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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①] 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①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5.03 BoardLang.text_hits 1,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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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4월(통권 50호)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1
박우현(근대사분과)들어가며근대 이후를 이전과 가장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이기심’과 ‘이익 추구’의 긍정, 경제적 ‘유용성’에 근거한 통치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이해방식이 이러한 관념을 근거로 자리잡았다. 스코틀랜드 학파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정부와의 시원적 계약이 존중해야 할 의무인 까닭은 모든 약속에 내재하는 도덕적 강제여서가 아니라, 거기서 발견되는 이익 때문이라고 주장했을 때부터 근대는 이익 추구라는 벽돌이 쌓아 올린 성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윤극대화’는 그 어떤 도덕에도 앞서는 절대선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나라나 지역마다 형태는 달랐지만, 근대 이전에는 절대자나 나름의 윤리에 의지해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관념이 인간의 삶을 규정했다는 점이 큰 틀에서의 공통점이다. 이와 달리 근대는 ‘근면’과 ‘성실’로 포장한 ‘이기심’과 경제적 ‘유용성’이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통치를 조직한다. 정치도 사회도 시장과 기업을 돕는 일이 중요한 업무이자 의무가 되었고, 시장과 기업의 언어 및 사고로 말하고 이해하는 것은 보편이 되었다. ‘유용성’으로 변신한 우리의 욕망은 금기가 아니라 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앙받았다.
우리도 똑같다. 내가 어떤 직업, 어떤 정치적 입장,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결국 연봉이 얼마고, 어느 동네에 살아야 하고, 아파트를 사야 하며,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등 욕망에 관한 것들이다. 나만 돌아봐도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전 세계가 연결된 이 체제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자각한다. 도덕이 아닌 욕망을 매개로 얽히고설킨 사슬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근대를 연구하는 것은 ‘이익 추구’를 긍정하는 경제적 ‘유용성’에 기반한 자본주의 분석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자본주의라는 말뜻 그대로 돈이 근본인 사회 아닌가?
물론, 욕망의 근대가 깊어질수록 노골적인 이윤극대화가 많은 폐해를 만들어 냈고 무한한 지지는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이윤극대화를 위한 이기심의 긍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체제를 지탱하는 자본주의는 공고하다. 단지 ‘유용성’을 매개로 한 이기심의 긍정이 숨어들거나, 변신했을 뿐이다. 오히려 내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우리 지역, 우리 민족, 우리 국가에 유용하다는 식으로 깊숙하게 숨어들어 갔다. 한때 일제시기 연구에서 공공성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식민지 근대의 사건들도 결국 공(公)이라는 외피에 스며들어간 이윤극대화의 모습이었다. 제국이 허용한 공간에서 근대의 전형인 사익을 추구하는 행동들이 제국의 식민 지배라는 구조에 균열 혹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 이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윤을 계산해 ‘유용성’을 판단하는 방식 즉, 비용-편익을 산정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며, 국가마다 다르다. 하물며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근대를 살아갔던 구성원들의 이윤극대화도 개인과 권력의 입장에 따라 달랐고, 정당화하는 방식도 달랐다. 단순히 개인의 사익 추구뿐 아니라 제국 단위, 식민지 단위에서도 자신의 이윤극대화를 정당화하며 공공의 가치로 포장했다. 그리고 충돌하고 갈등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욕망을 끄집어내 이윤극대화를 실현함에 거리낌이 없는 시대를 분석하는 것. 이것이 근대사 연구, 나아가 식민지 연구의 시작 혹은 밑바닥 아닐까? 모두가 떠나도 누군가는 밑바닥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식민지 근대를 살아갔던 다양한 사람과 권력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투영된 집합체가 철도다. 철도가 제공한 교통의 급격한 확대는 식민지에서 이윤극대화를 꿈꿨던 제국주의자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이 철도를 매개로 극대화하려 했던 이윤은 상황에 따라 경제적 이윤이기도 했고 정치·군사적 이윤이기도 했다. 형태가 달라도 모두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근대를 살아가야 했던 식민지의 구성원들에게도 철도는 경계 대상에서 이윤극대화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인식되어 갔다. 지역의 이익이든, 조선의 이익이든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었지만, 철도에 개인과 집단의 욕망을 투영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 때문에 철도는 다양한 집단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매개체였다. 갈등은 마을과 마을 단위에서도 일어났고, 중앙과 지역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나아가 식민지에서는 식민본국인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관계가 강고한 지배권력으로 자리하며 식민지의 근대적 욕망을 억제하기도 하고 조장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관계도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각기 다른 욕망을 자신의 식민지 철도에 투영했다.
