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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③] 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③_박우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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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일제시기 철도에 투영된 근대의 욕망들 3
박우현(근대사분과)문경의 철도? 점촌의 철도? ③1. 숫자로 보는 문경과 점촌의 변화경북선 1기계획선의 종착역 유치 경쟁에서 승리한 문경군 호서남면 점촌리가 1925년 이후 겪게 되는 변화상은 극적이다. 우선 인구와 여객, 화물 등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상부터 살펴보자.
<표 1>이 보여주는 문경군의 민족별 인구 동향을 살펴보면, 1930년대와 비교했을 때 1923년과 1925년 사이의 증가율이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24년 12월 점촌역이 개통한 것이 영향을 주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의 총인구 증가율 7.3%는 인근이자 경쟁 지역이었던 김천(4.69%), 상주(5.81%)보다 높았고, 경상북대 24개 부·군 중 6위에 해당했다.1) 민족별 인구 변화의 추이를 통해서는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까? 우선 인원은 적지만 중국인 증가율 폭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인은 1928년까지 늘어나다가 1930년대에 감소세로 돌아섰고, 1937년 이후 4명만 거주했다. 쿨리로 불렸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1928년 경북선 전체가 준공된 시기를 기점으로 줄어들었다고 이해된다.
일본인 인구 변화가 중요하다. 일제시기 철도역 설치는 곧 일본인들의 이주를 의미했다. 경부선의 지선이자 사설철도에 불과했던 경북선이 들어온 문경은 어떠했을까? 간선에 비해 변화 폭이 크진 않았으나 증가율을 보면 분명히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 1923년에서 1925년 사이에 조선인 증가율은 7.2%였고, 일본인은 28.17%였다. 28.17%는 같은 기간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다. 김천은 5.97%, 상주는 17.18%였다. 경북선 1기 개통 구간 중 가장 높은 일본인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다. 물론 증가율만으로 비교하기에는 1925년 12월 현재 김천 거주 일본인은 2,096명, 상주 1,637명, 문경 323명으로 차이가 크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1925년 이후 문경군의 인구는 증가와 감소를 거듭하며 완만한 증가추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철도 경북선이 경부선·경의선과 같은 주요 간선이 아니었기에 절대적인 화물이나 여객 수송량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문경 전체 인구가 다른 지역 인구를 역전할 만큼 막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문경군은 1923년 이후 경상북도 24개 부, 군 가운데 10~11위를 오가는 인구수를 유지했다. 2) 하지만 관심을 조금 더 지역 내 깊숙한 곳으로 옮겨보면 어떠할까? 철도역이 문경군 내 기존 중심지인 문경읍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 끝의 호서남면 점촌리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문경군의 인구 증가는 상대적으로 완만했으나, 점촌리가 속해 있던 호서남면은 그렇지 않았다. 호서남면의 인구는 급격한 상승을 보였다. 후술하겠지만 관공서 이전, 장시 이전 등 지역개발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이는 인구 변화로 증명된다. <표 2>는 각 시기별 문경군의 면 단위 인구 변화를 보여준다. 문경군의 10개 면과 경북선 1기 계획선의 종점을 두고 점촌역과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상주군 함창면을 비교해보자. 점촌리를 포함하고 있었던 호서남면의 인구증가율은 다른 면을 압도했다. 1930년 대비 1935년에 인구가 20% 이상 증가한 면은 경상북도에서 호서남면을 포함해 10개 면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1925년 당시 인구가 8,000명 이하였던 곳은 문경군 호서남면이 유일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면에서 이례적으로 급격한 증가율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점촌리와 같이 경북선 철도역이 놓였지만, 1기 계획선의 종점이라는 이점을 놓친 상주군 함창면과 호서남면을 비교해도 호서남면의 인구 증가율이 압도적이었다. 3)
