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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②] 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②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6.28 BoardLang.text_hits 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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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6월(통권 52호)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2

 

 

박우현(근대사분과)

 

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②

1. ㈜조선철도 경북선 부설을 둘러싼 부침

 
문경에 영향을 끼친 지역철도망 유치는 경상북도 김천에서 시작되었다. 문경의 남쪽에 있었던 김천은 경부선 김천역이 설치되며 경상북도 서부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지역이었다. 김천역에 정착했던 일본인 자본가들은 김천에서 북상해 상주에 이르는 철도부설을 추진했는데, 1916년 12월에 ㈜조선경편철도에 제출한 청원서를 통해 그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청원서
경상북도 김천-상주 간의 교통운수의 현세가 해마다 번잡해져, 현재는 주요 교통기관으로서 몇 대의 자동차만을 가지고 하루 몇 차례 운행하는 것 외에 객마차도 보조기관으로서 운전을 하고 있으나, 도저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또 물자 수송에는 70~80대의 마차가 있지만, 항상 체화가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이 때문에 운임은 사업자가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천은 경부선 중 물자의 집산에서는 대구, 대전을 능가하고, 그 거래액은 1년에 400만 엔에 이릅니다. 그리고 북쪽의 상주와 밀접한 경제적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남쪽으로 거창을 거쳐 진주로 통하는 요로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상주는 그 주의에 광막한 평야를 거느리고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며, 특히 양잠은 전 조선에 비교할 곳이 없고, 금광도 수 개소가 있으며, 게다가 경제적 권역 내에는 문경, 예천 및 충북, 강원 양 도의 부원을 가지고 있어 교통기관의 완비와 함께 더욱더 상업활동의 왕성을 기할 수 있는 좋은 지세에 있습니다. 김천-상주 간 약 25마일의 경편철도 부설은 목하 이 지방 사람들이 고루 열망하는 바입니다.
1)

청원서는 표면적으로 경북 서북부의 번영을 내세우고 있지만, 핵심은 김천 중심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대구와 대전에 대항해 김천을 중심으로 철도교통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지역들 즉, 위로는 경북 북부, 충북, 강원 아래로는 거창 진주 등 서부 경남까지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가 드러난다. 
 
물론 성과가 곧바로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러자 김천의 자본가들은 직접 철도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다. 1918년 6월 이들은 남선경편철도기성동맹회(南鮮輕便鐵道期成同盟會)를 결성했다. 김천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거창, 진주, 삼천포에 이르고, 북으로는 상주, 문경, 예천을 거쳐 영주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목표였다.2)
 
하지만 사람이 모여 뜻을 같이함을 서로 확인한다고 욕망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의 욕망을 실현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도부설에는 막대한 초기자본이 필요하다. 식민지 리스크를 감수하며 김천에 정착해 운송업이나 상업에 종사했던 재조일본인 자본가들이 철도부설자금을 직접 조달할 가능성은 없었다.

이는 일본과 조선의 사설철도회사가 가졌던 질적 차이와도 연결된다. 일본은 지방철도를 민간자본이 부설하는 경우 회사 구성원과 주주가 대부분 해당 지역과 관련된 자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철도부설과 함께 주변을 개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식민본국의 자본가가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을 바라고 타지에 투자하는 방식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철도역 주변 개발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개발하지 않아도 총독부의 보조금이 배당을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3) 식민지 조선 내부의 자본으로 철도부설이 불가능했기에 만들어진 보장 제도였다. 이미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택한 식민지 철도부설 방식이었다. 1931년 현재 조선에 설립된 사설철도회사의 주식소유 분포도 ‘일본에 있는 일본인’이 77.4%, ‘조선에 있는 일본인’이 20.2%, 조선인이 1.26%였다.4)
 
