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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④]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 1,500년 전, 다나카는 왜 영산강에 왔을까?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9.30 BoardLang.text_hits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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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9월(통권 55호)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

-1,500년 전, 다나카는 왜 영산강에 왔을까?-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어떤 ‘일본인’이 배를 타고 영산강 유역의 연안에 도착하였다는 상상을 해보자. 기왕 상상을 시작한 김에,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본다면, 다나카라는 이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북부 규슈의 지역 수장에게 속한 무장이었는데, 백제까지 이어지는 항로 관리를 위해 영산강 유역으로 파견되었다. 다나카는 경상남도 연안의 여러 포구를 지나, 영산강 유역 문화권으로 불리는 고흥, 해남, 영암, 함평 등지의 중요한 포구들에 모두 들렀다. 들르는 포구마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다양한 ‘친구’가 있었고, 어떤 포구에는 규슈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익숙한 형태의 무덤도 있었다.

다나카의 친구 중에, 영산강 유역에서 가장 먼저 만난 친구는 해남에 있던 마쓰다였다. 마쓰다는 규슈 지역 수장의 명령으로 건너와, 백제왕의 형식적인 허가를 받고 항구 관리를 하고 있었다. 마쓰다는 주변 재지세력 수장의 거점과 다소 떨어진 곳에서 자리 잡았는데,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마쓰다의 배웅을 받으며, 다나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영암 시종면이었다. 다나카는 영산강 하구로 진입하면서 극도로 긴장하였다. 마쓰다가 미리 귀띔해주기를, 영산강 하구로 들어가면 수심이 낮고 조류가 빠른 여울목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친구 덕분에 위험한 물길을 안전히 지나서, 광활한 바다 같은 영산강 하류의 ‘내해’를 마주하였고, 이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동북쪽으로 멀리 거대한 봉분들과 마을들을 발견하였다. 

다나카가 영암에 온 이유는 오랜 친구인 강남(야스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강남의 아버지는 영암 출신으로 규슈에서 일본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 강남은 다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남은 지역 수장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에 시종 지역 남쪽의 항구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시종 지역 수장은 점차 거세지는 백제의 영향력 확대에 내심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강남이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다시 배를 타고 영산강 지류인 함평천을 따라 올라가, 함평 표산에 도착하여 준하를 만났다. 함평 출신인 준하는 부모님을 따라 규슈에 이주하여 다나카 집안과 돈독하게 지냈다가 귀향하여 할아버지로부터 지역 수장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다나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돌아가신 준하 부모님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의 무덤은 유언에 따라, 북부 규슈의 무덤과 흡사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다나카는 제사를 마치고 육로로 길을 나서, 동북쪽에 있는 함평 신덕 지역으로 향하였다. 그가 신덕까지 길을 떠난 이유는 이곳에서 죽은 형탁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였다. 형탁은 신덕 지역 수장의 아들로, 뛰어난 무장이었고, 일본, 백제, 가야 각국에서 모두 탐내는 인재였다. 형탁은 북부 규슈 지역 수장의 딸과 결혼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일찍 죽고 말았다. 다나카가 도착해보니, 마침 무덤방 입구에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 일본, 백제, 가야 지역에서 온 조문품이 있었다. 거대한 무덤은 규슈 지역의 무덤 모습과 동일하였다.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아무 상관 없는 소설이지만, 있을 법한 일을 개연성 있게 구성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역사 연구에서 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은 금기시되지만, 1,500년 전의 독특한 물질자료를 이해하려면, 소설적인 접근이 유용할 때도 있다. 이번 연재의 진짜 주인공은 다나카라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바다 건너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일본식 고분이다.
 
 

2.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색다른 무덤

 
영산강은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 일대를 휘감아 흘러 황해로 나가는 강이다. 학계에서는 영산강 본류 및 지천, 그리고 그 바깥의 전북 고창, 전남 해남, 고흥 등까지 아울러 영산강 유역 문화권으로 부른다. 이곳의 정치체는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분구묘, 옹관 등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연안항로를 따라 주변 지역과 교류를 지속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에서 일본의 고분,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혹은 ‘한민족’의 영역에 대한 다른 민족의 침투를 금기시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전방후원형 고분은 애써 감추거나 부정하고 싶은 유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달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외형적으로 명확하게 일본의 전방후원분 형태를 띠고 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고훈시대(古墳時代)를 대표하는 일본 무덤이다.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글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6세기 말까지 일본 열도 전역에 확산하였으며, 무덤의 크기로 지역 수장의 서열을 보여주는데, 간사이 지역에는 길이 200m급의 초대형 전방후원분도 있다. 뒤의 둥근 부분에 시신을 안치하고, 무덤 봉분에는 깬 돌을 덮고 주변으로 ‘하니와’를 배치하였다. 하니와(埴輪)는 전방후원분의 주변에 배치한 의례용 장식 토기의 일종이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일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가진 고분이다. 다른 말로 장고분으로도 불리는데, 장고(장구)처럼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양쪽으로 봉분이 있는 형태에서 따온 말이다. 이번 글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부르는 이유는 일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매장주체부, 부장품, 주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일본과 다른 계통의 문화도 보이기 때문이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다양한 왜 계통의 고분이 확인되는데, 전방후원형 고분은 그중에서도 명확하게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보이는 고분을 말한다. 영산강 유역 문화권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전방후원형 고분은 약 16기에 달하는데, 지표조사에서만 확인된 유적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조사에 따라 수량은 약간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최북단 고창으로부터 최남단 해남에 이르기까지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다양한 지역에서 1~2기 정도씩 조성되었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분포 지역은 영암 시종면 태간리의 자라봉 고분 등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영암 시종면’-‘나주 반남면’-‘나주 다시면’으로 이어지는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있는 편이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주변에 재지세력 유적이 없는 곳에 단독으로 있기도 하지만,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지는 유적의 밀집 구역에 조성된 경우도 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서남해 연안, 혹은 과거 해안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들어졌고, 내륙 수운을 따라 연결되는 영산강 유역 상류나 지천 유역에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규모는 일본 간사이 지역의 초대형 전방후원분에 비하면 작은 편인데, 길이 70m 정도 되는 경우도 일부 있다. 
 
