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진진하게 영화를 관람했다.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평일 낮이었음에도 극장엔 사람이 많았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했는데 영화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존의 역사 영화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의 전투영화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서울의 봄에 대한 맥락뿐 아니라 다른 역사적 배경과 인물의 맥락을 모두 삭제하고 캐릭터를 선과 악으로 나눠 완전히 평면화시킨 뒤 양자 간의 밀고 당기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의도된 결과였다. 감독은 ‘워 게임’이 컨셉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과정을 ‘재미있게’ 전달하면 의미는 각자의 몫으로 피어난다, <서울의 봄>으로 천만 관객 돌파한 김성수 감독 인터뷰〉《씨네21》1438호).
‘워 게임’처럼 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나리오가 참고한 자료 때문일 것이다. 현재 12·12에 대한 기록으로는 실제로 보안사령부가 주도했지만 현대사연구회라는 임의 단체가 1982년 5월 편찬한 《제5공화국 전사》,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의 회고록인 《12.12 쿠데타와 나》, 장태완 장군이 회장직을 수행할 때 재향군인회가 발간한 《12.12 5·18 실록》,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인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1994~1996년 간 생산된 12·12와 5·18관련 검찰 수사기록과 재판 자료, 마지막으로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등이 있다.
영화는 그중 기본적으로 장태완 장군의 회고록에 기반해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승화 총장의 수경사령관 임명, 연희동 요정 초청, 유학성·황영시와의 통화, 야포단의 30경비단 조준 지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의 통화 내용 등 주요 장면의 전개 과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장태완 장군의 회고록은 1993년 출판되었다. 1993년 《시사저널》은 장태완 장군이 1987년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누워있을 때 작성한 육필 수기를 공개했는데, 이 육필 수기가 회고록의 초안과 같았다. 그리고 그 육필 수기는 다시 12·12쿠데타 직후 체포된 장태완 장군이 조서용지에 몰래 적어 비밀리에 보관하던 작전 일지를 바탕으로 했다. 감독과 작가의 의도가 작용했겠지만, 작전 일지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은 영화의 게임 같은 구성에 큰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제5공화국 전사》도 군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영화 구성에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역사학자로서 냉정하게 평가할 때 그 역사 인식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서울의 봄〉을 통해 관객은 어떤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 다만 그 인물에 대한 선험적 평가에 바탕해 영화를 볼 뿐이다. 전두광은 악의 결정체이자 유일한 원인 제공자이다. 그러나 12·12쿠데타는 엄연히 박정희 정권기의 유산이었다.
영화는 쿠데타가 성공과 실패를 오가는 순간을 극적으로 그려내지만, 실제로 쿠데타는 실패하기 어려웠다. 쿠데타 진압 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2·12 쿠데타 당시 당연히 군에는 쿠데타 진압 매뉴얼이 있었다. 이른바 ‘방패’ 계획이었다. 계획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수도경비사령부가 핵심 임무를 맡았고, 공수특전여단들이 수도권 방어 예비대 역할을 하며, 역시나 수도권 주변의 20사단(양평), 26사단(양주), 30사단(고양), 수도기계화사단(가평) 등 비 전방(야전) 사단들이 방패 사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경사는 5·16쿠데타 직후 창설된 부대였다. 당시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훼손된 작전통제권을 돌려받는 대신 5·16쿠데타 세력들에게 30사단, 33사단, 제1공수전투단의 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다. 그중 30사단과 33사단을 모체로 수경사의 전신인 수도방위사령부가 창설된 것이다(제1공수전투단도 처음에는 수도방위사령부에 배속되었다). 5·16쿠데타 세력들이 수도방위사령부를 창설한 이유는 쿠데타 주축들의 안위를 지키고 역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대대로 수경사령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 임명되었다. 수경사령관인 윤필용이 박정희 후임으로 이후락을 추대하는 쿠데타 모의를 했다는 ‘윤필용 사건’은 수경사의 친위부대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12·12에 참여한 차규헌 수도군단장도 1975년 2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수경사령관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수경사의 주력부대가 30단과 33단, 그리고 33헌병대대였다.
공수특전여단 역시 쿠데타 진압 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1970년대 공수특전여단의 임무는 중앙기동타격대, 수도권 방어 예비대였다. 공수특전여단은 특정 지역 경비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제일 빨리 동원할 수 있는 부대였다. 특히나 김포에 위치한 1공수, 송파구에 위치한 3공수, 부평에 위치한 5공수가 핵심 부대였다. 부평에는 9공수도 주둔했다. 7공수는 익산, 11공수는 화천, 13공수는 포천에 주둔했기 때문에 수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가 잘 보여준 것처럼 쿠데타 진압 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모두 쿠데타에 참여했기 때문에 쿠데타 진압 매뉴얼은 작동이 불가능했다. 수경사의 경우, 30, 33단, 33헌병대대를 제외한 사령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영화는 9공수의 회군을 쿠데타 성공의 중요한 국면으로 그려냈지만 서울 근교 공수특전여단의 대다수가 12·12에 참여했기 때문에 9공수가 서울에 들어왔더라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진압 임무를 맡았거나 서울 근방의 전방 부대를 정치적으로 운용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등에 배치되었다. 일선에서 보직경력이 필요할 때는 서울 근방의 9사단이나 1사단에서 단기간 복무한 뒤 다시 후방으로 복귀했다. 정치군인들이 쿠데타 진압 임무를 맡았거나 서울 근교 부대를 장악한 상황에서 군의 중립화는 험난한 여정을 필요로 했다.
