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역사와 현실》(132호) 시론]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선언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7.30 BoardLang.text_hits 882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7월(통권 53호)

[역사와 현실: 시론]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선언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예대열(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학술연구교수)

 

 
 
 

1.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선언

 
 
북한은 2023년 12월 조선로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와 2024년 1월 제14기 제10차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선언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남관계사가 주는 최종 결론은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을 꿈꾸면서 공화국과의 전면 대결을 국책으로 하고 있는 … 대한민국과는 … 민족중흥의 길, 통일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행사 령역을 합법적으로 정확히 규정짓기 위한 법률적 대책”을 수립하겠다며 ‘두 국가론’을 헌법에 명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
 
관계란 상대방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만큼 어느 일방의 파기 선언은 양측이 더 이상 과거처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동안 남북 관계를 규율해 왔던 권원(權原)은 1992년 2월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2) 남북 관계가 부침을 겪으면서도 그나마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남북합의서’의 총론적 내용에 양측이 모두 합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했을까? 현상적으로 북한의 선언은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남북 관계를 비롯한 국가전략의 전환 속에서, 윤석열 정부의 적대 정책이 그 선택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선택은 최근 북러 사이에 상호방위조약 성격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3)이 체결된 것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국면의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세계 질서의 전환 속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9년 말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자 북한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핵 개발을 통한 ‘대결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일본과 수교를 통한 ‘개방의 길’이었다. 만일 남한과 중국・소련이 수교를 한 것처럼 북한도 미국・일본과 국교를 맺었다면, 동북아 정세는 지금보다 훨씬 안정되고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른바 ‘교차승인’ 방식의 ‘개방의 길’을 선호하지 않았고, 북한 또한 그에 대항해 ‘대결의 길’인 핵 개발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4)
 
그럼에도 북한은 탈냉전 이후 30년 동안 미국과 수교를 통해 체제를 보장받으려는 전략을 지속시켜 왔다. 북한은 세계 유일 패권국가인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되,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투 트랙’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핵 개발은 미국을 협상으로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지렛대’이자 실패를 대비한 ‘보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하노이 회담 ‘노딜’에서 보듯 비핵화 의지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체제 보장은커녕 제재 완화조차 얻어내지 못하는 상황을 보며, 기존 전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남방’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급속히 진영화 된 세계의 다른 한편인 러시아와 중국의 ‘북방’에서 또 다른 기회와 가능성을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와 맞물려 다시금 한반도가 양 진영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 남북한 정부의 선택이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데 있다. 지금의 시대를 ‘신냉전’이라 부르건 ‘다극 체제’라 부르건,5) 한반도는 다시금 분쟁지역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한 것을 넘어, 남북 관계를 “적대적”이고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남북 양측은 엄청난 규모의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은 서로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한 만큼 일정한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관계가 악화되고 완충공간이 사라지게 되면서 충돌의 가능성이 커지게 된 것이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1) ‘두 국가론’이 갖는 분쟁의 위험성
 
 
기실 남북 관계에서 ‘두 국가론’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1년 남북한이 각각 유엔에 가입했을 때 이미 국제사회에서 ‘두 국가 관계’는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진보 진영 일각에서 이참에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 대상으로 삼아 양국 체제로 나아가자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방식은 남북 관계를 민족주의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가 명백하고, 청년 세대에게 통일을 당위로서 설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나름 현실적인 대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두 국가론’이 갖는 한계 또한 명백하다. 남북이 ‘두 국가’가 되고 서로 상관없이 지낸다고 해서 과연 평화가 찾아올까? 분단의 현실을 부정하고 ‘두 국가’로 살아간다고 해서 분단의 규정력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간 남북 관계를 보면 서로가 대화와 교류 없이 지내며 사실상 ‘두 국가’처럼 행동했을 때 오히려 적대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일찍이 강만길이 강조했듯이 한반도는 대륙 세력이 강했을 때는 일본을 찌르는 ‘칼’이 될 수 있었고, 해양 세력이 강했을 때는 중국을 향한 ‘다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었을 때는 한반도 분할론이 등장했다.6) 강만길은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지정학적 약점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여 분쟁의 중재자와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꿈꾸었다.7)
 
