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4년 7월(통권 53호)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
- 4~5세기 백제 사람들의 바다 도전기 -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지구의 다른 동물들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는 ‘그릇’이다. 인간은 약 1만 년 전부터 ‘흙’을 빚고 ‘불’에 구워서 ‘그릇’을 만들었다. ‘그릇’이 등장한 이후, 탕, 국, 찜 등 각종 요리법과 술, 김치 등 각종 발효 식품이 가능해졌고, 계절의 주기에 따라 수확한 농작물을 저장하여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농경사회의 삶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도자’는 ‘도기’와 ‘자기’를 통틀어 말하는 ‘그릇’으로, 흙을 빚고 유약을 입혀 불에 구워 만든다. 특히 1,300도 전후의 엄청난 고온에서 구운 ‘자기’는 원재료부터 고온을 내는 기술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해야 했으므로, 극히 적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가품이었다.
중국에서는 진‧한대부터 초기 청자를 만들었으며, 강남지역의 오, 동진, 송,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육조시대’에 청자의 제작 기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화북지역의 북조 영역에서도 도자를 만들었지만, 양쯔강 하류의 강남지역에서 만든 청자가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뛰어났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온에서 구운 경질토기를 사용하였고, 신라 중‧하대 이후로는 도기의 사용이 증가하였다. 9세기 말~10세기 초부터는 중국 강남지역의 영향 속에서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조선시대에 ‘청자’, ‘백자’의 제작이 본격화되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 고대 한국에 살던 사람들은 ‘도자’를 사용할 수 없었을까? 같은 시기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다양한 청자가 유행하고 있었다. 고대인들도 기왕이면 더 좋고 비싼 그릇을 탐냈을 것이다. 지금도 혼수 1순위는 바다를 건너 들어온 다양한 도자 그릇이다. 그런데 고대 한국과 강남지역 사이에는 황해가 놓여 있다. 고대인들이 중국 강남지역의 청자를 들여오려면, 위험한 바다에 도전해야만 하였다.
2.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들
위험한 바다에 도전하여, 고대 한국에 들어온 중국 도자가 있었을까? 한국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주로 백제 땅에서 다양한 중국 도자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러한 중국 도자가 집중된 곳은 백제의 첫 수도가 위치하였던 한강 유역의 한성 일대였다. 2020년 기준으로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온 중국 도자만 284점이다.1) 2012년 기준으로 백제 비도읍권 출토 도자가 44개체, 공주 11개체, 부여 37개체이고,2) 그 이후 출토 사례를 합치면 백제 지역 출토 중국 도자는 400여 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의 수량은 같은 시기의 고구려, 신라, 가야, 왜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다.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백제 지역 출토 중국 도자의 범위는 시간적으로 4~5세기 백제 한성기를 중심으로 한다. 물론, 6~7세기에도 중국 도자가 확인되지만, 많은 수가 4~5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공간적으로는 백제 한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포함한다. 이러한 도자는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모두 정식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으므로, 고고학적 방법론을 통해 도자의 제작 및 매장 연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도자는 완형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파편으로 나온 사례도 많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여러 편의 도자가 1개체로 복원되면, 수량을 1점으로 파악하였다.
아래에서는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를 지역별, 유적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많은 도자가 집중된 곳은 백제의 한성, 즉 한강 하류 일대이다. 이 지역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과 하남 감일동 유적 등에서 다양한 중국 도자가 출토되었다. 2024년 7월 기준으로 유적별 출토 수량을 살펴보면, 풍납토성 204점, 몽촌토성 80점, 석촌동 고분군 42점이며, 최근 몽촌토성 인근의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부지에서도 1점이 확인되었고, 하남 감이동‧광암동 유적에서 2점, 하남 감일동 유적에서 2점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한성에서 나온 중국 도자는 모두 331점에 달한다.
