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기획연재
[도시 화석을 찾아서 ①] 간판, 도시의 나이테_강성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6.28 BoardLang.text_hits 1,079 |
|
웹진 '역사랑' 2024년 6월(통권 52호)
[도시 화석을 찾아서] 도시 화석을 찾아서 1: 간판, 도시의 나이테
강성호(순천대)도시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면 오래된 것들은 없어지거나 확장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남겨진다.1)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미지의 생물과 그 생물이 생존했던 시대의 정보를 탐구하려면 화석을 살펴봐야 하듯이, 도시의 성장과 변화를 들여다보려면 '시층(時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건축 양식, 길의 형태, 머릿돌과 비석의 내용, 벽보 등 소위 '도시 화석'을 탐구해야 한다.2) 이는 마치 고고학자가 절벽의 단면을 통해 지층을 탐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글은 도시 공간의 하찮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조형물에 주목한다. 즉, 도시 화석에 해당하는 간판, 머릿돌, 맨홀 등을 통해 도시 공간의 '시층(時層)'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다만 필자는 '전남 순천'에서 지역사를 공부하며 틈나는 대로 도시 화석을 기록한 까닭에 활동 범위가 넓지 못하다. 아마도 이 시리즈는 순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필요한 부분에 다른 도시의 이야기가 나올 예정이다.
간판 이름의 다섯 가지 유형간판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가게를 알리는 옥외 광고물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간판이 있으면 무심코 그 간판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간판은 “전한다”, “장소를 표시한다”, “유도한다”의 세 가지 기능적 역할을 갖춘다. 그런데 도시 화석으로서의 간판을 읽는다는 건 상호명만을 확인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낡은 간판에서 도시의 지나간 세월을 살펴보는 데 있다. 누군가에게 낡은 간판은 '시각적 공해'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간판은 도시의 나이테나 다름없다. 그 이유는 간판 읽기가 간판이 자리한 건물과 거리의 표정과 더불어 가게가 품고 있는 기억들을 함께 읽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3) SNS로 로컬 아카이브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데, 그중에는 간판만을 수집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간판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간판은 도시의 다양성을 만드는 디자인이자 그 시대의 기술과 소재를 담은 보고이다.4)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간판 이름의 유형을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명확한 기준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간판 이름은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이 가능하다.5) 첫째, 간판은 누가 장사를 하는지를 강조한다. 예컨대, 희선미용실, 이강숙헤어라인 등 사장님의 이름이 들어간 미용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동네 병원에서도 의사의 이름이 적힌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둘째, 간판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포부를 강조한다. 믿음이용원, 소망피아노, 우정떡집 등의 간판에는 가게 사장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들어가 있다. 셋째, 간판은 주인의 소원이나 바람을 담는다. 오래된 간판들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수식어는 '소문난', '제일', '대성'이라고 한다. 넷째, 간판은 업종과 관련된 은유적인 표현을 쓴다. 맵시(옷 수선집), 옥타브(CD와 LP를 판매), 야옹아 멍멍해봐(반려동물), 가위손헤어샵(미용실) 등은 은유와 비유를 통해 어떤 가게인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유형은 이미 알고 있어 기억하기 쉬운 단어를 새긴 경우이다. 다섯째 유형은 가게가 위치한 지역 이름(지명)이나 특산품이 유명한 지역 이름(특산지) 등을 담는다. 여기에는 안성쌀, 춘천닭갈비, 포항 구룡포과메기 등이 해당한다. 사실상 이 글에서 살펴보는 간판은 다섯째 유형과 연관이 깊다. <그림1> 순천 원도심의 김이비인후과의원
<그림2> 순천 원도심의 고산의원
<그림 1>과 <그림 2>는 필자가 지역사 자료를 구하면서 구한 사진들이다. <그림 1>에 등장하는 '김이비인후과의원'은 1960년대 중후반에 문을 연 동네 병원이다. 알려지기로 '김이비인후과의원'의 원장은 김희두였다. <그림 2>는 김이비인후과의원 바로 옆에 들어선 '고산의원'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고산의원 원장 최정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다. 최정완(1900~2000) 원장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으로서 미션스쿨인 매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의사로 직업을 바꾼 인물이다. 그는 순천에서 1943년부터 1980년까지 고산의원을 운영하였다.6) <그림 1>과 <그림 2>의 촬영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1970~80년대 순천의 동네 병원 모습을 앵글로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림3> 광주 동명동의 일등석유상사
한편, <그림 3>은 광주의 원도심을 답사하면서 하나둘 찍은 사진 중 하나다. '일등석유상사'는 도시가스나 LPG가 보급되기 전 석유통을 들고 석유집에 가서 직접 기름을 받았던 시절을 증언하는 도시화석이다. <그림 3>의 '일등석유상사'는 직접 벽에 그리는 방식으로 가게 이름을 표시했다. 여기서 '일등'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업계 일등일 수 있고, 제일 먼저 석유를 판매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향토사학자 김경수 선생님의 조사에 따르면, <그림 3>의 동명동 일등석유는 1975년에 영업을 시작한 곳이다.7) 어쨌든 '일등'이라는 말 속에는 가게 주인의 욕망이 담겨있다(셋째 유형). 광주 동명동은 몇 년 전부터 '카페거리'로 알려지면서 소위 핫플레이스로 조명을 받고 있는 동네다. 광주 힙스터들의 성지인 동명동에 '일등석유상사'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간판 속의 심상지리한 도시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려면, 원도심-구도심-신도심 프레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적으로 '원도심'은 도시의 옛 중심지 또는 원래부터 내려오는 중심지를 뜻한다. 