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4년 6월(통권 52호)
[서평]
언어학자 김수경의 민족과 과학
- 板垣竜太, 2021, 《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東京: 人文書院-
홍종욱(근대사분과)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2022년 1월 22일 일본 朝鮮史研究会 関西部会 例会에서 일본어로 발표한 내용을 풀어서 한국어 문장으로 만든 것이다. 이 서평의 일본어 축약본은 《朝鮮史研究会会報》 제228호(2022.8.31.)에 실렸다. 이 책은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푸른역사, 2024)으로 우리말 번역이 나왔지만, 이 글의 내용은 일본어판을 대상으로 하여 2022년 1월에 작성된 그대로이다. 다만 책의 인용과 그 쪽수는 한국어판을 따랐다. 발표문에는 없던 제목을 부쳤는데, 김수경의 경성제대 동기인 박시형을 다룬 필자의 논문 「역사학자 박시형의 민족과 과학」에서 따왔다.
1. ‘비판적 코리아 연구’의 궤적
저자는 2008년 《朝鮮近代の歴史民族誌―慶北尚州の植民地経験》(明石書店)을 발표했다(한국어역은 이타가키 류타 지음, 홍종욱·이대화 옮김, 《한국 근대의 역사민속지: 경북 상주의 식민지 경험》, 혜안, 2015). 경북 상주에 초점을 맞춰 근세와 근대의 연속과 단절에 유의하면서 한국의 근대와 식민지 경험을 그린 책이다.
이후 저자는 북한 연구로 방향을 잡았다. 일본 사회에서 특히 2002년 북일 간의 평양 선언 이후 식민주의와 냉전적 사고에 사로잡힌 북한 인식이 확산하는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북한 연구, 특히 지방사 연구를 시도했으나 어려움을 겪던 중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만, 현장 연구를 한 적도 없는 지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가지고 조사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역사의 이미지에 대한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 자료만 모아 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김수경이라는 존재는, 한 지역이 아니라 한 지식인의 경험을 축으로 20세기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을 내게 가져다주었다.”(33쪽).
한편 저자는 에고-도큐먼트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일찍이 ‘S씨의 일기’를 분석하여 「식민지의 우울」(《근대를 다시 읽는다 1》, 역사비평사, 2006, 수록; 《朝鮮近代の歴史民族誌》 제5장으로 수록)을 발표했고, 고려대 정병욱 님과 일기를 소재로 한 국제 공동연구로서 鄭昞旭·板垣竜太編, 《日記が語る近代―韓国・日本・ドイツの共同研究》(同志社コリア研究センター, 2014年), 板垣竜太·鄭昞旭編, 《日記からみた東アジアの冷戦》(同志社コリア研究センター, 2017年)을 발표했다(한국어 역은 정병욱·이타가키 류타 엮음,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 소명, 2013 등). 이러한 축적은 이 책에서 김수경의 수기를 분석한 제3장 「배낭 속 수첩」에서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고 부르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역 연구를 포함한 오늘날의 학문 분야를 낳은 식민주의와 냉전이라는 힘에 맞서는 비판적인 지역 연구인 ‘비판적 코리아 연구(Critical Korean Studies)’라고 말하고 싶다. 월러스틴처럼 학문 분야라는 장벽을 넘고 국민국가를 초월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거기서 중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체제 분석에 귀착되지 않고 그것이 등장했을 때의 비판적 계기를 계승하는 것, 즉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틀을 재생산하는 데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 틀을 깨트릴 지(知)의 양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타가키 류타, 「비판적 코리아 연구를 위하여: 식민주의와 냉전의 사고에 저항하여」, 《역사비평》 132, 2020.8., 235쪽)
연구년으로 캐나다를 찾은 저자는 토론토에서 우연히 김수경의 차녀를 만난다. 이 인연으로 2013년 11월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국제학술 심포지엄 〈북으로 건너간 언어학자 김수경(1918-2000)의 재조명〉이 열렸다. 심포지엄 결과는 板垣竜太・コヨンジン編, 《北に渡った言語学者·金壽卿(キム·スギョン)の再照明》(同志社コリア研究センター, 2015)으로 정리되었다.
저자는 일찍부터 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다. 책 출간 후 어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은 제 대학원 시절 데뷔 논문은 식민지 조선의 식자(識字) 문제가 주제였는데, 김수경을 조사하면서 소쉬르 언어학, 문자론 등이 차례로 나오니까 예전의 관심이 새롭게 되살아나서 즐거웠습니다.”(「ほとばしる朝鮮語への情熱, 《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著者の板垣竜太さんに聞く」, 《月刊イオ》 305, 2021.11.)
그동안 저자가 발표한 김수경에 관한 논문 및 행한 구두발표는 다음과 같다.
