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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참관기
[학술회의 참관기] 고려시대 선조를 위한 후손들의 고민 엿보기_김민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11.28 BoardLang.text_hits 1,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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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11월(통권 45호)
[학술회의 참관기] 고려시대 선조를 위한 후손들의 고민 엿보기- 고려시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 참관기 -김민주(중세1분과)
살아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은 사람들과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그중 선조에 대한 제례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효의 실천과 선조와의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또한 국가적인 측면에서 현왕의 정치적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며, 정통성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2023년 9월 23일(토)에 진행된 “고려시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주제의 학술발표회는 고려사람들의, 고려사람에 의한, 고려사람을 위한 고려의 의례와 제례공간에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필자는 매력적인 주제에 이끌려 이번 발표회에 참여하게되었다. 다만, 막상 후기를 쓰려하니 과문한 탓에 이 글이 발표의 요지에 어긋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글이 발표자, 토론자 선생님의 노력에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후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제1발표는 김보광 선생님의 “고려전기 기신의례(忌辰儀禮)에 보이는 공간과 동선, 그리고 왕권의 재현”이었다. 김보광 선생님은 고려전기 기신의례가 국가의례적 성격의 행사로 확대되어가는 과정과 ‘진전’이라는 의례공간 내에서 이루어진 행위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기신의례는 성종대 왕실 주도의 불교식 제례라는 왕실의례에서 덕종대 이후 국왕주도의 국가의례로 전화되었음이 지적되었다. 국가의례로의 전화는 선왕휘신진전작헌의(先王諱辰眞殿酌獻儀)와 상진위표의(上陳慰表儀)가 추가적으로 거행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왕권을 정당화하고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적 행위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기신의례의 설행공간을 남한에 있는 태조나 여타 선왕선후의 진전사원의 구조를 통해 공간과 동선을 재구성하여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하였다. 국왕의 정치력을 상징하는 정전과 왕통을 상징하는 진전이라는 공간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였다. 특히 진전은 고려 국왕이라는 정당한 왕위계승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며, 이곳에서의 작헌의는 신하들로부터 감추어 권위를 확보하는 비의성(秘儀性)을 띤다. 즉 기신의례는 비의성을 통해 신성한 계승자임을 천명하고 정당한 국왕임을 인정받는 국가의례이며, 정전과 진전은 신성한 혈통의 왕위계승장임을 드러내고 정당한 군왕임을 인정받는 상징공간이었다.
제2발표는 조욱진 선생님의 “고려후기 태묘 운영과 전례(典例) 찾기”였다. 조욱진 선생님은 고려 무신집권기부터 공민왕 이전까지의 태묘제도 운영양상이 무신 집정자 또는 원의 영향이 아닌 전례를 바탕으로 한 고려 내부의 예제적 논의에 따라 변경되었음에 주목하였다. 고려 무신집권기부터 공민왕 이전까지 고려는 태묘 묘실의 운영상 발생하는 변화에 대응하여 내부적인 조정과정을 거쳤다. 무신집권기 순종의 천묘는 부소자목(父昭子穆)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던 당시 고려태묘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종을 천묘 대상으로 정한 배경에는 『춘추』의 내용에 기반한 1년 미만의 재위기간이 근거가 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소목의 변화는 소목불변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고려전기부터 지켜온 3소 3목을 맞추고 9실 체제의 유지를 우선시했던 결과로 파악하였다. 원간섭기에는 협실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7묘체제일 때 모셨던 모든 국왕을 5묘체제에서 모시기위한 방법이었다. 이 시기 협실(夾室)의 운영은 송의 협실체제를 차용한 것이었다. 원에서 운영한 도궁별전제(都宮別殿制)에서 태조의 중앙배치는 실제 고려에서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실을 구성하고 양 협실에 신주를 배치하면서 서상제(西上制)로 운영한 송의 태묘와 유사성을 갖는다고 지적하였다. 공민왕대에는 홍건적의 난, 흥왕사의 난 등의 사건과 원의 공민왕 교체 소문 등을 타계하기 위하여 다시 7묘 9실체제로 환원한 것으로 보았다.
제3발표는 박규은 선생님의 “고려후기 분암(墳庵)의 출현과 운영”이었다. 박규은 선생님은 고려후기 관인들이 묘소 부근에 사원을 세우는 것에 주목하여 분암의 출현 배경과 주체, 설립 양상을 설명하였다. 고려후기 분암의 설립은 왕실의 능사 전통과 묘제 및 불교식 제례 풍습, 고려후기 족분의 확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고려후기 분암을 조성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사원을 새롭게 세우는 경우, 폐사나 기존 사원을 중창・중수하는 경우, 별서(別墅)를 암자로 바꾸는 경우 등이 확인된다. 분암은 사원의 승려를 통해 조상제사와 묘소관리 등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후손들은 사원을 중수하면서 조상에 대한 자신의 효를 드러내고 제례공간을 갖출 수 있었다. 분암의 운영비용은 후손의 시납을 통해 이루졌는데 토지나 화폐 등을 사원에 시주하여 조상제사 묘소 보호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분암에서는 주로 명절이나 절일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일재 등의 제례를 지냈을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고려후기 분함의 출현은 조선 전중기 분암건립이 확산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았다. 조선의 분암은 승려를 통한 묘소 관리에 목적이 있었는데 이는 이미 고려후기 분암의 운영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조선에 『주자가례』에 따른 가묘 설립 이전 고려후기부터 운영한 분암이 조상제사의 공간으로 이용된 것이다.
“고려시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을 참관한 후 이번 주제의 키워드였던 ‘기억’과 ‘방식’에 대한 고려 사람들의 인식을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선조와 나를 연결하는 방식은 곧 선조에 대한 기억을 나에게 투영시킴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위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기존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목표로 내부적으로 전례를 고민하고 치열히 논의하였다. 이러한 논의과정은 당시 고려 신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를 보여주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국가의례뿐만 아니라 신료 개인의 입장에서도 후손의 비용으로 설립된 묘와 사원은 당시 후손으로서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고려전기부터 고려후기에 이르기까지 초학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고려의 예제에 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신 예제연구반 발표, 토론자 선생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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