국’의 기원을 찾다” 질의응답


 

이어보기 : 발표(오노 야스테루)
이어보기 : 토론(최우석)
이어보기 : 토론(홍종욱)


 

오노 야스테루 :

문제점이 많은 책인데 꼼꼼하게 읽고 코멘트를 해주신 홍종욱 선생님과 최우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3.1 혁명 담론에 대해 비판을 했기 때문에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게 봐주셔서 안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먼저 최우석 선생님과 홍종욱 선생님에게 공통되는 지적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수동적으로 서술하고 국제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의 내적인 맥락 분석이 약하다는 지적입니다.

이 점은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특히 대한제국기, 혹은 그 이전부터 국민, 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런 성별이나 출신계층 등 신분에 대한 의식이 해체되는 흐름에 대해서는 이번 책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분석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적인 능동성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이 책에 한정하지 않고 10년 이상 전부터 제 연구의 문제로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책도 이러한 내용으로 한 것은 역시 운동의 국제적 요인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내 자신이 연구를 통해 기존 연구에 공헌 할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

다만, 국제적 요인을 중시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수동적으로 서술했다고 하는 인식은 없습니다. 세계대전이라는 당시 주어진 조건을 밝히고 그 조건 속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어떻게 능동적으로 국제사회를 분석하고 운동에 이용했는지, 그러니까 주어진 조건속에서의 능동성을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성공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제 의도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최우석 선생님이 지적한 신규식의 경우도, 중국의 혁명파와 행동할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또 북경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 행동이 효과적인지를 생각하고, 제2인터내셔널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든지, 그러니까 국제 정세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두 선생님의 공통된 지적 두번째는 저의 3.1 혁명에 관한 평가가 너무 가혹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지는 가능성에 대해 부정해 버린 것은 제가 이 책의 문제점으로 반성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최우석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겠습니다. 1948년 8월을 한국의 건국이라고 책에서 주장했습니다만, 제가 뉴라이트는 아닙니다.(웃음) 그런데 저는 국가는 주권 국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권 국가로서 한국의 건국은 1948년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적인 국가 개념을 만들어 건국을 다시 정의할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국가는 주권 국가이므로 다른 나라 사람, 아니면 독립운동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 할 때는 보편적인 정의에 따라 1948년을 건국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뉴라이트가 건국절 이야기를 하고 한국 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만, 세계적 보편적 국가의 정의를 따른다면 뉴라이트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948년 이전 역사를 부정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2.8독립선언에 대해 너무 평범한 서술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인데요, 그런 점이 있습니다. 2.8독립선언에 대해 논문을 쓸 때는 독자성을 부각시켰는데요, 이번 책에서는 역시 3.1운동이 중심이 되는데요, 여기서 2.8독립선언의 독자성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됐습니다만, 좋은 방법이 없어서 평범하게 돼 버렸습니다.

신한혁명당은 자료가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최우석 선생님 지적이 맞는 듯합니다. 이상설이 어느정도 관여했는지 잘 알 수 없는데, 기본적으로는 서류상의 조직이고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류를 준비하다가 실패했고 그 서류를 경찰이 압수함으로써 그것이 자료로 남았다는 것이 실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연구는 신한혁명당이 실제로 존재하고 여운형이 관여해서 그것이 신한청년당으로 이어졌다고 보는데요, 그렇게까지 존재감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홍종욱 선생님이 많은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북한 역사학이 외부와 관계를 중시하지 않고 단일 민족을 강조하는 게 하나의 역사 부정이라는 지적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3.1혁명 이야기가 북한 역사학과 비슷하다는 느낌은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코멘트를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먼저 독립과 혁명은 양립 가능한 개념이 아닌가라는 부분인데요, 아일랜드 혁명도 그렇고 동시기 독립운동이 있어났던 이집트도 이집트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기 자료에도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다만 혁명의 개념을 넓게 본다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2019년에 3.1혁명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3.1운동을 지금의 한국과 연결되는 혁명으로 보는 것이므로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일랜드가 혁명인 이유는 그 결과 자치를 얻고 독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1운동은 식민지에서 달성한 결과가 무엇인가요.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신분제 해체, 여성에 대한 시선이 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독립에 가장 중요한 정치에서는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었을 뿐인데, 문화정치가 낫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혁명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나요. 문화정치를 과대평가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시정부와 남북통일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에 대해 당위의 국가, 현실의 국가라는 개념을 통해 19년 건국론자는 당위의 국가를 지향한다는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말로는 이해가 됩니다만, 한가지 의문인 것은 임시정부 연구자의 경우 사회주의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꽤 있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대한민국 민족주의는 흥미롭습니다. 관련 문헌을 읽어보겠습니다.

네이션, 피플에 대해서는 저도 예전에 윤영실 선생님 교토에 계실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에 신채호가 네이션, 피플 구분한 것에 대해 이번 책에서 같이 생각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이션, 피플 구별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사고입니다. 유럽에서는 그렇게까지 차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정보가 유럽에서 왔는지 미국에서 왔는지, 영어라도 영국인지 미국인지 그런 점을 꼼꼼하게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미국의 네이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능력이 있어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1차 대전 때 윌슨을 통해 그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앞으로 유럽과 미국의 차이, 1차 대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임부의 청원서의 행방은 잘 모르겠습니다. 찾아봤습니다만 일본 언론에는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임규가 거짓 진술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청원서를 발송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경찰에 잡힌 상황에서 유리하지는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피치자의 동의를 확인하는 방법에 대해서 윌슨은 민주주의, 주민투표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은 당시부터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불렸는데요, 식민지 주민에게 민주주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라는 거죠. 프랑스도 그런 역할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우석 :

