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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성 규범의 지식·제도와 반사회성 형성, 1948~1972_김대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2.05 BoardLang.text_hits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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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월(통권 47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성 규범의 지식·제도와 반사회성 형성, 1948~1972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08.)
 
 
 


김대현(현대사분과)

 
 
 

퀴어 역사 연구의 의의

 
 
한국 퀴어를 주제로 쓴 문화 연구는 많은데, 한국 퀴어를 주제로 쓴 역사 연구는 많지 않다. 자료를 통해 입증되는 실체적 진실과 정서를 통해 전달되는 서사적 진실은 서로 다른 연구방법론을 갖고, 둘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과거와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른바 역사 연구를 하기 좋은 주제에 대한 통념이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 재현을 위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주제, 둘째는 기존의 연구를 통해 축적된 역사상과 사회상에서 크게는 벗어나지 않는 주제. 전자는 역사 연구가 사료에 기반하기에 발생하는 물리적 한계, 후자는 기존의 역사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연구자의 입증책임이 커진다는 화학적 한계와 연결된다. 
 
이와 별개로 역사 연구를 통해 재현되는 것이 더 의미가 클 것 같은 주제들도 있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 안에서도 매우 딱딱하고 엄정한 방법론을 지닌다. 그것은 마치 판결문처럼 실체적 진실이 있고 없음을 추상같이 준별하고, 거기에 수반되는 명확한 근거와 사료 비판을 요구한다. 그렇게 구성된 역사적 사실은 매우 강한 지식권력의 효과를 낳는다. 친일인명사전이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최종장이 아니라 출발선을 제공하고, 거기에 실린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그 출발선의 움직일 수 없는 토대가 되었듯이. 
 
한국의 퀴어는 앞서 언급한 역사 연구의 물리적 한계와 화학적 한계를 모두 가진 주제다. 우선 한국의 성소수자, 정확히는 그와 유사한 과거의 존재와 실천들은 미국·일본과는 달리 스스로 자신에 대한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퀴어는 과거는커녕 현재에조차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존재한다 한들 그것이 일년 중 하루라도 저렇게 광장과 거리를 누벼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며, 저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물론 그러한 자료와 공감대는 다른 주제라고 해서 처음부터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역사상을 다룰 때 이것은 빠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은 모든 역사 연구의 행간에 묻어있다. 자료가 없으면 연구 주제를 확장해 자료를 발견하고 문제의식을 재정의하면 된다. 가령 퀴어 억압의 몸통은 이성애중심주의고 여성 억압의 핵심은 가부장제이며 장애 낙인의 원흉은 비장애중심주의다. 퀴어와 여성과 장애 관련 자료가 적다 한들, 이성애중심주의와 가부장제와 비장애중심주의에 얽힌 자료가 적을 리는 만무하다. 또 어떤 주제가 기존 역사상과 지나치게 멀어 보인다면, 실은 그렇게까지 멀지 않음을 입증해 보이면 된다. 
 
퀴어 관련 자료가 적고 주제에 대한 한국사학계 내의 학문적 성원권이 박약한 탓에 얻은 성과도 있다. 자료의 일천함으로 성소수자 당사자를 주체로서 복원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성애중심주의를 비롯하여 퀴어가 다른 사회적인 것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실증한다는 문제의식을 확고히 키울 수 있었다. 이는 영미권 퀴어 이론이 그토록 강조하였던 정체성 정치 비판을(물론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정체성 정치의 사례는 다름 아닌 ‘민족주의’지만) 그 나름의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우회하는 길이었다. 
 
퀴어가 당대 사회상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은 기존의 퀴어 관련 한국사 연구를 비판하는 일과도 연결되었다. 이 방면의 선구적인 연구서인 《퀴어 코리아》가 거기에 포함된다. 의미있는 실증들을 포함한 연구지만, 이 책에서 한국의 군사독재 및 이성애중심주의와 퀴어 당사자를 잇는 설명틀로 인용한 “대중독재론”과 “유교적 생명정치”, “가족 통치성”은 하나같이 별반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쉬운 의미화의 틀은 당대의 퀴어 억압을 뒷받침하였다고 간주된 ‘사회적 동의’를 지나치게 본질화하고, 결과적으로 실제 역사상과는 다른 재현을 불러올 수 있다. 역사학이 손에 잡히는 역사상의 물성을 강조하고 그것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축적된 사회적 조건과 우연적인 계기들로 인해 일견 단단해보이는 구조가 탈구축될 가능성, 즉 사회구성주의의 전제를 그 안에 이미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단단해보이는 사회 구조라도 그것은 각 시대마다 아주 구체적인 장치와 기관을 통해 조금씩 재구성되고 변화한다. 퀴어를 둘러싼 이성애중심주의 구조 또한 당대의 구체적인 지식과 제도를 통해 보강되고 해체될 것이었다. 내가 박사학위논문에서 실증하고 재현하고자 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성소수자 당사자 스스로 글 한편 제대로 남기지 않을 만큼 강고한 억압이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의해 어찌 구성되었는지를 살핀다면 그것이 어찌 해체될 수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략적 본질론의 효과를 감수하면서 한국 퀴어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조건을 계보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까닭이다.