조선 시대에 읍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공간이 원도심이다. 이와 달리 '구도심'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개발된 신도시를 가리키고, '신도심'은 1970년대 이후에 등장한 신도시를 의미한다. 그런데 구도심과 신도심은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기도 하다. 1920~30년대에 '구도심'이 등장했을 때 '원도심'은 구도심으로, '구도심'은 신도심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원도심'이 아예 없거나 '구도심'과 거의 일치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읍성을 기반으로 한 원도심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는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읍성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파손되거나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러한 읍성 훼철은 전통 시대 도시의 해체를 가져왔다. 결정적인 계기는 1907년 7월 30일에 이루어진 '성벽처리위원회'의 설치였다. 이를 계기로 통감부는 전국에 걸친 읍성 훼철을 본격적으로 가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선 시대에 생활과 통치 공간의 질서라 할 수 있는 읍성들은 하나씩 사라져갔다. 재미있는 것은 간판을 통해 읍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림 4>는 광주 동명동에 있는 동문약국의 간판이다. 동명동 일대는 조선 시대에 광주읍성의 동문 밖에 있다 하여 '동밖에', '동문외리(東門外里)', '동계리(東溪里)'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림 5>는 전주의 남부시장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남부시장은 전주부성의 남문인 풍남문과 지근거리에 있다. <그림 6>은 1970년 10월 15일에 촬영된 순천의 원도심 모습이다. 순천시는 1968년에 '시기(市旗)'와 '시민헌장' 등을 만들고 10월 15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이를 계기로 순천시는 매년 10월 15일마다 '시민의 날 기념행사'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림 6>은 1970년 제3회 시민의 날을 치르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매곡동'이라는 동네를 알리는 현수막을 앞세운 퍼레이드 행렬이 원도심에서 다리를 건너 장천동으로 향하고 있는 광경을 담고 있다. 사진 왼쪽에는 수많은 가게의 간판들이 즐비해 있는데, 유독 가운데의 '남문 사진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림 7>은 순천 원도심에 있는 '남문다방'의 간판이다. <그림 6>과 <그림 7>은 가게가 순천읍성의 옛 남문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례들은 전근대 시기 도시 구조의 기반이 되었던 성문(城門)의 위치성을 나타내고 있다. 성문은 성곽의 안팎을 연결하는 출입구로서 동선의 기점이 되는 중요한 장소였다.8) 따라서 성문은 '원도심'의 도시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대부분의 읍성이 훼철된 상황에서 성문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문의 위치성을 표방한 간판은 지역주민들의 심상지리(Imaginative Geography)를 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심상지리'는 주체가 인식하고 상상하는 특정 공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심상지리는 실제 지역적 위치와 무관하게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특정 이미지로 상상하거나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간판은 도시의 성장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 기호임에 틀림이 없다. 위 사례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성곽 시설의 성문들을 간판을 통해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간판이 지역사회의 변화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매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도시의 확장 과정을 보여주는 간판들<그림 8> 순천의 금호 세탁소
또한 낡은 간판 중에는 옛날 전화번호를 간직한 경우가 있다. 전화번호는 '지역번호-국번-사번'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국번(局番)은 전화(기지)국 번호를 의미한다. 즉 국번은 전화국별로 할당된 식별 번호이다. 국번은 원래 한 자리 수였다가 전화 보급률의 확대와 함께 두 자리 수로 늘어났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국번이 두 자리 수에서 세 자리 수로 변경되었다. 현재 우리는 세 자리 수 국번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간혹 원도심을 걷다 보면 두 자리 수 국번을 간직한 간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순천 원도심에 자리한 '금호 퍼크로 크리닝’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림 8>에서 볼 수 있듯이 금호 퍼크로 크리닝의 전화번호는 국번 52와 사번 3214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순천의 기지국 번호가 '52'번이었음을 뜻한다. 필자가 소장한 《순천상공명감》은 1987년에 순천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자료인데, 금호 퍼크로 크리닝에 관한 정보가 실려있다. 《순천상공명감》에서는 금호콤퓨터세탁소로 나온다. 전화번호가 일치한 걸로 보아 동일한 가게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림 9> 전주의 역전철물상사
<그림 9>는 필자가 가족들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를 갔다가 촬영한 것이다. 이 간판 이름의 구성은 장소('역전')+상품('철물')+업종('상사')의 조어로 이루어졌다. '기차역 앞(驛前)'에서 쇠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는 기차가 지나다니는 길목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기차나 철도와 관련된 것은 없었다. 역전철물상사는 전주 영화의 거리가 시작되는 오거리 입구에 자리한 노점이었을 뿐이다. 소위 전주의 '시내'라 일컫는 객사 일대였다. 역전철물상사는 전주역까지 대략 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로도 20여 분 정도 가야 했다. 그렇다면 왜 역전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 곳에 '역전철물상사'가 있는 것일까.