남선경편철도기성동맹회도 철도부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투자자를 구해야 했다. ㈜대일본제당의 사장이자 도쿄상공회의소의 회두였던 후지야마 라이타(藤山雷太)가 관심을 보였다. 대만에서 제당업으로 성공을 거둔 후지야마는 중국시장과 인접한 조선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제당 설립도 허가받은 상황이었다.5) 철도회사에 보인 관심은 그 연장선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지야마의 자본투자는 성사에 이르렀고, 김천의 재조일본인 자본가들과 함께 1919년 10월에 ㈜조선산업철도를 설립했다. ㈜조선산업철도는 1919년 10월 16일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김천, 상주를 지나 안동에 이르는 사설철도 부설도 허가받았다.6) 후지야마는 회사의 주식 총 40만 주 중 2만 주를 소유한 최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조선제당의 임원들도 3~6천 주 이상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후지야마가 주도한 회사였다. 후지야마 외에 2만 7천 주를 소유한 또 다른 최대주주로 ㈜동양척식도 있었다.7)
 
순조로웠던 회사 설립과 달리 철도부설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된 일본경제의 호황이 있었다. 투자처를 찾아 헤매던 자본이 식민지 조선까지 흘러왔다. 1918~20년 사이에 12개 사설철도회사가 14개의 철도망에 대한 부설 면허를 받았다. 이들 사설철도회사의 공칭자본금은 1천만 엔이 넘는 수준이었는데, 당시 일본 내 주식회사 중 공칭자본금이 500만 엔을 넘는 회사가 2.7%(13,174개 중 357개)에 불과했다. 철도를 매개로 한 거대한 주식회사들이 갑자기 조선에 설립된 격이었다. 전쟁을 배경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철도회사들은 1920년 이후 반동공황의 직격탄을 맞으며 수렁에 빠졌다. 김천의 ㈜조선산업철도라고 다를 게 없었다. 철도부설은 시작도 못했는데, 일부 주주들은 회사의 해산을 요구했다. 재조일본인 자본가들이나 조선총독부는 반대했지만, 투자규모가 컸던 일본에 있는 일본인 투자자들의 해산 요구가 거셌다.8)
 
설립 직후 ㈜조선산업철도의 활동을 보면 사실상 회사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3월까지도 철도부설은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로나 지질조사, 일부 용지의 매수가 진행 상황의 전부였다.9)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했고, 주주들은 배당금을 챙겼다. 납부된 자본금은 철도부설에 사용되지 못하고 은행에 예금으로 넣어둔 채 이자수익만 내고 있었다.10) 자본의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1923년 9월 1일 부실했던 6개 사설철도회사를 합병해 ㈜조선철도로 재편했다.11) ㈜조선산업철도가 면허를 받았던 김천-안동 간 철도망도 ㈜조선철도 경북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본금의 여유가 생겼고, 철도부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23년 8월 현재 ㈜조선철도 경북선은 김천-상주 구간, 상주-함창 구간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12월까지 김천-상주 구간은 80% 내외, 상주-함창 구간은 10% 내외의 공사를 진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12) ㈜조선철도는 경북선을 김천에서 상주군 함창면에 이르는 철도를 1기 계획선으로 우선 완공해 영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23년 4월 7일 조선일보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예천군은 동북으로 봉화 영주 양군이 잇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안동 의성 문경 상주 네 고을을 접하야 주민이 4천여 명에 달하며 경북에서도 대읍이라는 이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농산물이 풍부하고 따라서 시황도 번성하야 상업 발전상 매우 유망하나 다만 운수기관 되는 철도가 없어 일반 주민은 개탄함을 (중략) 산업철도주식회사의 경영으로 김천-안동 간 철도를 부설하기로 계획하야 방금 김천 상주 간은 공사에 착수 중임으로 내년에는 개통되리라고 하더니 지금에 무슨 사정으로 인함인지 1기계획선을 김천으로부터 상주군 영순면 영순강까지 하고 영순강에서 예천까지 2기계획선으로 부설한다 함(강조는 필자)으로 이것을 들은 예천시민 일동은 낙담 천만하야 만약 철도가 당지까지 1기계획선으로 되지 아니하면 예천은 영원히 발전의 전도가 늦어감은 물론이오 장차 현재의 운명을 지속하기에도 어려운 일이니 이것은 곧 당지의 사활문제라 하야 (중략) 26일 오후 4시에 당지 공립보통학교에서 시민대회를 개최하엿는데 (중략) 군수 김병태(金秉泰), 中西 경찰서장은 「철도부설 지속에 대하야 우리의 사활문제를 결단함」이란 문제로 시작하자마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좋소, 옳소, 그렇소 하는 소리가 맹렬하얏고 김군수를 조장으로 추천하고 이에 대한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우선 주민 일동의 연명으로서 철도국장, 도지사, 산업철도주식회사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또 위원을 선거하여 불원 간 상경하리라고 하더라13)
 
