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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일제시기 조선사업공채 발행정책과 식민지 인프라 개발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3.05 BoardLang.text_hits 1,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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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2월(통권 48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일제시기 조선사업공채 발행정책과 식민지 인프라 개발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23.02.)
박우현(근대사분과)연구의 계기석사학위논문의 주제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설철도 정책이었다. 사설철도를 소재로 택했던 이유는 당시 내가 가장 문제시했었던 민영화라는 주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횡포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가 깊어질수록 일제시기 사설철도를 자본의 움직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 분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책을 관할하는 주체는 식민본국이었던 일본이었다. 자연히 사설철도에 관한 조선총독부의 정책 방향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 목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국유화 노선의 선정, 보조법 개정을 통한 조선총독부 재정 지출과 같은 정책을 운용할 때 지역 자본가는커녕 조선총독부의 의사도 쉽게 반영될 수 없었다.
식민지의 정책 운용이 제국의 정책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총독 혹은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자율성’ 여부에 주목하면서 총독부를 ‘강한국가’로 인식하던 흐름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나도 영향을 받았고, 제국의 권력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등으로 분절해 분석하는 방식이 식민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방법론에는 현재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책 운용의 핵심은 결국 돈이다. 즉,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면 어떤 방향성과 목표로 조달되는가? 국가라면 핵심은 재정 · 금융일 것인데 이 부분에서 식민권력의 이른바 ‘자율성’이라는 기재가 작동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자 근대국가와 세계체제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교통, 재해예방 등의 인프라 구축의 측면에서 볼 때 식민권력이 행사할 수 있는 자금 면에서의 ‘자율성’은 희박했다.
이는 자금을 둘러싼 제국의 구조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다. 본 연구와 관련해 두 가지만 예로 들면, 조선총독부는 예산을 결정할 권리와 공채를 발행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총독부 등 식민권력이 자금 운용을 자율적으로 하는 것에 통제를 많이 가했다. 총독부는 예산안을 작성한 후 일본 대장성의 사정을 받아야 했고, (조선을 대표하는 의원이 없는)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했다. 특히 본 연구의 소재가 되는 조선사업공채는 발행한도, 사용처, 인수과정, 원리금 상환 등 모든 과정의 결정권을 대장성이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재정 운용 면에서는 총독부를 근대국가의 요소를 갖췄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지점 때문에 식민지 개발을 분석할 때 이른바 식민본국과 식민지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종합적 분석에 적합한 소재, 조선사업공채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재정 운용을 좌지우지했던 권력 기구는 크게 보면 대장성과 육군성이었다. 두 기구 모두 시기에 따라, 내각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일관되지 않았으나, 식민지 재정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제국주의 정책의 방향으로 종속시키려는 생각은 같았다. 대략 국제관계와 재정·금융의 안정을 통한 제국의 존속을 고려하거나, 군비확충과 대륙침략에 의한 제국의 확장을 위해 식민지 재정을 관리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이처럼 제국의 권력 문제를 시야에 넣고 식민지를 분석해야 한반도에 구축된 인프라 개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철도 · 항만과 같은 교통망 확충, 치수 · 사방사업과 같은 재해예방시설 등은 자본에 의한 무한한 이윤추구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즉, 근대자본주의로의 개편을 위한 산업적 전제조건이자 필수요소였다. 그러나 해당 사업들은 이익이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상당한 초기자본과 기간이 필요했다.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이처럼 쉽게 이윤이 발생하지 않았던 사업에 자금을 투여할 수 있었던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미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군사활동을 지속하며 팽창해나갔던 근대국가의 재정시스템뿐이었다.
게다가 인프라 구축은 상당한 초기자본이 필요했기에 조세 등 매년 징수하는 세입으로 충당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의 인프라 구축은 국가가 빚을 지는 방식, 즉 공채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이러한 방식의 자금조달은 근대국가 이전까지 없었던 재정조달 방식으로 무분별한 전쟁이 만들어 냈던 ‘재정-군사 국가’만의 특징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에서 공채발행을 재정 운용의 주요 도구로 활용했다. 그들은 공채발행으로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빠르게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의 식민지 개발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 스스로 식민지배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독립(자치)재정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동원한 자금에 대한 원리금 상환도 식민지 세입으로 부담하는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19세기 말 효율적인 식민지배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제국주의는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본국의 재정자금을 직접 식민지에 투자해 인프라를 구축하는 비중이 높았다. 영국 · 미국에 금융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던 점, 육군세력이 주도했던 식민지 확장 즉, 대륙침략을 위한 교통망의 필요성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점에서 사설철도 정책에서 확장해 조선총독부 재정에 투입하기 위해 대장성이 발행했던 조선사업공채를 연구하는 것은 제국의 의사 결정에 종속된 구조였던 식민정책, 매년마다 진행되었던 예산협상에서 확인되는 식민지 인프라 개발의 성격, 제국-식민지의 권력을 형성했던 다양한 주체들 간의 갈등과 종속관계가 식민정책에 끼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출발점이라고 여겼다.
