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도시 화석을 찾아서 ②] 머릿돌, 도시의 자기소개서_강성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550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도시 화석을 찾아서] 

도시 화석을 찾아서 2: 머릿돌, 도시의 자기소개서

 

 

강성호(순천대)

 
 
 
도시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는 머릿돌이다. 영어로 머릿돌이 '코너-스톤(cornerstone)'인 이유는 건물의 한 귀퉁이에 정초일 또는 준공일을 알리는 돌판을 새기거나 붙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을 짓는 일은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닌 전문가들의 지식과 기술을 자금을 들여 동원하는 과정이다. 짧으면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협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초 공사를 마치는 날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모든 공사가 끝나는 날에 축하 의식으로 준공식(竣工式)을 치렀다. 정초식에 기둥을 받치는 용도로 사용된 머릿돌은 '주춧돌'이나 '정초석'으로 불렸고, 준공을 기념하기 위한 머릿돌은 '준공석'이나 '준공표지석'이 되었다. 드물게는 머릿돌을 '귓돌'로 호명하는 경우가 있다.  

도시 화석으로서 머릿돌이 반가운 이유는 많다. 무엇보다 머릿돌은 건축물의 이력을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건축물에 관한 정보는 건축물대장을 떼면 금방 알 수 있지만, 길을 걷다가 머릿돌을 발견하는 일은 의외의 기쁨을 선사해 준다. 체감상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머릿돌에 새겨진 정보들이 다양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예컨대 기존의 머릿돌이 단순히 '정초일'이나 '준공일'만 알려주고 있다면, 시기가 올라가는 머릿돌은 건축물의 이름, 공사명, 설계자, 발주자, 시공자의 이름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초석보다는 준공석에서 정보의 다양화가 이루고 있다. 

제작 유형에 따라서 머릿돌의 종류는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존의 벽체에 머릿돌을 설치하는 경우이다. 다음으로는 오벨리스크(obelisk) 등과 같은 조형물을 통해 머릿돌을 구현하는 유형이 있다. 최근에는 심볼이나 브랜드 이미지를 강조하는 머릿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인테리어의 한 부분에 기념 문구를 새긴 머릿돌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머릿돌이 등장하고 있지만 조성 목적은 대동소이하다. 머릿돌을 설치하는 목적은 해당 건축물을 만드는 데 참여한 관계자(전문가·기관)에 대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공공의 이해를 돕고 시공의 책임성을 높이는 데 있다. 더 나아가서는 건축물에 대한 소유권을 명시하여 시공에 참여한 이의 노고를 기리는 데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정초식 광경

 
1933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는 흥미로운 사진을 실었다. 여학생들이 앉아있는 광경 속에 무언가 의식을 치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바로 1933년 6월 10일에 거행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校舍)의 정초식 풍경이다. 이를 확대한 원안의 모습은 더욱 흥미롭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머릿돌(정초석)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다. 머릿돌에 새겨진 글씨는 식별하기 어렵지만 '1933'이라는 숫자는 분명하게 보인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기념물을 봉안한 철궤를 머릿돌에 넣어 시멘트로 발랐다고 한다. 이 건물은 현재 이화여대의 본관 건물인 '파이퍼홀(Pfeiffer Hall)'이다. 식민지 조선에 근대식 서양 건축을 도입한 윌리암 메릴 보리스가 설계를 맡았으며, 조선인 건축가 강윤이 건축 부감독을 담당했다. 아직 필자는 이화여대의 파이퍼홀을 직접 가보지 못했다. 조만간 사진에 등장하는 정초석의 실물을 확인해 보려고 한다.
 
 
 
 

도시 화석을 사진으로 수집하는 일은 재미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도시 공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발견의 기쁨으로 짜릿한 순간을 만끽해 주기 때문이다. 머릿돌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정초식 사진은 그러한 짜릿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정초식 모습을 담은 사진은 웬만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왼쪽 사진을 살펴보자. '정초'라는 글씨 밑에 'The Most Reverend and Right Honourable,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정초식을 사식함, 천주강생 1959년 4월 21일, AMDG'가 새겨져 있다. 성공회 대학로교회는 학생 선교를 위해 서울 종로구 연건동의 가옥을 매입하고 1959년 4월 21일에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이 정초식은 제프리 피셔르 켄터버리 대주교의 방한에 맞춘 것이었다.  
 
