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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중화’의 심연을 질문하고 맥락적으로 독해하다: 《중화中華, 사라진 문명의 기준》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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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나의 책을 말한다] 

 

‘중화’의 심연을 질문하고 맥락적으로 독해하다
–《중화中華, 사라진 문명의 기준》

(푸른역사, 2024. 06)
 
 

 

배우성(중세2분과)

 
 

사대주의와 선비정신을 넘어 ‘중화’의 언어적 맥락을 묻다.

 
미래를 위한 교훈이나 지침을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학은 꽤 쓸모있는 학문이다. ‘중화中華’는 그런 그들에게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중화’가 사대주의의 상징, 혹은 선비 정신의 근거인지 묻는 것으로 질문이 충분하다고 해도 좋을까? 그렇게 쓸모를 찾았으니 그것으로 역사학은 이제 자기책임을 다했다고 말해도 좋을까? 역사학이 읽는 과거란 늘 그런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21세기에 요구되는 역사학적 통찰력의 모든 것인가?

널리 알려진 ‘중화’의 정의에 따르면, 이 단어는 한족이 이민족과 자신을 구별하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정의가 한국사에서 그 형태 그대로 관철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중화’라는 단어와 같이 쓰인 단어들이 같지 않으며, 언어의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사에서‘ 중화’가 표상하던 핵심적인 것들을 논의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그렇게 본다면, ‘중화’가 언제나 중심과 주변에 관한 의제였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해진다. 한국 역사에서 ‘중화’는 주변에서 상상하고 전유한 중심이었으며, 사라진 문명의 기준이었다.

‘중화’의 해석적 가능성을 열어 두고 그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탐색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개념사와 지성사에 부분적으로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나 틀에‘ 중화’라는 단어 혹은 개념을 대입하려 하지는 않았다. 인과의 연쇄에 따른 단일한 설명 구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시간초월적 원리나 간결한 설명보다는 역사적 현실의 복잡성·중층성·구체성을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중화’의 의미장을 그려내다

 
이 책의 ‘중화’ 이야기는 최치원에서 시작된다. 도당유학생 출신 유학자인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신라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이夷’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불교를 끌어와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몽골복속기의 고려 문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성리학적 소양의 소유자였지만, 유학을 중화와 동일시하지도, 불교를 이적이라 비난하지도 않았다. 몽골을 “아류(我類)가 아니”라고 말하는 명나라에 사대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고려는 이전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소중화’를 재발견했으며, 경전 상에만 전해오던 ‘용하변이’를 ‘소중화’ 고려의 정체성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그즈음 불교의 사회적 폐단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침내 정도전의 단계에 이르러 ‘중화’는 ‘정학’, ‘유교’, ‘도통’, ‘정통’, ‘천리’로, ‘이적’은 ‘이단’ ‘사설’ ‘불교’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렇게 ‘중화’가 ‘이적’과 이항대립하는 구조가 비로소 등장했다. 얼마 뒤 조선은 새로운 ‘이적’ 청나라에 사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을 마주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최명길과 조익 사이에서 시작된 논쟁은 남구만과 최석정, 송시열과 윤선거로 이어졌다. 송시열과 그의 학문적 후예들은 ‘의리’를 ‘천리’와 ‘인륜’을 따르는 문제로, 도학을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는 의제로 여겼다. 남인들도 ‘존주’의 의제에 동의했으며, 대보단이 가지는 의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남인들 중에는 ‘강국’인 이적 왕조에 대한 ‘사대’를 긍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존명 의리를 말했지만, ‘분의分義’에 판단까지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의제라는 점에서 보면 ‘중화’는 ‘동국東國’, 즉 화(華)에 비춘 동(東)의 문제이기도 했다. 조선의 문인들에게 동국은 ‘용하변이’하고 ‘진어중국進於中國’한 편방이자, “옛 임금을 우리 임금으로 삼아 천하의 의주(義主)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존재였다. ‘동국’이 그런 존재인 한, 이제 그런 맥락에서 ‘동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했다. 정통(正統)을 ‘동’에 적용하여 ‘화’의 기준에서 ‘동’을 정당화하거나, ‘화’와 ‘동’이 함께 구성하는 역사를 보여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익의 삼한정통론을 주장했으며, 화서학파의 후예들은 ‘동국’이 주도하여 동국사와 중국사를 하나로 묶어 내려 했다. 화서학파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서양은 ‘중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이적이며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은 서양이 초래한 새로운 위기에 학술적으로 대응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적’인 청에게 ‘사대’하면서 “천하의 의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국’은 이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중화’는 ‘북학’의 문제가 된다. 김창협, 이덕무, 성대중은 ‘황명사대부’들의 후예에 관심을 가진 존명 의리의 신봉자였다. 홍대용과 박지원, 서얼 출신 박제가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청나라를 통해 선진적인 ‘중화’ 문물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배우려 한 것은 한·당·송·명의 유제(遺制)였다. 결코 청나라가 가진 만주족의 고유문화를 배우려 하지는 않은 것이다. 청나라의 이(夷)다움을 전면 긍정했던 홍희준조차 그런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중앙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주류 엘리트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중앙으로부터 차별받던 평안도 변경민들에게 ‘중화’는 그리 중요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들은 중앙에서 ‘중화’와 같이 쓰이던 단어들로 지역의 역사문화적 전통을 정당화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시간대를 살아간 사람들도 ‘중화’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최익현은 ‘중화’의 의미장을 임계점 직전까지 넓혀 갔으며, 황성신문의 필진들은 ‘중화’를 폐기하고 이전에 그 의미장에서 쓰이던 단어들로 새롭게 발견한 대체재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렇게 ‘중화’는 한국 역사의 담론 지형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물론 그 잔영이 남았다. 식민지 조선인 커뮤니티의 리더들은 변질된 상태로 남은 ‘공’과 ‘의’를 매개로 식민권력의 담론에 접속하기도 했다.
 
 

개성이 살아 있는 역사 글쓰기를 지향하다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근·현대를 포함한 일체의 후행後行 시기를 특권화하지 않는 일이고, 과거를 수단화하지 않는 일이며, 과거로 현재나 미래를 정당화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단절적으로 보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시대착오·목적론·이분법은 물론 계몽의 욕망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계기성과는 다른 층위에서 전근대와 근현대를 넘나들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발화자에게 말을 걸고 그의 말을 들은 뒤, 그 의도와 맥락을 해설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텍스트를 맥락적으로 독해하는 이 책의 방식이다.

내가 이 책에서 의도한 역사 글쓰기는 추론과 논증이라기보다는 질문과 묘사에 가깝다. 비유하자면, 신념에 차서 사자후를 내뱉는 정치가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그리는 화가의 방식에 가깝다. 물론 이 책에도 분석과 논증, 추론과 주장이 담겨 있지만, 그것들은 복잡성과 중층성의 역사상을 묘사하는 본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나는 내가 이 책에서 말한 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유일한 정답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정답도 시간을 초월할 수는 없으며, 어떤 역사가도 정답을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이 책이 개성이 살아 있는 역사 글쓰기와 내러티브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늘 아래 당연한 것은 없다는 투로 던지는 수많은 질문은 그런 묘사를 위한 출발점이다. 정답을 찾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질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발화의 맥락을 온전히 그려 내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