① 「월북학자 김수경 언어학의 국제성과 민족성」 (신주백 엮음, 《한국 근현대 인문학의 제도화: 1910~1959》, 혜안, 2014.6.)
② 「スターリン批判と北朝鮮言語学: 金壽卿の朝鮮語学を中心に」 (同志社大-延世大 第1次共同学術会議 〈冷戦とコリア学, そして大学(1960~1980年代初)〉, 同志社大学, 2015.11.21.)
③ 「해방 전후 金壽卿의 연구업적과 그 활동」 (국어학회, 인하대학교, 2016.12.17.)
④ 「言語学と政治: 北朝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言語政策における金枓奉と金壽卿の役割を中心に」 (朝鮮史研究会関西部会例会, 河合塾セルスタ(大阪), 2017.1.28.)
⑤ “Language and Family Dispersion: North Korean Linguist Kim Sugyŏng and the Korean War” (Cross-Currents 6-1, 2017.5.)
⑥ 「訓民正音創制記念日の南北間の違いをめぐって」 (《사협교또회보(社協京都会報)》 21, 2019.12.)
⑦ 「김수경과 북한의 조선어학: 보편과 특수 사이에서」 (동아시아 한국학 제1회 집중강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0.2.3.)
⑧ 「월북 지식인 김수경의 삶과 학문」 (서울대학교 동아시아비교인문학 해외 학자 온라인 초청 세미나, 2020.12.8.)
⑨ 「戦場の知識人たち: 越北言語学者·金壽卿の朝鮮戦争手記より」 (공저) (《同志社社会学研究》 25, 2021.3.)
또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김수경의 글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① 「《龍飛御天歌》にみえる挿入字母の本質:特に問題の現実性に照らして」 (《同志社コリア研究ワーキングペーパー》 1, 2021.8.6.)
② 「言語学の諸問題に関するイ·ヴェ·スターリンの労作と朝鮮言語学の課業」 (《同志社コリア研究ワーキングペーパー》 2, 2021.8.7.)
③ 「朝鮮語形態論のいくつかの基本的問題について」 (《同志社コリア研究ワーキングペーパー》 3, 2021.8.13.)
그리고 이 책에 대해서는 이미 다음과 같은 서평과 소개가 이루어졌다.
① 藤原辰史(京都大学准教授, 食農思想史), 「激動の朝鮮 天才と家族の万感―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板垣竜太〈著〉」, 《朝日新聞》 2021.9.18.
② 「言語の天才·金壽卿の人生を通じて, 日本に《離散家族》を知ってもらいたい」, 《한겨레신문》(일본어판) 2021.9.29.
③ 「ほとばしる朝鮮語への情熱, 《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著者の板垣竜太さんに聞く」, 《月刊イオ》 305, 2021.11.
④ 김병문, 「식민과 냉전의 틀을 넘어서는 ‘비판적 코리아 연구’에 공명하며」,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제6회 한국학 포럼, 2022.1.8.
⑤ 柳忠熙, 「激動の時代を生きた言語学者金壽卿の人生から日朝韓の現状を考え直す」, 《図書新聞》 3526, 2022.1.15.
3. 대위법의 구성
【관점과 방법】 이 책은 “개인을 교차점으로 한 ‘전체사’”(38쪽)를 표방한다. 저자는 “아무리 ‘평범’한 인물일지라도,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히려 폭넓은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39쪽)고 말한다. 또한 “부르디외 풍으로 말한다면, 복수의 장(champ)에 몸을 두고 있는 개인을 그려 내기 위해서는 연구자 자신이 특정한 장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안 된다”(39쪽)고 스스로 경계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 서술과 언어학 서술을 대위법적으로 배열”(43쪽)한 데 있다. 저자는 “문학 텍스트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서로 겹쳐 놓고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1998)의 ‘대위법적 독해’를 본받아, 이 책의 이러한 시도를 당분간 ‘대위법적 평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43쪽)고 밝혔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식민지의 다언어 사용자】 김수경은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 시절 학우회 회보에 기고한 글에서는 “행하기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고 적었다. 제1장은 “해방 후 김수경이 ‘행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식민지기에 그가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서술”(46쪽)했다.
김수경은 “탐욕스럽게 지식을 흡수”(47쪽)했다. ‘영어 연구회’에 참가하고 “워즈워스의 시에 탐닉했던 문학청년”(56쪽)이었다. 일반언어학에 관심을 가진 김수경은 언어학 교원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의 조언을 받아 철학과 ‘순철(순수철학)’ 코스로 진학했다. 이 코스는 졸업생의 90%가 조선인이었다.
김수경은 임화의 ‘조선문고’와 인연이 있었다.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를 번역할 계획을 세웠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1940년 4월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했다. 창씨명은 ‘야마카와 데쓰(山川哲)’였다. 1943년 3월에는 용정 출신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배운 이남재와 결혼했다. 이남재와는 경성제대 동기인 이명선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해방 후 김수경의 적극적 활동을 낳은 것은 “식민지기 김수경 자신의 지적 축적이자 울분”(79쪽)이었다.