실마리는 전주역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주역은 1914년에 '전주군 이동면 상생리'에 영업을 시작했다. 이때는 최초의 전라선 철도 노선으로 전주-이리 간 기찻길이 개설된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국유철도 12년 계획에 따라 전주-이리 간 노선을 매입한 후 명칭을 '경전북부선'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표준궤도 공사와 함께 전주역의 위치를 '전주군 이동면 노송동'으로 이전했다.9) 이때가 1929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현 전주시청 부지가 전주역이 1929년에 이동면 상생리에서 노송동으로 옮긴 자리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전주역은 1981년에 현재 위치인 우아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현 전주시청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지도를 펼쳐보니 아귀가 들어맞았다. 전주시청은 역전철물상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7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1981년도까지 전주시청 부지에 기차 정거장인 전주역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면 역전철물상사의 위치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이는 도시의 확장 과정에서 전주역이 외곽으로 빠져나갔기에 발생한 '어색함'이었다. 다시 말해 '역전철물상사'라는 간판은 도시의 확장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도시 화석인 것이다. 이렇게 간판은 가게를 알리는 표지판을 넘어 도시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메타포인 셈이다. 비공식 지명을 보여주는 간판들비공식 지명은 주민들이 실제 사용하고 있으나 공식화되지 않은 지명을 가리킨다. 비공식 지명은 그 지역만의 길거리 문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고 수집할 대상이다. 원래 비공식 지명은 한자(漢字)가 아닌 토박이 말로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근현대 사건을 거치며 그 지역만의 독특한 비공식 지명이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강원도 원주의 원도심에는 평행을 이루는 3개의 간선 도로가 있다. 지금은 명칭을 각각 원일로, 중앙로, 평원로로 바꾸었지만, 예전 주민들은 A도로, B도로, C도로로 불렀다. 이 도로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한국전쟁 시기에 군인들이 사용한 명칭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남 마산의 귀환 동포 마을은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고 해서 '하모니카촌'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동네별로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비공식 지명이 근현대사와 어떻게 연동되어 만들어지고 변용되었는가를 살피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순천'의 사례를 살펴보자. 순천의 비공식 지명으로는 호남 사거리, 광양 삼거리, 탱크길, 시민다리, 삽재팔동과 건구칠동 등이 있다. 그중에서 주목하고 싶은 비공식 지명은 A지구와 C지구이다. 순천은 1962년 8월 28일 새벽에 둑이 터져서 2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을 두고 지역사회는 '8·28수해 사건'이라고 부른다. 당시 군사정부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수해 복구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순천에는 'A지구'와 'C지구'라는 복구주택단지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A지구'와 'C지구'는 순천의 대표적인 비공식 지명이다. 옛날 주소록을 살피다 보면 집 주소를 'A지구'나 'C지구'로 표시한 기록을 종종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A지구는 웃장 근처, C지구는 아랫장 근처에 있다. <그림 10>과 <그림 11>은 C지구의 도시 화석이다. 그 중에서 <그림 10>은 필자가 C지구를 답사하면서 발견한 간판이다. 현재 이 건물은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없어진 상황이라서 'C지구 소주방'의 간판도 덩달아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최근에 '8·28수해 사건'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수해전시작은도서관이 만들어졌지만, 개인적으로 'C지구 소주방'만큼 이 동네의 역사를 증언하는 도시 화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 11>은 수해전시작은도서관 근처에 있는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이다. A지구와 C지구의 주소는 'O호'로 부여되었는데, 아마도 <그림 11>은 주소가 '8호'여서 팔호수퍼라고 했을 것이다(증언에 따르면 예전에는 팔호상회였다고 한다).