더군다나 박정희 정권을 배태한 5·16쿠데타는 많은 군인이 하나회가 아니면서도 수수방관하거나 쿠데타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근원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5·16쿠데타 직후 쿠데타에 반대한 이한림 1군사령관이나 강영훈 육사교장은 모두 시련을 겪었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모든 군인들이 생득적으로 그 사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국방부장관과 육군본부의 미온적 대처, 3군사령관의 입장 변경 등은 그런 맥락에 있었을 것이다. 결국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낳았다. 12·12쿠데타는 전두환이라는 한 사람의 악인 때문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기 오랫동안 누적된 구조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새삼 놀라운 사실은, 당면한 쿠데타에 대해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매뉴얼과 명령이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할 때는 너무나 효율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상술한 쿠데타 진압 부대들은 모두 시위 진압 부대였다. 방패 사단으로 지정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20, 26, 30, 수도기계화사단도 충정계획지정사단이었다. 부마항쟁과 5·18민주화항쟁 진상규명 과정에서 많은 군 지휘관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명령이 선택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대답은 변명이 된다. 두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대응은 하나회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시 우리 군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다른 질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왜 서울의 봄일까? 영화를 보기 전부터 궁금했다. 서울의 봄이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말로, 10.26사태 이후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던 시기를 말한다. 길게 보아 서울의 봄은 10.26사태 직후부터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민주화가 좌절된 시기를 말하지만, 통상 1980년 3월 개강 이후 유신체제기 해직된 교수와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각 대학에 학생회가 부활하여 학원민주화투쟁과 계엄철폐투쟁이 활발히 일어난 5월 17일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특히나 5월 중순부터는 그동안 주로 학내로 제한되었던 시위가 도심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5월 15일엔 7만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서울역 앞 광장에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다가 철수한,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 벌어졌다. 이틀 뒤 신군부가 5.17쿠데타를 감행했기 때문에,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은 두고두고 비판과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군사독재의 성격에 대한 평가, 운동의 주체 설정, 조직론과 대중론 등에 관한 논의가 서울의 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애초에 서울의 봄의 주체는 시민이었으며, 서울의 봄에 대한 기억 역시 기저에는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5·18과 군부독재의 재등장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깔려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며 5월 중순 데모를 하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 그해 봄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영화 말미에 12·12쿠데타를 통해 서울의 봄이 짓밟혔다는 자막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그 외의 장면에서 시민들은 어디까지나 수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태신과 전두광이 경복궁 앞에서 대치할 때 웅성거리며 사태를 구경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대표적이다(〈1980년대사 전공 역사학자들은 <서울의 봄>을 어떻게 봤을까〉, 《주간경향》 1558호). 그런 점에서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영화는 12·12쿠데타가 아직 본격화하지 않은 서울의 봄에 미리 사망 선고를 내렸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영화의 입장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겨울방학인 까닭에 대학가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1980년 2월, 청와대에서는 ‘학원 소요사태 대비 군 보고’가 이루어졌고, 육군본부는 각군에 폭동진압교육훈련을 조기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개강 직후인 3월 6일엔 1차 충정회의를 가졌다.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등은 4월경부터 5월 17일 군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5월 초부터 부대 이동이 시작되었다(노영기, 《그들의 5·18》, 푸른역사, 2020). 5·16쿠데타 세력들이 시위 진압을 가장해 부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학생시위를 사주한 것처럼, 신군부는 5.17쿠데타를 위해 시위가 확대되길 기다렸다.
그렇다면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든, 군 투입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울의 봄을 영화처럼 정리하기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시민의 힘은 국가의 물리력을 넘을 수 없는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시민은 어떻게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장태완 장군을 모델로 한 이태신은 지나치게 정의의 현신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거절하지 않았던 수경사령관직을 몇 차례 거절한 것처럼 그리는 방식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불가능한 조건에서 저항한 그의 위치에 실존 인물이 아닌 개개의 시민이 대입되었으면 좋겠다. 무려 1,300만 명이나 관람한 이 영화로 인해 서울의 봄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흐릿해질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서울의 봄에 대한 기억이 또 다른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