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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국역사연구회 여름답사기] 전쟁의 현장을 가다_심규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8.31 BoardLang.text_hits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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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8월(통권 54호)

[2024년 한국역사연구회 여름답사기] 
 

전쟁의 현장을 가다!

 

 

심규보(근대사분과)

 
 
 
올해 한국역사연구회가 준비한 해외 답사는 필자에게 여러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많은 선생님과 함께한 답사는 현장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제공했고 선생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러일전쟁 120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전쟁’이라는 답사의 주제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던 여러 전쟁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답사가 계획되고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부족하지만 ‘개항기’라는 시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필자에게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계획된 답사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답사는 5박 6일 동안 진행되었고, ‘수·당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한국전쟁’ 등과 관련된 많은 답사지를 방문했다. 답사지마다 시대를 전공하신 선생님들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전문지식과 현장의 만남은 답사의 공간을 한층 더 생동감 있게 느끼게 해줬다. 필자의 역량 상 모든 답사지를 글에 담을 수 없었다. 답사지는 답사의 테마인 ‘전쟁’을 중심으로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구성하였다.
 
 

수·당 전쟁 유적지: 대흑산산성, 호산장성

 
대흑산산성은 고구려의 비사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비사성은 7세기 고구려와 수·당전쟁의 격전지로 수와 당의 군대가 거쳐야만 하는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비사성은 발해만과 황해의 해상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장소였다. 산성은 차량으로 이동하여 올라갔지만, 차량의 한편으로 보이는 산세의 가파름은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로 적합한 장소임을 추정하게 했다. 답사 당시 서북쪽의 장대는 공사 중으로 출입이 제한되었다. 장대 부근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을 기대했지만, 출입할 수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중국은 대흑산 산성의 고구려 성벽을 파괴하고 새롭게 성문을 건설하여 관광지로 이 장소를 개발하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 공정’은 다른 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단동(丹東)의 호산산성은 고구려의 박작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가파른 산성을 직접 올라가면서 고구려 산성의 험준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정상에서 한눈에 보이는 지형들은 산성이 건축된 이유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산성은 소위 ‘장성공정’으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구려 성곽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현대에 이르러 만리장성과 유사하게 건축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중국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은 현재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주요한 유적지들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답사 내내 같은 방을 사용했던 문영철 선생님은 사실과 맞지 않은 설명에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수·당 전쟁의 규모를 생각할 때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음에도 ‘고구려’라는 흔적 자체가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사진 1. 대흑산산성 장대는 아쉽게도 공사중이었다
 
 

사진 2. 호산산성 정상에서 김성훈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러일전쟁 유적지: 러시아거리, 동계관산, 203고지, 백옥산탑

 
중국으로 떠난 첫날 첫 답사지는 러시아 거리였다. 러시아 거리의 끝에는 대련(大連) 자연사박물관의 구관이 위치했고 그 주변으로 광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1898년 러시아는 청과 ‘여대조차조약(旅大租地条约)’을 체결하여 대련과 뤼순(旅順)을 조차했다. 대련은 동청철도가 설치되면서 점차 러시아에 의해 근대적 도시로 변화해갔다. 러시아 거리는 러시아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러시아식 건물이 남아있는 장소였다. 대련에는 유난히도 광장이 많았다. 러시아 거리의 광장뿐만 아니라 대련에 위치한 중산광장 또한 이 시기 건설되었다. 러시아에 의해 건설된 광장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통치권을 양여 받으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답사를 통해 광장이 제국주의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되었다. 대련의 광장들은 양국의 제국주의가 전개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사진 3. 러시아 거리의 끝에 위치한 광장
 
 
사진 4. 중산광장, 광장을 둘러싸고 일본 제국주의의 주요 기관들이 배치되었다.
 
