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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경 톺아보기①] 공간의 위계성_이동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7.30 BoardLang.text_hits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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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7월(통권 53호)

[신라왕경 톺아보기

신라왕경 톺아보기①: 공간의 위계성

 

 

이동주(고대사분과)

 
 
 
왕경은 한 국가의 수도를 의미한다. 집권층의 의지가 작용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게 된다. 왕경의 변화상을 톺아보기 위해서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변동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한다. 국가의 쇠퇴가 지방에서 시작되더라도 그 여파는 반드시 수도에 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왕경을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 변화의 흔적이 남게 되는 이치랄까. 
 
여기서는 ‘신라 왕경의 경관’이란 비단을 짜내기 위해 씨줄 곧 시간의 중심은 중고기부터 하대까지를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그리고 날줄 곧 공간은 현재의 경주시의 영역을 다룰 것이다. 베틀에 앉아 부단히 끌신을 움직이며 쉼 없이 종횡하는 북과 바디를 통해 남사스럽지 않게 직조된 비단이 나온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한번 수도면 영원한 수도인가

 
우선 고대도시를 들여다 보기에 앞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서울을 바라보자. 2002년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수도권 과밀화 해소,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완화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골자로 한 ‘신행정수도’를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서울과 경기권의 인구집중과 도농 간 격차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취임 이후 2003년 12월 29일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 조치법(신행정수도법)’이 투표의원 194인 중 167명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낙후된 지역 경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이전 정부부터 수도 입지로 최적화라고 평가한 공주 일대를 신수도 후보지로 정하였다. 대법원, 헌재 등 사법부와 중앙정부청사 등을 이전시키기로 결정한다. 이제 주요 행정부처를 이전할 법적 근거를 갖춘 셈이었다.
 
 
그림 1. 대한민국 인구 카토그램 2010 
출처 :https://worldmapper.org/wp-content/uploads/2018/04/Grid_WPA_kor_2010.png. ⓒCC BY-NC-SA 4.0)
대한민국의 수도권 인구 과밀화현상은 역대 정권에서 수도이전의 주요한 논거가 되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림 2. 지자체 소멸 위험지역
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수도권 인구 과밀화 현상이라 적고 지자체 소멸이라 읽는다. 
 

그런데 신행정수도법에 대한 위헌심판이 제기되었다. 청구인은 서울특별시에 주소를 둔 시민과 그 외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국민 168인이었고, 대리인은 법무법인 신촌이었다. 청구인의 주장은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불문헌법이며,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130조에 명시된 국민투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수도이전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재정투자의 우선순위가 도외시되어 납세자의 권리가 침해될 점. 적법절차의 청문회를 거치지 않아 국민 청문권이 침해된 점. 청구인 중 서울특별시 의회의원과 공무원들은 수도이전에 따른 공무담임권과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할 점. 수도이전에 따른 청구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 및 행복 추구권이 침해할 점 등을 골자로 위헌을 주장하였다.  
 
2004년 헌법재판소 윤영철 소장을 포함한 7명의 재판관은 세종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법적 근거를 위헌으로 판결하며 기념비적인 명대사를 남겼다.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확립된 관습헌법"
 
 
한 국가의 수도를 옮기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법률로써 수도를 이전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위헌판결의 논지는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법이 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헌법재판소에서 판례의 근거가 된 자료는 무려 조선 성종대(1467년) 편찬된 《경국대전》이었다. 이 법전에는 吏典 하부에 한성부조를 넣어 京都로, 개성부조는 舊都로 명시해 놓았던 것이다.1) 이런 논리는 예컨대 ‘우리말이 한국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항들은 헌법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관념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에 다름 아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ㆍ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란 법안으로 계승한 이른바 ‘행복도시법’으로 정책을 틀었고, 도시 이름을 세종시로 확정하게 된다(2006년 12월). 바통을 이어 받아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였다. 2010년 민관합동위원회 세종시 발전 방안을 발표하게 되는데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도시 성격을 행정 중심에서 교육과학중심으로 바꾸며, 이를 위해 자족 용지 비율을 6.7%에서 20.7%로 확대하고, 산업ㆍ대학ㆍ연구기능의 국제 과학 비즈니스 벨트를 거점지구로 지정하며, 대기업 유치하여 고용 인구 증가를 도모하고자 함. 
 