백제의 지역에서 나온 도자는 주요 강의 수계를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먼저, 한강 유역과 안성천 유역에서는 원주 법천리 유적의 양형청자 1점을 비롯하여, 오산 수청동 유적 1점 등 총 2점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금강 유역과 충남 서해안 지역에서는 천안 용원리 유적 4점, 화성리 유적 1점, 공주 수촌리 유적 5점, 서산 부장리 유적 1점, 홍성 신금성 유적 1점, 익산 입점리 유적 1점 등 총 13점이 확인되었다. 특히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는 흑유계수호(흑색 유약 빛이 나는 닭 머리 모양의 호)를 비롯한 다양한 호와 완(잔)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영산강 유역과 전북 서해안, 전남 남해안 일대는 이른바 ‘영산강 유역 정치체’의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지역인데, 부안 죽막동 유적 3점, 고창 봉덕리 유적 4점, 함평 금산리 방대형고분 8점, 함평 마산리 고분 7점, 영암 내동리 쌍무덤 1점, 영암 옥야리 유적 1점,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7점, 해남 용두리 고분 7점 등 총 38점의 중국 도자가 나왔다. 부안 죽막동의 해양 제사유적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덤에서 완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1점씩 발견되었으며, 함평, 영암 등의 고분에서는 고분 정상부에 파편 형태로 묻힌 사례도 있다.
그 외에 백제 ‘영역’이 아니지만, 고령 가라국(대가야)과 백제의 경계에 해당하는 남원 월산리 고분에서 1점, 함안 안라국(아라가야)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에서 1점의 중국 도자가 추가로 나왔다.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는 유적의 성격, 입지, 출토 도자의 기종 등을 기준으로 <별표1>과 같이 정리하였다. 유적의 성격은 주거, 저장, 폐기, 제사, 무덤, 기타 등으로 분류하였고, 입지는 연안과 내륙으로 크게 구분하였다. 연안은 과거 해안선이나 큰 하천의 감조구간 등을 폭넓게 고려하여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풍납토성, 몽촌토성은 현재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밀물이 한강을 따라 서울 전역으로 들어왔고, 조선시대 해선이 서울 각지의 포구에 자유로이 입출항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안으로 분류하였다. 고창 봉덕리 유적은 현재 해안선에서 12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줄포만의 과거 해안선을 고려하여 연안에 분류하였다. 유적의 성격과 입지 조건은 관련 여부에 따라 1과 0으로 표시하였다. 출토 도자의 기종은 시유도기, 전문도기 등을 ‘시유도기’로 종합하였고, 반구호, 계수호, 이부호, 병 등을 ‘호’로 종합하였으며, 완, 잔 등을 ‘완(잔)’으로 하고, 그 외에 벼루, 기타(양형청자 등)로 구분하였으며, 유적별 출토 수량을 숫자로 표현하였다.
<도면1> 원주 법천리 2호 석실 출토 양형청자와 중국 사례 (축척부동)
<도면2> 공주 수촌리 고분군 출토 흑유계수호와 중국 사례 (축척부동)
<도면3> 영암 내동리 출토 중국 도자와 유사사례(축척부동)
3. 백제 지역 출토 중국 도자의 네트워크 분석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는 386점(남원, 함안 2점 포함)에 달한다. 여기에 유적의 성격이나 입지 조건 등의 데이터를 더하면, 중국 도자 관련 데이터는 연구자의 직관에 의존하기에 다소 어려운 규모가 된다.
