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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 승정(僧政) 연구_김윤지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07.26 BoardLang.text_hits 1,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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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7월(통권 43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 승정(僧政) 연구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08.) 김윤지(중세1분과) 고려시대는 다양한 신앙과 사상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중 불교는 승려로 대표되는 수행자 집단의 규모와 활동, 그들에 대한 세속의 후원 등이 특히 두드러진다. 왕실 이하 귀족층의 출가가 흔하였고 사회적 관계망 속에 승려가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국가에서 집행한 승려에 대한 인사는 관료층에 준하여, 그와 같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였다.
관료 인사에 관한 것을 ‘정(政)’이라 했다. 그 대상이 승려인 경우 ‘승(僧)’을 관칭하여 ‘승정’이라 했으며 선발과 인선의 일이 주를 이뤘다. 이 논문은 고려에서 승려 인사를 처리한 최종적인 방식이 관료 시스템의 한 종류로 여겨져, 시험[僧科], 위계[僧階], 고위직의 인선[僧批]과 임명장[大官誥], 책봉례[冊禮], 겸임직[判事] 등 고려식 지표들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나아가 고려 후기 불교 교단과 승정의 변화상, 그것이 조선 초 척불(斥佛)로 이어진 지점 등을 논한다.
승과는 승려를 대상으로 한 시험으로, 승려에게 관직 진출의 길[入仕路]과 같이 여겨졌다. 승과에 합격하여 높은 지위나 직책에 오른 승려는 자신을 선발해준 이에게 마치 과거 주관자와 급제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것 같은 각별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 당해의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동년(同年)’으로서 서로 간에 유대를 형성했다면 승려의 경우에도 ‘동선(同選)’, ‘동년’ 등의 호칭을 사용했다. 과거 시험이 청요직(淸要職)과 같이 청빈하고 중요한 관직군, 재추(宰樞)와 같은 최고 직군에 오르는 데 필수 요건으로 작용한 것처럼 승과의 합격은 공적인 지위[僧階]가 수여되는 근거였음은 물론이고 승려가 이후 중앙의 인사체계로 편제되는 데 유효하게 작용했다.
승정 시스템 하의 승려는 백관(百官)에 조응하는 층위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비직(批職)이라 하여 참상(叅上) 이상의 관인에 상당하는 제도적 대우를 받는 승려들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최고 층위는 3품 이상의 고위 관인과 마찬가지로 임명장[官誥]을 받았다. 이러한 승려 임명장의 말미에는 그것이 공론(公論)에 따른 인사였음을 강조하여 당해의 인사가 불교 교단에 그치지 않고 혹은 국왕의 사심[私恩]이 아닌 조정의 의견까지 충족한 것이었음을 자부했다.
고려에서는 왕의 스승, 나라의 스승으로 왕사·국사를 임명했다. 이들은 불제자를 자처한 국왕의 지극한 예우를 받는 당대의 고승이자 사실상 불교 교단의 영수였다. 그 임명 의례는 본래 스승과 제자의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을[世世生生]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의 제자례를 거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승정이 정비되면서 제자례에 앞서 군신 관계를 중심으로 한 책봉례(冊禮)를 선행하는 것으로 절차가 변화된다.
무신집권기에는 인사 전반을 집정자가 장악했으므로 승정도 영향을 받았다. 고려전기 형성된 승정의 시스템 전반이 여전히 운영되던 속에서 집정자는 고위 승려의 인선을 주청하는 방식으로 간여했다. 이에 수선사·백련사 등 특정 승단에 대한 집정자의 사적인 관심과 후원이 그 사주들을 중심으로 한 승정의 혜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을 회복해가는 가운데 인사 일반은 물론 승정에서도 국왕 주도의 의지가 드러났다. 이 시기에는 국왕이 특정 승려에게 승정을 전관하도록 했다는 식의 기록들이 확인되어 고려전기 이래 교단이 혹은 교단과 국가가 함께 논의하는 공의(共議)의 정치가 무너졌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그 일련의 시책에는 인사 집행에 관한 국왕의 권한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체제 자체의 파행적인 운영 혹은 공의정(共議政)의 붕괴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승계․승직의 신설로 인해 관련 직제가 전기보다 한층 확대되었는데 공민왕이 교단의 영수인 왕사․국사 외에 종(宗)의 영수를 지정하여 판사(判事)를 임명하기 시작한 것이 주목된다.
고려시대 판사는 관부의 겸직 장관이었다. 고려말 국왕은 종의 최고 승려를 지정하고 그를 판사로 임명하여 우대했다. 종을 승정의 중요한 단위로 삼고 그 행정적 역할을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점차 중앙 정계와 정치세력의 변동으로 척불(斥佛)이 강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고, 조선의 개국으로 귀결된 후 태종대를 기점으로 교단을 단계적으로 축소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승정 체제도 격하시켰다. 각종판사(各宗判事)는 승려에 대한 선발과 추천을 예조의 소속 관사가 된 승록사에 보고하는 실무적 성격의 승직 정도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정국의 급변으로 종판사직이 질적 하락을 보게 된 것이었으며 고려말 신설했을 당시의 의도와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승직은 본래 품질이 없지만 고려에서는 이를 관제에 근거하여 체계화했다. 그 인선은 교단 승려들의 중론을 토대로 운영하되 최종적으로는 이를 관제의 체계 속에서 집행함으로써 승려의 상층부를 관인에 상당하도록 했다. 중국 진한시기에는 ‘비질(比秩)’이라는 명목으로 품이 없는 환관을 정질(正秩)에 비견하여 운영했고 이것이 송에서는 ‘시질(視秩)’이라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고려의 경우 ‘경상(卿相)에 비견하여[視]’ 승려 임명장[僧官誥]를 지급한다거나 ‘3품에 비견하여[秩視三品之高]’ 임명장을 준다는 등의 표현이 확인된다. 고려는 관제에 비견하여 고도화된 승려 인사를 운영함으로써 출세간의 영역을 문무반의 인사와 조응하도록 설계했다. 이에 해당 승려들이 때로 ‘치반(緇班)’으로 별칭되기도 했다. 이는 신분과 자질면에서 훌륭한 인재를 관인으로 발탁하고 국정 운영의 일원으로 했듯 그러한 층위에 준하는 인재[賢良]인 승려 일군을 형성한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승려를 공경하고 도덕과 법력이 뛰어난 현량의 승려를 정선(精選)하여 국가체제 안으로 편제하고 활용하는 것을 지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