즉 한반도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완충공간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두 세력이 만나 충돌하면 한국전쟁의 경우와 같이 쉽게 전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두 국가’ 체제는 남북한이 과거처럼 진영화 된 세계의 양축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과 긴장이 높아지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평화 유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22년 8월 김여정은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라고 했다.8) 하지만 남북이 서로를 의식하지 말고 살기에는 아직은 양측 모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남북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도 문제겠지만, 아무런 준비나 대화 없이 헤어지는 것도 문제다.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관계가 단절되면 서로 간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현재 남북 간 완충지대는 사라졌다. 2018년 체결한 ‘9・19 군사합의’는 비무장지대 안의 무기와 초소를 철거하고 서해 접경 지역에서 군사훈련과 사격훈련을 중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다시 과거의 중무장지대로 후퇴했고, 서해 또한 분쟁의 바다로 돌아갔다. 남북 간 소통 채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남북한 모두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창구 역할을 하던 조직과 사람들은 해체되거나 숙청당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협상의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9)
 
 
2) 평화를 향한 역사적 상상력
 
 
김정은은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하며 주권 행사 영역을 합법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법률적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국가의 남쪽 국경선이 명백히 그어진 이상 불법 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령토, 령공, 령해를 0.001mm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로 간주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0)
 
남한 정부와 언론은 이 언설을 두고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실제 서해5도 주변은 북한의 ‘두 국가 선언’ 이후 다시금 분쟁의 바다로 되돌아간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풍선에 실린 전단과 오물이 언제 군사적 무기로 변할지 모르는 위기의 시대에서, 비록 ‘맹아’라 할지라도 평화와 공존의 싹을 찾아내 그 의미를 싹틔우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이 위의 연설을 하며 ‘국경선’이라고 표현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남북 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선언한 이상, 서로를 국제법의 규율을 받는 국제관계로 위치시키고자 했다. 국제법의 제1원칙이 당사국 간 합의라는 점에서, 남과 북의 법률관계는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마무리하는 절차이자 동시에 전후 분단체제를 규정하는 출발점이었다. 주지하듯 서해5도 수역을 둘러싼 갈등은 정전협정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정전협정상 해상의 경계는 육상의 휴전선과 달리 명확하게 합의된 분계선이 없었다. 정전협정에는 도서의 관할을 구분 짓는 기준선과 인접수역 존중 원칙만 제시되었을 뿐, 바다 위에 그어 놓은 해상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NLL(Northern Limit Line) 또한 미국이 한국군의 월선을 방지하고 초계 한계를 제한하고자 만든 ‘북방’의 한계를 긋는 선일 뿐이었다.11)
 
이처럼 불완전한 정전협정은 서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 안에는 교류와 협력의 가능성도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전협정상 한강하구는 남북의 민간인이 출입할 수 있는 ‘개방수로(open water way)’로 규정되어 있다.12) 정전회담 당시 유엔과 공산 양측은 한강하구 주변이 평야 지대임을 감안하여, 서로 방어하기 어려운 조건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경계를 짓기보다 아예 ‘개방수로’로 설정해 버렸다.13) 
 
이에 따라 한강하구는 육상의 DMZ와 달리 공동의 영유와 이용의 측면에서 ‘개방’된 공간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유엔과 공산 양측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953년 10월 3일 군사정전위원회를 가동하여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대한 규칙 및 관계 사항’에 합의하였다. 이 ‘합의서’에는 강 위에 별도의 경계선을 두지 않겠다는 점(제2조). 민간인에 대해서는 출입을 허용하겠다는 점(제4조), 민용선박의 항행 보장을 위해 모든 군사 역량을 철수시키겠다는 점(제7조) 등이 명시되었다.14) 
 
물론 한강하구는 위와 같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금단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정전협정에는 분명 “민용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수면 자체가 경계선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변화된 정세와 제약된 조건 속에서 절망하기보다는,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평화를 만들어 갈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3) 재회를 위한 내부 혁신과 성찰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하며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내용은 흡수통일 문제였다. 김정은은 남한 정치세력에 대해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남한의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진보’에 대해서도 사실상 흡수통일론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고 결론 내린 듯하다. 
 
물론 남한 정치세력 간 대북정책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진보’는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 관계의 현안을 해결해 가면서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중시했다. 반면 ‘보수’는 남북 관계의 현실보다는 통일의 미래를 중시하며 “결과로서의 통일”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의 평가와는 별개로 ‘보수’나 ‘진보’ 모두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생각을 갖고 대북정책에 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 이면에는 ‘보수’나 ‘진보’ 모두 남한이 체제경쟁에서 승리했고, 그것을 토대로 우위적 입장에서 북한을 상대화하며 한반도 정세를 주도해 나가겠다는 인식이 깔려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좌우 양측 모두 일종의 ‘승리 사관’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념을 떠나 남한을 우위에 두고 진행한 대북정책은 오늘날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앞에서 효능감을 상실한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은 비핵화 요구 앞에 핵의 고도화로 나아갔고, ‘남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고립 탈출의 요구 앞에 ‘북방’에서 기회를 찾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북한은 ‘진보’의 경제협력 요구와 ‘보수’의 경제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앞세우며 경제와 민생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15)
 