이러한 방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데이터는 ‘네트워크 분석(Network Analysis)’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접목하기에 적합하다. 네트워크 분석은 사회학에서 사회 네트워크 분석(Social Network Analysis, SNA)으로 널리 활용되는 방법론으로,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시각화하여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10) 네트워크 분석에서 분석 대상은 노드(nodes), 액터(actors) 등으로 불리고, 이들 사이의 연결은 링크(links), 라인(lines) 등으로 불린다. 네트워크 분석은 노드와 링크로 행렬을 만들고, 행렬을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국내의 고고학계, 고대사학계에서도 ‘네트워크 분석’ 방법론을 접목한 연구가 2019년 무렵부터 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청동기,11) 신석기,12) 낙랑고분,13) 영산강 유역14)
등의 데이터에 관한 네트워크 분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는 사료가 아닌 연구 동향이나15) SNS 및 교과서의 역사인식16) 등을 대상으로 네트워크 분석이 시도되었으며,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촌 이름 데이터,17) 고대 동아시아의 교섭 데이터18) 등의 사료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적 연구도 제출되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발굴을 통해 확인된 중국 도자라는 물질자료 데이터에 대해 네트워크 분석 방법을 시범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유적의 성격과 입지, 유물의 기종, 출토 맥락 등의 복잡한 정보를 구조화 및 시각화하여 이해하려면, 네트워크 분석의 방법론이 적합할 것으로 판단된다. <별표1>로 제시한 데이터는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를 출토 맥락, 유적 성격, 기종 분류 등 다양한 기준으로 연구자가 별도 작업한 행렬이다. 데이터는 발굴 보고서 등을 기준으로 추출하였으며, 출토 맥락과 파편의 복원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데이터의 신뢰도를 초보적으로 검증하였다.
이러한 데이터 행렬은 Ucinet 6.730 프로그램과 이에 연동된 Netdraw 프로그램을 통해 시각화하였다. 아래의 그래프는 중국 도자 데이터의 관계를 시각화한 그림이다.
<그림1> 유적별 중국 도자 데이터의 시각화
위의 그래프에서 화살표의 굵기는 시유도기, 호, 완 등의 출토 수량에 비례하여 표현하였으며, 입지(연안, 내륙)와 유적 성격(주거, 저장 등)은 관련 여부에 따라 유적과 화살표로 연결하였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노드는 도자가 출토된 백제 땅의 유적들이며, 남원과 함안의 경우에는 짙은 붉은색으로 표시하였다. 노드의 위치는 지도상의 유적 위치를 최대한 고려하고자 하였으나, 그래프의 시각화를 위해 일부 조정하였다.
분석 결과, 시유도기 기종은 ‘연안’의 유적에서만 발견되고, ‘내륙’의 유적에서는 1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시유도기 노드는 왼쪽 중앙, 연안 노드는 왼쪽 아래에 위치하며, 여기에 연결된 연안 유적들도 주로 왼쪽 혹은 아래쪽에 있다. 풍납토성의 경당지구, 미래지구 유적은 시유도기 연결도가 최대이며, 실제로 완형의 시유도기가 집중 출토되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호, 완도 함께 발견되었다.
주거, 저장, 폐기 등 생활 유적에서는 대체로 시유도기가 집중되는 동시에, 호, 완, 벼루 등이 골고루 확인되었다. 따라서 시유도기 노드의 위치를 고려하여, 생활 유적의 성격을 갖는 노드는 왼쪽 위, 아래에 배치하였다. 반면, 고분 유적에서는 대체로 호, 완이 출토되었으므로,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석촌동 고분군 외에 호와 완이 동시에 출토된 지방의 사례는 공주 수촌동 4호 석실과 함평 금산리뿐이다. 시유도기는 석촌동 2호분과 영산강 유역의 일부 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이러한 그래프와 앞장의 분석을 종합하면,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주거, 저장 등을 위한 생활 유적은 시유도기와 같은 대형 옹이 집중되는 동시에, 호, 완(잔)도 나오고, ‘연안’ 범주에 포함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같은 중앙의 유적에서는 지방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수량의 도자를 사용하였다. 