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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논문을 말한다
[나의 논문을 말한다] 부여 정치사 연구_이승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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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4월(통권 40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부여 정치사 연구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08) 이승호(고대사분과) 2012년 7월, “나의 논문을 말한다” 코너에서 석사학위논문 「3세기 후반 고구려의 對西晉 교섭과 국제정세」를 소개한 지 10년 만에 다시 제 논문 얘기를 꺼내봅니다. 즐겁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제 선정 부여사 전공자라는 말이 지금은 퍽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돌아보면 석사학위논문을 제출한 뒤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박사학위논문을 처음 준비할 때까지도 고구려사 전공자라는 정체성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까지 발표해 왔던 몇 편의 글에 살을 붙이고 내용을 더하여 「고구려·부여 관계사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 초고를 작성했다. 글을 들고 지도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렸을 때의 무겁고 답답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표지와 목차 뒤로 감춰두었던 자신 없던 문장들이 채 들춰지기도 전에 논문은 제목에서부터 퇴짜를 맞았다. “우리 학계에서 부여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부여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데, 어떻게 고구려와 부여 관계의 역사를 논할 수 있는 거지?” 막막했다. 간단하고 또 너무나도 근본적인 질문이었으나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 - 지금도 크게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 우리 학계에서 부여사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부여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자칫 고구려의 시선에서 부여사를 일방적으로 소비할 우려가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아직 우리 학계에 부여사를 전론으로 다룬 박사학위논문이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부여사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구성해 보는 것이 어떤가’라는 지도교수님의 권유를 메모한 연구노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끙끙 앓았다. “부여 정치사 연구”라는 제법 그럴듯한 제목을 두고 학위논문 작성에 매달렸지만, 이렇듯 처음부터 부여사에 대한 어떤 특별한 문제의식이나 의미심장한 연구 목적이 있어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얼버무리기에 지도교수님의 지적은 너무나도 매서웠고, 또 ‘부여사’를 전론으로 하는 첫 번째 박사학위논문을 써보겠다는 욕심이 눈을 가렸다. 그렇게 처음에는 생각지 않던 ‘부여사’를 주제로 다시 글을 준비하게 되었다. 도판 1. 청주 오송읍에서 출토한 동병철검. 부여 땅에서 출발한 이주민 집단의 흔적으로 볼 수 있을까.
문제의식 어떤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료를 다시 읽고, 정리하고, 목록화하였다. 그리고 부여와 관계된 선행 연구를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사료를 읽고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글을 추동할 문제의식도 가닥을 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부여사에 대한 통시적 이해가 부재하다는 점, 부여사 서술이 대체로 고구려의 시선에서 ‘주변 역사’로 논의되어 왔다는 사실은 글 작성의 동력이 되었다. 한국고대사회를 서북행렬사회(西北行列社會)·후방행렬사회(後方行列社會)·남방행렬사회(南方行列社會) 등으로 구분하여 바라보았던 이병도의 시선은 부여를 그 후방행렬사회에 위치시킴으로써 문화적 성격에 ‘변방성’을 덧씌웠고, 이러한 관점은 부여사를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으로 작용하였다. 고구려사 연구의 진척 속에서 부여사에 대한 이해가 일부 진전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부여의 역사는 고구려의 발전을 설명하는 수식으로 혹은 그 종속 요인으로 취급되었다. 그간 부여사에 대한 고정된 인식, 즉 ‘문명의 배후’, ‘고구려의 기원 혹은 그 주변’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욕심이 생겼다. 처음 「고구려·부여 관계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자 했던 것도 어찌 보면 고구려사의 시선에서 부여사를 바라보고자 하였던 의도가 무의식 중에 개재된 것은 아니었을까. 부여를 중심에 놓고 부여사를 바라본다면, 그동안 고구려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져 있던 예맥 집단의 역사가 새롭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연맹왕국’이라는 고대국가 발전단계 상의 도식에서 부여사를 바라보았던 그간의 시각도 여전히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략 7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연맹왕국’이라는 용어 하나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문제의식이 조금씩 가닥을 잡고,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둘 생겨나면서 아래와 같은 글의 목차가 구성되었다. 사실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겨웠던 부분은 고고학 연구 성과를 수렴하는 일이었다. 부여와 관련한 고고학 성과를 정리하면서 평소 고고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였던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물질자료를 분석할 능력이 없는 필자는 중국학계에서 발표된 부여 고고학 관련 연구의 궤적을 따라가며 논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구성과 논지 Ⅰ. 서론 1. 연구 주제와 문제의식 Ⅱ. 부여의 성립과 문화 기반 1. 부여의 성립과 기원전 3~2세기 국제정세 Ⅲ. 부여족의 확산과 동부여 1. 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동부여 Ⅳ. 부여사의 전개와 국세 변동의 추이 1. 기원전 시기 夫餘-前漢 관계와 ‘濊王之印’ Ⅴ. 부여 정치구조의 특징과 국가체제 1. ‘用刑’과 迎鼓로 본 부여 왕권의 위상 Ⅵ. 