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나의 논문을 말한다] 이승만 정부의 식량유통정책 연구_김수향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9.30 BoardLang.text_hits 593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9월(통권 55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이승만 정부의 식량유통정책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2)
 
 
 

김수향(현대사분과)

 
 
 

1. 왜 1950년대 식량인가

 
요즘엔 듣기 힘든 단어지만 1950년대에는 빈번하게 쓰였던 단어 중 하나가 보릿고개이다. 보릿고개는 가을에 수확한 쌀을 모두 소진했지만, 벼를 추수한 후에 심은 보리가 채 익지 않아 식량이 부족한 시기의 고단한 삶을 의미한다.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 시기가 아니더라도 먹을 식량이 없는 농가, 절량(絶糧)농가가 항상 존재했다.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농민이 전 국민의 70%에 달할 만큼 농업이 주요한 산업이었던 1950년대. 막상 농민은 한 해 동안 고생해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것이 없었다. 대체 왜. 박사논문 주제를 1950년대 농업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부터 켜켜이 쌓인 1950년대 농업사 연구들은 필자가 품은 질문에 일정한 답을 주었지만 아쉬움도 여전했다. 농민이 생산한 양곡이 어떤 경로를 거쳐 유통·소비되었고, 그 속에서 생산자인 농민이 절량상태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박사논문은 1950년대 정부 식량정책의 법·제도적 토대의 형성 과정과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한 양곡의 생산, 유통, 소비(배급)에 이르는 식량유통의 전 과정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식량은 생산 영역인 농업, 식량이 유통되는 경제구조, 생산과 소비의 주체인 국민들의 생활상까지 포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이다. 유통부문이야말로 식량 생산자와 소비자가 조우하는 지점이기에, 관련 연구를 통해 1950년대 한국 농업의 현실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논문 작성과정에서 활용한 자료와 함께 논문의 내용과 의미를 소개하고자 한다.
 
 

2. 정부식량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식량수급계획’ 자료

 
1950년대 한국 정부의 식량정책을 뒷받침한 법·제도는 1950년에 제정된 「양곡관리법」과 그에 따른 정부관리양곡제도이다. “국민 식량의 확보와 국민 경제 안정을 도모”함을 목표로 제정된 「양곡관리법」은 시장을 통한 양곡 유통을 원칙으로 했다. 주목할 것은 정부가 식량 유통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통로 또한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매년 농민으로부터 일정량의 양곡을 매입하여 ‘정부관리양곡’으로 두고, 이를 배급·판매할 수 있었다. 논문의 주된 분석 대상이 정부 정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관리양곡제도의 구체적인 운영상은 ‘식량수급계획’자료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양곡관리법」에 따라 정부는 매년 정부관리양곡 수급계획을 작성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정부가 작성한 초안과 수정안은 국가기록원이 소장중이며, 국회의 검토 의견과 수정안은 의안정보시스템(https://likms.assembly.go.kr/bill)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농림부가 작성한 계획은 크게 수요면과 공급면으로 구성된다. 공급면은 정부입장에서 양곡을 획득하는 경로를 의미하며, 수요면은 정부가 배급, 군량 등 양곡을 지출해야 하는 부문이다. 각 계획안에 적힌 숫자를 엑셀에 옮기고, 해마다 다른 항목들을 나름의 기준을 세워 정비하는 데에는 많은 품이 들었다. 서 말의 구슬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과정이었지만 덕분에 보배도 얻었다. 1950년대 정부의 식량정책이 시기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녀년부터 정부관리양곡의 규모가 대폭 증가했다. 수요면, 특히 관영수요(군량과 공무원용 배급양곡)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매년 600만석(국내산 양곡 생산량의 약 1/3)에 달하는 정부관리양곡의 규모는 1956년까지 유지되었다. 규모는 같았지만 전쟁기인 50-53년과 전후복구기인 54-56년 정부가 양곡을 공급한 대상은 확연히 달랐다. 전쟁기만해도 일반 시민들에게 유·무상으로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 배정된 양곡(민수용)과 군량, 공무원 배급 등을 위해 배정된 양곡(관수용) 의 양은 비등했다. 전쟁 이후 정부는 민수 부문에의 양곡 공급을 중단했다. 관영수요, 특히 군량을 충당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정부가 양곡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 또한 매상에서 현물납제, 원조 식량 등 시기마다 달랐다. ‘식량수급계획’자료 자체가 정부가 식량정책의 주안점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 
 
 

3. ‘숫자’의 의미 찾기 – 식량 매입 가격에 관한 자료

 
식량정책의 변화를 정리한 후, 식량수급계획상의 여러 가지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전후(戰後) 복구기로 불리는 1954년~1956년의 식량정책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전시라는 비상상황이 끝났음에도 정부관리양곡의 규모가 줄지 않았고, 식량정책의 목표가 정부관리양곡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전쟁기~전후복구기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양곡을 확보하는 방식과 그것이 발휘한 효과였다. 「양곡관리법」이 규정한 유일한 정부의 양곡 확보 방안은 매상(유상구입)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금납으로 징수하던 지세를 현물로 징수(임시토지수득세)하여 양곡을 확보했다. 이미 분배농지의 대가를 현물로 징수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현물수납을 통해 정부는 자금 지출 없이 양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전쟁 비용 조달에 휘청거리는 정부 재정을 받쳐준 반면 농민에게는 득보다 실이 컸다.