 
이 법안은 세종시의 본 취지인 국가 균형발전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수 있으며, 국가 정책 사업으로서 신뢰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는 우려로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결국 세종시는 2008년 12월 ‘1단계 1 구역 기공식’을 시작으로 2012년 11월 1단계, 2013년 11월 2단계, 2014년 11월에 3단계(세종2 청사 포함)까지 준공을 완료하게 된다. 아울러 부족한 사무 공간 확보를 위해 정부세종 신청사 건립계획을 수립하였고,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을 2020년 4월 착공하여 2022년 10월에 준공, 23년 3월 행정안전부 및 기획재정부가 입주하여 현재 22개의 중앙행정기관과 16개 소속기관 등이 있다.
 
 
그림3. 세종 정부청사 전경.
출처: ⓒ정부청사관리본부.
‘열린 청사, 국민에게 열려있고 귀담아 듣는 청사’를 모토로 설계되었다.
 

사실 세종은 소외된 충청권의 민심을 달래는 당근으로 곧잘 소환된다. 최근 김종민 새로운 미래연대 의원이 2024년 7월 16일 발의한 ‘행복도시법’ 개정안은 대통령집무실 설치 규정을 강행 규정으로 변경하는 내용을 담았고, 이전 시한을 2027년 5월 29일로 명시하였다.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사실 비좁은 서울을 이전하려는 천도의 역사는 오래다. 가령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대전을 행정부수도로 만들어 균형 있는 국토개발을 필연코 이룩하겠다는 공약을 하였다. 그리고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을 임시행정수도로 확정 지어 50~100만이 수용가능한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10.26 사태로 백지화되었다. 이후 전두환 정부는 정부 기능을 대전에 분산하겠다는 의지를 비쳤으나, 전매청을 신탄진으로 이전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는 대전을 제2의 수도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이는 결국 정부대전청사, 곧 제3정부종합청사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가 과밀화되었고, 정부의 행정력이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 도농 간의 격차가 심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정치권에서는 이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수도는 고정불변의 성질을 가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수도를 이전하려는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 집권층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 수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수도의 선정은 항상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며, 그 공간적 위치에 의해 처음부터 수도가 될 운명을 가진 도시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상기된다.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의 이전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은 철저히 정치적인 결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시대를 올려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천도를 살펴보자. 수문제는 한 대 이래 사용해 온 장안성에서 정무를 보지 않고 새로이 대흥성을 건설하였다. 《수서》나 《책부원구》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3)
 
 
군사와 치안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왕조 의례를 효과적으로 연출할 필요성 때문이다. 
옛 장안성 건축물이 낡았기 때문이다. 
옛 장안성의 자연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앙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한편 한국 고대 국가들도 다양한 원인에 의해 천도를 단행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방경영과 관련된 평양천도, 백제 개로왕의 비참한 죽음과 한성 함락, 그로 인한 웅진천도. 아울러 백제 성왕이 중흥을 꿈꾸며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며 단행한 사비천도 등 다양한 사례가 확인된다. 신라의 경우도 비록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신문왕이 달구벌로 천도를 시도한 사례까지 천도의 역사는 유구하다. 

천도의 목적은 다양했다.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집권세력이 의도적으로 공간을 이동시키고자 했단 점에서 어느 곳이나 수도가 될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천도의 후보지로 낙점된 지역이 처한 자연지리적인 환경 등도 중요한 평가 요소였을 터이다. 100여 년 전 일본인 학자는 경주가 처한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세가 수도로 기능하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보았다.4)
 


공간이 가진 위계성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수도란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다시 말해 인간에게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과 공간의 상관성을 이해하기 위해 두 편의 영화를 보도록 한다. 2013년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설국열차는 프랑스 웹툰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기상 이변으로 빙하기를 맞이한 지구. 인류 마지막 생존구역인 설국열차는 17년째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그림4.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각 객차에는 등급화된 인간들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윌포드라는 절대자가 설계한 열차는 머리칸, 중간칸, 꼬리칸으로 구성되며 각 구역에는 등급화된 인간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각 구역별 인간의 생활은 복장에서 말해주다시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꼬리칸의 인간들은 불가촉천민 정도에 해당하며 식량으로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공급받는다. 때로는 머리칸 사람들의 삶을 보조하기 위한 악기 연주자, 청소부 등으로 차출되기도 한다. 일정 정도 키에 도달한 어린이들을 부모의 동의 없이 머리칸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불편하지만 이 아이들은 기차의 낡은 부품을 대신하는 소모품이었다.
 