다른 면은 상황이 달랐다. 경북선이 지나갔던 상주군 혹은 예천군과 인접했던 영순면·산양면의 인구는 1925~1935년 사이에 10% 넘는 증가율을 보였지만, 그 외 지역은 5%를 넘지 못했다. 심지어 가은면, 동로면, 마성면, 문경면의 인구는 감소했다. 특히 문경군의 전통적 중심지이자, 1등도로가 지나던 문경면의 인구 감소는 특기할 만하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감소세를 보인 면들은 1925~1930년에는 현상 유지에 가깝다가 1930~1935년에 본격적인 감소세를 보였다. 교통망의 변화만으로 거칠게 살펴보자면, 경북선이 안동까지 완공된 1931년 시점부터 경상북도 서북부의 중심지가 영남대로가 아닌 철도망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천, 상주, 예천, 안동은 경북선이 군의 중심지를 지나갔던 반면 문경은 철도망이 군의 남쪽 경계로만 지나갔다. 게다가 철도역도 점촌역 하나였다. 인구 변화만으로도 군의 중심지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변화를 보면 점촌역 설치로 문경 지역이 실제로 요동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함창면과 호서남면의 갈등하게 된 이유 즉, 종점역으로서의 이점이 현실화하였다는 뜻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점촌역에 드나들었던 화물 수송량과 운임 수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1 : 경북선 주요 역별 발송 화물 톤수 (톤)
출처 : 朝鮮鐵道株式會社, 《營業報告書》, 각년판, 역별 운수 성적표 그림 1과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1928년까지 점촌역은 화물의 발송과 도착 모두 함창역을 압도했다. 상주역보다도 수송량이 많았다. 1927년 상반기, 하반기와 1928년 상반기, 하반기에 점촌역에서 발송된 화물은 각기 10,192톤, 9,007톤, 10,318톤, 6,949톤인데, 함창역은 3,722톤, 4,004톤, 4,398톤, 5,713톤에 불과했다. 도착한 화물의 경우 점촌역은 12,502톤, 5,888톤, 15,677톤, 5,880톤이고, 함창역은 2,746톤, 918톤, 2,415톤, 1,150톤으로 발송 화물보다 더 큰 차이를 보였다.
도착 화물 격차는 점촌-예천 간 철도 공사가 이어졌고, 함창면에 비해 허허벌판이었던 점촌리에 철도역 설치 이후 더 많은 시설이 건설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발송 화물이 차이를 보였던 것은 아직 경북선이 개통되지 않은 예천은 물론 영주, 봉화 등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수송되는 화물을 점촌역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함창면 사람들이 점촌역이 생기기 전까지 기대했던 그 물류 수송이었다. 그림 2 : 경북선 주요 역별 도착 화물 톤수 (톤)
출처 : 朝鮮鐵道株式會社, 《營業報告書》, 각년판, 역별 운수 성적표 그림 3 : 경북선 주요 역별 운임 수입 합계 (엔)
출처 : 朝鮮鐵道株式會社, 《營業報告書》, 각년판, 역별 운수 성적표 영주, 봉화 등의 물류를 점촌역이 독점했다는 사실은 1928년 이후 점촌역 화물 수송량이 급감하는 통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경북선 2기 계획선의 완공으로 예천까지 경부선이 연장되자 점촌역에 집중했던 화물 수요가 새롭게 들어선 용궁역, 예천역 등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예상보다 길어진 2기 계획선의 부설 기간은 점촌역 주변이 급격하게 번성해 지역 내 중심지로 정착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철도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화물 수송이다. 1928년까지 화물 수송에서 함창역을 압도했던 점촌역은 운임 수입에서도 큰 격차를 보였다. 그림 3의 점촌역과 함창역의 격차는 이를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종점이라는 이점이 사라진 1928년 이후 점촌역의 운임 수입도 급락해 상주역과 함창역에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도시 기반이 전혀 없다시피 했던 점촌의 지역적 특징을 보여주는 통계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 이제 호서남면의 중심은 점촌이야이제 통계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지역의 변화를 살펴보겠다. 지역의 변화는 철도가 놓인 점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갈등 양상의 크기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문경군이라는 지역을 한층 더 깊숙이 들어가 분석할 때, 점촌역 설치가 낳은 면 단위의 갈등과 군 단위의 갈등이 존재했다. 면 단위 갈등은 당연히 호서남면 내 리와 리 사이의 갈등이었고 대표주자는 역시 영남대로의 주요 역도를 품고 있었던 유곡리와 점촌리였다. 경우에 따라 점촌리와 인접한 면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군 단위 갈등은 문경군을 형성했던 면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었고, 갈등의 양 축은 문경면과 호서남면이었다. 먼저 면 단위 갈등부터 보겠다.
