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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갑오개혁 이후 일본 망명자 집단의 활동(1895-1907)_문일웅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7.30 BoardLang.text_hits 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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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7월(통권 53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갑오개혁 이후 일본 망명자 집단의 활동(1895-1907)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02)
문일웅(근대사분과)연구의 문제의식갑오개혁 이후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에 대한 연구들은 대개 대한제국 체제를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체제의 중심은 단연 전제군주를 지향했던 고종(高宗)이었다. 기존 연구는, 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제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았다.
하지만 전제군주제는 근대국가의 기본 요소인 국민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렇기에 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제는 한국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닌 오히려 근대국가 수립의 장애물이었다.
한국의 입헌군주제 논의는 갑오개혁 이래로 지속적으로 진전되어 왔으며, 전제군주제의 균열이 시작된 러일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 재등장 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전개된 근대국가 수립 논의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현대 한국인의 국가 인식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정치세력의 향방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필자는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를 관철시키려는 시도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러일전쟁 이후 근대국가 수립 논의는 어떠한 기반 하에 시작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 수립 논의의 ‘언더’-일본 망명자 집단물론 기존 연구에서도 대한제국기 입헌군주제 논의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기 입헌군주제 논의에 대해서는 주로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설명되어 왔다. 독립협회 운동의 전체 양상에 대해서는 지금껏 신용하(愼鏞廈) 및 주진오(朱鎭五)의 연구를 주로 참고해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구는 모두 독립협회 운동의 표면적인 양상을 운동의 근본적 동인(動因)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본 연구 역시 독립협회 운동의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을 통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다만 위 연구들과 달리 본 연구는 갑오개혁 이후 한국의 입헌군주제 논의를 주도했던 정치세력으로 독립협회를 규정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말하자면 독립협회는 여러 정치 세력이 합법적으로 내세운 일종의 ‘오픈’ 단체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필자는 대한제국기 입헌군주제 논의의 ‘언더’를 일본 망명자 집단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본래 갑오개혁 당시 정권을 구성했던 세 갈래의 경쟁적 세력으로, 각각 ‘박영효 세력(朴泳孝勢力)’, ‘시무파(時務派)’, ‘대원군파(大院君派)’로 갈래지을 수 있었다. ‘박영효 세력’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주축으로 규합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정통성을 인민의 동의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양원제 국회 수립을 목표로 했다. 반면 ‘시무파’와 ‘대원군파’는 세도정치기 실무를 담당했던 전통적 명문 출신 관료층과 대원군에게 개인적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수의 인민이 참여하는 하원(下院) 대신 상원(上院)만을 설립하는 형태의 입헌제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망명자 집단의 국내 입헌군주제 논의 주도 배경이들 일본 망명들은 입헌군주제를 매개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국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였다. 이들은 두 가지 사항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는데, 첫째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화군(義和君)을 옹립할 것, 둘째는 상기 정변을 1898년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망명자 집단은 이름처럼 한낱 망명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국내에 미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일본 망명자 집단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들의 뒤에는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듯 러일전쟁 이전 한국의 개화지식인은 민족이 아닌 인종을 단위로 독립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인사들은 대체적으로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에 일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망명자 집단을 비롯한 개화지식인이 중요하게 의식했던 일본이란, 결코 일본 정부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일본 망명자 집단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당대 복잡다단했던 일본의 정치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망명자 집단이 상대했던 여러 개의 일본한국의 개화지식인 대다수는 갑오개혁 당시 일본 정부의 강압적 내정간섭의 재연을 우려했지만 한편으로는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면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모방해야 하며, 일본의 도움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견 모순적 태도를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모순적이지 않았다. 갑오개혁 당시 한국 내정을 심각하게 침해했던 일본은 번벌(藩閥) 세력이 장악한 일본 정부였다. 갑오정권은 이미 비번벌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정부의 대한강경책을 불식시키고자 한 바 있었다. 요컨대 일본 망명자 집단 및 국내 입헌군주제 세력은 일본의 여러 정치세력과 선택적으로 제휴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독립협회운동의 전개 역시 동시기 일본의 정당정치(政黨政治) 발달과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특히나 1898년 6월에서 11월 말에 이르는 때는 일본에서 번벌 세력을 대신하여 최초의 정당 내각(제1차 오쿠마 내각)이 등장했을 때였으며, 동시기 국내에서는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의 격렬한 대정부 투쟁이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배후에는 일본 망명자 집단의 활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망명자를 비롯하여 국내 입헌군주제 세력에 호의적이었던 일본의 정당 내각은 1898년말 붕괴했다. 재차 일본에는 번벌 내각(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동시에 한국 정부는 독립협회 해산 및 만민공동회를 진압해버렸다. 독립협회운동의 종말 역시 일본 정당 내각의 운명과 결부된 것이었다. 일본의 게이앤 시대(桂園時代) 개막과 일본 망명자 집단의 말로독립협회 해산 이후 고종은 중추원의 형해화, 대한국국제의 반포, 국가 권력의 내장원(內藏院) 귀속 등 일련의 반동적인 조처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반동적 조처는, 한반도 진출을 목표로 했던 일본 번벌 내각의 묵인, 내지 방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번벌 내각은 한국의 현상 유지를 통해 러시아의 진출을 막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898년에 수립된 제2차 야마가타 내각 이후 일본 정계는 점차 번벌 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900년에서 1910년대까지 일본은 번벌 정치가가 교대로 내각을 운영했던 게이엔 시대(桂園時代)였다. 일본의 번벌 세력의 신장은 곧 일본 망명자 집단을 필두로 한국의 입헌군주제 세력에게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일본 망명자 집단 및 국내 입헌군주제 세력은 일본의 정치 변동을 초조해 하며 여러 극단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그러나 국내 입헌군주제 세력과 연계한 일본 망명자 집단의 시도는 대한제국 정부에게 번번이 진압 당했다. 대한제국의 입헌과 전제군주제 논의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고종의 권력이 위축되면서 종결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서는 더 이상 전제군주제 관련 논의가 부상할 수 없었으며, 입헌군주제는 시대적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 번벌 정부는 일본 망명자 집단이 한국의 입헌군주제 세력 및 일본의 비번벌 정치세력과 연대할 것을 우려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통감부가 개설되었을 때에도 일본정부는 일본 망명자 집단의 주요 인사들의 귀국을 불허했다. 국내에서는 일진회로 대표되는, 일본 군부 및 번벌 세력에 영합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부상하였고 이는 대한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 망명자 집단의 일본 정계를 이용한 근대국가 수립 구상은, 일본 군부 및 번벌 세력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 실패는 곧 한국 지식인들에게 아시아 연대론의 허구를 직시하게 만들었으며, 민족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 수립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귀감이 되었다. 민족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 구상 속에서도 군주제에 대한 환상이 더 이상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곧 갑오개혁 이래의 일본 망명자 집단의 활동의 유산이라 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