 

논문의 구성

 
 
박사학위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퀴어를 포함한 1948~1972년 한국 사회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통치 기술로 보안처분을 지목했다. 형벌 외 예방적 제재로서 형사처분을 가리키는 보안처분은 나치 독일 시대의 남성 동성애자 거세 조치를 비롯하여, 소년법상 우범소년 대상 보호처분, 국가보안법상 사상범 대상 보도구금, 윤락행위등방지법상 요보호여자 대상 보호지도소 수용 등을 망라하였고, 처벌 대상이 된 각 법의 대상들은 모두 범죄로 점찍힌 행위뿐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것 같은’ 사람, 즉 행위의 개연성을 포괄하게끔 구성되었다. 논문 제목의 ‘반사회성’ 역시 현행 소년법에도 잔존해있는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에서 따왔다.
 
행위의 개연성 처벌이 태연하게 합리화된 데에는, 그런 그들을 ‘복지’의 대상으로 보고 국가가 ‘보호’한다는 법이념이 깔려 있었다. 요보호아동처럼 복지법을 통해 가급적 너른 범주를 원호한다는 발상이, 형법으로 들어와 요보호여자처럼 가급적 너른 범주를 처벌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또한 보호를 명목으로 행위의 개연성을 처벌한다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을 어딘가 보호받아야 할 미숙한 존재로 본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일종의 내부 인종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몸의 분류는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시설화 논의, 즉 어떤 존재를 시설에 격리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발상과 연결되었다. 
 
복지와 보호를 내건 행위의 개연성 처벌을 옹호한 이데올로그들은 소년법원과 그것의 후신인 가정법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소년법과 가사심판법에는 모두 사회사업학(사회복지학), 심리학, 정신의학 전문가를 초빙하여 대상소년 및 기타 문제적 존재를 조사·감별한다는 법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를 뒷받침할 인적·조직적 연계는 1950년대 말부터 준비되었다. 서울아동상담소 전문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사관·조정위원은 초창기 실제로 사회사업학·심리학·정신의학 전문가로 선임되었고, 이들은 거의 모두 활발한 언론 기고와 사회활동을 벌여나가며 자신의 의견 및 활동에 대한 학술적·제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둘째로 이들 이데올로그들이 근거한 각 학문 체계와 그것을 관통하는 중심 사조를 분석했다. 그 중심 사조는 곧 우생학과 정신분석학의 교차였다. 우생학은 문제적 존재들의 선천적 유전성을 강조했고, 정신분석학은 문제적 존재들의 후천적 양육 단계의 변수를 강조했는데, 이 둘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설화 논리의 고급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인간의 성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시도한 지식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젠더·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것을 넘어, 그러한 성적 관념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의 몸을 분류하고 거기에 차등적인 가치를 매기는 주요 장치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논문 제목의 ‘성 규범의 지식·제도’가 이런 까닭에 지어졌다. 
 
소년법원·가정법원과 연관된 각계의 이데올로그들은 이러한 학문적 권위를 통해 여성·퀴어·비행소년 등 사회적 소수자를 병리화하는 발언을 수차례 발신하였다. 일견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동성애·자위행위·성매매·지적장애(“정신박약”) 등의 나열은 소위 인종적 ‘퇴행’을 선천적·후천적 요소로 합리화한 우생학·정신분석학의 뒷받침 속에 합리화되었다. 이들의 말은 단순한 혐오발언의 의미를 넘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공신력이 배가되는 형태의 제도적인 역할을 행사했다. 이러한 지식의 유포와 제도의 작동은, 어떤 사회적 소수자가 끝내 일반 사람과는 달라서 조사·감별 및 치료, 격리와 시설수용이 필요한 사회적·성적 존재로 여겨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했다. 
 
 

현재를 본질화하지 않는 과제

 
 
이 연구가 한국사학계에서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장면이 생각난다. 보안처분제도의 예시로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윤락행위등방지법, 소년법 및 과거 나치 독일에서의 남성 동성애자 거세가 나란히 소개된 자료였다. 퀴어 역사 연구에 갸웃하는 연구자는 있어도 국가보안법 연구의 의의를 의심하는 연구자는 없을 것이다. 기존의 역사상과 이 주제가 어떻게 화학적으로 결합되는지의 증빙이 필요했던 나에게, 이 자료는 마치 천군만마의 가능성을 확인한 듯했다.  

한국의 퀴어운동은 다른 운동과의 연대에 사활을 걸어왔다. 일단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LGBT)의 여러 주체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레 필요하고, 연대체 안에서 다른 운동단체를 만나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 현장의 이슈를 학습하는 의무가 부과된다. 장애여성운동을 만나면서 탈시설 의제를 알게 되었고, 성소수자 대상 전환치료의 기관 중 하나가 바로 그 복지시설임을 알았을 때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남의 억압으로 생각하던 것이 마침내 내 억압으로 경험되는 일은 운동판에서 겪는 상사 가운데 하나다. 

되짚어보면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적 지향(동성애·양성애 등) 차별금지조항이 포함된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만들어졌을 때나, 처음으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트랜스젠더·젠더퀴어 등) 차별금지조항이 포함된 2012년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될 때, 성소수자 인권운동단체뿐 아니라 반공·냉전 이슈를 내건 전통적인 운동단체들 역시 거기에 꾸준히 연대해왔다. 그리고 그 연대의 구도는 취약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그 또한 역사와 사회 가운데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구성된다. 

나에게 학술연구는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없어도 끝내 필요하기에 하는 것이다. 무엇을 역사학 논문에 담는 순간 그것이 부당하게 고착된 형태로 재현되는 권력효과를 의식하면서, 무언가를 써 내리는 내 펜을 용서하기 위해 많은 것들에 내 얼굴을 거울삼아 비춰보는 일이 잦았다. 그 긴장의 힘으로 이 논문을 썼다.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하고 무슨 글을 쓰든, 그런 효과에 대해 지금보다 더 자각적일 수 있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