대형 옹은 액체류를 비롯하여 음식을 저장하는 용도였을 가능성이 있고, 호와 완(잔)은 이를 먹기 위한 그릇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귀족문화가 발전하고 있었고, 술이나 차를 마시면서 도자를 활용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백제 중앙의 지배층은 이러한 문화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중국 도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무덤 유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호, 혹은 완(잔)이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1점씩 부장되었으며, 많아도 3~4점 이내였다. 다만, 중앙의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수십 점의 호가 부장되었다. 시유도기는 지방 무덤 중에 영산강 유역의 무덤에서만 확인되었는데, 대체로 분구의 정상부나 주변에서 파편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백제 중앙의 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사례와 차이를 보인다. 지방 무덤을 만든 수장은 주변의 다른 세력과 달리 중국 도자를 입수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다가, 무덤에 함께 묻었거나, 의례용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중국 도자가 확인된 유적은 연안에 집중되었는데, 모두 37개소에 달한다. 백제 중앙의 풍납토성 등 유적은 한강을 통해 황해로 연결되었고, 서산, 홍성, 부안, 익산, 함평, 영암, 해남, 고창 등도 황해 연안에 인접하였거나, 금강, 영산강 등을 통해 바다에 쉽게 연결되었다. 함안 말이산 고분도 바닷가에 인접한 입지로 분류된다. 내륙의 경우, 8개 유적에서 중국 도자가 나왔는데, 한강, 금강 유역에 밀집해 있다. 남원 월산리 고분은 남강 수계인 동시에, 운봉고원 서쪽으로 섬진강에 연결된다. 즉, 내륙 유적에서 중국 도자가 나온 사례는 연안 입지의 유적보다 4~5배 정도 적지만, 대부분 큰 하천 유역에 위치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한성기 백제의 중앙에 해당하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에서는 백제 지역에서 나온 거의 모든 종류의 도자가 출토되었으며, 수량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액체류 등의 저장 용도로 활용된 시유도기부터 호, 완(잔), 그리고 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벼루까지 확인되었다. 백제 중앙의 지배층은 바다 건너 들여온 중국 도자를 본래 용도와 문화에 맞도록 활용하였다. 지방에서는 무덤에서 완형의 호, 완(잔)이 1점 정도 출토되었으며, 호와 완이 함께 출토된 사례는 희박하였다. 즉, 지방의 수장은 강남지역의 도자 문화를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였고, 도자를 입수한 뒤에 아껴서 보관하였다가, 무덤에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수행한 분석은 백제 지역에서 나온 중국 도자 데이터를 단순히 시각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유사도 분석, 클러스터링 분석 등을 활용하여, 도자 출토 유적 사이의 유사성과 상호관계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백제 지역 출토 중국 도자는 왜, 어떻게 바다를 건너 수용, 확산되었을까? 당시 바다를 건너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한 도전이었다. 백제 사람들은 왜, 어떻게 그러한 도전에 나선 것일까?
4. 바다를 건너온 중국 도자, 다시 바다로 나아가다
기본적으로 중국 도자의 수용과 확산에는 바다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 강남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가 화북지역과 고구려를 거쳐 육로로 운송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들은 대부분 황해를 건넜을 것이다. 또한 지방에서 나온 중국 도자는 대체로 연안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므로, 깨지기 쉽고 값비싼 중국 도자는 바다를 통해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도자가 왜, 어떻게 백제로 전해졌는지에 관한 질문에 답을 하려면, 4~5세기 이전 동아시아 해양 교통의 시스템을 살펴보아야 한다. 3세기까지 동아시아는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육상 지표물을 눈으로 확인하여 연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연결된 구조였는데,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이라는 외교 형식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이어졌다.