중간칸은 주로 열차 내 질서유지를 위한 무장 병력이 차지하고 있다. 아마 꼬리칸 인간들이 머리칸으로 넘어가려는 폭동을 무력으로 잠재우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칸에는 선택된 인간들이 호화롭게 온실칸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술과 마약에 취해 뒹굴기도 하고, 고급스러운 복장의 어린이들이 세뇌교육을 받기도 하는 공간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머리칸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한다. 머리칸은 윌포드가 설계한 열차의 가장 핵심적인 엔진이 안치된 공간이다. 여기서 엔진은 서구의 산업혁명의 성과물인 증기기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인간들의 심성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서구의 마인드에서 머리칸은 가장 위계가 있는 공간이다. 가장 앞쪽은 목숨을 담보로 성취할 가치가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 된다. 
 
한편 2019년 개봉한 기생충 역시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서울의 반지하에 사는 김 씨 가족과 언덕에 위치한 고급저택에 사는 박사장 가족을 중심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기택의 아들 기우가 박사장의 딸의 영어 과외 교사로 고용되며, 일가족이 연쇄적으로 박사장의 집에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가정부를 쫓아내면서 집 지하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고 사건은 위험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림5.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고지대와 저지대란 위치성은 빈부 격차의 정도를 보여주는 상대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영화의 폭우 장면은 부유한 박사장과 가난한 김 씨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물이 역류하는 변기를 막고 공짜 와이파이를 찾거나 학교 강당 대피소에서 이재민들과 밤을 지새우는 등 그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김 씨 가족에게 스며든 반지하 특유의 냄새는 빈곤을 상징한다. 이에 반해 박사장은 폭우로 취소된 캠핑을 대신하여 집안 마당에 아들을 위해 인디언텐트를 치고, 부부는 넓은 거실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빈부의 격차는 고지대와 저지대란 위치에 반영되어 있다. 이 상대적인 위치는 부유와 빈곤을 구분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고지대 즉 한 마을이 조망되며 양지바른 곳은 부유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설국열차의 머리칸과는 달리 기생충에서는 고지대가 위계가 높은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서구와는 달리 동양적인 마인드일 것이다. 
 
비근한 예로 높은 곳을 선호하는 동양의 마인드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촌인 경주 양동마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 봉우리에서 뻗은 네 줄기의 골짜기가 勿자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각 산등성이에는 관가정, 향단, 서백당, 무첨당 등 각 문중의 주요 저택들이 포진하고 있다. 아울러 산자락에는 일반 민들이나 살았을법한 초가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집의 상대적인 위계를 위치를 달리하여 추구한 셈이다. 
 
 

수도를 의미하는 한자들

 
수도는 외형에서 어떤 차이를 보일까. 일단 자연촌락과는 경관에서부터 구별된다. 예컨대 수도라고 하면 랜드마크로서 권위건축물인 궁궐, 사찰, 사방이 격자형으로 구획된 도로, 집주화된 공간 등이 우선 떠오른다. 수도 곧 도시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농촌에 비해 자급자족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도시라고 하면 거주민들이 생활하기 위해 식량을 과도하게 비축할 필요가 있는 외부의존형이다. 아울러 지방에 비해 특수 기능이 발달한다. 예컨대 정치성이 집중되거나 종교의 중심지로 기능이 부각되기도 한다.5)
 
신라의 중심지인 왕경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金城, 新羅城, 斯羅, 東京, 東都, 金京 등의 고유명사가 있고, 京都, 王京, 王都, 王城, 京, 大京, 京城, 京邑, 京師, 玉京, 都, 都城, 邑, 健牟羅 등의 보통명사가 확인된다. 위 한자의 용례를 범박하게 정리해 보면 공통분모로서 京, 都, 師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각각의 한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첫째 京은 《爾雅》권 1, 釋詁편에는 ‘크다’라는 의미로 풀이되어 있고, 《爾雅》권 7, 釋丘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아주 높게 만든 언덕’으로 되어 있다. 《說文解字》에서도 ‘人所爲絶 高丘也 從高省 京象高形’이라 하여 같은 의미가 보인다. 한편 《春秋左氏傳》에는 “경은 천자의 거소를 말한다(京曰 天子之居也)”고 한다. 《日本書紀》에도 풍전국에 경이 성립되는 경위를 전하며 ‘천황이 축자에 이르러 豊前國의 長峽縣에 도착하여 행궁을 짓고 거처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곳을 경이라 불렀다(天皇遂幸築紫, 到豊前國長峽縣, 興行宮而居. 故號其處曰京也)고 한다. 천황의 거처 공간이 곧 경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 「新羅始祖 赫居世王」 조에는 徐伐에 대해서 ‘지금 풍속에 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今 俗訓 京字云 徐伐 以此故也)’라고 당대의 주석을 전하고 있다. 경을 서벌, 곧 서라벌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왕경의 정식 명칭은 金城이다. 이를 음차로 표기하면 사로나 서라벌이 되고, 훈차로 표기하면 금성이 된다. 6)
 
