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역사와 현실: 시론
[『역사와 현실』(129호) 시론] 공공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_이하나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11.28 BoardLang.text_hits 3,140 |
|
웹진 '역사랑' 2023년 11월(통권 45호)
[역사와 현실: 시론] 공공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하나(역사공장/공공역사문화연구소)
역사 부정의 시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최근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독립군 지도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대신 독립군을 토벌했던 백선엽 장군 흉상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한 데 대하여 역사학계는 물론, 국민의 반발이 거세다. 광복되기 전 영면하신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는 철지난 반공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뿌리 깊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고, 건강하고 정상적인 시민 의식을 가지려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반면교사의 사례이기도 하다. 현 정부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이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중요한, 혹은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공산당에 가입하곤 했으므로 (북한 정부와 직접 관련 없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도 마땅히 우리 사회에서 존경과 모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해방 전 빨치산과 6・25전쟁 당시 빨치산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아무리 설명한들, 또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가담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사료를 들이밀든, 심지어 육사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큰 모욕감을 느껴 명예졸업장을 반납하겠다고 선언을 하든, 현정부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밀어붙일 태세이다. 공공연한 역사 부정이 헌법을 수호해야 할 정부에 의하여 일어나다니, 정녕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은 국민만의 몫인가.
더욱 어이없는 것은 이러한 현정부의 역사 인식이 극우 유튜버들의 근거 없는 주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극우 유튜버들은 한국이 일본 ‘덕분에’ 근대화되었으니 일본에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일제시기 조선인에 대한 강제적 동원은 사실 무근이며 조선인 여성에 대한 강제적 성 동원 및 성 착취는 거짓 주장이므로 따라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도 없다는 식의 일본 정부 입장을 그대로 카피하거나, 제주4・3항쟁이 ‘빨갱이’의 소행에 불과하기에 학살을 동반한 소탕작전이 불가피했다는 둥, 광주민중항쟁은 북한의 간첩이 침투하여 일으킨 것이라는 둥 역사의 가짜 뉴스를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언어로 퍼뜨리고 있다. 이들의 목적이 마치 국민에게 자신들의 이념에 부합하는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이들의 무리한 행동이 투철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더 충격적이다. 돈벌이를 위해 역사의 공공성을 무너뜨리는 행태가 인터넷 공간에서 성행하고 있는데도, 양식 있는 시민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부는 북한 붕괴를 주장하던 극우 유튜버를 통일부장관에 임명했으니 참으로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반대하는 여론이 60%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에 찬성하는 여론이 거의 30%나 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댓글창을 뒤덮은 양극단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멸시, 혐오와 저주들은 한국사회가 이념전쟁, 역사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근대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국민 통합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국민의 분열은 역사학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공공역사에서 소외된 역사학자
한국사회의 이념적 양극화가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역사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비판도 없이 고대사의 영광만을 강조하는 이른바 ‘유사역사학’의 고대사 연구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강조하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근현대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역사학계 안에서는 마이너 그룹이라고 볼 수 있지만, 대중적 영역에서는 역사학계의 영향력을 훨씬 능가한다. 당장 유튜브 채널과 각종 블로그, 카페, 팟캐스트 등에서 이들의 논리를 따르는 대중들이 만든 콘텐츠는 그 양과 강도에 있어 역사학자들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학교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 여기 있다며 근거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으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마치 사실인양 설파한다. 이것이 극우 정치인과 극우 언론에게 영향을 주어 공신력까지 얻은 채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다시 이러한 내용의 콘텐츠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惡貨의 순환 고리가 보수 정부들의 물심양면 지원에 힘입어 확대재생산되는 현상은 역사학자들을 한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러다가는 빅데이터로 움직이는 대화형 인공지능에 역사 문제를 물어봤다간 엉터리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또 하나 문제적인 것은 역사학자의 학문적 권위가 시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기대만큼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성과 중 하나였던 反권위주의가 의당 있어야할 지식의 전문성에 대한 존중마저 부정하는 反지성주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역사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정치적 의도로 치부하여 “친일파와 종북좌파의 선전 선동”으로 몰아붙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역사학자의 수난시대다.
