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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역사연구회 여름답사기] 나의 요동 지역 답사기_문영철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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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2024년 한국역사연구회 여름답사기] 
 

나의 요동 지역 답사기

 

 

문영철(고대사분과)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장맛비가 내리고 있던 7월 9일, 필자는 이번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전날까지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발하는 당일 날 혹여 여행 보따리가 비에 젖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하늘이 이번 답사를 반겼던 것일까? 출발하는 당일 날 신기하게도 비가 그쳐서 선선한 날씨에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여러모로 의미 있는 답사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중국 광저우 답사 이후 팬데믹으로 인하여 그동안 한국역사연구회 해외 답사는 5년 동안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번 답사는 해외 답사의 부활을 알리는 뜻깊은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다양한 시대사 전공자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시대사를 초월한 만남이기도 하였다.

16명의 한국역사연구회 회원과 일가족으로 구성된 답사팀은 다롄에서 단둥, 번시를 거쳐 심양까지 총 5박6일동안 요동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번 답사는 러일전쟁 발발 12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요동 일대의 주요 근현대사 유적을 탐방하는 것이 답사의 주된 취지였다. 여기에 고구려 산성, 책문후시, 심양고궁 등과 같이 전근대 유적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시대사 유적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답사는 5박 6일동안 총 26개의 유적지 및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다만 본 글에서는 모든 답사 장소를 열거할 수 없기 때문에, 필자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를 선정하여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동계관산 러일전쟁 유적지

 
동계관산(東鶏冠山)은 러일전쟁 유적지로 오늘날 다롄시 뤼순커우구 북동부에 있다. 이곳은 러일전쟁에 사용된 러시아 요새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다롄과 뤼순은 러일전쟁(1904~1905) 시기 주요 격전지 중 하나이다.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다롄과 뤼순 지역을 획득하자(1898), 청일전쟁에서 청이 다롄과 뤼순 지역을 일본에게 쉽게 내어준 사실을 교훈삼아 이 일대에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동계관산에 남아있는 러시아의 요새도 이중의 하나이다.
 
 
사진 1. 동계관산 러시아 요새
 
 
사진 2.  동계관산 러시아 요새 내부 모습
 
 
동계관산에 있는 러시아 요새는 러시아군이 1900년 1월에 콘크리트와 자갈로 만든 요새이다. 일본군은 1904년 8월부터 4개월 동안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애를 썼고, 약 9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가까스로 점령했다.

현재 요새는 수많은 총과 포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여전히 콘크리트 요새가 주는 압도감은 100여 년이 지나도 남아있었다. 러시아군은 이제 물러나고 없지만, 여전히 요새는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당시 요새에는 러시아군이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참혹하게 쓰러졌다는 것을 상상해보니 실로 전쟁이라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곳에는 조금 신기한 포토존이 하나 있다. 요새 내부로 들어가면 포탄으로 훼손된 구멍하나가 밝게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 모양이 마치 여인의 옆모습 같이 생겼다(그림 2에서 정중앙 흰색 부분). 여기서 필자의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이 형상은 이 지역이 더 이상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평화의 여신이 다녀간 흔적은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뤼순감옥

 
뤼순 감옥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순국하신 곳이다. 뤼순 감옥은 수감장소, 고문장, 노동현장 등 대부분의 시설이 보존되거나 복원된 상태라서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또한 감옥 곳곳에 빼곡히 적힌 한글 설명문은 이곳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장소인지 알게 해준다.
 
 
사진 3. 뤼순 감옥 전경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안중근 의사가 수감 된 장소가 아닐까 한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수상을 암살한 국사범이었기 때문에 특별 감시 대상으로 따로 별도의 부속건물에 수용되었다. 이곳은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지만, 수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필자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현지 중국 관광객 한팀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고, 그 팀을 인솔하는 가이드가 중국어로 “안중근”을 언급하면서 안중근이 수감 된 장소라고 설명하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그것은 가슴 속에 숨어있던 한국인의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기억되는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진 4. 안중근 수감 장소
 
 
사진 5. 안중근 수감 장소 내부 모습
 
 

다롄 대흑산산성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은 오늘날 다롄시 진저우구 시가지에서 동북쪽 20km 지점에 있는 산성이며, 고구려의 비사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사진 6. 멀리서 바라본 대흑산산성(비사성)
 
 
비사성은 수·당전쟁 시기에 중원왕조의 수군(水軍)이 해로를 따라 평양을 가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고구려의 해상관문이었다.《자치통감》과 《책부원귀》에 의하면 비사성은 “4면이 가파른 절벽이고, 오직 서문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四面懸絕 惟西門可上]”고 기록되어있다.
 
