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_이상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1,153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덕형절충과 유교 이념의 제도화 연구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8)
 
 
 

이상민(중세1분과)

 
 
 

역사적 유교의 모호함과 여말선초 덕치·형정

 
역사 속 유교·성리학에 다양한 속성이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교는 누군가에게는 보수적 권위를 누군가에게는 진보적 토론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다면성은 동시에 혼돈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유교에 대해 그 어떤 설명이 시도되더라도, 누군가는 ‘네가 아는 유교는 틀렸다’ 내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라며 냉소를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걸 피하고자 ‘그때그때 다르다’ 식으로 확답을 피한다면 어떨까? 이제는 ‘말만 그럴싸하지 내용이 없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유교’를 다루는 문제로 박사논문을 쓰게 되어서야 간신히 깨달았다. 역사적 유교는 그 중요성이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모호하고 가변적인 개념인지라, 그 어떤 설명을 시도해도 진부하거나/지엽·피상적이거나/핵심이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비판을 받는 게 문제인 것은 아니다. 다만 논의를 더 진전시키는 방법만큼은 더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를 위한 적당한 주제를 찾아다니다 여말선초 유교·성리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의 위상을 얻는, 이른바 ‘유교화’의 초기단계를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말선초 유교 국가/유교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지식인 지배층들이 극복해야 했던 과제는 무엇이었고, 이들은 이를 어떤 방법으로 돌파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노선을 정당화하고자 했을까. 

여말선초 유교의 제도화 과정에서 덕치(德治)와 형정(刑政)의 관계는 이를 보여주는 꽤 유명한 주제다. 많은 연구에서 지적되었듯 덕치는 도덕적 교화를 통한 통치를, 형정은 법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여말선초의 지배층은 이 두 가지 원칙을 어떻게 조화롭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지속했으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논의를 넘어선 실제 정책과 제도에 반영되었다. 사실 덕치·법치·예치·형치(형정)도 앞서 말한 모호함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 모호함의 중심에 있는 문제에 가깝다. 전근대 유학자들은 언제나 형벌은 형벌이 없는 것을 기약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성인조차 형벌을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시에 예(禮)와 같은 개념은 때에 따라서 인(仁)·덕(德)과 대비되는 규범으로 이해되기도, 반대로 정(政)·법(法)에 대비되는 유연한 규범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 현실성에 있어서는 더욱 복잡한 문제였다. 이처럼 덕·형은 비단 현대의 연구자만이 아니라 전근대 유학자들 자신들조차 그 정의나 방편을 통일시키지 못한 개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시기별 단절과 분화, 이상과 현실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유교는 고정된 사상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산물이라는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고려 말~조선 건국기 : 통치에서의 ‘덕치’의 비중 확립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용어의 적절성에 대한 반론이 있지만) 훗날 연구자들이 ‘성리학자’라고 분류하였던 유학자들이, 고려 말 조정에 등장하였던 것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자신의 시대를 가족 내 분쟁의 증가, 지주와 이서층의 착취로 인한 농민들의 유망 등을 근거로 ‘인륜이 파탄’된 시기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윤리 도덕으로부터 국가의 제도에 이르는 전면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한 이상적 해법은 바로 ‘덕치’였다. 이는 도덕적 통치를 통해 인간의 내재된 윤리적 본성을 길러내고, 개인과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사회 질서를 재건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말해 강압보다는 자발적 참여를 중시하는 통치 방식을 지향했다.

한편, 이들의 노력은 지방 사회의 지식층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그 힘을 더해갔다. 13~14세기를 전후해 중앙의 관료들이 낙향하고, 이들과 지방의 유력자들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의 지방 사회에서는 종래 향리와는 구분된 새로운 지식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앙 관료와 유사한 유교적 교양을 공유하면서 점차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이후로 중앙 조정에서 풍속안정책을 지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중앙·지방의 유학자 지식인들의 ‘교육·교화’의 목표는 비단 신진관료 육성으로 이어지는 고등 교육에 한정되지 않았다.《효행록》을 편찬하여, ‘논밭의 백성’을 교육하려 했던 당시의 유학자 권보·이제현의 노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도덕적 교화에 힘썼다. 

