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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1회 공무수행 역사학의 시작_박범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9.30 BoardLang.text_hits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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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9월(통권 55호)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1회. 공무수행 역사학의 시작
 

 
 

박 범(중세2분과)

 
 
 

연재를 시작하며

 
본래 이 글은 2020년 한국역사연구회와 푸른역사의 “역사문고” 사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금요일엔 역사학”이라는 더 멋있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나 또한 이때 집필 신청을 하고 원고를 넘겼으나,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아서 넘긴 원고를 거두고 다시 가다듬어서 집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벌써 4년이 흘렀다. 여전히 원고는 넘기지 못했고 원고에 수록할 내용은 더욱 늘어나고 말았다. 차일피일 미루던 찰라, 한국역사연구회의 미디어팀에서 연락이 왔다. 억지로라도 매달 쓰면 결국 원고를 다 마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수락했다. 마치 박사과정 시절 학위논문의 진도를 못내서 여기 저기 학회에 발표 신청을 하고 떠밀려 학위논문을 마무리하던 것처럼.

‘공무수행 역사학’이라는 표현을 생각한 것은 우연히 본 신문에 실린 한편의 글에서 비롯되었다. 2019년 2월 14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카이스트 전치형 교수의 <‘공무수행 과학’의 애로>라는 글을 읽고 역사학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전 교수는 “공무수행 과학에도 당연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이 필요하지만, 공적 과학의 창의와 혁신은 무엇보다 그 활동의 연속성, 안정성, 신뢰성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 글을 보고 문득 내가 경험해 왔던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면 역사학은?

역사학 분야에도 수 많은 ‘공무수행 역사학’이 존재한다. 조달청에서 운영하는 통합 전자 입찰 사이트인 ‘나라장터’에 들어가면 하루가 멀다 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용역 과제가 올라온다. 그 용역 과제 안에는 역사학과 관련된 과제도 꽤 많다. 역사학과 관련이 깊은 국가유산청을 비롯하여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재과’, ‘문화유산과’, ‘문화관광과’, ‘문화체육과’에서는 자신들의 과업 수행에서 필요한 역사적 사실 혹은 과업의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학술 용역 과제를 공고한다. 이러한 것들을 일러 ‘공무수행 역사학’이라고 부를 만 하다. 그리고 그 학술 용역 과제에는 수많은 역사연구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

과연 이러한 용역의 수행을 학술 연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 교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다만 과학 분야에 한해서 그렇다. 전 교수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서 산성비로 나빠진 수질 회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장기 과제의 데이터를 수집할 때, 미 항공우주국에서 극지방의 얼음을 관측하는 자료를 수집하는데 공무수행 과학이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하는 역사 관련 학술 용역 과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연구재단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지원해주는 연구과제에서도 이러한 장기적인 프로젝트는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과 역사학 연구의 차이일 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역사학 연구자들은 한국연구재단 혹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같은 학술연구단체의 연구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과제는 역사학 연구자들이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주제 혹은 과제를 직접 찾고 이를 재단과 연구원에 제출하고 심의를 거쳐서 선정하기 때문에 연구자의 자유 의지가 매우 많이 반영되어 있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내가 하고 싶은 주제를 연구하고자 하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학술연구기관에서는 주제 선정에 있어서 연구자의 의지를 대부분 수용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공무수행 역사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주제의 연구를 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은 지역 연구원에서 연구과제를 신청하여 계약을 맺은 적이 있는데 해당 지역 연구원 관계자로부터 우린 지역 연구를 하는 곳이지 순수학술기관이 아니므로 자기 지역 사례만 연구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목적성이 뚜렷한 것이다.