사실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은 북한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북한사 연구들은 여전히 북한 문제가 한국 사회 갈등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학문적 영역에서만큼은 그 체제의 경험을 ‘포용’하거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 그 체제 안에는 근대 이래 아래로부터 제기되었던 민들의 요구와 식민지시기 치열하게 투쟁했던 민족해방운동가들의 노력이 스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6)
 
하지만 북한의 역사성에 대한 의미 부여는 자체의 고유성에 대한 천착보다는, 북한이 과거와 대면해 현재의 문제점들을 개혁하라는 주문이 담겨 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북한 초기 ‘인민민주주의 단계’에 대한 검토,17) 북한 체제의 모순에 대한 기원,18) 유일체제・국가사회주의체제・계획경제의 모순 등 현재와 같은 체제가 만들어진 ‘결절점’에 주목한 연구19)들은 모두 지금의 문제와 그것의 해결 필요성을 전제하고 연구된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현재적 문제의식’은 현실 문제와의 긴장성을 놓지 않을 수 없는 북한사 연구의 특성상, 오늘날 경직된 북한 체제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친 현재성에 대한 강조는 과거를 자칫 그 당시의 맥락에서 벗어나 지금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문제의식이 오늘날 북한에 대한 ‘승리 사관’과 그것에 기반한 대북 인식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평화 공존의 출발은 상호 인정에 있는 만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다시 만났을 때를 대비해 남북이 서로의 ‘수용성’을 높일 수 있도록 내부적 혁신과 성찰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여전히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현실과 유리된 헌법상의 영토 조항이 있다. 또한 남북한은 유엔 회원국 가운데 전시에 상대방을 완전히 제거하고 통일을 이루겠다는 국방정책을 내세우는 유일한 나라들이기도 하다.20)
 
우리는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을 목격하면서도 국제사회가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참혹함을 마주하면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의 시대 속 한반도의 긴장과 위험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평화의 원칙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남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평화를 지켜나가는 데 복무하는 것이 이 시대 북한사 연구자로서의 책무 아닐까 싶다.
 
 
 
<미주>
 
1)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강령적인 시정연설을 하시였다」, 《로동신문》, 2024.01.16.
2) 통일원 남북회담사무국, 1997,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1.12.13 채택, 1992.2.19. 발효)」, 《남북기본합의서 이행 문제 관련 자료집》, 101쪽.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련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조선중앙통신》, 2024.06.20. 
4) 와다 하루키 지음・길윤형 옮김, 2023, 《북일 교섭 30년》, 서해문집, 51쪽. 
5) 김재관, 2023,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단상과 전망」, 《동북아워치》 9, 6쪽. 
6) 강만길, 2018, 「대한제국 앞의 네 가지 길(1983)」, 《강만길 저작집 4: 한국민족운동사론》, 창비, 337쪽. 
7) 옥창준, 2024, 「강만길 지정학의 지정학」, 《강만길 선생 1주기 추모 학술대회 자료집: 강만길의 역사학 -방법, 지향 그리고 현대적 의미》, 98쪽. 
8) 「김여정, 尹 직격 “10년 전 정책 베껴 ‘담대한 구상’이라니”」, 《서울신문》 2022.08.19.
9) 김연철, 2024,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황해문화》123, 30~32쪽. 
10)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강령적인 시정연설을 하시였다」, 《로동신문》, 2024.01.16. 
11) 예대열, 2022, 「분단시대의 우상(偶像) -서해5도 수역을 둘러싼 안보 개념의 ‘발명’과 ‘변주’-」, 《역사와 현실》126, 412~415쪽. 
12) 國土統一院南北對話事務局, 1988, 《停戰協定文本<國・英文>》, 國土統一院, 2쪽. 
13) 조성훈, 2011,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7쪽.
14) 合參情報本部, 1999, 《軍事停戰委員會便覽》4, 18쪽.
15) 정욱식, 2023,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서해문집, 131쪽.
16) 예대열, 2015 「해방 이후(1945~1950) 북한 경제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史叢》86, 88쪽.
17) 김성보, 2000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역사비평사. 
18) 김재웅, 2018, 《북한체제의 기원》, 역사비평사. 
19) 이종석, 1997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서동만, 2005,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선인; 김연철, 2001,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역사비평사. 
20) 정욱식, 2024, 「탈북한의 상상력」, 《황해문화》123, 8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