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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문화와 물품의 교차점을 가다_이규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3.11.29 BoardLang.text_hits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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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3년 11월(통권 45호)

[답사기] 
 
 

문화와 물품의 교차점을 가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테르미즈 답사기 -

 

이규호(고대사분과)
 
 
 
푹푹 찌는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던 8월 4일 금요일, 역사학‧고고학‧미술사 전공자 26명으로 구성된 중앙아시아 3개국(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답사단 일행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이 날을 시작으로 8월 14일까지 9박 11일간 답사일정을 무사히 소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답사단이 이 기간동안 소화한 거리는 족히 1000km 단위로 셀 수 있을 정도였고, 이동한 시간은 그 날의 일정을 변동시키는 주요한 변수가 되어 일행들의 피로감을 더했다.
 
필자 입장에서 이번 답사는 참여를 결정하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지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3월이었는데, 가기로 결정한 것은 6월말이나 되어서였다. 제일 큰 문제는 직장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11일간의 답사 일정 가운데 평일이 7일인데, 당시 남아 있는 연차는 9일 6시간이었다. 즉, 답사에 연차 7일을 쓰면 올해가 아직 3분의 1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잔여 연차 2일 6시간으로 버텨야했기 때문이다(현재는 1일 2시간 30분 남았다. 아직 9월인데...).
 
긴 고민 끝에 처음으로 다녀온 중앙아시아 3개국의 문화는 눈 앞에 두고 보면 피로감을 잊게해줄 것들로 가득했고, 처음 겪어보는 고온을 경험하는 날도 있었지만 건조한 덕에 야외를 돌아다니는데 수고스러움을 덜어줄 수 있었다. 답사기를 쓰기 위해 가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고 있는 지금, 그 때 다녀왔음에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다. 다만 짧은 지면을 할애하여 열흘 가량의 일정을 모두 다루는 것은 주마간산식으로 나열하기에 급급할 듯 하고, 또 전체 일정에 대한 답사기는 올해 연말 별도의 학술지에 실릴 예정이라 하므로, 거기서는 다루지 못할 내용이 포함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이번 답사의 일부나마 독자들께 전달하고자 한다.
 
 
동서교역의 허브, 부하라(8월 5일, 9일)
 
8월 4일 타슈켄트의 일정을 소화한 일행은 다음날인 5일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부하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하라는 그리스계 왕국인 박트리아 시대의 금화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전 3세기부터 형성된 도시이다. 부하라라는 이름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사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비하라(Vihara) 내지 바하라(Vahara)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데, 이를 반영하듯 인근의 사마르칸트, 발흐와 함께 고대 불교가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이후 이슬람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또 몽골군에 의해 도시 전체가 전멸하기도 했으나 지리적 입지로 인하여 복구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부하라 일대에는 고대 그리스, 소그드, 이슬람 유적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슬람 유적이 중심인 현재 부하라 구시가지는 ‘부하라 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먼저 우리가 방문했던 장소는 소그드인들이 동서교역의 활동 중심지로서 구축하였던 곳이었다.
 
 
소그드인들의 무역요새, Paykend Fortress(8월 5일)
 
원래 여기는 8월 6일~8일의 투르크메니스탄 일정을 마치고 부하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리기로 한 곳이었다. 하지만 답사지를 제작할 때 전체 일정의 경로 및 위치 확인을 담당한 필자는 이 일정이 불가함을 깨달았다. 8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국경까지 차로 10시간을 가야하는데,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해도 통관까지 감안하면 해가 지기 전에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그리고 8일에 우리 일행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비자만료 20분을 남기고 우즈베키스탄 국경에 들어왔다). 어차피 부하라 시내에서 크게 멀지 않았고 부하라에 도착한 것도 오후 4시경이었으므로 일자를 조정하여 이 날 방문하기로 하였다.
 
페이켄드 요새는 부하라 서남쪽으로 45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기원전 4세기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요새가 된 유적이다. 이 곳은 남쪽의 인도, 이란과 북쪽의 우랄, 볼가, 코카서스 지역을 잇는 교통로상의 연결지점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무역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이곳은 한 명의 지도자에 의해 운영된 것이 아니라 상인들로 구성된 공화정의 형태였다고 하며, 9세기에 요새를 지탱하게 해주는 인근의 자라프샨 강의 물줄기가 변하여 버려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를 생각해볼 때, 얼마나 상업이 번성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평선 너머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며 유적지로 이동했는데, 중간에 길을 놓친 버스 기사님의 실수로 약간의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다행히 요새 유물전시관장님이 큰 길까지 차를 타고 배웅을 나와주셔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바로 유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을 지나 작은 구릉을 넘자 요새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지만 흙으로 쌓은 벽과 석양빛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유물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는 전시관장님의 말에 우리는 먼저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조금 큰 가정집 규모의 전시관이었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26명의 인원이 그 전시관에 모두 들어가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궁금한 유물은 관장님에게 물어가며 설명을 들었다. 당 현종 개원연간(713~741)에 발행된 개원통보를 보니, 당시 이 지역이 동서교역의 허브였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요새 안으로 이동했다. 평탄한 주변 대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는, 주변 지역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요새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조로아스터교 사원, 궁전, 모스크, 상인들의 숙소 유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벽 앞에 서서 안을 둘러보니 다양한 건물들과 사람, 물건이 오갔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 하였다.
 