역사 연구자들이 ‘공무수행 역사학’을 수행하면서 이를 학술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인지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로 여기에 있다. 우선 학술 용역 과제이다 보니 연구의 필요성은 발주처, 즉 지방자치단체에 있지 역사 연구자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대체로 용역 과제를 수행 하기 위한 지침, 즉 과업지시서를 잘 준수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다음으로 학술 연구 용역 결과물은 이미 나와 있는 역사 연구자들의 선행 연구 논문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내용을 구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지역 사회의 필요에 의한 결과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지식은 이미 대부분 연구 결과로 나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역사적 근거를 찾아주는 선에서 결과 보고서가 작성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누구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연구용역 과제의 최종결과물은 한두 번의 자문회의를 통해서만 검토된다. 자문회의는 학술논문 심사 과정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문일 뿐이다. 그리고 최종결과보고서는 시군청 서고 어디엔가 꽂혀 있으며, 출판물로 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역사 연구자들이 ‘공무수행 역사학’을 자신의 역사 연구를 위한 도구 혹은 계기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알바’ 정도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도 박사과정에 들어간 이후 여러 종류의 역사학 관련 연구 과제에 참여했다. 나는 원래 조선후기 경제사, 특히 재정사를 주된 연구 주제로 삼아 왔다. 석사논문은 의주부의 지방재정이었고, 박사논문은 장용영의 재정 연구였다. 줄곧 조선후기 재정사에 대한 관심 속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연구 용역 과제를 수행하면서 지역사와 근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야 했다. 새로운 역사 분야에 대한 흥미를 얻을 수 있었고 역사 연구를 스스로 넓혀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원에 들어와 구체적인 세부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이 매우 지난하면서도 힘든 작업이라면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제 역사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 연구의 지평을 세부 전공이 아닌 역사학 전반으로, 더 나아가 사회과학으로 넓혀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지난 10년 동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재정사가 아닌 지역사 연구자가 되어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기획 연재를 하게 된 이유는 현재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는 연구자를 위해서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박사학위 과정 시절에는 오직 학위논문을 쓰는 데에만 집중한다. 좋은 학위논문을 써야 박사학위 연구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학계의 현실이다. 대부분 박사과정생들은 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늦더라도 좋은 주제로 연구사적 의의가 높은 논문을 쓰고자 노력한다. 다른 학문과 비교하여 역사학 논문 학위 과정이 몇 년 긴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표절 문제와 같은 사례가 다른 학문에 비해 역사학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현실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알게 된다. 좋은 학술 논문을 잘 쓰는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그리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장 교수 채용 조건에서부터 막히게 된다. 자신의 학술 논문 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 경력과 용역 과제 참여 경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대학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학 연구자로 살아가게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연구, 다른 하나는 강의, 마지막은 봉사이다. 봉사가 사실은 뜬금없어 보이는데, 학술대회 토론이나 학술지 심사 같은 것을 가리킨다. 위 세 가지는 대학 교수가 되면 업적평가에 반영되는 지표이다. 나도 대학교수가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전까지 위 세 가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누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부록처럼 ‘산학’이 따라 붙는데 바로 이 ‘산학’이 연구용역이다. 안타깝게 대학원 과정에서는 위 네 가지 요건 중에서 ‘연구’만 배운다.

연구 조차도 정해진 매뉴얼은 없다. sns에서 우연히 본 글이 있는데 누가 한국사 대학원 구조를 ‘도제식’이라고 지칭했던 기억이 난다.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거의 도제식이라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도교수의 역량에 따라 대학원생의 연구 형태가 결정된다. 그래서 늘 어느 대학원에 다니는가 보다 어느 지도교수에게 배웠는가를 강조한다. 하지만 정해진 매뉴얼은 없기 때문에 선행연구 논문을 열심히 정리하고, 해당 주제의 자료를 읽다보면 마치 도를 터득하듯 논문을 쓰게 된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정해진 매뉴얼은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작년에 다행스럽게 성균관대 임경석 선생님께서 <역사논문 작성법>이라는 매우 훌륭한 저서를 출간하셨다. 그리고 3년 전에도 목포대 최성환 선생님께서 <역사 논문 쓰기 입문>이라는 책을 내셨다. 두 책은 아마도 내가 아는 역사논문 작성을 위한 소개서라고 알고 있다. 외국에는 분야별 논문 작성법에 대한 책이 많은데 왜 한국에서는 이러한 책이 없을까 생각했었다. 처음 대학원에 들어가는 학부생이나, 논문을 처음 작성하는 대학원생들에게는 매우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연구는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추어졌는데, 그러면 강의는 어떨까. 나는 2009년 석사학위를 막 마치고 처음으로 건양대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강사법 덕분에 강사 조건이 대부분 박사졸업이 되면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나는 석사를 마치자마자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건양대에서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안식년으로 외국에 가시게 되자 그 분께서 맡으신 한국사 교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강의를 어떻게 하면 된다는 말도 없이 떠나셨다. 나는 어떻게 강의를 해야 하는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받은 과목명은 ‘한국사새로읽기’였다.