 
출처: 대한성공회 대학로교회 홈페이지(2024년 8월 19일 접속)
 
 
그런데 오른쪽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건물에 남아 있는 머릿돌(정초석)은 1959년 정초석 사진과 비교했을 때 문구에서 차이가 난다. 'The Most Reverend and Right Honourable,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부분은 '켄터버리 대주교 제프리 피셔르 각하'로 바뀌었고, 맨 하단의 'AMDG'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다. 참고로 AMDG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라는 말의 약자로서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예수회가 내세운 설립 이념이었다. 그 외에 '정초'라는 제목과 '정초식을 사식함'이라는 문구, 그리고 '천주강생 1959년 4월 21일'이라는 정초식 날짜는 똑같다. 그렇다면 왼쪽 사진과 오른쪽 사진은 어떠한 연유로 차이가 있는 걸까. 아마도 왼쪽은 켄터버리 대주교가 참석할 때 사용한 행사용 영문 버전이고, 오른쪽은 실제로 외벽에 설치한 머릿돌이 아닐까 싶다. 
 
 

머릿돌로 읽어내는 건축의 이력

 
 
 
 
 
위 두 사진은 머릿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부림빌딩의 건물과 그 머릿돌이다. 이 웹진의 특성상 부림빌딩은 역사학연구소가 자리 잡은 건물임을 눈치챈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진은 필자가 2024년 6월에 학술대회 발표로 역사학연구소에 갔다가 찍은 것이다. '머릿돌'이라고 새겨진 글씨 아래에 '1989.5.1.'이 보인다. 부림빌딩의 준공일이 1989년 5월 1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도시를 답사하면서 쉽게 볼 수 있는(어쩌면 이제 쉽게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머릿돌의 모습이다. 

두 번째 사진은 전남 순천시의 행동우체국 건물과 그 건물의 귀퉁이에 부착되어 있는 머릿돌(준공표지판)이다. 이 머릿돌(준공표지판)에는 행동우체국 공사와 관련된 공사명, 공사기간, 발주처, 공사감독관, 시공감리, 시공사, 현장대리인에 관한 정보가 빼곡히 들어있다. 이 머릿돌에 의하면, 행동우체국 공사는 '개축공사'로서 2019년 6월부터 12월까지 이루어졌다. 전남지방우정청이 발주했고, ㈜금성종합건설사가 시공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건축물의 이력도 함께 포함해서 건축물의 역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담아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인스타그램 @journey.to.modern.seoul(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머릿돌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도시 화석이다. 그런데 머릿돌에 새겨진 연호가 항상 서기(西紀)로만 되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위 두 사진은 서기가 아닌 다른 연호가 새겨진 머릿돌에 해당한다. 왼쪽 사진은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있는 머릿돌이다. 단기 4294년이므로 서기 1961년에 준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부는 1948년 9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공용 연호로 '단기'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지어진 공공시설이나 건축물들은 머릿돌에 '단기'를 새긴 경우가 꽤 많다. 오른쪽 사진은 서울특별시 충무로 인현동에 있는 대운빌딩의 머릿돌이다. 서기나 단기가 아니라 육십갑자인 '갑인년(甲寅年) 7.26'로 되어 있다는 게 특징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갑인년'이란 1974년이다. 즉, 오른쪽 사진을 통해 대운빌딩은 1974년 7월 26일에 정초식을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릿돌을 둘러싼 논란과 발견

 
이번에는 머릿돌을 둘러싼 논란과 발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 사진과 관련해서 지난 2021년은 한국은행 본관 건물의 머릿돌에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논란이 일어났었다. 이 논란은 2020년 10월에 진행된 국회 국정감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일련의 조사 작업을 통해 한국은행 본관의 정초석 글씨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와 일치하다는 결론을 맺었다. 그래서 이 정초석을 철거할 것인지 아니면 쓰라린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보존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머릿돌은 보존하되 안내판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타협이 맺어졌다. 이 논란은 도시 화석으로서의 머릿돌이 가지는 역사성을 잘 보여준다. 
 
