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를 하게 된 이유는 현재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는 연구자를 위해서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박사학위 과정 시절에는 오직 학위논문을 쓰는 데에만 집중한다. 좋은 학위논문을 써야 박사학위 연구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학계의 현실이다. 대부분 박사과정생들은 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늦더라도 좋은 주제로 연구사적 의의가 높은 논문을 쓰고자 노력한다. 다른 학문과 비교하여 역사학 논문 학위 과정이 몇 년 긴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표절 문제와 같은 사례가 다른 학문에 비해 역사학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현실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알게 된다. 좋은 학술 논문을 잘 쓰는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그리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장 교수 채용 조건에서부터 막히게 된다. 자신의 학술 논문 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 경력과 용역 과제 참여 경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대학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학 연구자로 살아가게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연구, 다른 하나는 강의, 마지막은 봉사이다. 봉사가 사실은 뜬금없어 보이는데, 학술대회 토론이나 학술지 심사 같은 것을 가리킨다. 위 세 가지는 대학 교수가 되면 업적평가에 반영되는 지표이다. 나도 대학교수가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전까지 위 세 가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누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부록처럼 ‘산학’이 따라 붙는데 바로 이 ‘산학’이 연구용역이다. 안타깝게 대학원 과정에서는 위 네 가지 요건 중에서 ‘연구’만 배운다.
연구 조차도 정해진 매뉴얼은 없다. sns에서 우연히 본 글이 있는데 누가 한국사 대학원 구조를 ‘도제식’이라고 지칭했던 기억이 난다.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는 거의 도제식이라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도교수의 역량에 따라 대학원생의 연구 형태가 결정된다. 그래서 늘 어느 대학원에 다니는가 보다 어느 지도교수에게 배웠는가를 강조한다. 하지만 정해진 매뉴얼은 없기 때문에 선행연구 논문을 열심히 정리하고, 해당 주제의 자료를 읽다보면 마치 도를 터득하듯 논문을 쓰게 된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정해진 매뉴얼은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작년에 다행스럽게 성균관대 임경석 선생님께서 <역사논문 작성법>이라는 매우 훌륭한 저서를 출간하셨다. 그리고 3년 전에도 목포대 최성환 선생님께서 <역사 논문 쓰기 입문>이라는 책을 내셨다. 두 책은 아마도 내가 아는 역사논문 작성을 위한 소개서라고 알고 있다. 외국에는 분야별 논문 작성법에 대한 책이 많은데 왜 한국에서는 이러한 책이 없을까 생각했었다. 처음 대학원에 들어가는 학부생이나, 논문을 처음 작성하는 대학원생들에게는 매우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연구는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추어졌는데, 그러면 강의는 어떨까. 나는 2009년 석사학위를 막 마치고 처음으로 건양대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강사법 덕분에 강사 조건이 대부분 박사졸업이 되면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나는 석사를 마치자마자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건양대에서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안식년으로 외국에 가시게 되자 그 분께서 맡으신 한국사 교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강의를 어떻게 하면 된다는 말도 없이 떠나셨다. 나는 어떻게 강의를 해야 하는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받은 과목명은 ‘한국사새로읽기’였다.