철도역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점촌리에는 번영회가 조직되었다. 점촌리는 애초에 수십 호에 불과한 작은 촌락이었다. 그러니 번영회원이라고 해서 이른바 점촌리의 토박이일 리가 없었다. 대부분 점촌역 설치와 함께 몰려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번영회의 일은 간단했다. 철도역이 들어섰으니 우리 지역에 걸맞은 시설을 유치해 지역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덕에 우리의 이윤을 극대화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점촌번영회가 가장 먼저 추진했던 목표는 장시 유치였다.4) 1924년 11월 현재 문경군에는 문경면 하리(읍내시), 산양면 선암리(산양시), 농암면 농암리(농암시), 동로면 동로리(적성시), 가은면 왕릉리(왕릉시), 신북면 갈평리(갈평시), 호서남면 유곡리(유곡시)에 총 7개의 장시가 운영되고 있었다.5) 1910년대까지 읍내시, 산양시, 농암시가 가장 거래가 많고 교류가 왕성한 시장으로 꼽혔다.6) 그런데 12월에 점촌역이 들으서자, 문경군뿐 아니라 호서남면 주변의 장시 운영체계가 흔들리게 된다. 갈등의 축은 다시 점촌과 함창이었다. 경북선 1기 계획선의 종점역 설치부터 갈등이 깊었던 두 지역이었다. 이미 1924년 9월부터 함창면의 주민들은 점촌역 설치와 함께 장시 신설을 반대하고 나섰다.7) 표면적으로는 점촌역에 장시를 신설하면 상주, 함창, 산양 등 주변 장시의 개설 일자를 모두 변경해야 해 번거롭다는 이유였다. 철도로 대표되는 근대교통은 전통시대의 교통로에 비해 철도역이 들어선 지역과 들어서지 않은 지역의 산업화 격차를 크게 만들었다. 유통을 집중시키는 편중의 강도가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적 교통체계의 도입 및 연장에 따라 기존 상권의 변화를 추동하는 변수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기회와 위기를 차별적으로 부여했다. 특히 장시는 5일장이라는 특성상 개시일을 놓고 이웃 장시와의 연계가 중요했다. 이는 동시에 갈등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역 내 장시들 사이에 특별한 전문화 경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장시 유치 경쟁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어떤 지역은 새로운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얻은 지역은 장시 유치운동이 일어났고, 위기에 처한 지역은 반대운동이 일어났다.8) 점촌역을 둘러싼 지역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철도역을 유치한 데다가 종점역 선정 경쟁에서도 승리했던 점촌리 주민들은 인근지역의 반발과 관계없이 장시 신설을 지역개발의 시발점으로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10호에 불과하던 가옥이 철도역 설치와 함께 100호가 넘어섰고, 음식점, 잡화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점촌번영회는 앞으로 통신기관, 미두검사소, 장시 등을 신설해 점촌역 북쪽에 의성, 안동 지역의 화물을 점촌역에 집중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인근지역 중 상주군 상주면에만 있었던 은행까지 유치하려고 움직였다.9)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점촌역이 영업을 시작하고, 장시 신설 요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지 7개월여가 지난 1925년 7월에도 점촌에 장시가 신설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시기에 장시는 조선총독부가 신설, 이전, 폐지를 허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외래권력인 총독부는 이러한 허가 권한을 매개로 지역 갈등에 개입하거나 방관하며 식민지민을 통제하는 데 활용하였다. 점촌에 장시를 신설하는 사안에 대해 1925년 7월 현재 식민권력이 택한 방법은 방관이었다. 이유는 인근지역 즉, 함창면, 산양면 등의 반대였다. 하지만 점촌역 설치 이후 250호까지 가호가 늘어난 점촌리에 언제까지 장시 설치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대안이 등장했다. 신설이 어렵다면 기존 장시를 이전하는 방안이었다. 대상은 점촌리와 같은 호서남면 유곡리 장시였다.10)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영남대로의 가장 중요한 역도였던 유곡도의 소재지이자 1910년대 부설된 1등도로도 지나갔던 그곳이 유곡리였다. 유곡리 장시를 점촌으로 이전하자는 주장은 이제 호서남면의 중심은 유곡리가 아닌 점촌리라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조선시대는 물론 1910년대까지도 호서남면은 물론 문경을 넘어 영남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던 유곡리였다.