앞으로의 연재는 일제시기 다양한 세력이 철도에 투영한 근대의 욕망을 각기 다른 층위에서 살펴볼 것이다. 지역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는 작업, 식민본국과 식민지의 이해 충돌, 제국별로 식민지 철도에 투영한 욕망의 차이 등을 천천히 살펴보겠다. 이윤추구를 무기이자 미덕으로 체득한 근대가 식민지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 철도를 통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는 지역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는 작업을 위해 경상북도 문경에 주목한다.
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①1. “마차에 실을 정도 물자가 필요할지 걱정했습니다”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경상북도가 시작하는 곳인 문경새재IC로 빠지면, 문경읍에 이른다. 그런데 문경읍에 이르러도 문경시청은 찾을 수 없다. 시의 명칭과 같은 읍이라면 시청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경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문경시청은 어디에 있을까?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경새재IC에서 15㎞ 정도 남쪽으로 더 내려가 점촌함창IC로 빠져 점촌동에 이르면 문경시청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은 문경(聞慶)으로 불렸지만, 1986년에서 1995년까지는 점촌이 문경군과 분리되어 점촌시로 독립하기도 했었다.1) 그만큼 점촌이라는 지명은 한때 문경을 대체할 정도였다. 내 어머니도 친척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데 항상 점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 점촌과 문경은 아예 다른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점촌은 이 지역을 통할하던 군(郡)의 명칭인 문경과 비등한 위상을 갖게 되었을까? 심지어 점촌이라는 지명은 일제시기까지의 문경군 호서남면(戶西南面) 점촌리(店村里)에서 유래했다. 호서남면 내에서도 점촌리는 영남대로의 역참인 유곡역(幽谷驛)이 있었던 유곡리와 비교해 한적하기 그지없던 곳이었다. 그림 2의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 1918년 경상북도 전도에서도 유곡리와 달리 지명이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경상북도 선산군 사례처럼 면이었던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선산읍을 관할하는 구미시로 역전되는 경우2)는 발견되지만, 리의 명칭이 면을 넘어 군·시 단위로 승격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림 1 문경읍과 문경시청의 현재 지도
그림 2 : 1918년 현재 문경군 지도(점촌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출전 :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慶尙北道》, 1918(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흔히 이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해방 이후 문경 지역 탄광 개발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1에서 보이는 문경시 내부를 연결하던 철도(문경선, 가은선)와 탄광의 성쇠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문경선, 가은선의 최초 개통 등 부분적인 사실에 오류가 있지만, 은성광업소 종사자들의 구술이 사료로 수집될 만큼 탄광의 성쇠가 이 지역의 발자취를 상징하는 부분임은 틀림없다.3)
하지만 해방 이후 탄광 개발의 역사가 문경읍이 아닌 점촌리에 설치된 문경시청, 한때 문경군과 독립된 점촌시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탄광은 오히려 문경읍 가까이에 더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 두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는 문경시 문경읍과 점촌동의 문경시청에는 어떤 역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최초의 종관철도 경부선의 노선 선정 과정과 일제의 1등도로 부설 과정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제는 경부선의 노선 선정 초기부터 전통적인 교통로였던 문경을 배제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까지 영남과 한양을 오가던 영남대로의 주요 기점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러일전쟁과 만주침략을 염원하고 있었던 일본 내 육군 세력이 주도하던 경부선 부설이었기에 신속하고 효율적인 철도망 건설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기존의 교통 중심지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텐데 문경은 배제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조선철도 1천마일 축하연’을 기념해 최초로 간행했던 《조선철도사》에는 이후 철도국이 펴낸 철도사 판본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경부선 부설 당시 답사노선이 그려져 있다. 그림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제는 1차 답사 단계부터 문경새재를 지나는 전통적 교통로를 배제했다.
그림 : 붉은색 표시가 경부선 조사경로들이다
출처 : 朝鮮總督府鐵道局, 《朝鮮鐵道史》, 朝鮮總督府鐵道局, 1915.