이처럼 고려 말 유학자들이 덕치를 중시했고, 덕치는 형벌을 최소화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다.《논어》의 유명한 ‘정령으로 다스리고 형벌로 통제하면, 백성들은 이를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구절이 이제현에 의해 과거시험 대책문의 문제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고려 말 유학자들 또한 현실적으로 덕치만으로는 사회 통제가 어려웠던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덕치의 이상이 당시 유학자들에게 부각되었음에도, 형정에 대한 관심 또한 부각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유학자들은 질서 유지와 사회 안정화를 위해 형정의 도입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형정이라는 현실이 덕치의 이상과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정도전은 유교 경전의 ‘성인도 형벌을 완전히 폐할 수 없다’는 구절에서 이론적 정당성을 찾았다. 이 시기 유학자들의 고민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편에서 고려말 유학자들이 덕치·형정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실용적·현실적인 필요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이 ‘덕치’에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덕치가 단순히 선정(善政)을 수식하는 말 이상으로 중요한 통치이념이 되어야 했다. 그 까닭에 전체 통치에서 덕치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덕치와 형정을 ‘선후(先後)’, ‘본말(本末)’, ‘경중(輕重)’으로 명확히 차등을 두면서도, 동시에 ‘형정은 통치를 보조하는 도구’ 라고 하면서 형정에 대해 규정짓는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덕치와 형정의 관계가 명확히 정의됨으로써, 종래 통치를 위해 언제나 시행되어야 했던 형정에서도 덕치를 배제시킬 수 없게 되었다. 형정의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덕치를 양립·공존시킬 방법이 고민되어야 했다. 정도전이 주희의 저술과 원대 제도들에 기초해 ‘자신(自新)’과 ‘지금(知禁)’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던 것은 이를 집약한 것이었다. ‘자신’이란, 범죄자를 처벌하되, 사형만은 면하여 이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지금’이란, 피지배층에게 처벌 조항을 미리 알려주어 범죄를 피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둘은 모두 형벌을 사용하는 현실적 통치를 염두에 두면서도, 형벌에 의존하지 않고 도덕적 교화를 병행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개국 초부터 세종 대까지 : 덕·형의 절충을 위한 해석의 각축

 
조선의 개국 후 덕치와 형정 문제는, 철학적 논의를 넘어 국가 운영의 구체적인 원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정도전의 시기까지 관념적으로 구상되었던 질서가 구체적인 사례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 문제를 의미했다. 당시 유학자들은 국가를 이상적으로 운영할 방법을 모색하며, 덕치의 이상과 형정의 현실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안을 구현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의 지배층들은 덕치와 형정을 양립·절충시키기 위한 다양한 과제에 봉착했다. ⓐ 우선 여말선초를 거쳐 덕치가 중시되어 ‘민본/애민’이 중시된 만큼 ‘민심’에 대한 관심도 늘어갔는데, 그 때문에 가능한 범위에서 민심을 최대한 달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 그리고 이를 위한 이상적 수단인 ‘교육·교화’가 피지배층 깊숙히 침투되기 힘들었던 당시의 현실적 문제 또한 해결해야 했다. ⓒ 그리고 한번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방법도 강구되어야 했다. 종합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 특히 유교적 교육을 받기 어려운 무지한 피지배층이 범죄자가 되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실질적인 대안은 크게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우선 주로 세종과 그에 동조한 관료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주장이 있었다. 이들은 민의 타고난 덕성에 대한 신뢰와 그에 대한 동정심을 토대로, 처벌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 범죄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 처벌을 앞세우는 일이 민심을 혼란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고, ⓑ 교육·교화가 어렵다면, 훈민정음과 같은 수많은 우회적 방편을 이용해 이를 관철시켜야 한다고 보았고, ⓒ 범죄자들을 용서하고 갱생의 기회를 제공해야 재범이 예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세종의 말에서 확인되듯, 형벌을 피하고 교화서를 간행하는 등의 대책은 ‘교화를 위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敎化所先]’ 일로 여겨졌다.

그 반면, 허조·정창손 등 유학자 관료층에서 제기되었던 주장이 있었다. 이들은 관·민간의 엄격한 상하관계에 대한 질서의식을 기반으로, 민과 같은 피지배층, 그 중에서도 범죄자들에게는 섣부른 용서 대신 일벌백계를 통해 질서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 처벌에 소극적인 것이야말로 민심을 혼란하게 할 것이라 보았고 ⓑ 교육·교화에 대한 원론적인 방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보았고 ⓒ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범죄자를 예방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범죄자에 대한 엄벌을 시행하여 국가의 기강을 살리는 일은, 세종에 의해 인용된 허조의 말에서 확인되듯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救弊之急務]’로 여겨졌다.

이상의 논의에 참여하였던 논자들은 모두가 덕치가 형정보다 앞서야 한다는 전제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한 이론적 근거를 유교 경전이나 선대 유학자들의 저술에서 찾고자 했던 것 또한 동일하였다. 세종 등의 견해는 물론이거니와, 언뜻 형벌을 옹호하는 듯한 허조 등의 견해 또한 결국 ‘최소한의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처벌에 대한 무작정적인 형벌 옹호론이 아니었고, 오히려 관·민의 엄격한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그의 입장 또한 결국 유교 전통의 텍스트를 통해 정당화된 주장이었다. 그 의미에서 이들의 주장은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대안’이었으나, 그 대안이 다양하게 구분되었을 따름이었다. 
 