한강 유역에서 성장한 백제도 3세기까지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주변 마한 소국의 대외교섭권을 장악하면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는 3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의 극심한 정세변동으로 인하여 변화를 맞이하였다. 중국의 서진은 3세기 말부터 내부 혼란에 빠져, 4세기 초에 멸망하고, 강남지역의 동진이 한족 왕조의 전통을 이었다. 화북지역에는 이른바 ‘5호 16국’ 시기가 시작되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였고, 이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이 첨예하게 이어졌다. 그 결과, 3세기까지 동아시아 세계의 연결망으로 작동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는 경색되었다.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의 연대와 관련하여, 시유도기의 경우에 약간의 논쟁이 남아있지만, 대체로 4세기 중후반 이후에 제작된 동진, 송 등의 강남지역 도자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4세기 중후반 이후, 백제와 강남지역 동진 사이에 새로운 해양 교류의 시기가 다시 펼쳐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경색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다시 살린 것일까? 하지만 백제의 북쪽으로 적대국 고구려가 있었고, 이어지는 랴오둥과 산둥반도에는 동진과 대립하는 여러 유목민 왕조가 있었다. 백제 혹은 동진의 선박이 이러한 적대국 연안에서 안정적인 보급을 받고, 복잡한 해양 지리정보를 확인하고, 선원들이 휴식할 기항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
백제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항로를 통해 동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된 이후, 이 지역의 주민 중 일부는 그대로 남아서 바다 건너 동진과 계속 교류하였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산둥반도와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하면, 이들은 황해도와 경기만 일대에서 황해 중부를 횡단하여 산둥반도로 향하는 황해중부횡단항로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 낙랑, 대방 세력 중 일부는 백제로 남하하여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백제의 대중국 외교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황해중부횡단항로라는 새로운 항로의 운용에 필요한 경험, 기술, 정보를 전하였을 것이다.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와 대립하면서,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적어도 황해도 남부까지 진출하여 영역으로 삼았다. 황해도 남부는 한강 유역의 백제에서 황해중부횡단항로를 활용할 때,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372년에 백제는 ‘백제왕’의 이름으로 동진과 ‘조공-책봉’ 관계를 처음 맺었다. 백제와 동진의 교섭이 백제의 적대국, 동진의 적대국을 경유하는 장거리 연안항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4세기 후반 무렵에 빈번하게 백제와 동진의 교섭이 이루어지다가, 4세기 말부터 빈도가 급감하였다. 4세기 말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황해도 남부를 상실하고, 한강 하구까지 봉쇄당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아마도 황해도 남부의 장악과 상실이라는 정세 변동이 황해중부횡단항로의 안정적 운용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백제는 봉쇄된 한강 하구를 피해 화성 일대를 새로운 출발지로 주목하였는데, 실제로 금동관, 금동신발이나 각종 백제 유적은 4세기 후반 무렵부터 화성 일대에 확산되었다. 백제는 5세기 전반부터 송과도 교섭을 이어 나갔는데, 비록 동진과 가장 빈번하게 교섭하였을 때의 빈도를 회복하지 못하였지만, 고구려를 견제하고,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송과의 교섭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송과의 교섭도 역시 황해중부횡단항로를 통해 이어졌다.19)
4세기 후반의 백제는 대규모 풍납토성을 축조하고, 석촌동 고분군을 조영하는 동시에,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동진과 교섭할 정도로 중앙의 왕권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은 중국 도자라는 새로운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소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가 4~5세기에 대부분 수도 한성에 집중된다는 점, 웅진기와 사비기에도 공주와 부여에 집중된다는 점은 도자의 주요 소비처가 백제 중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지방에는 ‘왜’ 도자가 확산되었을까? 중국 도자가 확인된 지방 유적은 연안 또는 내륙 수운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 지역의 세력을 압도하거나 우위를 가진 세력의 무덤이라는 특징이 있다. 백제는 이러한 지역에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자라는 새로운 물건을 보내주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였다. 백제가 원했던 것은 지역 세력의 복속과 군사적 지원이었으며, 지방 세력은 백제로부터 도자를 비롯한 ‘위세품’을 받아서 주변 세력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국 도자는 대부분 연안 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도자의 확산은 서산, 익산, 고창, 함평, 영암, 해남을 거쳐, 백제 영역 밖의 함안까지 이어졌다. 중국 도자가 강남지역을 떠나, 백제 중앙을 거쳐, 한반도 서남해안을 따라 확산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중국 도자가 바다를 건너왔는지에 관한 질문, 즉 중국 도자의 수용과 확산 경로에 관한 질문과 이어진다. 앞서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황해중부횡단항로라는 새로운 항로로 동진과 교섭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백제 남쪽의 옛 마한 세력을 비롯하여, 가야, 왜 등의 세력들은 3세기까지 중국과 연결되던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의 경색 상황에서, 중국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 백제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새로운 경로로 중국과 교섭하면서, 도자와 같은 새로운 문화와 물건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값비싼 물건은 연안항로를 따라 서남해안 일대로 확산되었다.