“이 답사는 수개월을 들여 명세도 및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를 통해 선정된 노선은 부산에서 부산진을 거쳐 낙동강의 좌안(左岸)으로 올라가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문의, 청주를 거쳐 경성 숭례문(남대문)에 달하는 코스로 총 거리는 240마일(약 386㎞)에 달했다. 당시 경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는 3개가 존재했다. 첫 번째 도로는 동로(東路)라 칭했는데 경성에서 충주, 안동, 의성, 경주, 울산을 거쳐 부산에 도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도로는 동로의 충주에서 분기해 문경, 상주, 대구 밀양을 통과하는 것으로 이를 중로(中路)라고 칭했다. 세 번째 도로는 서로(西路)라 칭했으며, 청주, 영동, 금산, 성주, 현풍을 거쳐 창원으로 나와 김해를 통과해 부산으로 들어가는 노선이었다.
답사를 준비하면서 먼저 이 세 도로가 통과하는 지방의 상황을 연구했다. (중략) 중로 역시 충주와 상주 사이에 있는 조령의 지형이 험준해 철도를 통과시키기에는 어려우나, 상주 이남은 지세가 대체로 평탄했다.”4)
1915년판 《조선철도사》에는 이유도 서술되어 있다. 1차 답사를 앞둔 시기 총독부의 판단이 인용문에 들어 있다. 이유는 충주-문경-상주 구간에 속했던 조령의 험준함이었다. 터널 기술력의 한계뿐 아니라 비용 부담이 컸고, 무엇보다 러일전쟁 이후 곧바로 만주 침략을 노렸던 일본 내 육군 세력은 원활한 군사수송을 위한 한반도 종관철도망의 빠른 완공이 필요했다. 근대 이전 교통의 중심지였던 영남대로의 문경새재는 철도로 대체되는 변화 속에서 전통적인 교통 중심지라는 위상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지점에서 근대교통이 드러내는 이전과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도보와 우마차 중심의 전통시대 교통로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장애물에 인간이 맞춰갔다. 산을 오르고, 그중에서 비교적 평탄한 구간을 찾아 걸어서 길을 만들었다. 인간을 자연에 적응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 즉 나의 욕망이 중심이다. 근대교통 역시 자연을 인간에게 적응시키는 방식이었다. 자연이 인간을 방해하면 터널을 뚫는 등의 방식으로 자연을 개조하였다.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이 아닌 환경을 파괴해 인간에게 환경이 적응하도록 하는 방식은 비단 교통에만 한정된 근대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문경을 대신해 경부선 철도역이 설치된 지역은 문경군 남쪽에 있는 김천군(金泉郡)이었다. 김천은 원래 김산군(金山郡)의 한 면이었는데, 경부선 철도역이 김천면에 들어오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통폐합된 군의 이름으로 김천을 사용하게 되었다. 당국은 변경 이유를 ‘정치 및 상거래의 착오를 줄이게 되는 편익’으로 설명했다. 결국 철도역이 생기며 김천면 지역이 군의 중심지로 변모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었다.5)
철도역이 들어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수치는 역시 인구 변화다. 그런데 1910년대와 20년대의 총인구 변화를 보면 현격한 차이를 찾기 어렵다. 개편 이후 김천군은 이전의 김산군, 개령군(開寧郡), 지례군(知禮郡)과 성주군 신곡면(薪谷面)을 통폐합해 만들어진 군이었다.6) 김천면을 포함한 김산군의 인구는 44,878명으로 철도 개통 이후 8년여가 지났지만, 문경군 전체 인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증가세를 보이진 않았다.