그러나 근대교통의 핵심인 철도역이 안동을 목표로 하며 유곡리가 아닌 점촌리에 놓이자, 상황은 달라졌다. 지역 내에서조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점촌리가 장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유곡리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장시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점촌번영회는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까지 유곡리에서 점촌리로 옮기고자 했다.11) 면사무소 이전은 장시 이전보다 신속하게 진행되어 1925년 10월 29일부로 호서남면사무소는 유곡리에 점촌리로 이전하였다.12) 장시 이전은 다른 군이나 면과 갈등하는 사안이었기에 협의 과정이 복잡했지만, 면사무소 이전은 호서남면 내에서의 파워게임으로 정해질 수 있었기에 빠르게 결정될 수 있었다. 그만큼 호서남면 내에서 점촌리의 사회경제적 영향력이 이미 유곡리를 넘어섰음을 방증하는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면사무소 이전과 달리 장시 이전 문제는 9월에도 진척이 없었다. 점촌에 정착해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민들은 경상북도청까지 방문해 점촌역에 장시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요구가 거세질수록 반대도 거세졌다. 함창면, 산양면뿐 아니라 호서남면 동쪽의 예천군 용궁면에서도 점촌에 장시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3)
하지만 현실은 점차 점촌리에 유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1기 계획선의 종점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촌역은 1925년 현재 주변 지역의 화물을 독점하고 있었다. 경북선 개통 이후 함창면뿐 아니라 용궁면에 운집했던 화물도 전부 점촌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장시가 열리지 않으면 화물을 쌓아두는 기간만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점촌 지역민들의 장시 설치 주장은 당시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물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주장은 언제나 승자의 논리에 손을 들어주는 법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시를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점촌의 편이었고, 경상북도 당국은 1년여를 지체한 끝에 11월 19일에 현지조사를 진행했다.14) 결국 철도역 설치 1년 이후인 1925년 12월 18일에 점촌리에 장시 개설 허가가 내려졌다.15) 개설 방식은 유곡리 장시의 이전이었다. 아울러 호서남면 경찰관주재소도 유곡리에서 점촌리로 신축 이전하도록 했다.16) 점촌역 설치 1년여 만에 호서남면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유곡리는 공공관서와 장시를 모두 점촌리에 내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에도 유곡과 점촌의 개발 격차는 커져만 갔다.17) 이처럼 근대교통의 발달이 만들어 낸 지역의 발달은 멀리서 보면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치열한 내부 갈등의 현장이었다. 그림 4 : 1950년대 점촌시장의 전경
출처 : 문경시, 《사진으로 보는 문경의 근대 100년사》, 문경시, 2005, 222쪽 용궁면은 용궁시와 점촌시의 개시일이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타격이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으나, 1년여를 끈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18) 1926년 1월 8일 점촌역에서 장시 개설 축하연이 열렸다.19) 유서 깊은 역참으로부터 면 내 발전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인근지역의 반대운동도 뿌리칠 만큼 지역 내 철도역 설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물론 장시와 면사무소 이전은 호서남면 내의 갈등, 인접면과 겪는 갈등이었다는 점에서 점촌역 설치가 가져온 변화 중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3. 문경군의 중심도 이제는 점촌이야점촌역을 중심으로 인구가 늘고, 시가지가 커지면서 지역의 개발 욕망은 호서남면의 수장이 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욕망은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면 단위를 넘어 문경군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올라서길 원했다. 점촌번영회는 1926년 7월 7일 협의회를 개최하고 우편소·금융조합·공의(公醫)의 설치, 장시 개시일 증가 등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15일에는 문경군청에서 군수 박정순을 만나 이를 전달했고, 19일에는 경상북도청에도 요구사항을 청원했다.20) 8월 4일에 열린 협의회에서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조합 설치가 시급하다는 합의안도 채택했다. 21)