둘째 都는 《爾雅》권 1 釋詁편에는 어조사라고만 나와 정치적 중심지란 의미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송대 宋敏求가 찬한 《長安志》에는 여러 문헌이 정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春秋左氏傳》에 ‘邑 가운데에는 先君의 宗廟之柱가 있는 곳(邑有 先君宗廟之柱曰 都)을 都’라 하였으며, 《五經要義》에는 ‘천명을 받은 왕자가 나라를 처음 세워 도를 세울 때 반드시 중토에 세워 천지의 조화를 총괄하고, 음양이 올바르고 균형 있는 곳에 의거하여 사방을 통치함으로써 만국을 제어할 수 있다(王者受命創始建國, 入都必居中土所以總 天地之和, 據陰陽之正均, 統四方以制 萬國者也)’는 기술이 확인된다. 《古今通論》에는 ‘東南方五千里,名曰赤縣神州,中有和美鄉,方三千里,五嶽之城,帝王之宅,聖賢所居也.’라 하여 都의 구체적인 공간 이미지가 서술되어 있고, 《法訓》에는 ‘王者가 천하의 중심에서 거주하는 곳(《法訓》曰 王者居 中國何也)’이란 기술이 확인된다. 

셋째 師는 《爾雅》에서 ‘많다’ 혹은 ‘사람의 무리’라는 의미로 설명이 되어 있다. 《帝王世紀》에서 경사는 ‘천자의 畿內 사방 천리를 甸服이라 하고, 전복의 안에 있는 곳이 京師(《帝王世紀》曰 天子 畿方千里曰 甸服, 甸服之內曰 京師)’라고 한다. 그리고 《白虎通》에는 ‘경사는 무엇을 이르는가. 천리의 읍을 일컫는다. 경은 크다는 것이다. 사는 무리이다. 천자의 거하는 바가 있으므로 큰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京師者, 何謂也, 千里之邑號也. 京. 大也;師, 眾也. 天子所居, 故以大眾言之, 明諸侯, 法日月之徑千里).’ 또한 경사를 조영한 수 문제의 조칙이 《冊府元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京師는 百官의 府署이자 四海가 (마음속으로) 귀속하는(곳이니) 짐 한 사람이 홀로 소유하는 곳이 아니다(然則 京師 百官之府, 四海歸嚮, 非朕一人之所獨有)’고 한다. 《春秋公羊傳》에 ‘京師는 천자가 거주하는 곳이다. 京은 큰 것이고, 師는 많은 것이다. 천자의 거소는 필히 많고 큰 것을 말한다(《春秋公羊傳曰》京師者 天子之居也. 京者大也, 師者衆也, 天子之居必以衆大之辭言之)’고 한다.
 
따라서 수도를 나타내는 한자를 종합해 보면 ‘천하의 중심이자 王者가 거주하는 곳이며, 궁과 종묘가 있고, 많은 사람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이 된다. 그러므로 왕경은 국정을 총괄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인 면에서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루게 된다. 것은 동양의 도시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도시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차이는 서아시아나 유럽이 생활, 경제의 중심인 ‘市’를 중핵으로 성립되었다면, 동아시아의 도시는 정치와 관리의 중심인 ‘都’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7)
 
 