행정구역 개편 이후 김천군 전체를 보면 1913년 8월 1일 현재 인구는 102,260명, 문경군은 68,860명이었다. 1923년 12월 말 김천군과 문경군의 인구는 각각 126,789명, 83,370명으로 1913년과 비교하면 각기 24.0%, 21.1% 증가했다. 그다지 큰 차이가 확인되지 않는다. 철도역 설치와 인구 증가는 관계가 없을까? 핵심은 일본인 인구 변화에 있다. 1923년 12월 말 일본인 인구는 김천군 558호 1,978명, 문경군 96호 252명이었다.7) 총인구의 격차가 1.5배인데, 일본인 인구의 격차는 7.8배나 되었다. 실제로 1917년, 1918년에는 9.3배, 1919년 9.6배, 1920년 6.5배로 큰 격차를 유지했다.8) 김천역 설치 이후 김천은 대구, 포항, 경주와 함께 경상북도에서 대표적인 일본인 밀집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9)
문경은 어떠했을까? 문경은 1900년대 후반 의병운동이 활발해 그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상주로 도망친 일도 있었다.10) 그만큼 일본인의 거주가 적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935년 대구의 지역신문이었던 《조선민보》에 보도된 회고담은 1910년대 문경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1916년 경성 부산 간 도로가 점점 완성될 때 데라우치 총독이 지나간다고 해 자동차를 구경한다고 시골에서 많은 사람이 모일 정도의 민도였습니다. (중략) 당시에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따라다녔습니다. 물산도 없어서 지게를 이용해 잡화 식료품 등을 김천에서 가져왔습니다. 마차를 운행했지만 마차에 실을 정도 물자가 필요할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 교통이 넓혀지면서 물자도 점차 늘어나고 금일의 성행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내지인(일본인)은 30호 정도 있었습니다. 학교조합을 만들려고 했는데 1915년에 10명의 일본인 학생이 없어서 설립인가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1917년 12월 말 통계에 따르면 문경군의 일본인 호수는 81호11)이고, 1916년 7월 6일 자 기사에 문경군 문경면의 일본인은 65호에 196명12)이었다고 하니, 일본인이 30호 정도 있었다는 회고가 정확히 어느 시기를 언급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10년대 문경에는 일본인이 극히 적었고, 물자 유통에 대한 수요가 적었고 자연스레 근대적 교통수단이 생소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2. 유곡과 문경, 영남대로를 답습한 1등도로경부선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고 해서 문경이 식민지 근대의 교통망과 전혀 관계없는 섬처럼 존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제국주의 시대 통치의 지배와 통치의 공간적 범위는 식민본국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다. 비록 제국별로 식민지에서 원하는 바가 달랐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윤극대화를 노린다는 점은 공통점이었다.13) 막대한 초기비용을 자랑하는 철도를 한꺼번에 부설하기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은 방식이 대체·보완할 필요가 있다.
문경에도 철도의 대체재가 도입되는데 흔히 ‘신작로’라고 불렸던 근대도로의 부설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11년 8월에 시작한 제1기 치도공사의 대상 노선 중 가장 중요했던 경성-부산 간 1등도로가 충주에서 이화령을 넘어 문경을 거쳐 남하해 상주에 이르는 노선이었기 때문이다.14) 근대도로 부설도 영남대로의 관문이었던 조령은 산세가 험준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고 조령 남쪽의 이화령을 지나게 되었다.
경성-부산 1등도로의 제1기 치도공사 계획은 경성에서 대구까지 완공하는 것이었다.15) 공사 과정을 살펴보면 1912년 12월까지 문경을 포함하는 충주-상주 구간은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며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대구-상주 구간 등과 함께 1914년에 착수해 1915년 준공 예정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1914년 3월 충주-상주 구간 공사가 13개 노선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후 공사 상황을 추적하면 1915년 5월 시점에는 충주부터 문경 남쪽 경계에서 2.4㎞ 정도 떨어진 상주군 함창면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함창면 남쪽 상주군 낙동면, 1916년 7월에는 김천까지 완공되었다. 1917년 7월에는 상주군 남쪽 칠곡군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16)
도로망의 시야를 문경으로 좀 더 좁혀보겠다. 경성-부산 간 1등도로는 문경의 어떤 지역을 연결했을까? 1918년부터 문경을 지나가며 운행한 것으로 보이는 승합자동차 노선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18년 3월 대구에서 활동했던 재조일본인 자본가 이토 기치사부로(伊藤吉三郞)는 대구-다부원-낙동-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는 자동차 운송업을 개시했다.17)
대구-충주 간 자동차 영업은 25일부터 개시되는데 정류장은 칠곡, 다부원, 장천, 해평, 도개 낙동 성동리 상주 함창 유곡 문경 연풍 온천리로 46리에 달하고 8시간이면 도착한다. 자동차 발착시간은 아래와 같다.
대구 출발 오전 7시, 충주 도착 오후 3시
충주 출발 오전 7시, 대구 도착 오후 3시18)
13개 정류장을 통해 경성-부산 간 1등 도로 중 경상북도의 주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와 충주의 지명을 따 구충자동차는 대구에서 충주까지 8시간이 걸리는 승합차 영업을 하는 동안 칠곡군의 칠곡, 다부원, 선산군(현재 구미)의 장천, 해평, 도개, 상주군의 낙동, 성동리, 상주, 함창, 문경군의 유곡, 문경, 괴산군의 연풍, 온천리 정류장에 정차했다.