 
 
 
 그림 : 1924년 3월 말 경상북도 관내 자동차 운행도
출처 : 1924.05 《慶北》第三年 第五號, 慶北硏究會 
 
 
1924년 3월 말 현재 경상북도 관내 자동차 운행 빈도를 보여주는 그림 1과 함께 기사를 읽으면 이해가 편하다. 김천에서 시작할 경북선은 상주를 거쳐 함창면과 예천군을 지나 안동군에 이를 예정이었다. 기사가 보도된 1923년 4월 시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김천-상주 구간도 기공하지 못한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인가 상황을 보면 상주군 함창면까지는 1922년 10월 5일에 선로공사 시행을 인가받았고, 함창에서 예천군까지는 같은 해 11월 22일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한 상황이었다.14) 게다가 이미 인가를 받은 김천-상주 구간도 기공하지 못해 1923년 4월 17일부로 공사착수 연기를 신청하는 상황이었다. 함창-예천 구간은 같은 해 6월 21일에야 인가를 얻었으니, 4월 시점에서 예천군민의 불만 토로는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1기 계획선에 포함되는가였다. 최종적으로 철도의 종점은 김천과 안동이라 할지라도, 철도망 전체가 완공되기 전까지 1기 계획선의 종점에 주변 지역 물류가 집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천군민들이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회사, 경상북도 등에 청원서를 보내고 상경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든 1기 계획선의 종점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1923년 현재 1기 계획선의 종점으로 지정된 상주군 함창면과 예천군은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역이 아니다. 지난호에 살펴봤던 경상북도 지도(그림 2)를 다시 보면 함창면과 예천군 용궁면 사이는 문경군의 최남단이었던 호서남면이 있었다. 지난호에 언급했듯이 1등도로가 지났던 유곡리와 후에 등장할 점촌리가 모두 호서남면 소속이었다. 그렇다면 1기 계획선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문경군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예천군과 같은 움직임은 없었을까?
 
 
그림 2 : 1918년 현재 문경군 지도(점촌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출전 :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慶尙北道, 1918(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1923년은 물론이고 경북선 부설이 시작되었던 1924년 상반기까지 지역을 지나가는 철도와 관련한 문경군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우선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천에서 상주군 상주면과 함창면을 지나 예천군 용궁면과 예천면으로 향할 때 지나게 되는 문경군 호서남면은 당시 군의 중심지였던 문경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문경면을 중심으로 의견이 모이기 힘든 구조였다. 또한 애초에 함창면이 1기 계획선의 종점이고 다음 역은 예천군 용궁면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즉, 문경군에는 철도가 정차할 계획이 없었다. 실제로 함창면과 호서남면 간 거리는 2~4㎞에 불과했기에 문경군은 상주군과 예천군에 정차할 철도망이 지나가는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니 1기 계획선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24년 상반기에 지역의 관심은 김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경북 북부의 운송업이 함창면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에 맞춰져 있었다.15)
 


2. 갑자기 등장한 1기 계획선 종점, 점촌역

 
분위기가 급격히 바뀐 것은 1924년 8월 이후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소문이 들려왔다. 경북선 1기 계획선의 종착역을 상주군 함창면이 아닌 문경군 호서남면에 설치할 것이고, 점촌리가 예정지라는 소문이었다. 영업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은 1924년 6월 30일까지를 회기로 하는 제17회 영업보고서에는 점촌이 등장하지 않다가, 12월 31일까지를 회기로 하는 제18회 영업보고서에 경북선 1기 노선의 종점인 점촌이 등장했다는 점이다.16) 
 