공의 설치는 근대 의료 혜택에 대한 일본인 이주자들의 요구가 늘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2) 학교조합 설치를 요구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불과 10년 전인 1915년에 문경은 일본인 학생이 10명도 되지 않아 일본인 학생들의 교육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던 학교조합의 인가도 받지 못하던 지역이었다.23) 그런데 문경군 전체도 아니고 호서남면 점촌리의 번영회에서 학교조합을 설치해달라는 요구가 등장했다. 철도의 도입이 일본인 이주의 증가를 의미했던 식민지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점촌번영회의 요구는 문경군 사람들이 모두 동의한 의사표시가 아니었다. 장시 개시일 증가 요구는 1년이 지나도 허가를 받지 못했고, 공공기관 설치도 번영회가 합의한 사항 중 허가받은 것은 없었다. 당국이 허가한 것은 1928년에 설치된 소방기관뿐이었다. 이유는 역시 인근지역의 반대였다. 특히 호서남면 동쪽의 산양면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24) 산양면은 후에 경북선이 점촌역 동쪽으로 연장될 때 예천군 용궁면과 철도역 설치를 둘러싸고 갈등했던 지역이다. 다시 말해 곧 산양면에도 철도역이 들어설 수 있는데 문경군을 대표하는 공공기관이 이미 점촌으로 이전해버리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줄어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철도역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점촌번영회의 요구사항에 대한 산양면의 반대 역시 이윤극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극히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였다. 도덕과 인정(人情)보다 갈등과 반대가 합리적인 행위라고 평가받는 근대자본주의로 이미 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문경군의 주도권을 두고 격돌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공공기관 이전 요구가 남아있었다. 경찰서와 군청이다. 1925년 현재 문경군의 경찰서와 군청은 당연히 읍내이자 군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문경면에 있었다. 철도가 놓이면 신, 구 중심지 간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특히 점촌역처럼 기존 중심지와 사실상 정반대 지역에 철도역이 들어선 경우라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문경면의 인구는 정체했고, 호서남면의 인구는 급증했으나, 여전히 문경군 내 최대 인구 보유지는 문경면이었다. 인구가 제일 많은 지역과 인구 증가율이 제일 높은 지역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고, 군청과 경찰서를 둘러싸고 폭발했다. 먼저 경찰서는 1926년 무렵부터 문경면에서 점촌리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점촌이 경북선 개통 이래 “장족의 발전을 해 현재는 내선(內鮮) 가옥이 즐비하고 각종 상공업이 발달해 군청소재지인 문경읍을 멀리 능가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찰행정상 경찰서를 점촌으로 이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25) 그러나 경찰관주재소도 아닌 경찰서를 이전하는 것은 군을 대표하는 지역을 이전하는 것과 같았다.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의 문경군 여론을 보면 11개 면 중 8개 면은 경찰서 이전을 찬성했고, 문경면을 포함한 3개 면이 반대하고 있었다. 점촌역을 보유한 호서남면의 유지들은 1931년 2월 20일 경상북도청을 방문해 경찰서 이전을 진정했다. 이유는 역시 철도역을 보유한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점촌은 경북선 개통 이래 매년 발전하면서, 문경군 내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26) 철도가 지나간다는 점은 전통적인 지역 중심지를 넘어설 수 있는 무기였다.