 

세종 이후부터 성종 대까지 : 법제적 정착을 통한 윤리적 규제

 
세종시기의 각축은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었을까? 세종의 생전에는 (누구보다 국왕 자신이 큰 지지자였던 까닭에) 세종의 주장이 대체로 관철되었다. 하지만 세종 사후부터 상황은 또 다른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세종과 같은 주장은 정말로 ‘유교적인’ 전통에도 부합하는 언뜻 아름답게까지 들리는 견해였으나, 그 자체로 당시의 ‘교화’를 감당해내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 깊숙한 곳 까지 교육이 전파될 수 없던 전근대 국가의 행정능력상, 국왕 자신의 전폭적인 지지만으로 전국의 향교를 기획만큼 완전히 운영하는 것도, ‘처벌 자제를 통한 교화’를 글조차 익숙치 않은 일반 민에게까지 일일이 관철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의 방식은, 구체적인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채 추진된 한시적인 이상론에 불과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세종대 후반기부터 지속적으로 도적의 창궐이 이어지자, 덕·형 절충의 논의는 종래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특수한 사례지만 세조 대 정언 김지와 같이 범죄자의 처벌을 두고 ‘형벌을 쓰는 지극한 덕에 감격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발언하는 이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새로운 방식의 대안이 구축된 것은 성종 대에 들어서였다. 성종은 윤리적 실천을 법제를 통해 바로잡고자 하였다. 성종과 당대 유학자들은 세종의 이상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형벌과 교화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성종대도 마찬가지로, 대신 세력과 김종직 등 대간 세력 간의 분기가 존재하였지만, 이들은 법제를 수단으로 하여 윤리적 규범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 보편적으로 공감하였다. 가령 김종직 등은 강상범과 같은 큰 범죄자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처형함으로써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 비리를 저지른 관리의 자손이나, 재가를 한 부녀자의 자손은 관직에 나가지 않게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윤리적 규범 정착을 위한 법제적 강제를 주장하였던 성종대 국왕과 유학자들의 입장은 언뜻 세종대 허조·정창손 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성종대의 관건은 법제와 형벌을 통한 강제적 제재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형벌의 공정성과 일관성을 높이려는 노력에 있었다. 윤리적 금령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형정의 권위를 중시하는 입장이 부각되고,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의 편찬이 이를 보조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졌지만, 실질적으로 범죄자에 대한 감형은 세종대보다 오히려 확대된 것이 그 증거였다. 범죄의 경중에 따른 처벌 기준이 보다 세부적으로 정립되고, 감형이나 사면의 조건이 명확하게 규정되는 것 또한, 형벌의 공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지나친 가혹함을 방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여말선초 유교’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유교를 중심으로 여말선초를 설명한다면, 고려 말 초기 성리학의 정착기를 지나, 세종 시기를 유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수성’의 시대로, 그 이후 성종 시기를 (유교화가 진전된) ‘교화’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혹은 그 반대로, 정치적 자율성과 균형이 유지되던 세종 시대에서, 유교적 법치국가가 만들어진 성종 시기로의 변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다양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유교화’로 설명하는 데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고려 말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을 ‘유교화’의 진전이라고 부르는 입장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유교(화)를 어떻게 정의내린다 해도, ‘성리학자’들이 관료계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고려 말에서부터, 대간층을 중심으로 한 숭문(崇文)정치가 표방된 성종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 양적·질적 확대가 여러 증거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15세기 말에 조선이 ‘충분히 유교사회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이후의 성장·분화의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그 시기를 ‘단순히’ 설명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덕치를 통치의 중심으로 가져다놓은 고려 말, 이를 통한 덕치와 형정의 실제적 절충·구현 방안을 다양하게 논의한 15세기 초, 그 잠정적 대안으로서 법제를 통한 윤리적 규제를 제시한 15세기 말의 인물들 모두가 스스로의 입장을 ‘유교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유학자로 생각하였던 수많은 유학자들의 목소리들 중 어떤 것을 ‘유교에 꼭 부합하는’ 것으로, 어떤 것을 ‘덜 유교적인’것으로 규정할 자신은 없다. 이는 내가 속한 한국사 연구의 100여년 역사에서, 어떤 시기 어떤 학자의 연구방법이 ‘진정으로 역사학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자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한국사를 대상으로 한 역사적 유교(화)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사에서 유교(성리학)국가·유교사회·유교화 등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납득할 방법으로 명료하게 실체화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여부가 유일한 관건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래 ‘유교국가’ 조선의 성립에 대해 찾아나갔던 선학들의 노력 속에서 밝혀진, 고려·조선을 관통하는 수많은 정치·사회·문화적 요소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소중한 통찰들은 그 질문의 답변 자체와는 별개로 소중한 가치를 창출해왔다. 

한국의 ‘유교’를 둘러싼 논의들이, 비록 진행될수록 발견되는 것이 그 안에 속한 다양한 인물들의 복잡하고 모호한 이미지 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박사논문의 작업과정은 여말선초 유교라는 좀 인기가 없는 주제를 통해, 그것이 ‘단순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하고, 이를 가능한 범위에서 시기별로·견해별로 단순화시켜보는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변혁기로서의 여말선초와 그 안에 살았던 정도전, 세종, 성종 등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유교국가’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만들어보고자 했던 고민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비록 그 설명이 틀리거나 모호하다는 불평을 듣는다 한들 그것으로 족해볼 따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