부여의 멸망 과정과 유민의 동향 1. 부여의 ‘西徙近燕’과 346년 前燕의 침공 Ⅶ. 결론 논문에서 가장 욕심을 냈던 부분은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부여사에 대한 통시적 서술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부여사 관련 기록은 턱 없이 부족하며 그마저도 1~3세기 연대에 집중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남겨진 기록마저 타자의 시선에서 작성된 것이다. 부여인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였다. 부여사에 대한 통시적 서술을 위해서는 이처럼 기록되지 않은 시기의 역사마저도 채워 넣어야 했다. 특히 관련 기록이 없다고 보아도 좋을 부여의 성립 혹은 건국과 관계된 역사는 고고학 성과에 의지해 논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턱 없이 부족한 필자는 선행연구 성과를 수용하고 정리하는 작업 이상의 결과를 제시할 능력이 없었다. 논문에서 가장 부끄럽고 아쉬운, 향후 가장 많은 보완을 거쳐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Ⅱ장 “부여의 성립과 문화 기반”은 그렇게 작성하였다. 연구자들 간에 오랜 기간 의견이 분분하였던, 부여사 분야에서는 핵심 쟁점 중 하나라고도 할만한 ‘동부여’ 문제는 처음 「고구려·부여 관계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준비할 때부터 관심을 두고 해명하고자 욕심을 냈던 주제였다. Ⅲ장 “부여족의 확산과 동부여”에서는 동부여의 성립 시기를 3세기 후반으로 보는 학설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에서부터 등장하는 동부여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부여와 동부여의 관계 및 동부여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 내보고 싶었다. 최근 필자와 생각을 같이하면서도 보다 구체화된 견해를 제시하는 동료 연구자들의 논문이 발표되고 있어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고구려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동부여의 역사상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다행스럽게도 700여 년에 걸쳐 전개된 부여의 역사 가운데 기원 전후 시기로부터 3세기 후반까지는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역사상에 대한 접근이 허용된다. Ⅳ장 “부여사의 전개와 국세 변동의 추이”는 그러한 문헌 기록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기원 전후 시기 부여의 대외관계를 반영하는 자료로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재조명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1~2세기 부여의 대외관계를 개관하였으며, 3세기 초 동쪽 세력권의 붕괴와 함께 서서히 기울어가는 3세기 부여의 국세 변동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3세기 무렵 부여가 쇠퇴하게 되었던 대내외적 요인을 살펴보았다. ‘연맹왕국’은 오랫동안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규정하였던 용어였다. 하지만 7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연맹왕국’이라는 용어로 모두 설명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부여의 정치구조와 국가체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Ⅴ장 “부여 정치구조의 특징과 국가체제”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작성하였다. 아래에 제시하는 세 개의 도판은 필자가 고민하였던 3세기 무렵 부여의 정치구조와 국가체제를 시각화한 것이다. 정치구조와 국가체제의 변화 양상, 그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분석의 대상이 되는 풍부한 문헌 기록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점에서 부여사의 척박한 연구 환경은 넘지 못할 장애물로 작용한다. 욕심만큼 기왕의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도판 2. 부여의 정치구조
도판 3. 부여의 국가구조
도판 4. 부여의 영역과 사출도(四出道)
285년 모용선비 기습적인 공격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으면서 부여의 국세가 급격히 추락하였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으며, 또 단편적으로나마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그 이후로 왕실이 고구려에 귀부하며 나라의 운명을 다하는 494년까지 대략 2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진 부여의 역사는 베일에 싸여 있다. 특히 346년 전연(前燕)의 침공을 받아 왕과 5만여 명의 백성이 전연 땅으로 끌려간 뒤로 전개된 부여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몇몇 단편적인 기록을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즉 부여의 역사 후반기 200여 년의 시간은 ‘역사’로서의 서술이 불가능하다. Ⅵ장 “부여의 멸망 과정과 유민의 동향”에서는 이러한 연구의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해당 시기 중국 사서에 전하는 중원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부여 왕실 일족과 부여계 인사들의 동향에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맥을 이어가던 부여국의 존재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5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검토 속에서 부여 멸망의 대외적 배경을 짚어보고, 부여 출자(出自)를 표방하였던 두막루국의 역사를 간단히 살피는 것으로 논문의 마지막 내용을 담았다. 후기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한 지 벌써 5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처음 학위논문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개 글을 웹진에 투고해달라는 제안이 있었다. 당시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고사하였지만, 사실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었기 때문에 도망쳤던 것임을 고백한다. 전면적인 수정·보완을 거쳐 책으로 출간한 다음 「나의 책을 말한다」에 이 글을 싣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5년 간 무얼 했나 싶다. 이제 서야 여기에 글을 남기는 이유는 연구자로서 지난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다시 5년이 지난 시점에서 똑같은 한탄을 하지 않기 위해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