오랜 갈등 끝에 문경경찰서는 1937년 8월 5일 문경면 상리에서 호서남면 점촌리로 신축 이전하기로 결정되었다. 상리에는 하위기구인 경찰관주재소가 들어섰다.27) 1925년 유곡리에서 점촌리로 옮겨왔던 경찰관주재소를 12년 만에 문경면의 경찰서와 맞바꾼 셈이었다. 경찰서 이전에 관해 경상북도의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경찰부장은 문경면 상리의 경찰청사가 수백년 전에 건축된 노후한 건물이었기에 어차피 신축이 필요했다고 설명하며 문경면의 불만을 무마시켰다.28) 물론 신축이 필요했다는 이유가 경찰서 이전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문경면의 불만을 뒤로 하고 점촌으로 이전한 문경경찰서는 1937년 11월 기공해 다음 해 5월 준공하며 신축이전을 완료했다. 29) 경찰서보다도 군을 대표하는 공공기관인 군청에 대한 이전 요구는 점촌역이 들어선 지 4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등장했다.30) 군청 이전은 면사무소 이전과는 규모와 파급력의 차이가 컸다. 식민권력의 지방 통치 안정화 측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히 공공기관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지역 상권 전체가 이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문경군의 군청 이전 문제는 문제가 더 복잡했다. 다른 지역은 기존 읍내에서의 중심지 이동이라는 성격이 강했다면, 문경군은 군청을 이전하면 문경면이 군청을 통해 얻고 있었던 제반 이익을 모조리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이견 조율이 어려웠다. 당연히 갈등은 심각했다. 점촌에 정착한 사람들의 견해를 대변해 주던 기사에서는 이미 상공업 면에서 문경면을 능가한 점촌에 당연히 군청을 이전하여야 함에도 문경군수 박정순이 이를 방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1) 박정순은 불과 1년여 전에 점촌역을 유치했다고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1926년 7월이 되자 점촌 지역민들에 의해 점촌 발전을 저해하는 인물로 비판받고 있었다.
1926년의 박정순 관련 기사는 방향이 엇갈린다. 위의 비판 기사가 나오기 4개월 전에는 박정순의 업적이 뛰어나 군민들이 송덕비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는데 본인이 거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32) 그런가 하면 9월에는 박정순의 용퇴설이 등장한다.33) 일부 군민들이 유임 운동에 나섰고, 당사자는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박정순은 1926년을 끝으로 문경군수에서 물러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34) 자료의 미비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정순에 대한 문경군 내 여론이 갈라져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점촌역이 설치 이후 문경면과 점촌역으로 갈라진 군내 여론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순을 비판하는 7월 기사와 옹호하는 3월, 9월 기사 그리고 결국 군수에서 밀려나는 결과로 볼 때 그는 점촌역을 유치하긴 했으나, 현재 더 많은 인구가 속해 있던 문경면의 입장을 소극적이나마 옹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31년에도 문경군청 이전은 군 내 갈등의 원인이었다. 2월부터 군청이전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통해 문경군 내 세력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점촌을 중심으로 문경군청 이전에 찬성한 면은 총 8개 면으로 이들은 경상북도청을 방문해 군청 이전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에 참여하지 않은 3개 면은 문경면, 산양면, 신북면이었다.35) 신북면은 현재 문경군에 존재하지 않는 면이다. 