문경군만 살펴보면 유곡과 문경 2곳에 정차하였다. 이를 통해 문경 내에 경성-부산 간 1등도로가 지나던 핵심 지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 1915년에 측량한 지도에 보이는 문경에서 이화령까지의 1등도로
출처 :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朝鮮五万分一地形圖[15-2-16] : 聞慶(榮州十六號)》, 朝鮮總督府, 1918.
그림 5 : 1915년에 측량한 지도에 보이는 함창에서 유곡까지 1등도로
출처 :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朝鮮五万分一地形圖[17-3-13] : 咸昌(尙州十三號)》, 1918.
그림 4와 그림 5는 1915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작성한 지도다. 1등도로가 남쪽부터 보면 상주군 함창면을 거쳐 문경군 호서남면 유곡리를 지나 문경군의 중심지였던 서쪽으로 뻗어가 이화령은 넘어 괴산군으로 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점촌은 1등도로 건설과는 관련이 없었다.
1등도로를 면 단위로 본다면 점촌리와 같은 호서남면에서는 유곡리를 지났고, 승합자동차도 유곡에 정류장을 두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곡리에는 조선시대까지 전통적 교통망이었던 역(驛)이 있었다. 유곡역이라는 명칭도 고려시대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이며, 유곡도는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구성하는 주요 6개도의 하나였다. 게다가 유곡역은 영남지역 72개 고을의 교통량이 집중되는 역으로 한강 남쪽 양재와 함께 영남대로에서 가장 중요한 역도로 꼽히던 곳이었다.19)
자연스레 유곡리는 경상북도 서북부 교통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때문에 호서남면의 장시도 유곡리에서 열렸다.20) 단순히 면의 중심지라는 수준을 넘어서는 위상이었다. 이러한 점은 문경에 놓인 1등도로가 조선의 전통적인 교통로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방향에서 놓였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물론 기존 연구가 밝히고 있듯이 1910년대 일제가 부설한 1등도로 전반에 등장하는 특징이었다.21) 이는 대전, 신의주 등 조선시대와 다르게 새로운 일본인 중심 시가지를 형성해 지역사회의 주도권을 순식간에 변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던 철도교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림 6 : 경성-부산 간 1등도로 중 이화령 개수도로
출처 : 「京釜線梨花嶺改修道路」, 《釜山日報》, 1915.11.16.
1등도로 부설이 유일한 근대교통의 도입이었던 문경의 1910년대는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를 추동할 만한 계기가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라는 조건이 지역에 끼칠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던 외부인의 유입 즉, 일본인의 이주가 적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의 이주가 적었다는 것은 곧 자본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본의 증식을 통해 이윤극대화를 도모하는 근대적 욕망의 분출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도라는 근대교통을 매개로 유입되는 제국의 사람과 자본이 각기 다른 방식의 이윤극대화를 위해 추진할 수 있는 공통의 프로젝트가 지역철도망 유치였다. 문경을 중심으로 생각했을 때 철도 확장의 욕망은 문경 내부가 아닌, 문경과 인접한 지역이자 경부선이 지나가며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했던 김천에서 시작되었다. 동기는 대구와의 지역 유통망 주도권 경쟁이었다. 이 과정에 휘말리며 문경 역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문경과 유곡이 아닌 점촌의 시대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주>
1) 「구리시 등 11개시 설치와 군관할구역의 조정 및 금성시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3798호, 1985.12.28. 제정)」.
2) 行政硏區會 編, 《(大韓民國)地方行政區域便覽》, 彰文閣, 1963, 223쪽; 「구미시 설치 및 부산시·경상남도 간 관할구역 조정에 관한 법률(법률 제3014호, 1977.12.19. 제정)」; 「경기도 남양주시 등 33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4774호, 1994.08.03. 제정)」.
3) 《대한석탄공사 은성광업소의 “개광에서 폐광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006.
4)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史》, 1915, 94~96쪽.
5) 「府郡廢合ニ關スル件」, 《府郡廢合關係書類》(CJA0002546), 1913.08, 617쪽; 「第二号調査書 面ノ名稱 名稱ノ由來」, 《面廢合關係書類》(CJA0002552), 1913.12, 859~861쪽.
6) 이대화, 「20세기 초반 지방제도 개편의 목적과 추진과정 –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숭실사학》23, 2009, 92~101쪽.