1948년 건국설은 뉴라이트가 노린 것이 그 이전 다양한 독립운동을 대한민국 역사에서 거세하는 효과인데요, 그걸 생각하면 조금 조심스럽게 다른 식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3.1혁명 담론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전혀 정착이 안 되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에서 3.1운동, 임정 100년 이벤트를 추진할 때 민족문제연구소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3.1혁명론의 학술적 업적은 2014년, 2017년 정도에 발표되고 그 뒤로는 재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요한 논자도 이준식,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님, 윤경로 선생님 등 원로급 연구자들이 시론적으로 제기한 정도입니다. 물론 오늘 사회자이신 고태우 선생님도 3.1혁명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셨는데요(웃음). 그밖에 다른 연구에서는 많이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3.1혁명론이 아니더라도 임정법통론처럼 다른 역사적 가능성을 배제하는 연구는 존재하지만, 3.1혁명론에 대해 그렇게 우려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상진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중 관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 하상진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선생님 저작 중 2017년도에 발표하신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조선독립운동」 논문을 읽었는데, 나가타 아키후미 선생님의 1996년도 논문, 정병준 선생님의 2017년도 논문 등과 비교해 보니, 오노 선생님께서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라고 일반적으로 명명할 법한 사람들을 ‘담당자’ 또는 ‘활동가’라고 하는 단어로 기술하셨습니다. ‘담당자’, ‘활동가’라는 용어를 선택한 이유에는 한인 독립운동 또는 민족운동에 대한 선생님만의 시각과 관점, 견해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여 질문을 드립니다.

  • 小野容照, 2017 「第一次世界大戦の終結と朝鮮独立運動 - 民族「自決」と民族「改造」」, 『人文學報』 110, 京都大學人文科學研究所.
  • 長田彰文, 1996 「ベルサイユ講和会議と朝鮮問題」, 『一橋論叢』 115-2, 日本評論社.
  • 정병준, 2017 「3·1운동의 기폭제 -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 및 청원서」, 『역사비평』 119, 역사문제연구소.

 

오노 야스테루 :

‘독립운동가’와 ‘활동가’를 쓰고 있는데, 특별히 양자를 구분한 의미나 의도는 없었습니다.

 

홍종욱 :

일본에서 보통 시민단체, NGO, NPO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활동가’라고 부르는데, 특별한 개념적 의미라기보다는 이런 일본어 표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태우 :

아까 ‘3.1혁명’ 관련 논의와 관련해서 저도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3.1운동을 ‘혁명’으로 부른다고 반드시 ‘1919년 건국사관’을 옹호하며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보거나,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려는 이데올로기 작업에 관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년 총서에 포함된 ‘3.1혁명의 여진’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썼는데, 정부의 기념사업을 옹호하려는 차원의 글은 아니었고요. 저도 이후에 영어로 다른 글을 발표하면서, ‘혁명’을 주장한다고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치와 역사가 결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3.1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68혁명’과 같은 용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68년과 그 이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한 사회운동이 일어났고, 반전운동과 환경운동 등이 활발하게 펼쳐진 바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3.1운동과 그 이후에 사회 주체로서 노동자, 여성, 어린이의 등장이라든가 각종 현장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적인 의미가 발현되었던 상황도 충분히 ‘혁명적 상황’ 내지 사회 변화의 충격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에서 ‘3.1혁명’이라는 단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보았습니다. 물론 3.1운동을 사회체제나 정치체제가 바뀌는 사회과학적인 엄밀한 의미의 ‘혁명’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촛불시위로 정권 교체가 되었는데, 저는 시위 이후에 여러 가능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3.1운동 이후, 3.1혁명 이후를 ‘혁명의 여진’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해봤던 것인데, 논문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오노 선생님 책에서 민주공화제나 민주주의라는 것이 특히 해외 독립운동가 진영에서 ‘자결’권을 보이기 위한 능력을 어필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후에 일어난 반향을 생각하면, ‘전략’적인 선택의 차원만으로 공화주의나 민주주의를 보는 것도 조금은 좁은 해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도 통치의 변화에서부터 사회의 변화, 즉 앞서 말씀드린 ‘민주주의’적 시각과 요구가 공장이나 소작쟁의 과정에서 구호로 등장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요. 그러한 다양한 해석과 역사의 여러 방향성도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박정민 :

안녕하세요. 박정민이라고 합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내용이 아마 미국의 윌슨을 비롯한 자유주의 계열의 민족자결 개념을 어떻게 식민지 조선인들이 사용하게 되었는지 밝혀주셔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유럽의 좌파가 먼저 민족 자결 개념을 사용했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라도 보신 자료 중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사용했던 ‘민족자결’ 개념을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이 사용하지 않았는지, 조선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오노 야스테루 :

질문 감사합니다. 제 책에서는, 여러 가지 민족자결 개념을 여러 세력이 주장하는데 최종적으로는 윌슨이 주장하는 민족자결 개념을 수용하게 되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다는 그런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민족자결 개념을 알게 된 계기는 말씀하신 대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족자결입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민족자결을 주장한 세력이 사회주의자였고 그런 사람들이 제2인터내셔널이 되잖아요. 처음에는 제2인터내셔널에 접근하다가 그 다음에 윌슨, 그리고 레닌 같이 제3인터내셔널과 접근하게 되면서 분리되어 갑니다. 출발은 유럽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얘기는 제 책에서 제2인터내셔널 거론하며 약간 언급했는데 참고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태우 :

질문과 답변 감사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오노 야스테루 선생님을 모시고 제6회 한국역사연구회 저작비평회 진행하였습니다.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서평이나 다른 방식으로 다시 오노 선생님을 모시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8월 초 무더위에 참여해주신 발표자, 토론자 선생님, 그리고 청중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