우선 준공을 앞둔 상황에서 계획에 없던 역을 추가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경북선은 ㈜조선철도가 부설하는 사설철도였기에 가능했다. 물론 사설철도라고 해도 회사가 직접 조사해 노선을 선정하면 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철도는 부설을 위한 초기비용이 거대할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교통인프라였기에 국가의 철저한 관리 속에서 만들어졌다. 노선의 중복을 막아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조선총독부도 1912년부터 조선 각 지역에 조사 인력을 파견해 철도부설이 필요한 지역을 조사했고, 그 결과를 민간에 제공해 투자를 유도했다. 김천-안동 구간도 1913년 9월 조선총독부가 확정해 제시했던 ‘제1기 조사노선’에 포함되어 있었다.17) 그런데 사설철도의 경우 조선총독부는 종점이 되는 양 역만을 확정하고 구간 내 역의 배치는 회사의 재량에 맡기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즉, 경북선은 사설철도였기에 갑자기 점촌역이 1기 노선의 새로운 종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점촌역이었을까? 호서남면은 1925년에도 문경군 내 10개 면 중 인구가 8번째였을 정도로 군 내에서도 중심지와 거리가 멀었다.18) 게다가 호서남면의 중심지는 장시가 열리고, 유곡역이 있었으며 1등도로가 지났던 유곡리였다. 점촌리는 언급조차 되지 않던 곳이었다. 우선 그림 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주군 함창면과 예천군 용궁면을 가장 짧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점촌리를 지나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은 대부분 일본에 거주하던 일본인 자본의 투자로 이뤄졌던 식민지 사설철도라는 특징과 연결된다. 민간자본이 철도망을 구상한다고 하면 보통 두 가지를 고려하게 된다. 하나는 이윤극대화, 다른 하나는 비용최소화다.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노선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중요한 부문을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 조선의 사설철도회사는 대부분 이윤극대화보다는 비용최소화에 관심이 많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설 투자나 연선 개발을 하지 않아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세금을 통해 고율의 배당금을 보조해주었기 때문이다.19) 점촌리는 함창면과 용궁면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비용최소화 구간이었다.

문제는 비용최소화를 추구하는 방향성과 다르게 간이역 수준이라도 굳이 계획에 없던 철도역을 추가로 설치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북선 1기 노선의 종점이라는 지위는 전체 철도망이 완공되기 전까지 주변 지역의 객화 수송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철도망이 보급되지 않았던 예천, 안동, 영주, 봉화 등의 물자 수송을 독점할 수 있었다. 준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종점이라는 지위를 빼앗기게 된 함창면 주민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함창면의 주민대표 10인은 대구를 방문해 경상북도지사에게 항의했다. 물화의 집산, 교통의 연락 등 모든 면에서 함창면이 점촌리보다 우수함에도 갑작스레 종점이 바뀐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용최소화라는 회사의 기조와도 맞지 않았다. 소문도 돌았다. 문경군의 일본인 모씨가 ㈜조선철도의 유력한 사람이라서 종점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였다.20) 소문의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림 3: 1924년 12월 1일 현재 문경 주변 철도망
출처 :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狀況 第十五回, 1924.12.
비고 : 검은색 노선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노선, 붉은색 노선은 사설철도 노선이다.
김천-상주 간 실선은 영업노선, 상주-점촌 간 테두리가 닫힌 점선은 현재 부설 중인 노선,
점촌-안동 간 점선은 현재 부설 미착수 노선이다.
 

다만 점촌역 설치와 관련해 다른 인물의 행적이 주목된다. 당시 문경군수였던 박정순(朴正純)이다. 박정순은 강제병합 직후부터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경찰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21) 김천경찰서를 끝으로 경찰에서 물러난 후 1922년 황해도 재령군수를 거쳐 1923년 8월 29일부로 경상북도로 돌아와 문경군수로 부임한 상황이었다.22) 점촌역을 종점으로 한 경북선 1기 노선이 영업을 개시하고 3개월여가 지난 시점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함창역과 점촌역 간 거리가 매우 짧은데 왜 점촌역을 세웠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문경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저 하야 그리하였습니다”라는 추상적인 답변을 남겼다. 
 
인터뷰에서는 그의 김천경찰서 근무 경력도 언급되었다. 근무 시기가 3.1운동 직후였던 1920~1921년이었고, 기자가 해당 지역 청년회 조직과 갈등이 있었던 점을 추궁하자 “위에서 그러한 명령이 있는 것”이라며 언짢음을 드러냈다.23) 지역 청년회 조직과의 갈등이란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의미할 것이고, 경찰이라는 직위는 김천 지역 재조일본인 자본가들과의 인적 연결망도 유추해볼 수 있다. 이후에도 박정순은 경북선 점촌역을 설치한 주역으로 지역에서 평가받는 것을 보면 그의 역할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24) 더 내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지역사 연구의 어려움이다.
 