식민지 예산편성의 최대 변수, 일본의 사정분석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매년 이루어졌던 조선총독부 예산편성에서 조선사업공채 발행을 좌우했던 핵심 요소는 일본의 재정 · 금융정책이었다. 총독부와 일본 정부가 당해 조선사업공채 발행과 향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시했던 것은 조선의 상황보다는 일본의 정치 · 경제적 사정이었다. 식민본국이 식민지 예산을 결정하는 권한부터 공채정책 전반을 장악했던 재정 구조가 만든 결과였다. 예를 들어 1910년대 초반 조선사업공채 발행 자체가 불가능했던 상황과 1917년 이후 함경선 건설을 중심으로 사업공채 발행을 시작한 점, 일본의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조선사업공채 발행계획을 갑자기 중단·취소한 점, 궁민구제토목사업비에 사업공채 발행을 포함하지 못한 점, 다카하시 재정 시기 일본의 적극재정방침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자금조달계획이 부재한 단발성 공채발행의 임시방편적 증액에 머물렀던 점, 인플레와 원리금 상환 부담 증가로 당해 연도 발행액의 감액이 필요했지만 중일전쟁 이후 오히려 조선사업공채 발행액을 급격히 늘렸던 점 모두 일본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공채정책 운영의 결과였다.
조선 내 요구와 멀어졌던 공채발행사업의 방향성둘째, 사업별로 살펴보면 조선사업공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던 사업은 일본 정부의 식민정책상의 필요, 다시 말해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서 설정한 조선의 역할에 맞춰 결정되었다. 특히 일제시기 전체에 걸친 경향이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철도건설 및 개량비가 지나치게 한반도를 종관하는 노선으로만 집중했던 것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조선 내 구성원 다수가 희망했던 횡단철도 부설의 경우, 평원선을 제외하고 사업공채 발행이 전무했다. 일제는 조선철도를 대륙침략과 만주에서의 일본 이권 강화를 위한 연결망으로만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 내 횡단철도 부설을 통한 지역개발의 열망은 조선사업공채 발행을 결정했던 대장성은커녕 총독부의 예산계획안까지 닿기도 어려웠다.
항만수축도 중일전쟁 이후 사업공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신속히 조달할 항만이 대부분 1~2년 단위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1년 전에 4~5개년 계속사업으로 사업공채 발행을 결정했던 항만이 1년 뒤에 자금조달을 전면 취소하거나 조선 내 재원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일제의 전시재정 운영에 종속되었던 조선사업공채 발행은 장기계획 없이 조변석개식으로 운영했던 식민지 인프라 개발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군사적 목표 달성 중시셋째,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공채발행을 통해 추진했던 식민지 인프라 개발과 비교해보면 조선사업공채 발행을 통한 인프라 구축은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도 인도, 인도차이나, 알제리, 토고 등 식민지에 사업공채 발행을 통해 인프라를 구축했다. 다른 국가들 역시 식민지 철도건설에 가장 많은 공채를 투입한 것은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내부 반란 진압, 경제적 이윤극대화를 목표로 식민지에 공채를 투입했다. 이에 반해 일제가 조선에 구축한 인프라의 방향성은 군사적 목표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던 한반도-만주 철도건설 계획과 연결되는 것으로 실제 조선사업공채 발행 예산의 73%에 해당했던 철도건설 및 개량비가 일본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로 향하는 종관철도망 구축에 집중되었던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식민지와 차이를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일본이 20세기 초반에 식민지 침략에 나섰던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는 19세기에 획득한 식민지배 안정화에 몰두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은 향후 비교 연구를 통해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조선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인접할 뿐 아니라 일본의 군사수송 경로에 위치한 식민지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 결과 조선 내 요구와 관계없이 군사수송에 필요한 교통망으로의 집중, 식량증산이나 방공설비 확충 등 당시 일본의 군사적 목적에 필요한 사업에 공채를 발행하게 된 것이었다. 그에 따른 원리금 상환 부담과 인플레는 식민지가 부담해야 했다.
만한철도경영에 관한 의견서(1909년 9월 21일 일본육군 참모본부 작성)
參謀本府, 「滿韓鐵道經營ニ關スル意見書」, 『陸軍一般史料』(文庫-宮崎-41防衛省防衛硏究所), 1909.09.21. 비고 : 1909년 일본육군 참모본부가 작성해 육군대신에 제출한 지도로 당시 육군은 러일전쟁 이후 군사적 목표에 따라 만주와 한국에 부설할 철도계획을 완성한 상태였고, 실제로 이 계획대로 한반도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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