【I. 구조와 역사: 김수경 언어학의 시작】 김수경 언어학의 초기 업적은 ①구조언어학, 나아가서는 언어철학 등 좀 더 보편적인 언어 문제에 대한 지향성, ②조선어에 관한 개별 구체적인 역사언어학에 대한 지향성, ③규범의 창출이라는 실천적인 언어학이다(87쪽). I에서는 “조선어사 연구(②)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구조언어학(①)과 교차하는 부분, 그리고 월북 후의 실천적인 활동(③)과 겹치는 부분”(87쪽)을 살폈다.
김수경의 도쿄제대 대학원에서의 연구 주제는 ‘조선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였다. 고바야시는 자신의 책 서문에 “면학의 고락을 함께한 야마카와 데쓰 군에게 나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89쪽)고 밝혔다. 김수경의 《〈로걸대〉 제 판본의 재음미》(1945)는 만년의 대조언어학 연구로 이어진다. 〈《룡비어천가》 삽입자음고〉(1947)는 ‘김수경 언어학의 개막’(103쪽)이었다. 최경봉은 이를 “구조주의 방법론을 국어 문법 연구에 적용시킨 최초의 논문”(103쪽)이라고 평가했다. 김수경은 훈민정음 연구도 진행했다.
【제2장 해방과 월북】 해방 후 김수경은 진단학회 상임위원 겸 간사를 맡았고(1945년 8월 16일), 훈민정음 반포 기념 강연회에 참가하고(동년 10월 9일), 조선산악회 주최 제주도 한라산 학술조사대에도 참가했다(1946년 2~3월).
진단학회 정기총회에서는 〈소련 아카데미를 위한 신진학도 양성〉에 대해 보고하고(1945년 12월 15일), 잡지 《인민과학》에 소련 초기 과학아카데미에 관한 프랑스어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에 게재했다(1946년). 국어문화보급회에도 참여했는데, 이 조직은 “민족주의의 과잉을 경계한 ‘비판적 조선학’”(최경봉)을 지향하며 조선어학회의 하부조직인 한글문화보급회와 대립했다. 또한 쿠랑의 번역서 《조선문화사서설》(1946년 5월)을 출간했다. 이 책 출판기념회에는 좌파 지식인들이 집결했다.
김수경은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원으로 있으며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1946년 8월 월북했다. 김수경의 선택에는 “경성제대 동기의 우정과 정치적 신념으로 맺어진 친밀한 인적 네트워크”(131쪽)가 배경에 있었다. 함께 월북한 김석형의 아내 고학인은 처 이남재와 이화여전 동기생이었다. 북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조선어문연구회(1947년 12월, 위원장 신구현)에서 활동했다. 이 연구회의 사명은 문자체계 확립, 규범문법 편찬, 사전 편찬 등이었다(138쪽). 김수경은 김두봉의 신뢰를 받았다.
【Ⅱ. 조선어의 ‘혁명’: 규범을 창출하다】 김수경은 정서법, 규범문법, 사전 편찬 등 언어 규범화 사업을 마르 학파의 이론과 연결 지었다. 마르 학파는 당시 소련 언어학의 주류였다. 김수경에 따르면 “마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서구라파 부르죠아 언어학’은 음성학·음운론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에 비해 ‘새로운 쏘베트 언어학’은 의미의 우위를 주장했다. 이 ‘어음에 대한 의미의 우위성’이야말로 조선의 제반 사업을 관통하는 원칙이 된다.”(154쪽). 김수경은 표음주의보다 ‘형태주의’를 채택했다.
Ⅱ는 〈조선어 신철자법〉(1948년 1월) 제정 과정에서 김수경의 역할을 해명함으로써 김수경의 언어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김두봉의 문자 사상과 어문 개혁에 대한 관여를 확인했다. 《조선어문법》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문법 체계의 급진적인 재편에 대해 그 근간이 되는 사상을 파악하고, 마르 학파의 언어학 가운데 김수경 등이 어떤 측면을 어떻게 적극 수용했는지를 파악했다(155쪽).
김두봉은 “발음과 표기의 관례보다 원칙적인 것, 모범이 되는 것을 ‘본’이라 불러 원칙적으로 어문 개혁을 진행해 나가려는 자세”(163쪽)을 취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의 특징은 ①두음법칙 폐기, ②절음부 도입, ③신6자모 도입이었다.
《조선어문법》(1949년 말)의 서문은 “문법의 내용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음론, 형태론 및 문장론의 세 부문으로 구분하면서도 이 세 부문의 호상 관련성과 문장론이 형태론에 대하여, 형태론이 어음론에 대하여, 각기 가지는 우위성을 특히 중요시하였다. (중략) 금후 조선어의 모든 현상은 일반언어학적 기초 위에서 고찰될 가능성을 얻게 되였다.”(194쪽)고 밝혔다.