 
 
 
머릿돌이라고 하면 오른쪽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딜큐샤의 정초석을 떠오르는 분들이 제법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딜큐샤는 앨버트 W. 테일러와 메리 L.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AP통신사 임시특파원으로 3·1운동 재판 과정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한 인물이다. 이 건물은 해방 후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는데, 테일러 부부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의 의뢰로 김익상 교수가 찾아다닌 끝에 발견되었다. 알려지기로는 장독대로 가려진 정초석 'DILKUSHA 1923'의 발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 머릿돌은 집의 이름(딜큐샤)과 건축 연도(1923), 그리고 집을 지을 때 집주인의 염원을 담은 성서 구절(시편 127편 1절)이 새겨졌다는 특징을 가졌다. 
 
 

머릿돌에 새겨진 재일동포의 흔적 

 
지금까지 주로 서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머릿돌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순천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일대의 머릿돌에 관한 내용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만,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전남 일대의 머릿돌에서 볼 수 있는 '지역적 고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필자의 능력 밖이다. 여기서 먼저 말하고 싶은 주제는 머릿돌에 새겨진 재일동포의 흔적이다. 지역사를 공부하면서 마주하는 사실 중 하나는 재일조선인 1세들이 자기 고향의 지역개발사업과 교육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년대부터는 재일조선인 1세들의 지원으로 학교 신축, 마을회관 건립, 도로포장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기증과 지원은 1970~8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지역사의 맥락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흔적을 검토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이 작업은 지역의 교육사, 발전사 등등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는 '데탕트 국면'에 따라 냉전적 분위기가 쇄신된 시대였다. 국제질서의 변화와 맞물려 재일조선인들의 '모국방문'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이루어진 재일조선인 모국방문사업의 참가 인원수는 약 2,000여 명에 이른다. 박정희 정권은 체제 경쟁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1975년부터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의 모국방문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일조선인들은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노력에 나섰다. 예를 들어, 전남 출신의 재일조선인들은 1971년에 '재일본전남도민회'를 결성하고 “향토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업”을 펼쳤다.1) 1970년대를 전후하여 각 지역에서는 재일조선인들의 성금과 후원으로 △ 마을 도로 포장과 다리 신축 △ 마을회관과 경로당 건립 △ 전화-전기-수고 개설 △ 학교 건립과 장학회 운영 △ 정미소와 축사 건립 △ 과실수와 벚꽃나무 심기 등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2)
 
 
 
 
이 건물은 2024년 1월에 전남 강진군 병영성을 답사하면서 찍은 것이다. 사실 성체만 복원한 채 내부 전체가 허허벌판인 병영성을 둘러보는 것보다 이 건물을 발견한 일이 더 흥미로웠다. 이 건물의 정확한 주소는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70.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문 위에 동판이 하나 있다. 이 건물은 '재일동포' 강신옥과 김정배의 기증으로 지어질 수 있었고, 준공식은 1975년 11월 21일에 거행했었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아쉽게도 주변에 여쭤볼 주민 어르신을 섭외하지 못해 건물의 내력에 대해서는 미처 조사하지 못했다. 건축물대장을 떼보니 2010년까지는 병영발전협의회가 중대 본부로 사용했었다. 
 
 
 
 
이 사진은 2023년 5월에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를 둘러보면서 찍은 것이다. 사진은 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악양초등학교의 교정을 담은 것이다. 요즘은 보기 드문 이승복 동상이다. 그런데 이 동상의 측면 아래를 살펴보니 '증 제6회 졸업생 재일동포 노경순 1976.7.'이라는 글씨가 동판에 양각되어 있었다.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을 찾아보니 악양초등학교는 1922년에 악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서 1926년에 6년제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제6회 졸업생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대략 1920년대 중후반에 악양초등학교를 졸업한 건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노경순이라는 '재일동포'는 일본에서 자산가로 성공한 후 모교 발전을 위해 이승복 동상을 건립하는 비용을 희사했을 것이다. 
 