처음에는 무언가 그 동안 알고 있던 한국사와 다르게 ‘새로읽기’가 가능한 내용으로 가르쳐야 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각 시대사별로 교과서에 없는 내용만 뽑아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읽기 위해서는 그 이유도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역사 이론을 3주차 정도 포함시켰다. 그러다 보니 교양 한국사개설과는 전혀 다른 강의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사새로읽기’는 그냥 교양 한국사개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의를 처음 맡게 되면 당연히 당황하고 떨리게 된다. 나는 2009년 처음 강의할 때 20대 후반이었다. 사실 수강생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도 않았다. 출석부의 이름을 부를 때 얼마나 떨었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중등교원은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이수해야 하고 임용 시험에 통과해야 중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등교원에 해당하는 강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교수법이라고 부르는 고등교원의 강의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강사에게 그런 교수법 이수를 요구하는 대학교는 거의 없다. 자격 요건은 해당 분야 박사졸업자이거나 전문가이면 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처음 강의를 맡게 되면 어떻게 강의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논문 작성법은 그나마 있어도 강의방법에 대해서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서 인기 학원강사의 강의 방법을 보면서 배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3년 전에 어느 대학에서 ‘예비 교수자로서의 실전 강의 전략’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인문학 박사과정생들에게 앞으로 ‘피교육자에서 교육자로’ 나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건양대에서 처음 강의를 한 이후 박사학위를 받기 전까지 10년간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우송대, 충남대, 건양사이버대, 금강대, 한국폴리택대, 수원대, 고려대에서 강의를 했다. 나름 많은 곳에서 강의를 했다고 생각한다. 한 학기당 5곳에서 강의를 했고, 일주일 강의는 평균 16시간 정도를 했고 많을 때는 32시간을 한 적도 있다. 그 덕분인지 강사 생활에 대해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강의는 대학마다 제각각이다. 전문대와 4년제, 지방대와 수도권 대학, 국립대와 사립대를 모두 해봤다. 모 대학에서는 행정학과에서 공무원 시험 대비 수업을 해 달라고 요청해서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공무원 국사 교재를 가지고 마치 학원 강사처럼 강의한 적도 있다. 세계사도, 동아시아사도 해 봤다. 심지어 철학과 미디어를 강의한 적도 있다. 한국사의 경우 과목명은 모두 제각각인데 강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한국사새로읽기’가 기본 내용이었다.
  
강의는 사실 연구 과제와 비슷한 면이 많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강의는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요일과 시간대의 강의를 맡을 수도 없다. 내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 과목이 존재한다. 연구자로서의 전공과 교육자로서의 과목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사 생활이 시작되면 연구자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강의를 한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 전공 연구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역사학 교육 철학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교육 철학은 혼자 생각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의 준비를 위해서는 평소 대학원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게 가장 좋다. 타 전공 수업을 들을 때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기록해 두었다가 강의에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전공인 조선시대를 제외하고 고대사, 고려시대사, 근현대사 교양 수업 내용은 대학원 때 주워 들은 지식들이다. 
  
