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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4~6세기 고구려 국제관계의 전개와 遼東_백다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3.29 BoardLang.text_hits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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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3월(통권 49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4~6세기 고구려 국제관계의 전개와 遼東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23.8.)
 
 
 

 

백다해(고대사분과)

 
 
 

들어가며: 왜 4~6세기 국제관계와 요동인가

 
이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4~6세기라는 시간적 범주, 해석의 틀로써의 국제관계, 그리고 국제관계를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요동이다. 각 키워드 간에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논문 소개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1) 왜 4~6세기 국제관계인가?
 
4~6세기 동아시아는 국제관계의 시대였다. 400년 동안 중화세계를 이끌었던 漢이 멸망한 후 西晉의 일시적 재통일이 있었지만, 중원을 여러 세력이 나누어 점유하는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에는 스스로가 중심임을 자처하는 여러 세력이 공존하는 다원적 세계가 펼쳐졌다. 각 세력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제관계에 주력하였다.
 
이 글에서는 4~6세기 고구려 국제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다원적 세계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였다. 4~6세기 동아시아는 기존의 中華 세계가 해체되었다가 재구축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체제와 성격’을 가진 세력이 공존하게 되었다. 江南에서 활동하였으나 中華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명분으로 삼았던 東晉과 南朝, 胡人이지만 전통적인 중화의 중심이었던 華北을 차지한 후 중화로의 변신을 꾀하였던 北朝, 그리고 초원을 발판으로 성장하였던 초원 세력이 함께 살아갔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교섭하며 국제관계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4~6세기 고구려의 국제관계는 고구려사의 다양성을 살핌과 동시에 동아시아 안에서 호흡하였던 고구려의 모습을 탐색할 수 있는 소재였다.
 
 
2) 왜 요동과 국제관계인가?
 
또 다른 키워드는 요동이다. 요동은 시대별로, 또 상황에 따라 그 범위와 의미가 다른 중층적 공간이다. 이 글에서의 요동은 4세기 후반 고구려가 영유한 遼河 以東의 지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고구려가 자국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한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
 
요동과 국제관계를 연계함으로써 첫째, 교섭 대상이 확대되어 간 양상을 추적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을 나아가고, 해당 지역을 영역화하는 과정 속에서 국제관계를 맺는 대상이 동심원적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요동이 가지고 있었던 ‘연결망의 허브(Hub of the Network)’라는 속성이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요동을 경유, 또는 출발하는 교통로를 매개로 교섭 대상을 다각화해 나갔다(<그림 1> 참조).
 
 
<그림 > 요동과 연결된 주요 교통로(ⓒ백다해)
 
 

고민의 연속: 어디에 차이를 둘 것인가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4~6세기 고구려 국제관계를 탐색하고자 하였지만 여전히 고민은 깊었다. 기라성 같은 선학들의 연구와 어디에, 어떠한 차이를 둘 것인가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장기간 고심을 거듭한 문제였다. 장고 끝에 두 가지 형태로 차이를 둘 수 있었다.
 
먼저 요동에 대한 지정학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차별점을 두고자 하였다. 공간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살피는 지정학을 활용해 고구려의 정치·외교적 맥락에서 요동이 가지는 가치, 이를 매개로 국제관계를 전개하는 것의 의미를 살피고자 하였다. 요동은 어떤 세력이 영유하느냐에 따라 연계되는 주변 지역이 달라졌으며, 그 과정에서 중심 거점이나 교통로 등 내부의 모습이 달라졌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요동과 요서가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오히려 한반도 서북부와의 연계가 강화되었다. 또한 요동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다시 정비되었다. ‘연결망의 허브’라는 속성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더욱 부각되었다. 이처럼 지정학을 참조하여 요동이 가진 자연·물리적 환경, 기후, 교통체계 등의 특성(Characteristics)이 고구려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문헌 자료의 확대도 꾀하였다. 기존에 널리 활용하였던 중국 正史의 本紀 및 列傳을 포함해 類書를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十六國春秋》와 《十六國春秋輯補》 등을 적극 참조하였다. 僞書로 폄훼되어 왔던 자료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동시기 다른 문헌-《資治通鑑》 및 《晉書》 載記-과의 교차 검증도 시도하였다. 그 결과 4~5세기 전반 華北에서 활약하였던 胡人들의 이해를 심화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사 전공자인 필자가 《十六國春秋》 등의 사료를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지들이 있어 지난한 과정을-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버텨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함께 사료를 읽으며 고민을 나누었던 고대사분과 위진남북조사반 동지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고민의 결과: 고구려 국제관계의 다면성·다층성

 
이러한 고민 속에서 4~6세기 고구려가 직접 국제관계를 전개하였던 江南의 南朝-東晉·宋·南齊·梁-와 화북과 요서에 거점을 두었던 北朝-前燕·後趙·後燕·北燕·北魏·東魏-, 그리고 西拉木倫河의 契丹과 몽골초원의 柔然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탐색 결과 고구려는 다원적 세계가 펼쳐진 가운데 고구려는 여러 대상과 동시에 교섭하는 다면외교를 전개하였음을 살폈다.
 
동시에 고구려는 서로 다른 체제와 성격을 가진 각 세력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시에 교섭함으로써 국제관계의 다변화를 꾀하였음에 주목하였다. 中華의 전통적 계승자를 자처하였던 南朝와의 중원왕조가 주변국과 관계를 맺는 전통적 틀인 조공·책봉에 입각해 관계를 맺었다. 반면에 北朝와의 관계를 시기별, 각 대상의 체제와 상황에 따라 ‘盟’이나 조공·책봉 등 형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또한 중원과 구분되는 독자적 문화를 보유하였던 契丹·柔然 등 초원 세력과는 ‘約’에 입각해 교섭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외교 방식을 다양화하며 국제관계를 전개하였으며, 이로 인해 특정 세력과의 관계에 여러 층위가 공존하는 다층적 면모를 지녔음을 밝혔다.
 

나오며: ‘4~6세기’ 고구려 ‘국제관계’사를 위하여

 
‘나의 학위논문을 말한다’라는 글의 취지에 맞게 논문에 관한 이야기를 작성해보았지만 여전히 보완해야 할 점도 적지 않다. 먼저 검토 시기의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4~6세기를 시간적 범주로 설정하였다. 변화가 시작된 3세기 후반, 특히 西晉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였다. 한편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준비하였던 6세기 후반에 대한 탐색도 불충분하다.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었을 때 ‘4~6세기’ 동아시아 사회 속에서 추진된 고구려 국제관계의 특징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음으로 검토 대상의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요동을 매개로 접근하다보니 江南과 華北에 거점을 두었던 중원왕조, 그리고 초원 세력과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시기 고구려와 공존하였던 백제·신라를 포함해 肅愼(挹婁)·扶餘 등과의 관계는 거의 다뤄지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의 ‘국제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보완도 필요하다. 지금부터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남겨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