순천의 또 다른 비공식 지명 중 하나는 '공마당'이다. 순천향교 뒤편에 자리한 공마당은 식민지 시기까지만 해도 넓은 공터였다. 공마당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곳이 빈터라는 의미의 '공(空)마당'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다는 뜻을 지닌 '곡(穀)마당'이었다는 설이다.10) 무엇이 진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1920년 7월에 결성된 순천청년회가 군청 당국과 지역유림들을 설득하여 이곳을 '운동장'으로 만든 일이 신문 기사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순천청년회는 “운동장을 문묘(순천향교) 후원에 설치하기로 백반주선”한 결과 1923년 8월 24일에 순천향교로부터 체육 장려를 위해 목적으로 허락을 받았다.11) 이 결정은 순천의 공설운동장이 다른 지역과 달리 지역청년회가 주도하고 지역유림들이 운동장 설치에 협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2) 이후 신문 보도는 각종 체육대회가 열리는 공마당을 '청년회 운동장'으로 표현했다. 순천청년회는 공마당에서 각종 체육 대회를 열어 지역사회와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림 12> 순천 원도심 지도(1993년)
이런 점에서 <그림 12>는 지도에서 비공식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1993년에 순천문화원이 동(洞)의 마을 유래를 조사한 책에 수록된 것이다.13) 이 지도에는 비공식 지명인 '금곡사거리'와 '호남사거리'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지도에는 1964년에 이루어진 행정 개편의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 순천은 과도한 행정 규모를 줄여서 인력·재정·시설 등을 절감하고 행정 능률을 제고하기 우해 33개 동을 16개 동으로 조정했다.14) 그 결과가 <그림 12>에서 볼 수 있는 '영옥동'과 '행금동(사무소)'이다. 그런데 영옥동과 행금동은 1998년에 '향동'으로 통폐합되었다. <그림 12>는 작성 당시 순천의 행정 현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30여 년이 지나서 동네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림 1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마당'은 순천향교 뒤편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그림 13>이다. 이 사진은 1930년대 말경에 순천중학교 학생들이 공마당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야말로 '공마당'은 향교 뒤편에 있는 공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3> 1930년대 후반의 공마당 광경
<그림 14> 공마당 슈퍼
<그림 12>와 <그림 13>이 공마당의 역사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면, <그림 14>는 공마당의 도시 화석이다. 현재 공마당 슈퍼는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공마당 슈퍼의 간판은 독특하다. 풍물놀이의 상모를 연상하게 만드는 디자인이 '공'의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그림 14>가 위치한 곳은 매곡동과 옥천동을 이어주는 중간지점이다. 매곡동이 '매산등 기독교 유적지'로 유명한 곳이라면, 옥천동은 순천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옥천서원'이 있는 동네이다. 공마당 슈퍼는 교통의 요지로서 수많은 동네 주민들이 이용한 가게였을 것이다. 수년째 셔터를 잠그고 있는 공마당 슈퍼는 '지방소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상 필자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대표적인 도시 화석인 간판의 이면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정리해 봤다. 계속해서 답사를 다니다 보면 여기서 설명하지 못한 다양한 사례들을 접할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으신 분 중에는 필자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사례들을 이야기해 줄 분이 있으리라고 본다. 다만 필자는 개인적인 답사 경험을 토대로 지면을 통해 제시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아내 보았다. 아직까지 '도시 화석'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과 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시 화석에 대한 탐구는 지역사와 도시사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주제라 생각한다. 다음에는 또 다른 도시 화석의 사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미주>
1) 로먼 마스·커트 콜스테트, 《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어크로스, 2021, 66쪽. 2) 김시덕, 《갈등 도시》, 열린책들, 2019, 63~103쪽. 3) 오창섭, 《간판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17, 37쪽. 4) 장혜영, 《사라지지 않는 간판들》, 지콜론북, 2020, 72쪽. 5) 장혜영, 위의 책, 77~85쪽. 6) 남호현, 「근현대 순천지역 주거에서 보이는 한일절충형 주택에 관한 연구: 우부자집, 고산의원장 가옥을 중심으로」, 《인문학술》 11권, 2023, 75~76쪽. 7) 「김경수의 광주땅 '최초' 이야기(66): 석유회사·주유소」, 《광주매일신문》 2022년 11월 10일자. 8) 김태완, 「일제강점기 도시성곽 성문의 역할과 활용 방식 변화」,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22, 2쪽. 9) 조성욱, 「전라선 철도역과 지역 중심지의 관계」, 《한국지리학회지》 8권 2호, 2019, 206쪽. 10) 문봉준, 《문봉준의 마을이야기》, 순천시민의신문, 2005, 119쪽. 11) 「순천운동장문제」, 《동아일보》, 1923년 9월 4일자. 12) 임동현, 「일제시기 조선인 체육단체의 스포츠 문화운동」,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22, 176쪽. 13) 순천문화원, 《순천의 마을 유래지》, 1993, 69쪽. 14) 순천문화원, 《순천승주향토지》, 1975, 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