또한,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노고와 성과는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채, 연구자들이 받는 원고료와 강연료의 수십 배를 단 한 번의 출연료로 벌어들이는 역사커뮤니케이터들의 활약만이 부각된 방송시장, 출판시장에서 이러한 무력감은 배가 되곤 한다. 아무리 제조업보다 유통업이 더 큰 수익을 얻는 것이 시장의 현실이라지만, 전망을 잃어버린 자본주의의 전사들이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오늘날, 지식마저도 생산자가 아닌 유통업자들이 부와 명성을 독점하고 인기를 발판으로 애국주의적 정서를 부추기는 상황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는 드물다. 하지만, 대중적인 ‘역사 붐’ 조성에 일조해온 이들 역사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무조건 폄하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유튜브상에서 활약하는 몇몇 역사커뮤니케이터들은 역사의 가짜 뉴스에 해당하는 담론들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을 뽐내고는 있으나 종종 부정확한 이야기를 과장하는 경우도 많다. 역사커뮤니케이터의 대부분이 역사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커뮤니케이터가 용어를 빌어온 과학커뮤니케이터의 경우에는 과학자가 직접 커뮤니케이터를 자처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커뮤니케이터 중에서 역사학자의 비율은 매우 낮으며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는 훨씬 더 낮다. 그러다 보니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가 대중에게 제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역사학자가 시대와 괴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전라도 천년사>를 둘러싼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인, 그리고 언론의 역사학자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역사학자들의 ‘역사대중화’라는 아젠다가 목표를 초과 달성하다 못해 이제는 대중들이 스스로 전문가를 자처하며 누구나 역사를 가공하고 즐기고 향유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정작 역사학자들은 공공역사에서 소외되어 그 존재감과 자존감이 날로 쪼그라드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역사학자는 어떻게 공공역사가가 되는가?
여기서 그 원인이 결국 우리 역사학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의도하지도 않은 어떤 결과의 책임을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일이 인생에서나 역사에서나 얼마든지 일어나기 마련이다. 너무 억울해하거나 노여워하는 대신, 차분히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그것은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공공역사를 너무 등한시해 왔다는 것이다. 알려진대로 역사학(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 재현, 역사 실천, 역사 담론 등을 의미하는 ‘공공역사(public history)’ 개념은 1975년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공공역사는 다수의 학회와 저널을 탄생시키며 명실상부한 역사학의 하위 분과가 되었다. 국제공공역사연맹(IFPH) 의장을 역임한 토마스 코빈(Thomas Cauvin)에 의하면 2013년 현재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대학에 220개에 달하는 공공역사 커리큘럼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개념과 사례(독일)가 소개되었다. 역사의 실용성에 대한 재인식과 역사 전공자의 진로 모색이라는 ‘공공역사’ 개념의 탄생 배경이 전세계에 공통된 것이고 보면 역사학자의 위기가 한국만의 일은 아닌 성싶다. 이러한 고민이 한국에서는 그간 ‘역사대중화’, ‘역사(문화)콘텐츠’, ‘역사소비’ 등의 용어로 대체되어 왔으나, 이들은 모두 공공역사의 부분집합이거나 한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었다. ‘공공역사’는 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미처 시야에 넣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 현상까지 포괄할 수 있는, 말하자면 개념의 포식자이다. 공공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학계 내부에서 논의되는 학문 자체만으로는 사회적으로 충분한 기능과 의미를 발휘하지 못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그 가치와 효용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일이 터진 후에야 성명서 내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의 공공역사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오늘날 공공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노정시킨 측면이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역사학자들이 공들여 온 ‘역사대중화’의 성과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이상적으로는 ‘역사대중화’ 역시 대중에게 역사를 돌려준다는 개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대중화’의 논리 세계에서 역사해석을 포함한 역사하기(doing history)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자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공공역사의 세계에서는 역사학자, 공공역사가, 대중이 모두 역사하기의 주체가 되고 일정한 권위를 나누어 가진다. 공공역사는 때때로 역사학에 전문성이 없는 일반 대중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역사하기의 과정 및 결과물까지도 포함한다. 대중이 스스로 역사하기를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공공역사가(public historian)이다. 이들은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역사를 활용하여 공공역사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 스스로가 공공역사가가 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도 논문이나 학술서를 쓰고 사학과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일을 제외하고, 역사학자로서의 전문성을 활용한 사회적인 모든 활동, 예컨대 박물관 및 기념관, 방송 및 문화예술계, 정부 기관, 연구소, 위원회 등에서 각종 역사 자문 및 조사 활동을 하거나, 대중 강연이나 대중서 집필, 역사 전공이 아닌 일반 학생들에 대한 교양 강의 등을 할 때는 공공역사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공역사가는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역할의 이름이므로 역사학자가 공공역사가의 역할을 하는 것은 실은 오래된 역사학계의 관행이자 전통에 속한다. 