전쟁이 종결된 후에도 정부는 현물 수납제도를 유지했다. 매상보다 현물수납의 방식으로 더 많은 식량을 확보했다. 정부가 현물 수납을 지속했던 이유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 자료는 농림부가 작성한 식량 가격 관련 문서들이었다. 국가기록원이 소장 중인 〈4287년산 추곡일반매입가격결정에 관한 건〉을 보자. 농민이 1954년 가을에 수확한 쌀을 정부에 팔 경우, 정부는  1석당 9,509환을 지불했다. 정부가 내세운 가격은 시장거래가격보다 낮았지만 당장 현금이 필요하거나, 빚을 진 농민들은 정부 매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임시토지수득세와 농지상환곡으로 정부가 수납한 쌀에는 1석당 5,550환의 가격이 적용된다. 같은 쌀에 대해 서로 다른 가격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정부입장에서 두 가격의 차이는 양곡 확보에 드는 자금이 줄어드는 효과를 발휘했다.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금납제일 때보다 과중한 조세 부담을 져야했고 영세농들은 현물수납으로 인해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식량정책 하에서 농민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절량농가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4. 1950년대 원조식량이 가지는 의미

 
정부의 식량정책에서 국산 식량만큼 중요한 것은 원조로 도입된 식량이었다. 한국 전쟁 기간과 1957년 이후 4.19전까지의 두 시기, 정부관리양곡 내 원조 식량의 비율이 특히 높았다. 두 시기 한국에 도입된 원조 식량은 성격이 달랐다. 전쟁기에 도입된 원조 식량이 UN과 미국이 전시구호를 목적으로 제공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PL480이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후자는 한·미 양국 간의 협정에 의거해 도입된 식량이다. 

농림부의 《농림통계연보》를 바탕으로 원조 식량의 도입경로와 시기, 도입량을 정리할 수 있었다. 미국과 한국의 도량형이 다르다 보니 꽤 애를 먹었다. 전쟁기의 구호 식량은 식량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다. 1953~4년 구호 식량으로 도입된 보리의 양은 국내 생산량과 맞먹었다. “공짜” 보리 앞에서 국산 보리는 가격경쟁력을 상실했다. 1953년과 1954년 여름, ‘공황’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국산 보리 가격이 급락했다. 보리 수확을 포기하고 밭을 갈아엎는 농민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PL480이 도입되기 전부터 원조식량이 농가경제에 미칠 악영향이 예견되었던 셈이다.

1950년대 후반 한·미 양국 간 협정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국산 양곡가를 하락시키는 구조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숫자로만 보면 잉여농산물 도입 이후 한국의 식량사정은 매우 호전되었다. 식량 수요량과 공급량이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정부는 수치상의 균형을 무기삼아 국산 곡가를 지지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전반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가운데 유독 곡가만 하락세였다. 그 결과는 농가 경제력의 약화였다. 반면 정부는 잉여농산물 도입과정에서 적립되는 대충자금으로 국방비로 인한 재정적자를 보전할 수 있었다.
 
 

5.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조금 더 큰 것으로.

 
이승만 정부가 시행한 식량정책의 내용과 그 역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논문을 쓰는 내내 〈양곡관리법〉에 명시되었던 식량정책의 목표, “국민 식량의 확보와 국민경제의 안정”을 되뇌었다. 큰 목표와 달리 논문에서 주목한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다양한 가격, 양, 시기와 같은 디테일을 따라가면서 필자가 얻은 답은 실패였다. 이승만 정부는 도시의 비농가는 물론 농민이 충분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식량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전 인구의 70%를 차지했던 농민의 경제력은 악화일로였고, 이는 국민경제의 불안정을 의미했다. 일부에서 이승만(이승만 정권)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 농지개혁과 자작농 창출을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들 앞에서 실제 농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야말로 역사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물론 선학들의 켜켜이 쌓인 농업사연구와 각종 기관들이 구축해온 현대사 관련 DB가 없었다면, 부족한 필자는 디테일에 다가가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논문에 풍부하게 담지 못 한 자료들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