또한 강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나만의 뭔가가 필요하다. 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을 환기시키는 말을 많이 한다. 대학생들은 특히 교양수업에 적극적이지 않다. 아무말 없이 멀뚱멀뚱 교수만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중학생과 같다고 말한다. 초등학생은 선생님이 물어보면 서로 손들고 답하려고 하는데, 중학생이 되면 손은 들지 않지만, 선생님을 바라보고는 있다. 반면 고등학생은 대부분 졸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생은 손은 안들지만 졸지는 않으니 공부하는 마음 자세는 딱 중학생인 셈이다. 그러면 수강생들은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본인이 무슨 마음으로 한국사 교양수업을 듣고 있는지. 문제는 이런 강의법을 대학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나는 전공은 전공답게, 교양은 교양답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간 강의하면서 깨달은 나의 교양 한국사 교육 철학이다. 대부분의 대학교 한국사 교양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내용의 3~4배가 넘는 지식을 가르친다. 학생들이 좋아할 리 없다. 사실 한국사 교양을 수강하는 이유는 시험보기 편해서이다. 암기만 하면 되므로 한국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주로 들으니 다른 학생들은 요즘말로 ‘학점 학살’을 당한다. 나는 교양 한국사의 강의계획서에 이런 내용을 넣는다. 한국사능력검정 시험과 9급 공무원 시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다른 수업을 들으라고. 또한 자신이 한국사에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듣지 않기를 바란다고 표기한다. 그리고 수업 첫 시간에도 강조한다. 그러한 학생이 있다면 수강 신청 정정 기간이 남아 있으니 다른 수업듣기를 적극 권장한다고. 그러면 수업 중간에 실제로 가방 들고 나가는 학생도 있다.
  
나는 왜 한국사를 알아야 할까.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이 말 이외에 더 답변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나를 위한 한국사는 쓸 수 없을까. 나는 교양 한국사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강조한다. 한국사는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한국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국사가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는 누구나 다 알지만 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지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으로 민족과 국가가 다르다는 것도 사실 가르치기 쉽지 않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이 아닌 생각을 가르치는 것이 교양과목으로서 한국사의 역할이 아닐까. 지식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신이 궁금하다면 도서관에 꽂혀 있는 한국사 책을 내 손으로 꺼내 들게 만드는 것이 교양과목 한국사 수강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 박사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전문 연구자로서 자리매김했다면 대학에서 교육자로서 강사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의 교양 한국사 과목은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강사 시절 강의한 ‘한국사 새로읽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공무수행 역사학, 지역사 연구, 지방대 사학과

 
내가 굳이 공무수행 역사학을 강조하게 된 것은 그것이 지역사 연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지역사 연구가 강조되면서 지금은 매우 많은 지역사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지역사 연구가 심화되면서 해당 명칭이 향토사인지, 지방사인지, 지역사인지에 대한 개념 논쟁도 여러 차례 있었다. 나는 사실 과연 그게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지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명칭보다는 필요성과 맥락에 있다고 본다.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까지 지역사 연구를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중앙제도사 혹은 국가사 연구를 매우 강조했다. 지역사 연구는 중앙사 혹은 국가사에 비하여 연구사적 가치를 낮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연구의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다른 면에서 차이가 컸다. 우선 연구의 시작점이 매우 다르다. 중앙사는 연구사적 맥락이 매우 강조된다. 선행연구를 디딤돌 삼아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사는 나의 경험상 연구사적 맥락을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역사 연구는 학문적 필요에 따라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면 지역사 연구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지역사 연구의 가장 큰 수요처인 지방자치단체에서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지역 향토사 연구자와 차이가 발생한다. 지역 향토사 연구자들은 애향심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방자치단체의 연구과제는 그렇지 않다.
  
지역사 연구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지역사 연구의 수행은 결국 지역 대학 사학과의 존재 이유와 연결될 수 있었다. 최근 정부 정책에 따라 학과의 벽은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다. 대학 단위로 점차 통합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역 대학의 사학과는 학과로서 존립이 점점 어려워져 가고 사학과 내부에서 독자 생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학과의 학부과정 조차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학원은 더더욱 힘든 현실이다. 지역대학 사학과 대학원의 존립 조차 위협을 받은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특이하게 지역사회에서 역사학은 여전히 필요한 존재로 남아 있다. 대학 내 역사학의 인기는 사그라들지만 지역사회 역사학의 수요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학이 너무 강한 존재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향토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전문성이 더더욱 강조되며 두드러진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문화원의 차이이다. 전국 지자체에서는 시군 단위로 한 곳의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다만 수도권과 지방에 차이가 있다. 수도권 문화원에는 이제 조금씩 학예사를 배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문화원 관계자들은 사학과 대학원 이상을 졸업한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주변 대학의 사학과와 매우 강하게 연계되면서 매우 수준 높은 연구와 교육, 그리고 아카이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문화원은 그러한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학이 아닌 비전문 인력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지역 문화원 내외로 애향심이 강한 향토사 연구자들이 자리한다. 최근 이러한 경향은 더더욱 두드러졌다.
  