【제3장 배낭 속의 수첩: 한국전쟁과 이산가족】 제3장은 김수경의 전쟁 수기 《오직 한마음 당을 따라 북남 7천리 (배낭 속의 수첩을 펼치며) -한 지식인의 조국해방전쟁 참전 수기(1950.8.9.~1951.3.31.)》 분석이다. 먼저 회고록의 성립 과정을 밝히고, 수기의 독특한 문체를 읽어내는 관점을 김수경 언어학의 틀을 응용하면서 제시했다. 수기에 적힌 한국전쟁 중의 김수경의 발자취(글자 그대로 걸었던 여정이기도 했다)를 풀어내었다(219쪽).
김수경은 1964년 북한에서 처음으로 《조선어 문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유일한 문학론인 〈작가의 개성과 언어〉(1964)에서는 “인민들의 생활과 혈연적 련계를 맺으며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갈 때 비로소 언어에서도 개성이 뚜렷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229쪽).
【제4장 한국전쟁기 학문체제의 개편】 제4장은 김수경이 학업을 재개하는 전시하 상황을 서술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 바깥으로 소개했고, 1952년에는 과학원이 창립되었다.
북한 언어학은 “소련을 중핵에 두면서도 한없이 이어지는 사회주의화된 민족들(세계로 열린 복수형)의 하나로서 조선 민족을 상상하고, 무수한 언어 중 하나로서의 조선어의 특질을 해명”했다. “국제적인 유대는 건국 초기 북한의 학문체제에서 큰 구동력”이 되었다(268쪽).
스탈린의 논문 〈언어학에 있어서의 맑쓰주의에 관하여〉(1950년 6월 20일)는 “언어를 계급적인 것으로 규정한 마르 학파를 비판하고, 계급을 초월하여 사용되는 전 민족적인 도구로 언어를 다시 규정”했다. 스탈린은 “공식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언어학의 ‘해방자’로 표상”되었다(273쪽). 스탈린 논문은 일본에서도 “역사학 분야에서는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등을 매개로 하여 ‘민족’론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273쪽).
【Ⅲ. 민족의 언어와 인터내셔널리즘】 Ⅲ은 스탈린이 언어학 논문을 쓴 1950년부터 1956년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비판 이전까지 시기의 김수경 언어학을 다뤘다. 김수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언어학이 스탈린 논문을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대해, 국제주의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민족적 자주’에 주목했다. 또한 문법론에서 형태론에 대한 문제 제기를 중심으로 김수경의 조선어학 재정립을 논했다. 1954년 공표된 《조선어 철자법》에도 주목했다.
【제5장 정치와 언어학】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의 영향으로 1958년 1월에 김두봉이 실각하면서 김수경도 비판을 받았다. 특히 신6자모는 비과학적(언어학적으로 틀렸다), 비인민적(인민의 문자 생활에 혼란을 초래한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339쪽). 1958년 4월에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가 발표한 논문에서 김수경은 ‘교조주의적 사고의 대표’, ‘외국의 것만 바라보는 참을 수 없는 《연구》’, ‘창조가 없는 과학’, ‘현학이나 말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았다(341쪽).
“‘말 공부’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고 나서부터는, 그의 특징이기도 했던 외국어 문헌의 적극적 참조 또한 현저히 감소했다”(346쪽)고 분석했다. Ⅳ에서는 “‘반종파 투쟁’에서 ‘말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비판받았던 폴리글롯 김수경에 의한 형태론의 기초작업”(377쪽)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다만 ‘말 공부’는 이 책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교조주의 비판에서 이미 쓰였던 상투적인 구절이었다(341쪽). 당시 북한의 사전에 따르면 ‘외국어 공부’라기보다 ‘부질없는 공담’을 의미한다고 판단된다.
《조선말사전》(과학원출판사, 1962).
김일성의 교시 〈우리 당의 언어 정책, 특히 우리 말과 글의 발달 방향과 그 연구 방향 및 그 해결 대책에 대한 강령적 교시〉(1964년 1월)에서는 문자 개혁을 반대하고, “전 세계가 공산주의화 되기까지 아직 오랜 시간이 걸리는 현 상황에서 보면 민족적인 것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성급하게 세계 공통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은 문제”(347쪽)라고 지적했다. 다른 교시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1966년)에서는 어휘의 조선 고유어화를 강조했다. 김수경은 1968년 1월 중앙도서관 사서로 좌천되었다.
【Ⅳ. ‘주체’의 조선어학】 Ⅳ는 “1956년의 ‘8월 종파 사건’으로부터 그가 학문의 장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1968년 무렵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언어학의 변화”를 다룬다. “김수경 및 조선어학을 주축으로 한 ‘주체화’ 과정의 사례 연구”라고 할 수 있다(367쪽).