처음에는 무언가 그 동안 알고 있던 한국사와 다르게 ‘새로읽기’가 가능한 내용으로 가르쳐야 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각 시대사별로 교과서에 없는 내용만 뽑아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읽기 위해서는 그 이유도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역사 이론을 3주차 정도 포함시켰다. 그러다 보니 교양 한국사개설과는 전혀 다른 강의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사새로읽기’는 그냥 교양 한국사개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의를 처음 맡게 되면 당연히 당황하고 떨리게 된다. 나는 2009년 처음 강의할 때 20대 후반이었다. 사실 수강생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도 않았다. 출석부의 이름을 부를 때 얼마나 떨었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중등교원은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이수해야 하고 임용 시험에 통과해야 중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등교원에 해당하는 강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교수법이라고 부르는 고등교원의 강의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강사에게 그런 교수법 이수를 요구하는 대학교는 거의 없다. 자격 요건은 해당 분야 박사졸업자이거나 전문가이면 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처음 강의를 맡게 되면 어떻게 강의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논문 작성법은 그나마 있어도 강의방법에 대해서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서 인기 학원강사의 강의 방법을 보면서 배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3년 전에 어느 대학에서 ‘예비 교수자로서의 실전 강의 전략’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인문학 박사과정생들에게 앞으로 ‘피교육자에서 교육자로’ 나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건양대에서 처음 강의를 한 이후 박사학위를 받기 전까지 10년간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우송대, 충남대, 건양사이버대, 금강대, 한국폴리택대, 수원대, 고려대에서 강의를 했다. 나름 많은 곳에서 강의를 했다고 생각한다. 한 학기당 5곳에서 강의를 했고, 일주일 강의는 평균 16시간 정도를 했고 많을 때는 32시간을 한 적도 있다. 그 덕분인지 강사 생활에 대해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강의는 대학마다 제각각이다. 전문대와 4년제, 지방대와 수도권 대학, 국립대와 사립대를 모두 해봤다. 모 대학에서는 행정학과에서 공무원 시험 대비 수업을 해 달라고 요청해서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공무원 국사 교재를 가지고 마치 학원 강사처럼 강의한 적도 있다. 세계사도, 동아시아사도 해 봤다. 심지어 철학과 미디어를 강의한 적도 있다. 한국사의 경우 과목명은 모두 제각각인데 강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한국사새로읽기’가 기본 내용이었다.
강의는 사실 연구 과제와 비슷한 면이 많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강의는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요일과 시간대의 강의를 맡을 수도 없다. 내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 과목이 존재한다. 연구자로서의 전공과 교육자로서의 과목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사 생활이 시작되면 연구자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강의를 한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 전공 연구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역사학 교육 철학도 함께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교육 철학은 혼자 생각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의 준비를 위해서는 평소 대학원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게 가장 좋다. 타 전공 수업을 들을 때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기록해 두었다가 강의에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전공인 조선시대를 제외하고 고대사, 고려시대사, 근현대사 교양 수업 내용은 대학원 때 주워 들은 지식들이다.
또한 강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나만의 뭔가가 필요하다. 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을 환기시키는 말을 많이 한다. 대학생들은 특히 교양수업에 적극적이지 않다. 아무말 없이 멀뚱멀뚱 교수만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중학생과 같다고 말한다. 초등학생은 선생님이 물어보면 서로 손들고 답하려고 하는데, 중학생이 되면 손은 들지 않지만, 선생님을 바라보고는 있다. 반면 고등학생은 대부분 졸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생은 손은 안들지만 졸지는 않으니 공부하는 마음 자세는 딱 중학생인 셈이다. 그러면 수강생들은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본인이 무슨 마음으로 한국사 교양수업을 듣고 있는지. 문제는 이런 강의법을 대학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나는 전공은 전공답게, 교양은 교양답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간 강의하면서 깨달은 나의 교양 한국사 교육 철학이다. 대부분의 대학교 한국사 교양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내용의 3~4배가 넘는 지식을 가르친다. 학생들이 좋아할 리 없다. 사실 한국사 교양을 수강하는 이유는 시험보기 편해서이다. 암기만 하면 되므로 한국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주로 들으니 다른 학생들은 요즘말로 ‘학점 학살’을 당한다. 나는 교양 한국사의 강의계획서에 이런 내용을 넣는다. 한국사능력검정 시험과 9급 공무원 시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다른 수업을 들으라고. 또한 자신이 한국사에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듣지 않기를 바란다고 표기한다. 그리고 수업 첫 시간에도 강조한다. 그러한 학생이 있다면 수강 신청 정정 기간이 남아 있으니 다른 수업듣기를 적극 권장한다고. 그러면 수업 중간에 실제로 가방 들고 나가는 학생도 있다.
나는 왜 한국사를 알아야 할까.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이 말 이외에 더 답변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나를 위한 한국사는 쓸 수 없을까. 나는 교양 한국사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강조한다. 한국사는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한국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국사가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는 누구나 다 알지만 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지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으로 민족과 국가가 다르다는 것도 사실 가르치기 쉽지 않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이 아닌 생각을 가르치는 것이 교양과목으로서 한국사의 역할이 아닐까. 지식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신이 궁금하다면 도서관에 꽂혀 있는 한국사 책을 내 손으로 꺼내 들게 만드는 것이 교양과목 한국사 수강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 박사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전문 연구자로서 자리매김했다면 대학에서 교육자로서 강사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의 교양 한국사 과목은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강사 시절 강의한 ‘한국사 새로읽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