문경면 동쪽에 위치했던 신북면은 1934년 4월 1일 재정적 빈약함을 이유로 문경면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36) 문경면과 인접한 면이고, 행정·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에 군청 이전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서남면 동쪽의 산양면은 문경면보다 호서남면과 인접하고 있었음에도 군청 이전에 반대했다. 앞서 보았듯이 이미 여러 부분에서 점촌 중심 발전에 반대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반대의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반대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경군청의 점촌 이전은 경찰서와 달리 일제시기 내내 성사되지 못했다. 군청 이전이 늦어졌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인구 문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4년 현재 문경면의 인구는 14,862명, 호서남면의 인구는 11,704명으로 문경면이 많았다. 37) 점촌에 철도역이 들어서고 급속도로 지역 내 상공업 중심지가 되어갔지만,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문경면과 가은면을 중심으로 탄광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군청 이전을 선호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경경찰서와 문경군청은 큰 차이가 있었다. 기존 건물의 노후 상태였다. 경찰서의 경우 매우 오래된 건물로 신축 필요성이 제기되던 상황에서 신축과 함께 이전이 실현되었다. 하지만 군청은 그렇지 않았다. 1915년 한 차례 증축을 한 후에도 공간이 부족해 1923년 12월 청사를 신축했기 때문이다. 신축한 청사를 바로 이전하는 것은 재정 운영의 입장에서 보아도 합리적이지 않았다. 이로써 점촌역 설치 이후 모든 행정기구가 점촌에 집중되었지만, 군청만은 구 중심지인 문경면에 남게 되었다. 물론 끝까지 문경면이 군청을 지킬 수는 없었다. 해방 이후 1949년 4월 27일 결국 문경군청은 결국 점촌으로 이전되었다.38) 현재도 문경시청은 문경읍이 아닌 점촌에 자리 잡고 있다. 근대교통의 도입이 만든 지역변동은 장기적이고, 지속해서 이루어졌다.
일제가 군사적 목적을 최우선에 두고 한반도에 부설한 간선철도망에서 배제된 곳에 들어왔던 작은 규모의 철도도 이처럼 지역을 한 차례 더 분절적으로 위계화시켰다. 그리고 그 위계화는 군 단위 심지어는 면 단위에서도 분절적으로 나타났다. 과거 연구에서 철도의 도입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식민지화의 확대와 같은 방식으로 단일하게 이해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지역과 다양한 형태의 철도망을 더욱 지역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분석해 보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근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자본주의적 개발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공통으로 확인되는 양상이 포착되기도 한다. 더 많은 분석과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것으로 문경을 소재로 철도를 통해 지역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는 작업을 마친다. 다음 회차부터는 조금 더 큰 지역과 일본 제국주의라는 지배권력이 만나는 방식과 그것이 만들어 낸 문제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미주>
1) 물론 절대적인 인구수는 차이가 컸다. 김천과 상주의 인구는 각기 126,789명에서 132,731명으로, 155,583명에서 164,617명으로 증가했다(朝鮮總督府, 각년판,《朝鮮總督府統計年報》, 戶口-現住戶口府郡道別).