‘토’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정한 형태소를 부가함으로써 문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조선어를 포함한 교착어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370쪽)이다. “‘일반’과 ‘특수’의 관계는 소련 중심의 인터내셔널리즘과 각지의 민족-국가와의 관계와도 어딘지 모르게 닮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일반’의 일부로서의 ‘특수’인가, 아니면 ‘일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인가? 당시 ‘주체’라는 이름 아래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던 여러 분야의 쇄신은 총체로서 후자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371쪽)
“문법 체계 안에서 토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그것들을 어떤 용어로 개념화할 것인가가 ‘주체의 확립’이라는 견지에서 커다란 문제”(371쪽)였다. 김수경은 1956년 논문에서 ‘토’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했다(375쪽).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의 문법 개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중심에 놓고 문법서의 편성도 조선어의 특성에 맞춘 ‘주체’적인 것이 되었다.”(377쪽).
김수경은 《조선어 문체론》(1964)을 내었다. 전전부터 문체론의 일인자였던 고바야시 히데오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383쪽). 김수경은 “‘대중이 원하는 글’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이상적인 문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언어학적 지식을 총동원”(386쪽)하고자 했다. “작가의 개성을 규범적인 문체의 틀에 끼워 넣어 소거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작가 개인의 위대한 창조성에 귀속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민적이기 때문에 개성적이 된다고 하는 논리로써 적극 옹호했던 것이다.”(387쪽)
“형식적에서의 김일성주의, 내용에서의 스탈린주의”(400쪽)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견인성’과 ‘민족적 자주성’이라는 스탈린의 논문에서 추출된 핵심적인 키워드를 그대로 살리면서, 그것을 새로이 ‘주체성’과 병치한 것이다.”(401쪽)
【제6장 재회와 복권】 김수경은 1986년부터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다가 1988년 차녀와 베이징에서 재회한다. 후지와라 다쓰시는 서평에서 “절정은 제6장. 저자는 여기서 김수경 아내와 딸을 인터뷰하고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까지 역사 서술을 여성들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슬픔, 한, 변명, 체념, 기쁨. 겹겹이 쌓인 역사 서술은 압권이었다.”고 밝혔다(藤原辰史, 「激動の朝鮮 天才と家族の万感―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板垣竜太〈著〉」, 《朝日新聞》 2021.9.18.).
김수경은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1989년 5월)을 발표했다. “이기문 등 한국의 연구자들에 의한 조선어 계통론, 특히 고구려어와 신라어를 상이한 언어라고 주장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453쪽) 김수경은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민족자주의식’을 가지고 ‘민족어의 통일적 발달’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두개 조선’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자주통일’을 지향하는 조선어학의 구축을 호소”했다(455쪽). 역사학자 김석형은 같은 출판사에서 《조선민족, 국가와 문화의 시원》(1990)을 간행했다. 김석형 역시 ‘두 개의 조선’론을 비판했다(456쪽).
4. 김수경 언어학 및 북한 학술 비판
이 책은 북한 사회 및 학문에 대한 ‘내재적 이해’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수경의 언어학과 북한의 학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이 책의 대위법에 ‘북한 역사학’이라는 또 하나의 선율을 집어넣어 생각해보고 싶다.
1) 과학적 조선연구와 ‘주체’
김수경 언어학은 20세기 한국 지식인의 1930년대 조선연구에서 시작되는 주체 형성의 기도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으로 대표되는 조선연구 흐름은 해방 후 내재적 발전론으로 이어졌다. 과학적 조선연구는 보편적 발전법칙이 관통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 극단에 주체사상이 존재한 것도 사실이다.(졸고, 「白南雲―普遍としての〈民族=主体〉―」, 《講座 東アジアの知識人4》, 有志舎, 2014)
김수경 언어학은 동시대 조선연구의 궤적과 겹친다. 김수경은 “개별 언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언어학에 관심”(59쪽)을 가졌다. “여러 언어에 두루 걸쳐 있는 일반언어학의 세계가 출구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세계를 개척하는 것으로 비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 보이’가 동시에 ‘소쉬르 보이’로도 될 수 있었던 동인은 아닐까”(60쪽).
1930년대 조선연구의 장에서 김수경은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관심을 가지는 ‘마르크스 보이’=‘소쉬르 보이’였다. 김수경은 1939년 가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대표하는 작가였던 림화(다만 이미 전향 후였다)와 동기생 신구현의 권유로 조선의 문헌을 정리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대저 《조선 서지(Bibliographie coreenne)》(1984~96)의 번역에 착수”했다. “림화가 주도했던 문고본 시리즈 ‘조선문고’(학예사) 중 한권으로 출간할 예정”(63쪽)이었다.
