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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민중을 바라보는 방법_왕현종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9.30 BoardLang.text_hits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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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9월(통권 55호)

[나의 책을 말한다] 

 

민중을 바라보는 방법

-한국 근대 민중의 성장과 민중인식의 차이-

(소명출판, 2024.6)
 
 
 

왕현종(근대사분과)

 
 
 
한국 근현대사 민중운동에 대한 연구들이 최근 여러 단행본의 형태로 출간되었다. 새로운 책들의 저술 동기는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사회변혁을 위한 담론으로 이해되어왔던‘민중운동론’의 시각과 내용에 대해 나름 반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서도 그런 맥락에 있지만, 민중운동론의 회의 내지 폐기를 주장하기 전에 당시 민중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 방법론적인 모색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원래 주제는 ‘한국근대 민중의 성장과 민중인식의 편차’라고 잡았지만, 최종적인 책 제목은 ‘민중을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고쳐서 발간했다. 
 
이 글은 한국근대 민중이 스스로 어떻게 근대를 맞이했고, 그리고 어떻게 헤쳐 나왔는가를 밝히려고 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민중의 자율적 생활과 자신들의 권리의식 성장에 더 주목하였다. 민중운동이 지향하는 신분제의 해체, 인권, 참정권 등 민주주의적 민권운동의 흐름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러한 질문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물음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민중을 바라봤던 관점은 ‘위로부터, 지배층, 근대’라는 시각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고 있었으므로 민중운동사의 방법론적인 전환을 추구하며 근대이행기 아래로부터의 민중운동의 실체를 살펴보려고 하였다.
 
 
 

1부, <근대사회 형성과 각 주체의 민중이해>에 대하여

 
민중사의 연구사에서는 민중을 하나의 변혁주체로 간주하여 거대담론으로서 민중적 민족주의를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민중을 자율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밑으로부터 근대세계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으로 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객관화하거나 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먼저 민중 용어를《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면, ‘인민’이라는 단어가 무려 2,504회 등장한다. 국민(163회), 신민(395회), 백성(1,718회)에 비해서도 빈도수가 많다. 19세기 말 새로운 서적 간행이나 각종 신문 매체 등에서도 확인된다.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에 실린 전체 글자수는 22만 8천자인데, 이 중에서 인민, 국민, 평민, 백성 중에서 ‘인민’이라는 용어가 제일 많이 쓰였다(439회). 국민은 12회, 평민은 2회, 백성은 36회였다. 개화기 서적에서는 일반 민을 가리키는 여러 종류의 용어 중에 절대 다수는 ‘인민(人民)’이라는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판단은 아직 섣부르다.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인민은 8~900회 쓰였지만, 도리어 백성이 1,200회 이상 쓰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왜 인민이라는 것보다 백성이 도리어 많이 쓰였을까. 이는 계몽운동가들의 민중인식과 밀접하게 관련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은 번역 문제다. 근대 자료 번역에서 ‘민중’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실제 원문의 쓰임은 그렇지 않았다. 이를테면, 1894년 3월에 공포된 동학농민군의 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반과 부호들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이라든가, “우리들이 오늘 일어선 뜻은 위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한 것(上報國家下安黎民)”이라는 표현은 원문 그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원자료를 번역하면서 본래 용어에 충실하지 않고 민중, 백성, 국민으로 자의적으로 번역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말 《고종실록》과 《독립신문》에서도 여러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 민중과 인민의 번역 사용 오류와는 별도로 주목할 부분이 있다. 1898년 12월 28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는 조서이다. “무릇 인민(人民)들은 한두 명씩 고립되어 있을 때면 누구나 다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안정되게 지니지만, 수백, 수천 명씩 무리를 이루게 되면 그 속에서 자연히 들뜬 기운이 생겨나, 처음에는 감히 말하지 못할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민중’이란 개별 인민이 단순하게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다수가 모이면 집단적 의식으로 각성하고 행동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민중의 개념을 사용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최고 권력자인 고종의 조서에서였다.  