박정순은 인터뷰에서 경북선이 연장되어도 충주로 통하는 1등도로가 문경에 있으니 도로와 철도가 연계해 화물 수요가 충분할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25) 그런데 이러한 논리가 점촌에 철도역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문경이 아니지만 문경군 경계에 접해 있었던 함창역이 그 수요를 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1등도로와 접한 철도역은 함창역이었다. 
 
또 한 가지 측면을 유추해보면 문경 지역에 매장되어 있었던 지하자원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부터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1918년 재조일본인 언론을 통해 문경군 문경면과 가은면 등지에 석탄뿐 아니라 철광, 석회석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가 특집기사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직 조선의 산업수준이나 채산성 등에서 본격적인 개발에 나서지 않았지만, 향후 문경의 지역이 광업을 중심으로 개발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 점촌역의 급설이 설득력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명확한 이유는 아니다. 행정구역이 다를 뿐 석탄 매장지로부터 함창역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경제적 효율성 혹은 합리성만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박정순이라는 인물의 인적 네트워크를 의심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점촌리가 1기 노선의 종점역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이는 지역사회에서 기정사실화되었다. 상주에서 함창을 거쳐 점촌에 이르는 노선은 김천-상주 구간에 이어 1924년 12월 상순에 개통할 예정이었다.26) 12월 1일 현재 노선을 보여주는 그림 3에서 김천-상주 구간은 영업을 시작했고, 상주-점촌 구간이 건설 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산업철도경북선은 그 기점을 김천(金泉)에서 시작하여 상주 및 함창시장을 통과하고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를 종점으로하게 되었는 바 동군(同郡)에서는 그 점촌리에 일대정거장이 됨으로 본래 수십호의 촌락이 근일 수백호가 이주될 모양이며 시장까지 신설할 작정이라 상주시일 및 함창 산양 외 시일과 연락을 취하고자 하여 상주시일은 이일 및 칠일이요 함창시일은 일일 및 육일이며 산양시일은 오일 및 십일이라 그에 대하여 점촌리에서는 사일 및 구일로 내정이 된 바 함창에서는 그 종점인 함창을 통과함에 대하여 대대적 반대운동을 하나 그 점촌리로 말하면 영순강이 근격(近隔)할 뿐 아니라 상주 산양 간에 내왕하는 행상이 막대한 이익이 있다하여 동 군수 박정순씨는 군민을 대표하야 운동을 한다는바 장래에는 금융기관까지 시설할 방침이라는데 그 점촌리 근방에는 토지가격이 고등(高騰)하야 일두락(一斗落)에 이백원이상에 이른다다더라27)
 
 
함창면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반대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박정순을 중심으로 한 문경군은 철도역 설치에 이어 장래 금융기관도 유치할 것이라고 홍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수십호에 불과했던 촌락에 곧 수백호가 이주하고, 장시도 신설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토지가격도 급등했다. 

10월 1일에는 1기 계획선 중 1차 준공 구간이었던 김천-상주 구간이 개통했다.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이 시승행사에 참여했음을 보도한 기사에서도 이후 해당 노선이 점촌,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향할 것이라고 안내했다.28) 이제 점촌역 설치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예정보다 역사 건축이 늦어지면서 12월 하순으로 개통 시기가 한 차례 연기되었고, 12월 25일 점촌역까지 개통하는 것이 확정되었다.29)
 
개통이 지연되자 함창면 주민들이 다시 반대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논리는 바뀌지 않았다. 함창은 본래 상주군 상주면 북쪽에 있는 산읍(山邑)으로 “2백여 호의 가옥이 즐비하고 교통이 매우 편리한 동시에 물화가 폭주”하는 곳으로 상주면과 함께 상주의 중심지지만 점촌리는 문경군 중심인 문경면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고 인구도 거의 없는 곳이라고 주장하였다.30) 이치에 어긋나는 내용이 없었다.
 