다른 하나는 시군지의 차이이다. 수도권에서 최근 간행된 시군지를 보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간행된다. 수도권 시군지의 내용을 보면 새로운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하거나 오히려 그 자체로 새로운 연구 성과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지방의 시군지는 그 경향을 따르지 못하고 있으며 예전 시군지를 답습하는 사례도 매우 많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을까. 특히 서울의 경우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역사편찬원을 중심으로 동 단위로 자료집 혹은 도록이 간행되는데, 지방에서는 읍면 단위 조차 이러한 책을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연구 수행 과제를 얼마나 더 전문적으로 접근하는가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연구 수행 과제를 선행연구 결과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면 새로운 연구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즉 공무수행 역사학의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연구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박사과정생이 필요하다. 대부분 사학과 박사과정생들은 지도교수 혹은 선배로부터 부탁 혹은 의뢰를 받아 원고를 작성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사실 그것이 연구과제 수행의 첫걸음이다. 많은 박사과정생들이 직간접으로 연구과제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박사과정생은 수도권에 존재하므로 지방과의 격차는 클 수 밖에 없다.
  
나는 지역대학 사학과의 존립은 그 대학원이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가에 있다고 본다. 학부과정이 아닌 석박사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공무수행 역사학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기 위해서는 석박사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부과정은 예비연구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본 과정에 충실하고, 역사학이 왜 필요한지를 가르치면 된다. 그리고 석박사과정에서는 전문 연구 성과를 도출하기 위한 자료 해석의 능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교육을 진행하면 된다.
  
또한 분명하게 언급해야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지역 학예연구사와 기록연구사이다. 공무수행 역사학의 사실상의 주체인 지방자치단체의 학예연구사는 매우 중요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학예연구사와의 협의를 통한 새로운 연구 과제를 발견할 수 있고, 새로운 지역사 연구를 찾아보기 위한 자그마한 노력도 시도해 볼 수 있다. 오히려 주도적으로 학예연구사를 통해 새로운 지역사 연구 주제를 제안할 수도 있다. 이를 토대로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전문 역사학 연구 인력을 양성하면서 동시에 지역사 연구를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다. 사실 지역사 연구는 한국사의 연구사적 의의를 찾기 위한 거창한 노력이라기 보다는 시군지를 다시 작성할 때 새로운 지역사 내용을 한 줄 더 추가하기 위한 자그마한 노력이라도 볼 수 있다. 공무수행 역사학과 지역사, 지방대 사학과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나의 공무수행 역사학의 시작, 논산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울 생활을 마친 나는 낙향하여 논산에 자리한 건양대학교 충남지역문화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양대학교에서 앞서 말한 한국사새로읽기 교양 강의를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연구소에서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자료를 읽는게 일상의 전부였다. 당시 연구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연구소에 있는 문서들을 한번 훑어 본 일이 있었는데 거의 마지막으로 수행한 연구소 사업은 2000년도 중반까지 유행하던 ‘지역문화유산해설사’ 관련 업무였다. 건양대학교에서는 대학원 과정에 ‘지역문화전공’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연구소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내가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에는 지역문화전공이 사실상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연구소 앞 방에 계신 교수님은 가끔 연구소에 찾아오시면서 오랜만에 연구소에 연구 분위기가 난다고 좋아하신 기억이 생생하다. 옆 방 교수님은 겨울이 되면 연구소 난방을 위해 석유 난로를 썼는데, 남은 석유 교환권을 나눠 주시기도 했다.
 
 
 
 
2013년 봄 어느 날,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위해 연구만 하던 나에게 연구소 소장님께서 일을 함께 할 생각 없냐고 문서 하나를 들고 오셨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이 연구용역 사업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소장님이 가져오신 문서는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 연구 용역 발주 기본 계획’이었다. 당시 논산시에서는 1914년에 만들어진 지금의 행정구역인 ‘논산군’ 탄생을 기념하여 오는 2014년의 ‘논산 100주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소장님께서 그 사업에 관여를 하고 계셨고, 우리 연구소에서 해당 사업의 일부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나의 첫 공무수행 역사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