 

머릿돌로 사진의 이력을 찾아보기

 
 
 
 
머릿돌에 새겨진 준공 정보는 건축물의 이력과 함께 옛 사진의 촬영 시기를 추정하는 일에도 큰 보탬을 준다. 위 사진은 일명 '장대다리'라고 불리는 순천교의 모습이다. 순천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동천 위에 지어진 다리로서 원도심 일대(옛 순천부 읍성)와 철도역 신시가지(순천역 일대)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다. 1872년 군현지도에서는 '광진교'로 표시될 정도로 순천의 교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다리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했을 때는 이 다리를 중심으로 14연대 봉기군과 경찰이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문제는 촬영 시기이다. 사진의 질감으로 볼 때는 '1980년대'로 추정되는데, 정확히 언제 촬영한 것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궁금증에 떠밀려 직접 다리를 찾아가 봤다. 왼쪽에 해당하는 순천교의 머릿돌을 살펴보니까 다리의 구조, 하중, 공사 기간, 시공청, 시공자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정보는 공사 기간이다. 이 머릿돌에 따르면, 순천교를 지은 기간은 1982년 7월 23일부터 1983년 8월 14일까지였다. 그렇다면 사진은 최소한 1983년 8월 이후에 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좀 더 촬영 시기를 좁힐 수는 없는 걸까. 사진을 계속해서 쳐다보니 다리 뒤편의 산기슭에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빨간 동그라미). 현재도 같은 위치에 있는 '순천승산교회'이다. 저 교회 건물의 변천사를 알기 위해 무작정 걸어갔다. 다행히 순천승산교회의 정문 옆에 머릿돌이 있었다(오른쪽 사진). 준공일은 '1989.6.10.'이었다. 결론적으로 사진의 촬영 시기는 '1983년 8월'에서 '1989년 6월' 사이로 좁힐 수 있다.
 
 

팔마비 비각의 머릿돌

 
 
 
팔마비(八馬碑)는 순천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이 비석은 고려시대에 '최석'이라는 지방 수령이 고을의 악습을 타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기념물이다. 1872년 군현지도에서는 읍성 남문 앞에 팔마비가 그려져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시가지 정비에 의해 현 위치(영동 1번지)로 옮겨졌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팔마비는 원래 아무런 보호시설이 없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1977년에 순천 출신의 재일조선인 김계선이 기증한 덕분에 팔마비 비각이 건립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아래 사진의 머릿돌을 통해 확인을 할 수 있다. 팔마비 비각의 하반부에 있는 머릿돌은 비석건립, 비각건립, 기증자, 건립자에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팔마비 비각의 머릿돌은 지역 문화재 관련 정보를 증언하는 도시 화석이다. 지역사회에서 문화재 관련 정보는 꼼꼼하게 검토되지 못한 채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나마 팔마비 비각의 건립 시기는 머릿돌이 있어서 오류 없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특정 시점에 머릿돌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처음 위치는 팔마비 비각의 정면 하단부였으나, 현재는 비각 측면에 눕혀져 있다. 비각 하단부를 전면 교체하면서 머릿돌의 위치를 바꾼 것이다. 공교롭게도 구석진 자리여서 일반인들은 머릿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위치 선정이다. 

이처럼 도시 구석구석에는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한 다양한 텍스트들이 숨어있다. 머릿돌에 새겨진 숫자는 건축물의 이력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머릿돌에 따라서는 연호를 서기가 아니라 단기나 육십갑자를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일견 머릿돌은 단순한 돌판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문화가 만나고 교차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역사적 논쟁의 한복판에 머릿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지역사 연구에서 머릿돌이 제공하는 정보를 잘 활용한다면 의외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머릿돌에 깃든 다양한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분석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미주>
 
1) 《호산 강계중》, 1999(삼판), 104쪽, 467쪽.  
2)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 재외동포재단, 2008, 142~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