신은 자연을 창조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삼국이 정립하기 전 한반도에는 여러 소국이 분립된 상태였다. 진한 12국, 마한 54국, 변한 12국을 아울러 삼한시대라 부른다. 당시 여러 소국 정치체에 대한 성격을 알려주는 자료는 제한적이어서 실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하지만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목지국, 백제국, 사로국, 구야국 등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즉 사로국은 주변의 압독국, 골벌국을 압도하며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당시 세력의 정도를 가늠할 때 중요한 근거는 인구수였다. 마한의 경우 대국은 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 호수는 총 십여만호로 계수된다. 진변한의 경우 변진은 12국으로 또 작은 별읍이 있고 대국은 사오천가, 소국은 육칠백가로 호수는 사오만호 정도로 계수되었다. 그렇다면 마한의 소국과 진변한의 대국이 엇비슷한 규모라 할 수 있겠다. 앞서 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간으로서 수도의 요건에 충족된다. 다만 소국내 국읍과 읍락의 상대적인 격차는 크지 않아 정치적 통합력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한족의]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국읍에 비록 主帥가 있더라도 읍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복수의 읍락 중에 중심적인 것이 국읍이며, 읍락 渠帥 중 국읍의 거수를 主帥로 불렀던 것 같다. 국읍의 주수는 읍락의 거수와 동질적인 것으로 보인다.8) 국읍의 주수가 있더라도 상대적 우세가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읍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인 천군이 존재하였다. 제사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주수의 압도적인 권력행사는 한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국의 정치력이 성장하면서 국읍과 읍락 간의 계층화가 가시화되었다. 그 결과 주수와 거수들 간의 관계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국의 정치적 성장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읍에 조영된 토성이라 여겨진다. 국읍 이외의 읍락에는 환호나 목책 정도의 방어시설을 널리 사용했을 것이다. 백제국의 몽촌토성이나 사로국의 월성은 국읍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사실 신라 왕경인 경주지역은 전형적인 선상지이다. 그 내부를 도시로 재편하기 위해서는 물길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왕경 유적의 대부분은 선상지의 중위면과 저위면에 걸쳐 분포하게 된다. 4세기 이전 사로국의 주요 주거지역은 경주 분지를 에워싼 ‘山谷之間’이었을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입실리, 구정동, 조양동, 덕천리, 죽동리, 사라리 130호분이나 2010년 조사된 탑동 21-3·4번지 목관묘 등이다. 혁거세 설화를 보면 경주 남산의 서록에 궁실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위치를 경주 창림사로 특기해 놓았다. 하지만 계림문화재연구원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중고기 이상 올라가는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탑동 목관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서남산 일대를 계속 주시해 볼 필요는 있겠다.
 
 
 
그림6  경주 창림사지(출처: ⓒ이동주). 경주 탑동 목관묘(출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월성은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그 시기로 소급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성벽을 만들어서 6세기대에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총면적은 193,845㎡(약 59,000평)이며, 길이는 동서 890m 남북 260m 바깥 둘레 2,340m 이다. 성벽은 평지면에서 2~7m정도로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성벽 붕괴를 위해 불에 탄 흙(燒土), 볏짚을 태운 재(灰), 점토덩어리, 자연석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월성은 경주 분지가 한눈에 조망되는 입지적 탁월성, 해자 및 남천으로 인한 방어상 유리한 지세, 내부의 평탄한 대지 등 여러모로 궁의 입지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궁의 기능이 작동한 것은 경주분지의 물의 통제가 상당부분 결실을 거둔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림7 1915년 鳥居龍藏이 조사한 교동 패총(출처 ⓒ국립중앙박물관)과 현재의 월성 전경(출처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시계방향 7시 부분(남성벽)이 鳥居龍藏이 조사한 구간에 해당한다. 
 
 
현재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 의해 남성벽 일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지점은 1915년 鳥居龍藏(도리이 류조)가 발굴한 지점이기도 하다. 도리이는 발굴결과를 토대로 교동 패총이라 명명하였다. 다만 월성이 패총일리 만무하니 성벽 붕괴를 막기 위해 패각류를 섞어 토양의 접착력을 높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드러나는 유구가 월성의 초축연대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향후 발굴결과가 기대된다. 

이제 국읍을 넘어 신라의 왕경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방이 조망되는 높은 지대에 궁궐을 조영하고 정무판단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1943년 런던 폭격으로 하원이 잿더미가 되었다. 재건을 위해 처칠은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그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며 하원 재건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수도에서 정무 판단을 내리는 공간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월성에 거주하는 왕은 국읍의 주수를 넘어 신라 국가 전체를 표상하는 군주에 다름아니다. 

다음에는 수도라는 공간의 위계성을 염두에 두면서 왕경에 거주했던 인간들의 삶을 미시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미주>
1) 《經國大典註》 經國大典註解 後集 吏典 天官 冢宰; 漢城府 및 開城府.
2)  이영호, 2014,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지식산업사.
3) 세오 다쓰히코 저ㆍ최재영 옮김, 2006,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황금가지.
4) 今西龍 저ㆍ이부오, 하시모토 시게루 옮김, 2008, 《이마니시 류의 신라사 연구》, 서경문화사.
5) 쓰데 히로시 지음ㆍ김대환 옮김, 2013, 《전방후원분과 사회》, 학연문화사.
6) 주보돈, 2020, 《신라 왕경의 이해》, 주류성.
7) 이동주, 2019, 《신라 왕경 형성과정 연구》, 경인문화사.
8) 權五榮, 1996, 「三韓의 「國」에 대한 硏究」, 서울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