쓰루조노 유타카(鶴園裕)는 당시 ‘조선학’ 운동을 ‘통일전선적인 학문운동’으로 평가했다(鶴園裕, 「近代朝鮮における国学の形成―《朝鮮学》を中心に」, 《朝鮮史研究会論文集》 35, 1997.10.). 전시체제기 임화의 실천도 조선 지식인의 일종의 ‘공동전선’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찍이 임화는 조선연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전시기에 들어서 1930년대 조선연구를 ‘이식성과 국제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재평가했다. 스스로도 출판사를 설립해 ‘조선문고’를 기획하여 조선의 전통과 문화의 체계화에 힘을 쏟았다. 해방 후 임화는 전시기의 문학을 돌아보며 조선인 사이에 ‘조선어’, ‘예술성’, ‘합리정신’을 지키기 위한 ‘공동전선’이 존재했다고 회고했다.”(졸저, 《戦時期朝鮮の転向者たち―帝国/植民地の統合と亀裂―》, 有志舎, 2011, 233쪽)
김수경은 해방 직후 진단학회에서 활약했다. 김수경은 “‘비과학적 민족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세계 언어학으로 이어지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조선 언어학’을 지향”했고, “좌파가 아닌 이희승과 이숭녕 같은 실증적인 언어학자와도 연구 활동을 함께”했다(124쪽). ‘과학적 조선연구’라는 틀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실증적 연구는 함께 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한국 학계에서는 통일전선의 기운이 높았다. 좌우파를 망라한 학술원이 성립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진단학회를 높이 평가했다(졸저, 《戦時期朝鮮の転向者たち》, 193쪽).
마르 언어학은 “모든 언어가 일원적으로 발생하고 동일한 단계적 변화에 의해 발전한다는, 언어의 일원적 발전 단계론”(203쪽)이었다. “‘국제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르 학파의 이론이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비인도유럽어계의 언어를 가진 민족들에게 매력적이었음은 틀림 없다.”(204쪽) 마르 학파는 “공시언어학을 중시하는 소쉬르의 언어이론과 구조언어학을 언어 발전 법칙이 없는 비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부르주아 언어학이라고 비판”(205쪽)했다.
김수경은 “교조주의적으로 구조언어학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스크바 음운론 학파 등을 경유하면서 북한의 현실에 맞춰 구조언어학과 소비에트 언어학의 가장 바람직한 성과를 받아들이려고” 했다(207쪽). “마르 학파의 ‘신 언어 리론’에서 조선어의 규범화 사업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언어의 상부구조론도 언어의 단일구조론도 아닌 ‘어음에 대한 의미의 우위성’”이었다(211쪽).
스탈린의 마르 언어학 비판을 받아들여 김수경 언어학도 변화해야 했다. “마르 학파는 언어를 계급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언어의 사적 유물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언어를 하나의 사회에서 계급을 넘어서 사용되는 전 인민(민족)적인 도구라고 정식화했다. 상부구조처럼 경제적 토대에 종속되어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287쪽)
김수경은 스탈린 논문에서 ‘언어의 민족적 자주성’이라는 논점을 추출했다. 김수경이 강조한 것은 조선어 역사에서 “언어 발달의 내적 법칙의 탐구”였다. 내적 법칙이야말로 “언어의 민족적 자주성의 토대”라고 판단한 것이다(288쪽).
초급중학교 《조선어 문법》(1954) 서문에서는 “조선어는 세계의 모든 언어 가운데서 가장 견인성이 강하고, 자기의 민족적 자주성을 고수하여 온 언어들 중의 하나”이며 “조선어는 전체 조선 인민에 대하여 공통적이며 단일한 전인민적 언어”라고 밝혔다(291쪽). 김수경은 “‘일반언어학’에 기초를 두면서도 조선어의 ‘고유성’을 해명”하고자 했다(298쪽). 그러나 “1950년대 말 이후의 북한에서 급속히 진행된 주체의 강조에 따라 이러한 ‘고유성’이 추출되는 기초가 되었던 ‘일반성’은 점차 소거되고, ‘민족적 자주’가 그 자체로서 확립”되어 갔다(314쪽).
여기서 스탈린의 마르 언어학 비판과 같은 스탈린에 의한 포크로프스키 역사학 비판의 상동성을 확인해 보자. 포크로프스키(M. N. Pokrovsky)는 10월 혁명 이후 소련을 대표하는 역사가였다. 그는 정해진 구도와 이론적인 틀을 중시하여, 모든 역사를 상업자본의 발전 및 계급투쟁 이론을 가지고 결정론적으로 해석했다. 또한 원로 역사학자의 연구에 극히 비판적이어서 공립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대학 역사학부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1930년대 스탈린은 포크로프스키의 추상적이고 사회학적인 도식을 비판하고 러시아 민족주의와 소련 애국주의를 강조했다. 그리고 1934년 모스크바 대학과 레닌그라드 대학의 역사학부를 부활시켰다. 스탈린의 포크로프스키 역사학 비판은 ‘국민사’ 구축을 지향한 것이다. 1938년 스탈린주의 역사학의 결정판인 《볼셰비키 당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 제4장 제2절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은 원시 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5단계 발전론을 제시했다.(立石洋子, 《国民統合と歴史学: スターリン期ソ連における「国民史」論争》, 学術出版会, 2011; 졸고, 「북한 역사학 형성에 소련 역사학이 미친 영향」, 《人文論叢》 77-3, 2020.8.)