개통이 다가오자 문경군의 주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난달 상순경에 문경군에서는 군수 박정순(朴正純)씨와 호서남면장 신학균(申鶴均)과 유지 이종봉(李鍾鳳) 제씨의 발기로 별안간 시민대회를 열고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문경을 발전시키려면 군계의 최종점인 점촌에 정거장을 세우고 도회를 만들지 안으면 아니된다는 가결로 함창역 이전문제를 일으켜 당국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맹렬히 운동하면서 일변으로는 번영회를 조직하고 발전책을 강구하던 바 상주측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한 군수 신현구(申鉉求) 씨 이하 유지 제씨의 발기로 시민운동을 일으키며 「만일 함창역을 빼앗기는 날에는 함창읍은 쇠잔하고 말 터이니 이는 시민의 사활문제라」하고 함창역 보존운동을 일으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국에 교섭하여 양군의 시민운동이 갈수록 맹렬하더니 결국은 문경 측에서 승리를 얻게 되어 당국에서는 벌써부터 거의 준공되어가던 함창역을 그냥 내버리고 점촌의 너른 들에다 정거장을 다시 건축하였음으로 상주시민의 운동은 수포로 돌아간 동시에 함창시민은 사활문제가 여기에 달렸다 하고 매일 당국에 대하여 운동을 계속하는 중이라더라31)

문경군수 박정순과 호서남면장 신학균 등의 주도로 열린 주민대회에서는 아예 함창역을 없애고 점촌역으로 이전하라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거리가 짧아 역이 2개나 있을 이유가 없다는 점을 문경군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2개 역인 모두 설치되었지만, 인접한 두 지역의 첨예한 대립은 사실상 문경군의 승리였다.

개통을 앞둔 12월 하순경이 되면 양측의 갈등이 어느 정도 타협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1기 계획선의 종점은 점촌역으로 하되 함창에 ㈜조선철도 경북선의 기관차고, 보선과 등을 두어 발전을 도모한다는 나름의 타협안이 만들어졌다.32) 그러나 이 타협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철도의 영업보고서를 보면 해당 기관차고는 가건물이었고, 1926년 상반기부터 가건물을 철거하고 해당 시설을 점촌역으로 이전하는 공사를 시작해 하반기에 완료했다.33) 사실상 점촌역이 지역 발전과 관련된 이권을 독점하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12월 25일 열린 경북선 상주-점촌 구간 개통식은 오전에는 함창. 오후에는 점촌에서 두 차례 따로 거행되었다.34) 양측의 갈등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요한 점은 점촌의 승리로 끝난 이 결과가 단순히 철도역 설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925년 이후 문경군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인구, 시장, 공공기관 등 즉각적 혹은 장기적으로 철도역 설치가 만든 변화상은 다음 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미주>
 