그림1. 외부에서 바라본 요새 성벽
 
그림2. 요새 내부 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본 전경 (Ⓒ이승호)
 
그림3. 개원통보와 그를 모방한 동전 (Ⓒ이진선)
 
그림4. 요새에서 발굴된 10~12세기의 유리병 (Ⓒ 이승호)
 
그림5. 페이켄드 요새와 부하라 일대의 지형도.
두 개의 빨간 밑줄 중 아래가 페이켄드 위가 부하라이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 북쪽을 지나는 자라프샨 강의 지류가 말라버린 탓에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유물 전시관과 요새 유적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7시가 되어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부하라 시내로 돌아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해외답사가 늘 그렇듯, 저녁식사 이후에는 항상 그날이 아쉬운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이어지는 법이다. 오래된 중앙아시아 도시의 밤거리는 어떠할까 궁금해하는 다섯명이 모여 어디선가 나고 있을 알콜 냄새를 찾아 호텔 밖을 나왔다. 초행길이었던지라 구글맵을 켜놓고 여기저기 걸어다녔는데, 길가에 차려놓은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가족과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약 30분간의 방황 끝에 어느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씩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여담이지만 그 가게의 맥주값은 생각보다 비쌌는데, 알고보니 그곳은 물담배가 메인인 곳이었다).
 
그림6. 부하라에서의 저녁 식당 Laziz house.
천장이 트인 자리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아시스의 저녁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림7. 부하라 시내 야간 방황 5인조.
안녕하세요 저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전상우)
 
 
부하라의 옛 거리를 거닐다(8월 9일 아침).
 
8월 8일 밤 11시 40분. 우리는 3일간의 투르크메니스탄 일정을 마치고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을 빠져나왔다. 우즈벡 통관까지 무사히 마치고 버스에 탑승하여 간단하게 김밥 도시락을 먹은 뒤 다시 부하라로 돌아온 것이 새벽 4시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5일에 소화하지 못했던 부하라 시내의 일정이 떠올랐다. 오래된 도시인 만큼 다양한 시기의 유적들이 있었고, 원래 계획에는 구글에서 부하라를 검색하면 나오는 대표적인 유적 두 곳을 방문하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마침 9일에 테르미즈로 향하는 출발시간이 10시라는 공지사항을 듣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시내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곧 체력이 남아있을 것 같은 몇몇에게 ‘내일 아침 시내 투어 하실 분 6시30분까지 로비로’라는 연락을 돌리니, 가보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있었다. 현 한국역사연구회 미디어위원장이자 룸메이트인 동학 이승호 선생도 그 중 하나였다. 약 2시간 뒤, 잠을 깨우는 알람이 울리고 나는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다들 많이 피곤했는지 참여의사를 밝힌 일행들은 모두 연락이 없거나 안 나가겠다는 연락을 했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룸메이트를 깨웠으나, 역시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혼자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이 때가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는 룸메이트에게 나지막히 속삭였다. ‘형, 잠은 버스에서 자요’
 
악마의 속삭임에 눈을 뜬 룸메이트와 함께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호텔을 나섰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1시간이면 한 바퀴 돌고 올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안내에 따라 걷기 시작하니 부하라 유적들의 모습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지났음에도 색깔을 잃지 않고 있는 건물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겨주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음과 동시에 눈으로 기억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목적지 중 하나였던 Ark of Bukhara에 도착했다. 부하라 구시가지의 중심지에 있으며, 멀리서 보아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5세기에 초축되어 1920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일부 구간의 성벽을 보수 중이었다. 내부에는 전시관이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우리가 너무 일찍 간지라 외관만 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성채의 변천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와서 아쉬울 뿐이었다. 성벽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걷다가 뒤쪽 모퉁이를 돌아보니 다음 목적지인 Mir-i Arab Madrassa와 Kalan Mosque, Kalyan minaretrk가 나타났다. 이곳은 교육시설, 사원, 탑으로서 부하라 성채와 함께 부하라 구시가지의 얼굴로도 알려진 곳이다. 사실상 이곳이 인생 첫 이슬람 양식의 건물을 실견하는 장소였는데, 차분한 분위기에 햇빛이 떨어지는 광경은 아주 인상 깊었다.
 
그림8. 부하라 성채의 모습. 내부를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림9. 성벽 보수 중인 부하라 성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일 바깥 외벽은 후대에 보강한 것이고 안쪽에 그보다 오래된 성벽이 남아 있다.
 
그림10. Mir-i Arab Madrassa. 절묘하게 가운데 창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그림11. 칼란 모스크와 칼리얀 미나렛.
다양한 문양과 다채로운 색깔이 기억에 남는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 둘은 잠을 조금 포기하고 나오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냐며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일정 상 이른 아침에 갈 수밖에 없었던 탓에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고, 이곳의 야경이 엄청 유명한데 그것을 보지 못한 것 역시 너무나 아쉬웠다(이 아쉬움은 며칠 뒤 사마르칸트에서 해소했다). 그런 한편 이 날의 아침 일정을 소화하면서 탄식을 참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다. 부하라 구 시가지 일대는 경복궁, 북촌 한옥마을 일대와 같이 유적과 오래된 집이 어우러진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그런 골목과 거리들 사이로 식당과 술집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이걸 그 때 알았다면 야경도 보고 그 정취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짙게 남기며 발걸음을 돌렸다.
 