백제는 서남해안 연안항로의 여러 세력을 군사적으로 모두 정복하고, 영역으로 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중국 도자와 같은 새로운 물건을 매개로 하여, 요충지의 중요한 세력들을 장악하고, 서남해안 연안항로를 네트워크 형태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바다를 건너 백제 중앙에 수용된 중국 도자는 백제의 필요, 연안 세력의 필요에 따라 다시 바다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러한 질서는 백제가 모든 연안을 직접 지배하면서 구축된 질서가 아니었고, 지방의 여러 세력이 다원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였다.
4~5세기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는 황해중부횡단항로라는 새로운 항로로 백제에 들어왔으며, 다시 서남해안 연안항로를 통해 지방에 확산되었다. 백제 중앙은 중국 도자와 도자를 향유하는 문화를 수용할 만큼 충분히 성장하였으며, 지방에 확산시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중국 도자를 다수 수용하였다. 지방의 여러 세력은 주변 지역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고, 백제를 통해 중국까지의 네트워크에 연결되기 위한 목적에서, 백제 중앙으로부터 도자를 받아, 귀중하게 다루었고, 자신의 무덤에 중요한 부장품으로 묻었다. 특히 도자가 출토된 지방 유적들은 서남해안 연안항로의 요충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도자는 연안항로를 통해 한반도 서남해안의 연안 세력들에게 확산되었다.
5. 나가며
백제 지역에서 나온 중국 도자 중에는 지금 집에 놓고 사용해도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튼튼하고 아름다운 도자가 많다. 요리와 술에 관심이 많은 필자 같은 사람에게, 대형 시유도기 옹, 계수호, 잔 등의 도자 세트는 그 자체로 흥미의 대상이 된다.
학문적으로는 그러한 도자에 어떠한 물질이 담겨있었는지, 정확히 어떤 용도로 활용했는지 추정하기 쉽지 않다. 다만, 흥미를 위해 상상해 보면, 중국 강남지역의 도자를 사용하는 귀족 문화와 백제 지역의 문화 사이에 하나의 공통점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술’이다.
《주서》 백제전에는 오곡, 과일, 채소 등과 더불어 ‘술(酒醴)’이 중국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남조계 사서와 《수서》, 《구당서》 등에도 중국과의 문화적 친연성을 언급한 기록이 많다. 기존 연구에서도 백제가 중국 강남지역의 귀족문화 가운데 술이나 차 문화를 수용하고, 그와 연계하여 도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백제 중앙의 지배층은 강남지역에서 비싼 술을 대형 옹에 담은 채로 수입해서, 닭 머리 모양의 주전자에 담고, 예쁜 청자 잔에 따라서 마셨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맛있는 저장 음식을 대형 옹에 담아 실생활에서 활용했을지도 모른다.