북한 역사학에서도 교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김석형이 쓴 《력사과학》 1958년 제1호 서문에서는, 연안파 지도자이자 역사학자인 최창익과 ‘그의 졸개’ 이청원을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이칭원에 대해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저서를 주석 없이 중복 인용하고 ‘중국’이라는 말을 ‘조선’으로 바꾼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력사과학》 1960년 제4호 권두언 「8·15 해방 후 조선 력사학계가 걸어온 길」에서는 최창익과 이청원에 대해 “우리 조국 력사 문화에 대하여 경시”하고 “맑스-레닌주의 명제들을 통째로 우리 력사를 서술하는 데 옮겨” 놓았다고 지적했다. ‘교조주의적 편향’에 더해 ‘반 력사주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졸고, 「북한 역사학 형성에 소련 역사학이 미친 영향」, 《人文論叢》 77-3, 2020.8.)
북한 학문은 보편과 특수의 결합으로서의 〈민족=주체〉를 추구했으나, 점차 보편보다 특수를 강조하게 된다. 김수경이 만년에 집필한 《세나라시기 언어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1989)에 이르는 여정은 20세기 한국 지식인의 조선 연구, 한국 연구와 궤를 같이한다. 고대사학자 손영종은 「조선 민족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 민족」(《력사과학》 1994-4)에서 삼국의 언어는 같았다고 말했다. 김수경의 연구를 의식한 언급이었다.
2) 학문과 정치, 언어학과 민주주의
북한 건국과 언어학 및 역사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조선어문연구회(1947)는 ①문자체계 확립, ② 규범문법 편찬, ③사전 편찬을 내걸었다. 조선력사편찬위원회(1947)의 기본방침은 “일본식 사학 및 그 영향의 잔재를 일소하는 동시에 서구학자들의 동양사에 관한 부르죠아적 견해와 편견적인 방법의 영향을 절대로 배제할 것”을 천명하고, “편찬의 대상은 원시민족사회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조선력사의 발전의 전과정이며, 편찬의 기본내용은 사회적 생산기구 급 성격의 생성발전 및 전변관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졸고, 「반(反)식민주의 역사학에서 반(反)역사학으로: 동아시아의 ‘전후(戰後) 역사학’과 북한의 역사 서술」, 《역사문제연구》 31, 2014.4.). 조선어문연구회와 조선력사편찬위원회는 나란히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1950)를 거쳐 ‘과학원’(1952)으로 흡수되었다. 건국 과정에서 조선어와 조선사가 핵심적 이데올로기로서 중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규범화·형태주의 지향과 민중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자. “김두봉은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데가 많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발전을 앞두고 하였다기보다도 현상에 따라간 것 같습니다”, ‘통일안’은 부분적으로 관습적인 용법에 타협하고 있다, 어느 최종 목표를 향한 ‘발전’을 염두에 둔 철자 원칙을 정하여 개혁해야 한다는 등 문제점을 총괄적으로 지적했다.”(160쪽) 신남철, 홍기문 등 마르크스주의자도 조선어학회의 표기법이 민중 노선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최경봉, 《한글 민주주의》, 책과 함께, 2012, 78쪽).
이러한 인식이 북한의 급진적인 언어 규범화 정책을 낳았다. 〈조선어 신철자법〉(1948)은 ①두음법칙 폐기, ②절음부 도입, ③신6자모 도입, 그리고 풀어쓰기를 지향했다. “불필요해진 한자어는 조선어 사전에서 삭제하고 한자어 사전에만 올려 함부로 새 말을 만들지 않도록 통제”(348쪽)하려는 ‘통제 사전’이라는 발상도 등장했다. 현대 조선어의 ‘통제 사전’은 ‘주체성 있는 사전’ 유형으로 여겨졌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9)에 묘사된 가상의 언어, ‘뉴스피크(Newspeak)’를 떠올리게 된다. ‘뉴스피크’는 “작품 속 전체주의 체제 국가가 실제 영어를 바탕으로 만든 새로운 영어이다. 그 목적은 국민의 어휘와 사고를 제한하고 당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사상을 생각할 수 없도록 하여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일본어 위키백과)
언어는 결국 민중의 선택이다. 최경봉은 “편리성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의 몫이며, 어문 정책은 대중의 요구를 반영해서 발전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최경봉, 《한글 민주주의》, 16쪽). 1954년 9월 〈조선어 철자법〉에서 신6자모 도입은 보류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한글 간소화 방안〉(1954)을 둘러싸고 이른바 ‘한글 파동’이 벌어졌다. 북쪽의 언어 정책이 급진적이었다면, 남쪽의 그것은 퇴행적이었다. 둘다 민중의 선택과는 거리가 있었다.