 
불교의 전파를 간직한 테르미즈(8월 9일~10일)
 
9일 오전 10시 부하라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에 위치한 테르미즈로 향했다. 알렉산더가 이곳을 정복하면서 세운 도시로서, 박트리아와 소그드를 연결하는 교역로 상에 위치한 핵심 도시였다. 쿠샨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곳에는 불교가 번성하여 다양한 사원이 세워졌다. 불교의 위세는 7세기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서도 유지되었는데, 『대당서역기』에는 테르미즈를 달밀국(呾蜜國)이라 하며, 10개 이상의 사원과 1000여명의 승려가 있고 수많은 탑과 불상이 있다고 전한다. 이후 칭기스칸의 군대에 의해 도시가 황폐화되자, 남은 자들이 남쪽 인근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테르미즈시를 세웠다.
 
 
불교 수행자들의 흔적을 따라서(Fayaz tepe, Kara tepe).
 
테르미즈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부족한 잠을 채우며 대략 6시간 정도를 달리자, 우리 일행은 舊 테르미즈의 파야즈 테페, 카라 테페에 도착했다. 이곳은 불교 사원 유적들로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걸어서 함께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테르미즈는 아무다리야 강 연안에 붙어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현재의 테르미즈도 마찬가지다), 사원들은 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조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남쪽에서 올라온 불교가 이곳을 거쳐 서역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사원 유적은 당시 성행했던 불교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파야즈 테페는 북쪽의 원형 스투파 구역과 남쪽의 사원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원 구역은 다시 세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원의 세 구역 가운데 중앙의 예배 구역에서는 벽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자로 표기된 불교 경전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카라 테페는 우즈베키스탄 최대의 불교사원이자 유일한 석굴사원으로서 서쪽과 남쪽 10여 곳의 석굴과 북쪽의 승원 및 스투파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5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라 해가 길고 더웠지만,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은 흙으로 덮인 사원 주변 일대를 비추어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사원의 남쪽에 면한 아무다리야 강은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경계이기도 해서, 강변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막과 함께 지금은 갈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 땅이 보였다. 강 언덕에 서서 옛날 사람들은 아마도 저곳에서부터 이곳 테르미즈에 이르러 수행과 교역을 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림12. 파야즈 테페의 원형 스투파 외관
 
그림13. 스투파 내부의 모습
 
그림14. 파야즈 테페 남쪽의 사원 구역. 중앙 우측의 낮은 구릉이 카라 테페이다.
 
그림15. 카라 테페 전경
 
그림16. 카라 테페의 석굴들
 
그림17. 카라 테페에서 바라본 아무다리야 남안의 아프가니스탄.
멀리 사구가 보인다.
 
그림18. 舊 테르미즈 일대의 배치모형.
왼쪽이 파야즈 테페, 두 물줄기 사이가 카라 테페,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 구 테르미즈이다.
 
 
넘어가는 해를 뒤로 하고 우리는 이 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곳의 불교 유적을 보고 나니 문득 몇 해 전에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불이 떠올랐다. 저 강 너머에도 있을 이와 같은 유적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현재로서 저 너머를 가는 것은 요원해보이는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저녁은 현지식 꼬치요리인 샤슬릭과 함께 보드카, 맥주를 곁들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잠을 줄이며 돌아다녔던 필자는...밤 10시 30분경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었다.
 
 
오오,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불교다(8월 10일)
 
다음날 오전, 우리는 테르미즈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호텔과 가까워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박물관으로 이동했는데, 다녀온 소감을 먼저 말하자면 이곳은 깜짝선물과 같은 곳이었다. 전날 다녀온 유적들을 비롯한 이 일대의 중요 유물들은 전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형과 유적의 형태, 규모 등만을 볼 수 있었던 어제의 2% 부족한 아쉬움을 여기서 모두 달랠 수 있었다. 긴 말 하지 않고 아래의 사진들로 대신한다.
 
그림19. 파야즈 테페 출토 삼존불상.
아직도 볼 때마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김근식)
 
그림20. 파야즈 테페 출토 불상편. (Ⓒ이진선)
 
그림21. 그리스-박트리아 인물 소조상. (Ⓒ전상우)
 
그림22. 장식용 불상 부조 (Ⓒ이승호)
 
그림23. 사제와 어린이가 그려진 벽화
 
 
테르미즈 박물관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국경을 넘어 타지키스탄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기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끝이다. 3일의 여정을 다시 돌아보았을 뿐이지만, 아직도 각 지역을 둘러보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으로 갔던 중앙아시아 3개국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용과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 되었고,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다면 그 때는 조금 범위를 좁혀서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다. 이 답사기를 읽는 독자분들께도 기회가 되면 꼭 방문해 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