이 산성은 해발고도 663m인 대흑산(大黑山)의 산세를 따라 지어졌고, 산 정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파른 절벽은 이곳이 천혜의 요새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오직 서문을 통해서만 올라 갈 수 있다”는 기록에 부합하듯이 오늘날 대흑산의 입구와 서문까지는 도로가 정비되어 관광객들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 다만 도로 정비로 인해 서벽의 과거의 모습은 이제는 볼 수 없고 성문도 별다른 고증 없이 복원해놨기 때문에 역사학도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측면도 있었다.
 
 
사진 7. 대흑산산성(비사성) 서문 모습
 
 
이곳에는 재미있는 민간전설이 남아있다. 서문에서 계곡을 따라 산성 안쪽으로 내려가면 석고사(石鼓寺)라는 절이 있다. 이곳에서는 신기하게도 당 태종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당 태종이 비사성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생전에 비사성을 간 적이 없으니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진 8. 당 태종을 모신 사당
 
 
이런 광경이 신기했던 필자는 당 태종 사당을 찍었는데, 옆에 있던 현지인 신도가 그 모습을 보고 대뜸 화를 냈다. 그만큼 그들에게 당 태종은 신성한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살아생전 당 태종은 요동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죽은 당 태종이 이곳을 점령한 것 같아서 묘하고 착잡한 심정이 올라왔다. 만들어진 역사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항미원조기념관

 
이곳은 단둥시에 위치한 군사박물관이며, 중국이 6.25 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기념하고, 북·중 우호 관계를 되새겨보는 장소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쟁기념관과 비슷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9. 항미원조기념관 전경
 
 
중국에서는 6.25 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 무장이 열악했던 중국군이 미군을 상대로 열심히 항전했다는 내용, 중국군이 북한을 열심히 돕고 우호를 다졌다는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에 필자가 이해하는 6.25 전쟁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과 중국은 상대국이라는 인식이 컸었다. 더불어 전시 내용이 우리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보니 항미원조기념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마치 적진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항미원조기념관에서 홍보하는 전시 내용 일부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통해서 얻어가는 것은 있었다.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두고도 국가와 이념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를 수가 있음을 몸소 체험 할 수 있는 기회였고, 이점을 통해서 앞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최대한 입체적 또는 중립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음을 상기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소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필자가 이곳을 관람할 때 앞쪽에서 한 현지인 중년남성이 큰 글씨로 ‘USA’라고 새겨진 반팔티를 입고 계셨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곳은 중국의 항미정신을 기리는 곳이고, 일부 관람객들은 중국 국기를 가져와 흔들고 계셨다. 쓸데없는 생각일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분이 무사히 관람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필자의 걱정과는 달리 별다른 사건사고가 생기진 않았다.
 
 
 
 
사진 10. 항미원조기념관 내부 전시 모습1
 
 
사진 11. 항미원조기념관 내부 전시 모습2
 
 

호산산성

 
호산산성(虎山山城)은 오늘날 단둥시 콴뎬 만족 자치현 호산(虎山)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와 인접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부르고 있다. 오늘날 호산산성은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1차 고구려-당 전쟁(645)에서 실패를 맛본 당 태종은 648년에 설만철(薛萬徹)이 이끄는 3만의 병력을 압록강으로 보내 이곳 박작성에서 국지전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박작성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발해 시기에는 박작구(泊汋口)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곳은 발해의 국경이자 동시에 압록강을 따라 옛 고구려의 왕도와 발해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이를 통해서 박작성은 압록강 하류 인근에 위치한 중요한 거점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산산성은 지리적 위치상 남쪽으로는 압록강, 서쪽으로는 애하를 접하고 있으며, 두 강의 합류지점에 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 곳을 장악하면 압록강 및 애하의 수로를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호산산성이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진 12. 호산산성 입구
 
 
 
한편 중국인들에게는 이곳이 만리장성 동단 끝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에서는 2000년대에 소위 ‘장성공정’이라는 사업으로 이곳을 만리장성 동단 끝으로 설정했으며, 만리장성을 복원한다는 명분 하에 새로운 성곽을 다시 지었다. 오늘날 호산산성은 옛 성곽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 졌고, 현대식 공법의 성곽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필자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성곽이었다.
 
 
사진 13. 새로 지어진 호산산성 성곽길
 
 
사진 14. 호산산성 정상부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애하 합류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