7) 「府郡廢合ニ關スル件」, 《府郡廢合關係書類》(CJA0002546), 1913.08, 608~614쪽;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3, 48~51쪽.
8)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1923 참조.
9) 김일수, 「일제강점 전후 대구의 도시화과정과 그 성격」, 《역사문제연구》10, 2003; 최성원, 「일제강점기 포항의 도시화과정」, 《경주사학》38, 2013; 김일수, 「‘한일병합’ 이전 대구의 일본인거류민단과 식민도시화」, 《한국학논집》59, 2015.
10) 이타가키 류타, 홍종욱·이대화 역,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 –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 혜안, 2015, 130쪽.
11)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 28~29쪽.
12) 「慶北記念號, 聞慶郡の發展」, 《朝鮮時報》, 1916.07.18.
13) 박상현, 「식민주의와 동아시아 식민국가의 정치경제-통합 비교를 위한 시론」, 《사회와 역사》111, 2016.
14) 廣瀨貞三, 「一九一〇年代の道路建設と朝鮮社会」, 《朝鮮學報》164, 1997; 조병로, 「일제 식민지시기의 도로교통에 대한 연구(Ⅰ)」, 《한국민족운동사연구》59, 2009; 박우현, 「1910년대 조선사업공채 정책의 전개와 난맥상」, 《한국근현대사연구》93, 2020.
15) 경성의 광희문 외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 경기도 광주·이천을 거쳐, 장호원·충주·문경·상주에 이르는 노선이었다(「道路一部의開通 京城으로부터 長湖院ᄭᆞ지」, 《매일신보》, 1914.09.26).
16) 「國道工事進陟」, 《매일신보》, 1912.07.28; 「治道工事의 現況」, 《매일신보》, 1912.12.19; 「大正三年 土木事業(1), 道路修築工事」, 《매일신보》, 1914.03.12; 「地方視察談片」, 《釜山日報》, 1915.04.07; 「聞慶에셔 安東으로, 慶北支局 金坵生」, 《매일신보》, 1916.07.09; 「尙州, 一等道路工事」, 《朝鮮時報》, 1917.10.28.
17) 「邱忠自動車運轉」, 《朝鮮時報》, 1918.03.17; 「大邱 邱忠自動車 開始」, 《매일신보》, 1918.03.13.
18) 「邱忠自動車時刻」, 《朝鮮時報》, 1918.03.24.
19) 任世權, 《聞慶市幽谷洞地表調査報告 幽谷驛》, 安東大學校博物館, 1995, 7~13쪽; 조병로, 「朝鮮後期 幽谷驛의 經濟基盤과 財政運營-《幽谷驛誌》 및 《幽谷驛關聯古文書集》을 中心으로-」, 《사학연구》66, 2002, 89~91쪽; 崔永俊, 《한국의 옛길 嶺南大路》,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4, 146~148쪽.
20) 1922년 12월 현재 문경군 내 장시는 총 7개로 읍내시, 산양시, 농암시, 적성시, 왕릉시, 갈평시, 유곡시였다(朝鮮總督府, 《朝鮮の市場》, 1924, 92쪽).
21) 廣瀨貞三, 앞의 글, 1997, 13쪽.
<참고문헌>
《매일신보》 《釜山日報》 《朝鮮時報》 「府郡廢合ニ關スル件」, 《府郡廢合關係書類》(CJA0002546), 1913.08.
「第二号調査書 面ノ名稱 名稱ノ由來」, 《面廢合關係書類》(CJA0002552), 1913.12.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 朝鮮總督府, 《朝鮮の市場》, 1924.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史》, 1915. 行政硏區會 編, 《(大韓民國)地方行政區域便覽》, 彰文閣, 1963. 도널드 서순(유강은 옮김), 《불안한 승리-자본주의의 세계사 1860~1914》, 뿌리와이파리, 2020(Donald Sassoon, The Anxious Triumph: A Global History of Capitalism 1860-1914, Penguin Books, 2019).
이타가키 류타(홍종욱·이대화 옮김), 《한국 근대의 역사민족지 –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 혜안, 2015(板垣竜太, ????朝鮮近代の歴史民族誌????, 明石書店, 2008).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심세광·전혜리 옮김), 《새로운 세계합리성 –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22(Pierre Dardot·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ete neoliberale, La Découverte, 2010). 김일수, 「일제강점 전후 대구의 도시화과정과 그 성격」, 《역사문제연구》1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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