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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담배의 전래와 수용 양상_신경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27 BoardLang.text_hits 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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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5월(통권 41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담배의 전래와 수용 양상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02.)


 

신경미(동국대학교)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뒤늦게 공부를 하겠다고 덤볐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른 하나에 역사학계에 들어왔고 올해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논문을 소개하자니 제법 쑥스럽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에는 18세기 이후 조선의 독서문화를 분석하고자 마음먹었다. 이덕무의 독서 이력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고 이를 확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독서문화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같은 학교에 계신 교수님께서 담배라는 주제로 써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건네셨다. 비흡연자인 나는 담배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지도교수님의 걱정이 섞인 재촉의 눈빛을 피하려 담배에 대해 뒤적인 것이 논문의 시작이었다.

담배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살펴볼수록 담배라는 물질이 조선후기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는 라틴아메리카를 원산지로 하는 낯선 물품이었음에도 빠르게 퍼졌다. 담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에는 의약품으로 이후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즐기는 기호품으로- 사회‧문화적 성격을 달리하며 함께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분석하여 담배의 시대성을 규명하고 조선후기를 살펴보려는 것이 논문의 최종 목표였다.

 

무병장수에 대한 욕망, 담배의 시작

17세기 초,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존재했고, 계속한 기후변화와 기근에 따라 치솟는 질병과 역병은 조선을 무력화하였다. 민간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소개된 낯선 물질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처음 담배는, 가래와 기침, 배의 통증. 추위와 더위에 효과가 좋은 약으로 소개되었다. 한 번 본적도, 들은 적도 없던 값비싼 담배는 신령스러운 약초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17세기 초에 사용되고 이후 점차 자취를 감춘 남쪽에서 온 영험한 풀이라는 의미의 ‘南靈草’라는 명칭은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유입초기 담배는 생산‧가공된 잎의 형태로 유입되었다. 이후 씨앗이 들어오면서 점차 재배지가 확대되었다. 다만 이때는 질병을 치료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자급자족용 소규모 재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의약품으로 사용됨에 따라 담배와 흡연은 엄격히 금지되지 않았다. 흡연 때 발생하는 독한 냄새와 연기로 인해 궁궐 내에서 공공장소나 위생이 중요한 장소, 시간에는 금지되기는 하였지만, 엄격히 통제되지는 않았다.

 

부를 만들어 내는 작물, 담배의 확산

시간이 흐르며 담배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인식은 점차 희석되었다. 비흡연자 위주로 제기되던 담배의 의약적 효과에 대한 비판은 흡연자 사이에서도 대두되었다. 이 시기, 담배는 영험함을 강조하는 남령초라는 명칭보다 ‘南草‧煙草’ 혹은 ‘煙茶’라고 불렸다. 의약품으로서 담배의 가치를 대신한 것은 높은 상품성이었다. 담배는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었고 그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담배는 돈이 되는 상품이었다. 담배 판매상인 간의 이권 다툼, 나날이 증가하는 담배 재배 농가와 그에 따른 비판론의 대두는 이러한 분위기를 시사한다.


표 1. 전국을 대표한 담배와 생산지
 

돈에 대한 욕망은 담배에 투영되어 담배 재배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最先出市’을 목적으로 한 담배 농사가 시작되었고,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지역별로 저마다의 재배법과 건조법이 발달하였다. 당시, 최상의 담배를 생산한다고 알려진 호남지역에서는 陰乾法을, 서초로 유명했던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는 煮茶法을 사용하여 담배를 건조하였고 이렇게 제조된 담배는 장시의 활성화와 유통망의 발달에 힘입어 전국으로 이출되었다. 이 시기 담배생산‧제조법의 발달은 그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닌, ‘맛 좋고’, ‘향 좋은’ 담배를 찾고, 각 지역의 담배를 품평하며 저마다 입맛에 맞는 담배를 피우는 문화가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

 

구별짓기와 자기통제, 흡연예절의 형성
 

사진 1. 은입사 기술로 장식된 煙具 일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8세기, 국내외 안정된 정세에서 변화의 바람도 불어왔다. 전통의 유지와 변화의 수용이 공존하는 가운데 사람의 욕망은 더욱 표면화되었다. 부를 추구하는 분위기는 심화되며 신분질서의 경계가 흐려졌다. 문화적으로 이 시기에는 어떠한 사물에 대한 기호를 드러내는 癖‧痴가 등장했으며, 時體(지금의 유행) 현상이 두드러졌다. 담배는 이 당시 시체의 하나였다. 뒤처지고 싶지 않은 욕망,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이 담배에 투영되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람이 증가하였고, 다른 사람이 피우니 피운다는 사람도 있었다. 담배에 대한 벽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 담배 도구를 장식하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시체가 되어 담배 도구를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불안을 불러왔다. 담배가 의약품일 때에는 질병 치료가 목적이었기에 모두가 이용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호품의 성격이 강화되자 일부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 상하귀천에 상관없이 누리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의 노비가, 여자가, 어린아이가 신분 높은 사람 앞에서, 남자 앞에서,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무례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지배층의 구별짓기가 시작되었고 흡연예절이 강화되었다. 지배층은 그들이 행해야 할 흡연예절, 사치스러운 담배 도구를 통해 양반의 지위를 표면화하려 하였고 동시에 여성과 피지배층, 어린이가 해야 할 흡연예절을 만듦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여성과 남성, 어른과 아이를 구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담배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담배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담배는 곡식의 생산을 줄이고, 신분질서를 어지럽히고, 사치와 이문을 탐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 세상에서 하등 쓸모없는 존재였다.

19세기 외국산 제조 담배가 유입되며 조선의 담배문화는 격변을 맞이한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고 근대식 제조법으로 외국산 담배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을 찾은 외국인은 조선의 담배문화를 미개하다고 인식하였다. 시간이 중요했던 시기, 외국인에 비친 조선의 담뱃대와 흡연은 시간을 축내고 비위생적인 야만의 표상이었다. 나름의 대응에도 조선의 담배문화는 점차 고유의 색깔을 잃었으며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후기

처음부터 지금까지 문화사를 공부하겠다고 할 때마다 문화사에 대한 정의와 방법론, 그리고 결과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그때마다 내가 박사 논문을 제출할 때 즈음이면 그래도 나름대로 문화사에 대한 정의를 내렸으리라 꿈꿨다. 그러나 박사 논문을 쓰는 동안 엄청난 자괴감에 허덕였고, 제출하고 나서도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 논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지난날에 대한 나의 반성이자, 열심히 달려보겠다는 결심의 표명이다. 끝으로, 부족하나마 논문을 완성할 때까지 명징한 비판과 위로를 아끼지 않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