그런데 역사학자가 전혀 관여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공공영역, 대중영역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다양한 실천 형태들도 무수히 존재해 왔다. 박물관과 기념관의 전시로, 소설로, 영화로, 드라마로, 웹툰으로, 게임으로, 웹에서, 앱에서, 각종 미디어에서, 콘텐츠 플랫폼에서, 가상공간에서, 교육 현장에서, 지역사회에서 등등, 공공역사는 역사학자들이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 곁에 어느새 와있으며 풍부하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대학 캠퍼스가 교수와 대학생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구성원을 위해서도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듯, 역사학자들도 학문 자체에 기여하는 것만으로 본연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책임을 다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데 역사학자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역사 담론이나 역사 재현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공공역사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공공역사는 공공성을 이미 획득한 역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가짜 뉴스에 가까운 역사 담론이 공공영역에서 버젓이 통용된다고 생각될 때 역사학자는 이에 개입하여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한다. 학문적 엄밀함과 풍부한 근거의 제시, 논리적 전개의 정합성, 그리고 설득력 있는 글/말솜씨가 무기가 되어 때로는 비평으로, 때로는 강연으로 공공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만일 역사학자가 학자와 대중 사이의 위계를 상정하고 대중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계도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공공역사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다. 논문을 쓰는 것 이상의 노력으로 공공역사에 접근하고 성의를 다해 토론에 임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처럼,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가 가장 훌륭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가장 좋은 것은 다양한 공공역사의 생산 과정에서부터 역사학자가 참여하여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역사학자는 공공역사가 존재하는 장소 및 미디어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상론인지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왜? 섣불리 이상론을 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하고 말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고 귀찮은 일에 얽혀야 하고 이런저런 뒷담화를 견뎌야 하고, 잘못하면 일부 극단적 네티즌들의 타겟이 되어 악플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전공 분야를 연구하고 주어진 숙제(?)를 해내는 것만도 너무 바쁘고 힘들다. 신실한 역사학자들의 순박한 의기투합
이쯤에서 역사공장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역사학자가 공공역사에 참여하거나 역사전공자가 공공역사 영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몇 해 전부터 공공역사의 일부 담론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비판하거나 공공역사에 대하여 발언하고 직접 공공역사가의 역할을 자임하는 연구자들이 조직적인 실천을 도모한 것은 실로 역사학계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2016~), 역사디자인연구소(2018~), 역사공장(2018~) 등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후발주자인 역사공장은 한국역사연구회 2016년 겨울 총회에서 발족한 스타트업사업단(단장 이지원)으로부터 출발했다. 처음엔 역사연구자들이 힘을 합쳐 뭔가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 그렇게 얻은 수익으로 후배 연구자들을 위해 좋은 일 좀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공부해서 남주자”, “돈벌어 남주자”를 모토로 한 이 사업단의 출발에는 다분히 역사연구자로서의 존재론적 위기감이 있었다. 큰 대학의 전임 교수에서 작은 사립대의 강사나 연구원에 이르기까지 역사연구자들의 소속과 직위는 다양할지 몰라도 연구자로서의 만족감이나 자기효능감의 측면에서는 공통적으로 위기와 불안, 그리고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학위 과정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라는 생애 주기와 겹치면서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는 대학원생과 막 학위를 받은 후배 연구자들의 막막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비교적 나이든(?) 연구자들의 막연한 의기투합이 스타트업사업단의 창립 동기였다. 그러나 야심찬 출발과 달리 거의 2년 동안 매달 한 번씩 만나 사업 아이템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명목으로 우의와 결의를 다지는 것 이외에는 실제로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8년 연구재단의 인문학대중강좌 사업에 5개 프로그램을 지원하여 그 중 4개가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위한 연구자 네트워크로서 역사콘텐츠 전문 기획사를 표방한 영리 법인 ㈜역사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처음에 역사공장(HistoFacto)이라는 이름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양분되었다. 우선 주변 역사연구자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역사가 무슨 물건이냐, ‘역사’와 ‘공장’은 격이 맞지 않는다, ‘뉴스공장’을 베낀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주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사실 인문적인 것에 ‘~공장’이라는 반대 이미지를 결합하는 명명법은 시장에선 아주 흔한 일인데, 실은 레닌이 소비에트 영화제작소를 ‘Film Factory’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일제하 카프 영화인들 역시 ‘영화공장’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이후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 부르면서 ‘~공장’이라는 작명법이 보편화되었다. 