근대 학문으로서의 언어학과 역사학은 민중의 몰주체화를 낳았다. 역사학에서 경제 결정론 및 사적 유물론 비판은 주체 사관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주체 사관은 인민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봤지만 끝내 수령의 ‘영도(領導)’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역사는 발전법칙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수령의 지배하에 놓였다. 김정일은 “인민대중은 력사의 창조자이지만 옳은 지도에 의하여서만 사회력사 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탄생 70돐 기념 전국 주체사상 토론회에 보낸 론문」(1982.3.31.),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문헌집》, 조선로동당 출판사, 1992).
급진적인 언어 규범화도 민주주의와 모순된다. 역사학에서 지도되는 민중의 처지는 언어학에서 통제되는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수경은 “언어학적인 ‘올바름’이 정치적인 ‘올바름’과 연결되어 조선의 ‘혁명’ 사업”(212쪽)으로 이어진다고 인식했다.
3) 북한 언어학에서 일본의 영향
김수경의 형태주의 체계화 및 이론화는 ①주시경 이래의 조선어학의 계보와 ②소련의 언어학이라는 두 가지 계보의 합류로서 설명된다(183쪽). 그렇다면 일본의 영향은 없었을까. 아니면 은폐된 것일까. 문외한이 보더라도 조선어의 세계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생각할 때 같은 교착어인 일본어, 일본어 문법은 중요한 참고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도 예컨대 “‘형태부’라는 용어는 고바야시 히데오로부터 김수경을 경유하여 북한의 언어학계로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했다(168쪽). 동화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절음부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를 생각할 때도 “일본어의 로마자 표기에서도 전전부터 마찬가지의 부호가 사용”(177쪽)되었다는 설명은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남한에서는 ‘토’ 즉 조사나 어미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었을까. 북한 학계와 비슷한 논란은 없었을까. “근대 일본어 문법론에서 뿌리 깊은 ‘반(反)보편문법’ 흐름”(200쪽)을 생각할 때 이런 궁금증이 더 깊어진다.
북한 학술에서 일본의 영향이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찍이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 가지무라 히데키는 북한 역사학에서 “일제 침략사의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적은 비중”인 것을 지적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파악의 방법론적 영역에서는 실로 내정불간섭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梶村秀樹, 「日本帝国主義の問題」(1977), 《梶村秀樹著作集 第2巻 朝鮮史の方法》, 明石書店, 1993, 318~320쪽). 일본의 영향은 없었다기보다 의도적으로 가려졌다고 판단된다.
5. 책의 외부, 확장하는 책
이 책은 디지털 웹 환경을 이용하여 흔들리는 책의 경계를 보여준다. 출판사인 인문서원 웹사이트에는 이 책을 위한 페이지가 있다( http://www.jimbunshoin.co.jp/book/b582005.html). 그 페이지에는 서지 및 판매 정보, ‘목차’, ‘내용 설명’, 제1쇄 정오표, 페이스북 페이지 및 색인 링크가 담겨 있다. 링크를 누르면 모두 11장으로 이루어진 PDF문서로 색인이 제공되는데, 책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색인을 보고 싶으면 출판사 웹페이지에 들러야 한다. 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저자가 소속된 도시샤대학 코리아연구센터(DOCKS)에서는 ‘코리아 문헌 데이터베이스’(KBDB, https://kbdb.info)를 운영하고 있다. 주로 저자가 수집한 북한 관련 잡지와 단행본의 목록과 일부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코리아 문헌 데이터베이스 구축에는 필자가 관여하고 있는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북한 인문학 데이터 아카이브’(NKHDA, http://dh.aks.ac.kr/~nkh/)도 일부 데이터를 제공하는 형태로 협력했다. ‘북한 인문학 데이터 아카이브’의 예컨대 이청원 위키 페이지를 보면, 하이퍼링크와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비선형적인 독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종이책에는 표, 그림, 주석, 저작목록, 연표, 참고 문헌 등 이미 텍스트를 넘어서는 혹은 보완하는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에 더해 이 책에서는 네모 상자에 넣은 보충설명, 대위법의 구성, ‘(→Ⅱ)’와 같은 일종의 하이퍼링크 등을 활용하여 종이책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그리고 넘쳐나는 부분은 웹사이트와 페이스북 계정에 담았다. 이 책은 종이책의 임계점에 육박하며 책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