2) 朝鮮總督府, 각년판,《朝鮮總督府統計年報》戶口-現住戶口府郡道別 참조. 3) 朝鮮總督府, 1935, 《昭和十年 朝鮮國勢調査報告 道編 第六卷 慶尙北道》, 6~7쪽. 4) 「店村의 榮繁會」《매일신보》, 1924.10.06. 5) 朝鮮總督府, 1924.11 《朝鮮の市場》, 92쪽; 朝鮮總督府, 1929 《朝鮮の市場經濟》, 136쪽. 6) 「慶北記念號, 聞慶郡の發展」」《朝鮮時報》, 1916.07.18. 7) 「產鐵終点은 店村里」《조선일보》, 1924.09.03;「咸昌市民大會產鐵終点에 市場反對運動」《조선일보》, 1924.09.11. 8) 조형근, 2006「재래시장의 부상과 식민지 지역경제의 사회문화적 동학」《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337~339쪽. 9) 「활기를 띠운 점촌의 廣野, 10호밖에 없던 촌이 갑자기 100호가 늘어」《매일신보》, 1924.12.13;「慶北線終點, 銀行設置切望」《매일신보》, 1924.12.31. 10) 「店村에 新市塲」《조선일보》, 1925.07.22. 11) 「店村驛擴張策」《조선일보》, 1924.09.11;「店村의 榮繁會」《매일신보》, 1924.10.06. 12) 「朝鮮總督府慶尙北道告示第七十五號」《朝鮮總督府官報》第3967號, 1925.11.09;「戶西南面所移轉」《매일신보》, 1925.11.11. 13) 「日を趁うて繁榮する店村へ市場を設置 二日陳情委員四名來道」《釜山日報》, 1925.09.06. 14) 「店村市塲施設을 道當局에陳情」《동아일보》, 1925.11.03. 15) 「店村市塲開設」《조선일보》, 1926.01.08. 16) 「店村新市塲, 八日初開市」《朝鮮新聞》, 1926.01.13. 17) 「異色마을을 가다 (15) 慶北 점촌邑 유곡里 馬房·驛村」《동아일보》, 1973.03.24. 18) 「店村開市와 龍宮市民不平」《조선일보》, 1926.01.15. 19) 「店村開市와 近萬名의場軍」《조선일보》, 1926.01.14. 20) 「店村住民擧つて面の繁榮に狂奔, 請願委員を選任して郡道堂局に膝詰談判」《朝鮮新聞》, 1926.07.20. 21) 「店村振興策協議會開催」《朝鮮新聞》, 1926.08.08. 22) 일제가 식민지에서만 실시했던 제도인 공의에 관해서는 문명기, 2014 「일제하 대만·조선 공의(公醫)제도 비교연구: 제도 운영과 그 효과」《의사학》23-2; 2014「일제하 대만·조선 公醫制度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 제도외적 측면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총》42 참조. 23) 「遙遙店村からも參加 伸びる聞慶に聽く始政當時の貧乏郡がこの發展 實に美はしき官民一致の賜物」《朝鮮民報》, 1935.08.28. 24) 「開市請願に店村民奮起す, 反對の意嚮に驚ろき」《朝鮮時報》, 1927.06.25;「店村消防出初, 近來にない盛况」《朝鮮時報》, 1928.01.18. 25) 「朴聞慶郡守店村の發展を阻害?,有志道廳を訪問して部落の發展策を陳情」《朝鮮新聞》, 1926.07.21. 26) 「警察署登記所と共に聞慶郡廳移轉陳情 店村を中心に八箇面結束して面民約二千名連署す」《釜山日報》, 1931.02.22. 27) 「朝鮮總督府慶尙北道告示第百三十號」《朝鮮總督府官報》第3203號, 1937.09.16. 28) 「聞慶警察署新築, 警備配置の必要上, 店村驛前に移轉」《朝鮮時報》, 1937.08.09. 29) 「聞慶 奉化兩署廳舍落成式」《釜山日報》, 1938.10.12. 30) 「聞慶群廳移轉問題, 慶東線の開通を機として店村に」《京城日報》, 1925.04.09. 31) 「朴聞慶郡守店村の發展を阻害?有志道廳を訪問して部落の發展策を陳情」《朝鮮新聞》, 1926.07.21. 32) 「聞慶郡守 頌德碑 建設設計中」《매일신보》, 1926.03.22. 33) 「聞慶郡守 留任運動과 其不可한 理由를 朴氏가 說明」《매일신보》, 1926.09.11.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직원록 자료 참조. 1926년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을 찾기는 어려운데 송덕비가 건립된 기사를 보면 1930년 7월 현재 《매일신보》 전북지국장을 역임하고 있었다(「前朴郡守 頌德碑建設 聞慶郡民이」《매일신보》, 1930.07.01). 35) 「聞慶郡廳을 店村에 移轉陳情 十一面中八面代表上道」《매일신보》, 1931.02.26. 36) 「朝鮮總督府慶尙北道令 第83號」《朝鮮總督府官報》 第2036號, 1933.10.21.; 朝鮮總督府, 1933「面ノ廢置, 名稱及區域變更ニ關スル件」《慶北面ノ名稱區域變更關係認可書類綴》(CJA0002989), 16~17; 84~85쪽. 37) 朝鮮總督府, 1944 《昭和十九年五月一日 人口調査結果報告》, 52쪽. 38) 「大統領令 第81號 慶尙北道聞慶郡廳 位置 變更에 關한 件」《官報》, 1949.04.2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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