1960년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부른 이래 현대미술 분야의 작업실이나 공방에서도 ‘공장’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공장’은 역사를 제재로 한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의미와 역사를 만든다(making history)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처음에 이상하게 들리던 이름도 자꾸 부르면 정이 들고 익숙해지듯 지금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이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 깊이 있는 강의를 추구하는 열린대학 및 유튜브 역사공장 채널 운영, 그리고 영상콘텐츠 기획 및 자문 등이 현재 역사공장의 주된 일이다. 비록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나 역사디자인연구소에 비해 성과가 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천천히 꾸준히 가는 것을 미덕 삼아 차근차근 조용한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런데 대중강좌와 영상콘텐츠 기획, 제작, 자문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정부 기관 및 지자체 용역이나 기타 사업을 하려면 경우에 따라 영리법인과 비영리법인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영리법인으로는 연구소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연구소여야 역사공장이 하는 일을 이론적으로 지지해 줄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2021년 4월, 공공역사문화연구소가 탄생했다. 역사공장 로고가 역사는 팩트에 기반한다는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디자인되었던 것처럼, 공공역사문화연구소 로고 역시 공공역사+문화연구+장소라는 의미를 담았다(눈치챘겠지만 가내수공업이다). 역사공장이 직접 대중과 만나는 공공역사의 실천 기관이라면, 공공역사문화연구소는 한국의 공공역사에 대한 분석과 비평, 그리고 한국 현실에 맞는 이론 개발 등의 연구와 공공역사가 양성 및 재교육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내용에 따라 컬처포럼, 공공역사세미나, 공공역사워크숍, 문화기획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현재 양자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하면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업 목적도 초기엔 어떻게든 수익을 남겨 그 수익으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수익 자체 보다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공하는 것 자체가 공공역사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초점이 변화하였다. 하지만, 거의 만장일치로 회의를 끝내곤 하는 역사공장의 구성원들이라고 언제나 한 마음 한 뜻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이나 그러하듯 이 안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고 이견이 있다. 하지만, 제 앞 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연구자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먼저 생각했던 순진하고도 선량한 연구자들의 의기투합(가끔은 동상이몽?)이야말로 이 모든 무모한 시도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사람의 문제다. 2019년 역사공장은 한국역사연구회와 MOU(업무제휴 협약서)를 체결하여 서로 파트너 관계임을 확인했고, 역사공장은 한역연 회원을 포함한 역사연구자 전체를 인력풀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섭외나 협력 단계에 이르면 여러 문제들에 부딪힌다. 예컨대, 역사공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면 많은 연구자들이 “저는 기획력이 없어요..”라는 대답을 한다. 이는 완곡한 거절의 의미지만, 거절의 이유가 거의 같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것은 애초에 역사공장이 뭐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공공역사) 기획을 하는 곳이다”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와서 좀 있다 보면 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이다. 현재 13명인 역사공장 멤버들은 내부에서는 PD(Program Director)로 불리는데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부터 실행까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기획력은 처음부터 재능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노력과 훈련을 통해 터득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분야든 기획력 없이 버틸 수 있는 곳은 없다. 방송사로 치면 과거엔 데스크 간부들이나 CP(Chief Producer)들만 할 수 있었던 기획을 요즘은 신입사원에게도 요구하고, 심지어는 입사 시험에서도 기획서를 쓰라고 한다. 하다못해 학생들이 동아리 프로젝트를 할 때도 기획력은 필수이다. 대학에 소속된 교수, 강사, 연구원들이 연구 프로젝트를 하거나 외부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요즘엔 아주 흔한 일인데, 이 모든 일의 출발이 바로 기획이다. 아무리 공부만 한 연구자들이라도 어떤 일에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조직화, 체계화하여 설득력 있게 문서화하고, 또 일이 되게끔 여러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필요한 능력이다. 이미 학위를 받은 연구자라면 석사, 박사논문이 통과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획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늘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이유는 뭘까? 역사학자들은 기획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 실은 기획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획의 경험이 없는 것이다. 공공영역, 대중영역에서 기획을 하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학계에서도 ‘문화적 전환’이 가능할까?