1) 達捨藏, 1931, 《慶北沿線發展誌》, 3쪽.
2) 김일수, 2016, 「일제강점기 김천의 일본인사회와 식민도시화」, 《사림》56, 253~254쪽.
3) 박우현, 2016, 「대공황기(1930~1934) 조선총독부의 사설철도 정책 전환과 특성」, 《역사와 현실》101.
4) 박우현, 2017,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설철도 매수 추진과 특징」, 《역사문제연구》 38, 73~74쪽.
5) 이은희, 2018, 《설탕, 근대의 혁명 : 한국 설탕산업과 소비의 역사》, 지식산업사, 126~127쪽.
6) 鮮交會 編, 1986, 《朝鮮交通史 1 : 本卷》, 三信圖書有限會社, 807~808쪽.
7) 矢島桂, 2012, 《戰間期日本の對朝鮮鐵道投資 1918~1929年》, 一橋大學 經濟學硏究科 博士論文, 22~24쪽. 
8) 矢島桂, 2009, 「植民地期朝鮮への鉄道投資の基本性格に関する一考察: 1923年朝鮮鉄道会社の成立を中心に」, 《経営史学》44-2, 65~67쪽.
9) 朝鮮産業鐵道株式會社, 1923.03, 《第七回營業報告書 大正十一年 下半期》, 2~4쪽
10) 矢島桂, 2009, 앞의 논문, 62~64쪽.
11) 矢島桂, 2009, 앞의 논문, 70쪽; 이형식, 2010, 「중간내각 시대(1922.6-1924.7)의 조선총독부」, 《동양사학연구》113, 288~293쪽.
12) 朝鮮鐵道株式會社, 1923.08, 《營業報告書》, 56~57쪽.
13) 「醴泉에市民大會開催 鐵道速成을運動하고자」, 《조선일보》, 1923.04.07. 
14) 朝鮮産業鐵道株式會社, 1923.03, 《第七回營業報告書 大正十一年 下半期》, 2~4쪽.
15) 「金泉の諸問題, 慶北線と自動車=慶東線と米糓, 米豆檢査所と米糓商の尙州進出, 大邱支局靜山生」, 《京城日報》, 1924.05.06.
16) 朝鮮鐵道株式會社, 1924.12 《第十八回 營業報告書》, 7쪽.
17) 南滿洲鐵道株式會社 庶務部調査課, 1925, 《朝鮮の私設鐵道》, 3~4쪽; 朝鮮總督府鐵道局, 1929, 《朝鮮鐵道史》, 714~718쪽.
18) 朝鮮總督府, 1935, 《昭和十年 朝鮮國勢調査報告 道編 第六卷 慶尙北道》, 6~7쪽.
19) 矢島桂, 2009, 앞의 논문, 67쪽; 박우현, 2016, 앞의 논문, 315~321쪽
20) 「咸昌市民陳情」, 《동아일보》, 1924.08.20.
21) 「警部朴正純도 逮捕」, 《강원일보》, 1949.03.13; 「朴正純等四名서울本部에 送致」, 《연합신문》, 1949.04.01; 「朴正純許智保釋, 書類만서울에送附」, 《자유신문》, 1949.05.03.
22) 「敍任及辭令」, 《朝鮮總督府官報》 第3317號, 1923.08.30.; 「黃海郡守異動」, 《동아일보》, 1923.09.0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직원록 자료
23) 「東亞日報記者地方巡廻 正面側面으로 觀한 聞慶의 表裡」, 《동아일보》, 1925.03.16.
24) 「聞慶郡守 頌德碑 建設設計中」, 《매일신보》, 1926.03.22; 「聞慶郡守 留任運動과 其不可한 理由를 朴氏가 說明」, 《매일신보》, 1926.09.11.
25) 「東亞日報記者地方巡廻 正面側面으로 觀한 聞慶의 表裡」, 《동아일보》, 1925.03.16.
26) 「慶北線의 延長」, 《시대일보》, 1924.09.23.
27) 「産鐵終点은店村里」, 《조선일보》, 1924.09.03.
28) 朝鮮總督府 鐵道局, 1924.12 《朝鮮鐵道狀況 第十五回》, 83쪽; 「慶北線初乘の記, 地方產業開發の汽笛をあげて, 汽車は新線を進行す」, 《京城日報》, 1924.10.03.
29) 「朝鐵 慶北線, 尙州 店村間의 開通期는 來月上旬」, 《매일신보》, 1924.12.04; 「朝鐵 慶北線 尙州 店村間, 來25일 개업」, 《매일신보》, 1924.12.15; 「慶北線 尙,店間開通은 二十五日에」, 《조선일보》, 1924.12.24.
30) 「停車場移轉은 咸昌의死活問題, 건축락셩까지된뎡거장을다른곳에빼앗기고대분개」, 《매일신보》, 1924.12.13.
31) 「猛烈한 爭奪戰 량군이 모다 군민대회를열고」, 《매일신보》, 1924.12.13.
32) 「尙州店村間의慶北線開通式 詳報, 二十五日을期하야大大的擧行, 咸昌의發展과都市氣分의濃厚」, 《매일신보》, 1924.12.24.
33) 朝鮮鐵道株式會社, 1926.6 《第二十一回 營業報告書》, 10쪽; 1926.12 《第二十二回 營業報告書》, 14쪽
34) 「咸昌 店村 兩驛의 慶北線 개통식 後報, 환성은 如雷 인기는 沸騰, 특파원 崔東熙 發信」, 《매일신보》, 1924.12.27; 「慶北線開通祝賀 咸昌에서擧行」, 《조선일보》, 1924.12.29; 「慶北線開通式 兩處가다盛况」, 《조선일보》, 1924.12.3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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