 
답사 둘째 날에는 러일전쟁의 격전지인 뤼순으로 향했다. 러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군은 만주로의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뤼순을 점령하고자 했다. 대련에 상륙한 일본군은 해군의 지원을 받아 대련 일대를 점령하고 뤼순으로 향했다. 러시아는 1898년 뤼순을 조차하면서 방어시설을 건설하고 있었지만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러시아군은 방어진지 구축을 진행하여 203고지 등에서 진지의 공사를 완료했다. 답사지로 방문한 동계관산, 203고지에서는 요새화된 진지의 형태가 남아있었고, 해안포와 기관총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특히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동계관산은 강력한 러시아의 진지를 추정할 수 있게 했다. 뤼순공방전은 치열한 공방이 지속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사진 5.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동계관산 요새
 
 
사진6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이 설치한 해안포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한 이후 곳곳에 위령탑을 건설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백옥산탑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위령탑은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와 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뤼순 점령 중 사망한 일본 병사들의 유골을 보관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설했다. 위령탑은 203고지에서도 발견되는데, 뤼순에 산재한 위령탑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짐작하게 했다.
 
 

사진 7. (좌) 백옥산탑의 위령탑
사진 8. (우)203고지 위령탑

 
 
러일전쟁 유적지는 현장을 생동감있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존재했다. 이는 답사에 관한 아쉬움이 아니라 현장에서 그릴 수 없는 한국과 청의 모습이었다.

답사를 떠나기 전 필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된 인천 월미도 앞바다를 방문했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인천과 뤼순에 있던 러시아군을 일본이 기습적으로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월미도는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러시아의 군함이 스스로 배를 침몰시킨 장소였다.

러시아는 1993년부터 ‘제물포해전 추모행사’를 매년 개최해왔다. ‘제물포 해전’ 100주년을 맞이한 2004년에는 지금의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푸틴 대통령도 2010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곳을 방문하여 헌화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이 일본, 영국, 미국 등 열강의 적극적인 극동 정책에 기인한 전쟁임을 강조하면서 러일전쟁이 ‘방어전’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 항복하지 않고 자폭한 러시아 군함들은 민족의 자존심으로 표상되었다.
 
 

사진 9.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의 추모비
 
 

사진 10. 바라예크함 깃발 복제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직접촬영)
 

일본에서도 러일전쟁은 ‘방위 전쟁’으로 기억되었다. 2005년 요미우리 등 일본의 여러 신문사는 러일전쟁 100주년 특집을 다루면서 일본의 러일 개전을 국면 타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표상했다. 심지어 2015년 일본의 수상이었던 아베 신조는 ‘전후 70년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라고 발언하여 러일전쟁을 마치 제국주의에 대항한 전쟁인 듯 포장했다. 이 발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보는 일본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양국은 모두 러일전쟁을 자국을 수호했던 영광의 역사로 포장해왔다. 러일 양국의 전쟁으로 발생한 한국과 중국의 피해는 양국의 시선에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러한 러일전쟁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선은 한국과 중국에 있는 유적지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났다. 유적지는 한국과 중국에 위치해 있음에도 막상 전쟁이 발생했던 두 국가에 대한 조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중 양국이 전쟁의 직접적인 교전국이 아니다 보니 유적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국 사이에서 벌어진 격전지를 보면서 한국의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항일투쟁과 만주사변 유적지: 뤼순감옥, 관동도독부법원구지, 일본수상경찰서, 장씨수부, 9·18 역사박물관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한국에 대한 권리와 남만주 일대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일본은 한국에서 ‘을사조약’을 시작으로 ‘한국병합’ 작업에 착수했고, 중국에서 ‘만주선후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만주의 이권을 공고히 했다.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았을 수 있었고, 한국과 만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국권을 상실해가던 과정에서 일제의 침탈과 제국주의 열강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표명한 투쟁이었다. 하얼빈에서 의거한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거쳐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안중근은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뤼순감옥에는 안중근이 수감 된 장소와 사형이 집행된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중근이 수감 되었던 장소는 외부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고 바로 옆에 간수의 당직실이 붙어있는 형태였다. 뤼순감옥에는 감방, 고문실, 사형집행실, 강제 노역 장소 등이 남아있어 수감자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관동도독부 법원은 안중근이 6차례에 걸쳐서 재판을 받은 장소였다. 법원에는 안중근이 재판을 받은 장소와 재판관들의 업무실 등이 남아있어서 당시 현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 재판석을 바라보며 피고인의 위치에서 현장의 느낌을 체험했다. 
 
 
사진 11. 뤼순감옥 내부 전경
 
 

사진 12. 관동도독부 법원 재판장에서 도면회 선생님, 한성민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안중근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에 의해 1910년 8월 29일 병합되었다. 비록 국권을 상실했지만, 한국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안중근이 재판을 받고 사형은 받은 장소는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순국한 장소가 되었다. 이 두 장소의 공기는 유난히도 무겁게 다가왔고 까닭 모를 착잡함이 느껴졌다. 