백제는 도자라는 첨단 그릇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까지 수용하기 위해서, 위험한 바다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백제인들이 단순한 욕망 때문에 바다에 목숨을 건 것은 아니었다. 백제인들은 바다 건너 도자를 들여오고 나서, 다시 바다를 통해 연안항로의 요충지마다 도자를 보냈다. 이것은 백제가 경색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회복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백제 땅에서 나온 중국 도자가 모두 백제 선박에 실려, 백제인 해양기술자에 의해, 백제로 유입되었을까? 당시 동아시아의 조선술, 항해술 발전과정을 고려하면, 중국 동진, 송 등의 선박을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중국은 이미 4~5세기 이전에 발전된 형태의 구조선을 활용하고 있었다. 백제는 중국의 선박을 활용하거나, 혹은 그러한 기술을 받아들여 바다에 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남지역의 도자는 백제 외에 베트남 등 바다로 연결되는 다른 지역에서도 선호하는 물건이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도 강남지역에서 제작된 도자가 확인된다. 백제 땅에서 나온 강남지역 도자는 중국, 베트남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해양 네트워크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백제는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보편적인 기술, 문화 속에서 중국 도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다시 바다로 확산하는 역할을 하였다.
<별표1> 백제 지역 출토 중국 도자의 유적 성격, 입지 및 도자 기종별 데이터 행렬 (2mode)
<미주>
1) 한성백제박물관, 2020, 《한성백제 유물자료집Ⅰ 서울 백제유적 출토 외래유물》.
2) 임영진, 2012, 「中國 六朝磁器의 百濟 導入背景」, 《한국고고학보》83.
3) 국립공주박물관, 2011, 《中國 六朝의 陶磁》, 86쪽.
4) 국립공주박물관, 2011, 앞의 책, 67쪽. (南京市 象山 출토)
5)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公州 水村里遺蹟》
6) 난징박물원 소장품 직접촬영 (蘇州市 昊中區 楓橋 출토)
7) 진장시박물관 소장품 직접촬영 (鎭江市 陽彭山 東晉城墓 출토)
8) 이범기, 2021, 「영암 일대 방대형분의 축조배경과 대외교류」, 《영암 내동리 쌍무덤 사적지정을 위한 학술대회》, 35쪽 사진40.
9) 이범기, 2021, 앞의 글, 26쪽, 그림14.
10) 김용학, 1987, 「사회연결망 분석의 기초개념-구조적 권력과 연결망 중심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58 ; 2003~2004(개정판), 《사회 연결망 이론》, 박영사 ; 2003~2016(초판~제4판), 《사회 연결망 분석》, 박영사.
11) 강동석, 2019, 「지석묘사회의 네트워크 구조와 성격 검토」, 《한국상고사학보》105.
12) 홍은경, 2019, 「한국 신석기시대 사회관계망분석(SNA)을 위한 예비검토」, 《고고학》18-3.
13) 고일홍, 2022, 「네트워크 시각화와 고고학 자료의 활용 – 낙랑고분의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79-1.
14) 박준영, 2022, 「역사・고고학 연구를 위한 네트워크 분석 방법론의 활용 가능성 -고대 영산강유역과 가야 권역 출토 구슬 자료를 중심으로」, 《인문논총》79-1 ; 허진아, 송원근, 2022,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한국고고학보》123.
15)고일홍, 2020, 「북한의 발해 연구사 서술을 위한 새로운 접근-북한 학술지 목록화 사업 결과물을 활용한 내용분석」, 《인문논총》77-4 ; 서호준, 2021,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대구사학》144.
16) 정선화, 2022, 「SNS 기록을 통해 본 대중의 가야 인식 -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78 ; 2022,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가야사 인식과 이미지텔링 -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164.
17) 임동민, 2022, 「네트워크 분석과 한국 고대사 연구의 접목 가능성 - 함안 성산산성 목간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97.
18) Lim, Dongmin, Exploring a New Methodology for Studying Korean Ancient History Using Network Analysis: Focusing on negotiation data from the Eastern Jin and Sixteen Kingdoms to the Song and Northern Wei period,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28 No.2, 2023.
19) 이상의 항로 관련 서술은 다음을 요약한 것이다(임동민, 2016, 「백제와 동진의 교섭 항로」, 《백제학보》17 ; 2018, 「《晉書》 馬韓 교섭기사의 주체와 경로」, 《한국고대사연구》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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