내친 김에 공공역사문화연구소의 작명법도 언급해 볼까 한다. 처음엔 ‘문화’라는 말을 연구소에 으레 넣는 문구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이들이 문화+연구소가 아니라 문화연구+소라는 것을 알고 나면 다소 의아할 수 있다. 도대체 공공역사와 문화연구가 무슨 관련이길래 한 연구소에서 이 두 가지를 다 한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공역사는 많은 경우에 문화적 형태로 발현되며, 공공역사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그 시대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공공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해외 역사학계와 비교했을 때, 한국사학계처럼 사회문화사에 무관심한 곳이 드물다는 사실과, 공공역사 개념이 아주 늦게 그것도 서양사학자에 의하여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깊은 관련이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문화사 연구한다고 하면 그건 국문과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이 많았다. 문화사 연구는 역사학이 아니라고 대놓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역사학자의 상당수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학은 역사를 등한시하여 가장 중요한 관점을 잃었고, 역사학은 문화를 등한시하여 가장 중요한 영토를 잃었다.”
(나이가 아니라 생각이) 올드한 역사학자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경제가 ‘최종심급’이고 정치(정책)는 근본이며 문화는 ‘지엽말단’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사는 소재주의적이고 가벼운데다 무엇보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만으로는 살 수 없다. 중요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인생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문화(사)란 분야가 아니라 시각이다. 따라서, 문화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 문화적인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1970년대 이후 인문학에서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 이루어져 문화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러한 연구 경향 위에 ‘공공역사’ 개념이 탄생한 것은 물론, 문화사의 맥락에서 공공역사가 역사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 오랫동안 ‘문화사’란 ‘과학적이지 못한 역사학’의 대명사였다. ‘문화민족주의’나 ‘문화개량주의’처럼 ‘문화’라는 말은 왠지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부정적 어감을 주어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문화로 이름을 내고 해외에서 전례 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한국에서 ‘문화’라는 말은 종종 모욕을 당한다. 그러면서 또 필요할 때는 국가의 이름으로 콘서트에 동원되는 아이돌처럼 어정쩡하게 끼워지기 일쑤다. 현재적 문제의 역사적 기원과 흐름을 맥락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역사학의 임무라면 오늘날 어느새 ‘문화강국’으로 불리게 된 한국이 어떻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를 일구어냈는지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유학생으로 먹고 산다는(?) 한국 대학에서 한국 문화가 좋아서 한국에 유학온 학생들에게 한국 문화를 역사적으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이 사학과의 자랑은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가 BTS에 관한 기사나 논평을 거의 내지 않는 이유는 BTS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이해도 가지 않고, 따라서 설명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1980년대 연구는 시작되었고, 이제 곧 1990년대가 역사학의 시야로 들어올텐데, 역사학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의 역사를 사회문화사에 대한 이해 없이 설명하려 든다면 역사학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요컨대, 공공역사를 이해하고 싶다면 결국 동시대의 사회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가장 이상한 일은 역사문화학과나 역사(문화)콘텐츠학과에서 역사도 가르치고 콘텐츠도 가르치는데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거나, 문화 이론은 가르쳐도 근현대 문화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사학과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학생들에게 콘텐츠 제작법을 가르쳐도 어쩐지 양자 모두 미진하고 쉽게 융합되기 어렵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근현대 사회문화(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역사는 소재적으로, 콘텐츠는 기술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소재가 아니며 역사(문화)콘텐츠는 기술이 아니다. 결국 역사학이 탄탄히 뒷받침되어야 그 위에 콘텐츠가 됐든 공공역사가 됐든 뭔가를 쌓을 수 있는 것이다. 문화사 수업이 없는 이유는 그것을 가르칠 교수가 없어서이고 그 이전에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별로 없어서이다. 이를 전공하려는 대학원생이 없는 이유는 사학과 대학원에서 문화사를 공부하기 어렵기 때문이지 처음부터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화사 연구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대학원생이 꽤 많다는 것을 정작 지도교수는 잘 모르거나 모른 척 한다. 어쩌면 문화사에 관심 있는 학생은 애초에 사학과 대학원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신진 연구자들이 사회문화사적 시각을 연구에 도입하고 있으나, 사실 이들도 체계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독학으로 외롭게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대가 지나 이들이 논문 지도를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문제일 수도 있다(그러길 바라지만 확신하긴 어렵다.). 하지만, 아직도 분야로서의 문화사 연구, 그 중에서도 공공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현대 대중문화에 대한 사적 탐구는 요원한 상태이다. 최근에 공공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과 일부 사학과와 역사(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화사 전공 교수를 채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은 같은 맥락의 현상이다. 오늘날 공공역사의 존재 방식 자체가 시대성과 역사성을 내포한 문화현상이며, 이른바 ‘유사역사학’에서부터 근현대의 가짜 뉴스에 이르는 것들까지도 하나의 기형적인 사회문화적 현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학의 한 영역으로서 공공역사 연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하나의 힌트가 된다.