한편 러일전쟁의 결과는 중국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전쟁의 결과 러시아로부터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양여 받았다. 일본은 조차 지역을 ‘관동주’라고 이름하고 관동총독부를 설치했으며, 남만주철도의 수비를 명목으로 일본군을 배치했다. 관동총독부는 이듬해 관동도독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19년 민정으로 이관하면서 관동청이 되었다. 이에 따라 관동총독부 및 도독부에서 관할하던 일본군은 분리되어 관동군사령부로 따로 소속되게 되었다.

조차지와 철도의 수비를 담당하던 관동군은 1920년대 말부터 중국 침략의 선봉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관동군은 장쭤린 폭살사건을 일으킨 뒤 만주사변을 연속으로 계획하여 실행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1945년까지 지속될 중일전쟁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장씨수부와 9·18 역사박물관은 만주사변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장씨수부는 동북지역의 최대 군벌이었던 장쭤린과 장쉐량의 관저와 사택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답사의 마지막 장소였던 장씨수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과 더운 날씨 때문에 관람이 매우 힘든 곳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저택의 거대한 규모는 당시 봉천군벌의 위상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9·18 역사박물관은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을 기념하여 만주사변이 발생한 심양 지역에 설치되었다. 9·18 역사박물관에서 강조되는 것은 ‘國恥’와 ‘國難’이었다. 청일전쟁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만주 침략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을 조망하고 있었다. 전시의 끝에는 만주사변으로 비롯된 ‘국치’를 항일전쟁 끝에 극복한 모습들이 강조되고 있었다. 만주사변을 중일전쟁과 연결하고, 중일전쟁이 제국주의로부터 승리한 전쟁임을 강조하는 전시의 내용은 중국이 교육하고자 하는 ‘애국’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해줬다.
 
 

사진 13. 장씨수부 내 장쭤린 관저
 
 

사진 14. 9·18 역사박물관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한국전쟁: 압록강단교, 압록강 도하 목교, 항미원조기념관

 
선박에서 내려 압록강 철교 옆으로 나란히 자리한 압록강 단교로 향했다. 단교의 입구에 세워진 펑더화이와 인민지원군의 동상은 중국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단교는 북한과 중국에게 조·중 친선과 ‘항미원조’ 전쟁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듯했다. 단교에서 ‘항미원조’ 전쟁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승리한 전쟁처럼 묘사되었다. 단교의 곳곳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인민지원군의 사진과 조·중 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자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었다. 단교의 끝에는 펑더화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항미원조’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다음날 방문한 압록강 도하 목교는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신의주로 가는 교량이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도하 한 방법을 알 수 있게 해줬다. 목교와 단교는 한국전쟁에서 한반도로 진출하는 인민해방군의 모습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진 15. 압록강 단교에서 원재영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16. 단교의 입구에 위피한 펑더화이의 동상
 
 
사진 17. 수풀사이로 보이는 압록강 잔교
 
항미원조기념관은 단교에서 단편적으로 파악했던 중국의 시각을 확실히 보여줬다. 전시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전시에서는 중국 인민들의 역할이 강조되었는데,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모금 운동, 절약 운동 등이 강조되었다. 전시에서는 특히 압록강까지 올라온 미군을 다시 38선까지 밀고 내려간 군사적 승리가 강조되었다. 중국에게 한국전쟁은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승리한 자랑스러운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의 유적지에서 보이는 중국의 ‘애국주의’ 전시는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에 대한 지향을 조망하기보다 전쟁에 참여하거나 전사한 중국군을 영웅화하기 급급했다. 미군의 깃발과 한국군의 부대마크들은 마치 전리품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단둥지역의 답사는 눈앞에 보이는 북한을 통해 분단이라는 현실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분단 이데올로기의 극복 과정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진 18. 항미원조기념관의 전시 끝자락에 전리품 처럼 전시되고 있는 미군기와 부대마크들
 
 

마치며


답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아쉬움이 남았던 이유는 4박 5일의 일정이 그만큼 알차게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답사 기간 내내 좋은 식사와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많은 선생님과도 소통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 나눈 교류들은 답사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였다. 많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주시고 격의 없이 대해주신 여러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