한편 당대 지식인의 민중인식은 민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관료계몽지식인으로서 김윤식, 유길준, 그리고 유교지식인 매천 황현이 대상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민중을 우민으로 보고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민중이 계몽의 대상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역시 기존 질서에 반항한다면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피지배층에 대한 우민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1894년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등은 민중의 의식과 생활과 같이 하고자하는 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1차 봉기와 집강소체제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동력으로 삼았다. 수많은 민중들은 자신들의 소원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으며, 나름대로의 민주주의적 질서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후 이러한 경험은 정치제도로서 정착되지 못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정치·군사적 침략에 대항하는 2차 봉기를 전개하였다. 이때 참여한 농민군 세력은 크게 세력화되었지만, 민중의 개별적 주체적인 참여보다는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과 전쟁 수행에 동원되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수많은 민중들의 참혹한 희생을 가져왔다. 
 
 

2부. <대한제국기 민중 인식의 편차와 계몽 담론>에 대하여

 
2부에서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황제 즉위와 1898년 독립협회의 중추원 개편을 비롯한 정치개혁운동을 검토했고, 1905년 이후 계몽운동의 전개와 의병운동, 신식 보통학교 교육의 확대 등을 검토하였다. 

먼저 근대개념사연구 기초로서 독립, 국권, 인민, 입헌 등의 개념을 다루었다. 흔히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계기로 하여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하는 근대국가와 국민을 창출하는 근대국가의 개혁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1905년이후 계몽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심지어 밑으로부터 정치세력화를 지향하는 일진회에게도 마찬가지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몽운동의 연구에서 민중과 계몽운동 단체와의 상호관계성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근대국가, 근대시민사회를 이끌려고 했던 계몽운동세력(독립협회과 만민공동회, 계몽운동단체, 일진회 등)이 민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끌려고 했는가, 국권회복운동의 또다른 정치세력인 의병운동과 민중과의 결합방식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두 가지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계몽운동, 혹은 정치세력이 민중을 어떻게 동원해 내는가를 바라보는 한편, 역으로 민중의 입장에서 계몽주의적 인민의 권리와 의무 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양쪽의 관점에서 민중인식의 편차를 다루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민중의 권리 의식이나 정치참여의 권리는 거의 상정되지 못했다. 1905년 국권침탈 전후로 가장 국민의 개념과 권리를 설명한 자료로서 연구되었던 《국민수지》(혹은 《헌정요의》)에서도 1910년까지 국권 개념이나 국민의 권리에 대해 크게 발전된 내용 변화를 갖추지 못했다. 민중들의 기본권 보장은 필수 조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진회 운동에서도 일본 황제의 시혜속에서 추상적 차원의 민권 보장을 내세우고 있었을 뿐, 실제적으로 민중의 정치참여 권리인 참정권을 포함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룬 것은 1906년 이후 보통학교와 사립학교에 진학한 민중의 후속세대에 대해서이다. 민중의 아이들은 일제의 통제하 관·공립보다 훨씬 많은 2천 여개의 사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과 신교육체계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규교과의 체계를 넘어 마치 고등교육에서 행해지는 학문과 현실에 대한 토론 수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연합체육대회를 통하여 지역민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시켰다. 이들 새로운 세대의 민중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의식과 행동의 주역으로 나서는 준비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사족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대적 변화속에서 민중의 세대도 바뀌고 있음을 인식하자는 차원에서 덧붙였다. 

전체적으로 본서는 한국 근대 민중의 지난한 투쟁에 관한 역사적 관점과 추이를 보다 정교화하려고 했다. 이 시대 입헌주의 내지 민주주의적 과제는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민권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그래서 민중들의 정치 참여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9세기 말 시점에서는 민중들이 사회경제적 이해의 관철을 위해 개개인의 삶과 의식의 향상을 도모하였고, 자기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 사례로서 민중들이 각종 소송, 집단적 집회, 심지어 폭력적인 민란, 농민전쟁에까지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중들은 유교주의의 우민관이나 계몽주의의 우민관을 넘어서서 직접 의병전쟁·계몽운동·일진회 등 여러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후 민중들의 후속세대는 1919년 3·1운동에의 참여와 경험을 통해 민중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타개해 나갔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 책을 쓰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점이 있었다. 근대이행기 민중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 내재적 발전의 시각에서 민중의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운동에 주목해야 하며, 1894년 혁명운동에서 제기된 민주주의적 소통과 절차의 정치제도화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새로 발간되기 시작한 민중에 관한 저작들과 함께, 본서의 출간으로 아래로부터의 민중운동과 21세기 미래사회의 전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