사학과 졸업생의 진로 문제도 공공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역사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기에 역사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사학과에 오면 평생 좋아하는 역사를 즐기며 관련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학부 졸업만으로 관련 직업을 가질 만큼 학부에서 배우는 것만으로 전문성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예컨대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이 역사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프로듀서(말하자면 공공역사가)가 되고 싶다면, 이 학생은 역사학은 부전공 정도로만 이수하고 커뮤니케이션이나 영상 제작 관련 전공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문화사나 문화이론이 궁금하다면 국문과나 사회학과, 미학과(예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 등 다른 과 수업을 찾아볼 것이다. 현재의 커리큘럼으로는 사학과 석사 과정 정도는 졸업해야 뭔가를 기획할 수 있는 전문적인 눈이 생기겠지만, 다큐 만들겠다고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가장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다. 남들은 다 아는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사학과 대학원에 가서 심지어 박사학위까지 받고 매년 꼬박꼬박 논문을 쓰고 있는 ‘덜 떨어진’ 인간들이나 공공역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공공역사에서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사학과 졸업생도 점점 더 소외된다.
공공역사 전문대학원을 만들자
공공역사문화연구소가 문을 연지 2년여가 지난 지금,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어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공공역사’는 역사학계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는 대학 연구소로는 처음으로 조선대학교에서도 공공역사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앞으로 더 많은 대학에서 공공역사를 주제로 연구소를 만들고 학술대회를 열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강좌를 개설하는 등 관심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모르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공공역사문화연구소가 트렌드를 재빨리 낚아채어 선점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공역사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초반의 뜨거운 관심은 당연히 식겠지만, 역사학계가 공공역사를 역사학의 한 분야로 품 안에 넣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공공역사문화연구소가 기획하고 24명의 역사학자와 공공역사가가 함께 쓴 책 공공역사를 실천중입니다(푸른역사, 2023)는 한국의 공공역사를 증언하는 최초의 저서로서 한국에서 공공역사가 역사학의 시민권을 얻는 데, 그리고 역사연구자 및 역사애호가들에게 공공역사의 다양한 실천 방식들을 알리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된지 일주일 만에 알라딘 역사학 분야 1위, 역사 주간 11위에 오를 만큼 주목받고 있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공공역사의 밝은 전망을 예언하는 것인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의 공공역사를 ‘공공역사’로 재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아마도 역사학계가 공공역사를 역사학의 일원으로 당연시하게 되고 학회와 저널이 생기고 지역 거점 대학마다 공공역사 과정이 만들어지는, 언제일지 모르나 언젠가는 오게 될 그 시점이 오면 더 이상 이 연구소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역사의 한 소임을 다하고 나면 역사 속으로 총총히 사라져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역사학계의 퍼스트 펭귄(위험한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펭귄)을 자처한 이 연구소의 원대한 포부는 공공역사에 대해 무심과 무시 사이를 오가는 역사학자들을 공공역사의 세계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짧은 지면에 공공역사의 미래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를 다 적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공공역사가 대학의 정식 커리큘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인문학 전공과 마찬가지로 사학과 학부 교육은 교양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동/서양사와 한국사로 나뉘고 시대별로 세분화되어 있는 개론 수업을 어느 정도 수강하는 것만으로도 전공 학점이 다 차기 때문이다. 역사교사가 되거나 역사학자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역사 전공을 살려 직업을 찾는 사학과 졸업생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공을 살릴 만큼 전공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문화학과나 역사(문화)콘텐츠학과라면 사정은 더 심각하다. 콘텐츠 제작에 대한 실무적인 수업도 같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수업을 듣는다고 정말 실무적인 능력이 증진되고 취업을 잘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전공을 살리는 건 사학과에 오기 전부터 이른바 ‘역덕’이라고 불렸던 역사 매니아층이다. 하지만, 매니아로서 역사의 시시콜콜한 면면을 많이 아는 것과 사학과 전공에서 배우고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역사에 흥미를 느껴 사학과에 온 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정작 역사와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학부에서는 전공 프로그램을 심화하는 동시에 공공역사 입문 정도를 개설하고, 사학과 졸업생이 진학할 수 있는 대학원 선택지를 하나 더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록학이나 박물관학처럼 이미 대학원 과정이 있는 경우에는 사학과 졸업생이 그쪽으로 진학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록학이나 박물관학이 역사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에 역사학을 토대로 한 기록학, 박물관학을 개발하는 것은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역사학자를 키우기 위한 일반대학원과 공공역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원으로 이원화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이 전문대학원에서는 아키비스트, 큐레이터, (디지털)문화재 전문가, 작가 및 연출자 등의 스토리텔러, 문화기획전문가 등을 양성하는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대학의 특성과 여력에 따라 한 두 개 정도를 선택하여 집중적인 커리큘럼을 개발할 수도 있다. 일반대학원과 전문대학원 둘 중 하나만 있는 대학도 있을 수 있고, 둘 다 운영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둘 사이에 학점을 공유할 수 있게 유동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만일 대학원 과정을 만들 여력이 없다면 학부에 공공역사 관련 과목을 한 두 개라도 개설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공해야 한다. 이상론이지만, 대학원 졸업 후 취업(취직이 아니다!)은 거의 보장되어야 한다. 관건은 수요와 공급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대학생 수에 비하여 교수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현실적인 교원 일자리에 비하여 박사학위 소지자는 너무 많다.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공공역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의 거점 국립대에는 지역 특성에 맞는 공공역사 전문대학원이 하나씩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그곳을 터전으로 한 공공역사를 다루어야 하며 졸업생들을 그쪽으로 취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명문대 사학과라서 공공역사 따위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학원 졸업생들이 거의 대학에 전임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공공역사는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학자로서의 삶에만 충실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졸업생들이 전국의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만나게 되는 수많은 학생에게는 공공역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이해한다면, 교수와 학자를 많이 배출하는 대학일수록 공공역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연구자도 함께 양성해야 한다. 모든 역사학자가 전부 공공역사를 연구할 필요도 없고, 공공역사가 궁금하다고 모두가 사회문화사 연구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앞으로 공공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북돋아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어차피 ‘공공역사’라는 개념이 절실히 필요한 쪽은 역사학계이지 대중이 아니다. 이미 풍성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국의 공공역사에 뒤늦게 숟가락 얹는 정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공공역사 문화를 위해 역사학자도 참여하고 기여하는 데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이 득세하고 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닌 지금, 진실 보다는 어떤 신념과 감정에 기반한 역사의 가짜 뉴스가 공공역사의 얼굴을 하고 횡행하면서 오히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가짜 뉴스’라고 공격하는 사태가 앞으로 더 심해질지 모르고, 그 가운데 역사의 사회적 공급에 역사 전공자들이 점점 더 소외되어 사학과 폐지론이 현실화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작은 안위에 파묻혀 전공을 깊게 파는 것에만 몰두하고 만족한다면 ‘역사’는 공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외면하는 것이다. 한 우물 파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어느 인문학자의 전설이 있다. 우물에서 뛰쳐나오다 목말라 죽을 뻔한 청개구리 인문학자의 전설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연구자들이 어느 쪽 스토리텔링을 더 맘에 (안)들어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래를 만드는 것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굳이 가보고야 마는 문제적 인간들이라는 것을 역사 공부를 하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