 
 
 

3. 5세기 말 ~ 6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영산강 유역에 뜬금없이 일본 고훈시대의 전형적인 고분이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전방후원형 고분이 만들어진 5세기 말 ~ 6세기 초, 동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동아시아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한국의 삼국시대, 일본의 고훈시대에 해당하였다. 중국 남조는 송(420~479)의 멸망과 남제(479~502)의 건국이라는 변화 속에 있었다. 북조에는 화북을 통일한 북위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혼란기였다. 일본에서는 웅략(457~479), 무열(499~506), 계체(507~531)로 이어지는 시기였는데, 간사이 지역 야마토 왕권의 집권력이 커지는 가운데, 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의 난(527~528)과 같이 지역 세력의 반발이 교차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과 일본 내에서 발굴된 고고자료를 종합해보면, 주로 백제, 가야, 신라 등에서 건너온 주민들이 규슈나 간사이 지역에 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전해주고 있었다.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는 분구묘와 옹관으로 대표되는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대략 5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일부 지역에서 ‘점’ 단위로 백제의 위세품을 받으면서 백제의 간접지배 단계에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전통적인 무덤 가운데, 영암 시종면, 나주 반남면, 나주 다시면을 비롯하여 여러 중요한 지역의 무덤에 백제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위세품’들이 부장되었다. 그러다 6세기 중후반 정도가 되면, 당시 백제 수도였던 사비(부여) 일대의 전형적인 돌방무덤이 영산강 유역에 확산하였고, 이쯤부터 백제의 직접지배 단계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은 5~6세기의 시간적 변화 속에 위치하였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약 30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성되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왕조 교체기이거나 수도를 옮길 정도로 큰 혼란을 겪은 시기였고, 동시에 국가의 집권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지방의 재지세력에 대한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4.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을까? 

 
대략 1990년대부터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에 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가 시작되었고, 2000년대 이후 심화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전방후원형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들이 일본 계통의 무덤을 어떻게 영산강 유역에 만들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무덤에 묻힌 피장자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보면,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은 재지수장설, 왜인설, 귀향설로 나뉜다.

재지수장설은 영산강 유역의 수장이 일본의 여러 지역, 특히 북부 규슈 지역과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고분 문화를 수용하여 전방후원형 고분을 조성하였다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대형 고분의 조성에는 노동력 동원과 같은 재지세력의 힘이 필요하며, 고분의 특징 중에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전통적인 요소도 포함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조상의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 문화를 단기간에, 단기간만, 바다 건너의 다른 종족 집단으로부터, ‘이주’ 없이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주변에 오래된 재지세력의 문화가 확인되지 않고, 단독으로 만들어진 전방후원형 고분은 어떻게 해석할지도 문제로 남는다.

왜인설은 왜인이 직접 이주하여 전방후원형 고분을 만들었다는 견해인데, 고분의 형태와 조성방식, 유물 등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조영 시점이 백제 한성함락 직후의 혼란기인 동시에 백제와 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왜인의 이주를 상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바다 건너 왜에서 이주한 이주민이 대형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을지, 전통적인 재지세력의 주거지 주변에 이주민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귀향설은 일본 전방후원분이 단기간 확인되는 동시에, 재지 계통의 문화가 공존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부 규슈로 이주했던 마한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조성한 왜 계통의 무덤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영산강 유역과 북부 규슈 사이의 긴밀한 교류, 인적 이동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으나, 귀향 교포가 과연 대규모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을지 궁금증이 남고, 무덤 조성 주체가 북부 규슈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영산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는 직접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이상의 연구 흐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복잡한 편이지만, 각각의 견해는 다시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4가지 층위로 나뉜다. 먼저, 무덤 조성 주체가 백제와 대립하였거나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이었다는 입장이 있는데, 대체로 재지수장설에서 많이 차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백제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일정한 관계만 유지한 정도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부 백제의 의도까지 투영되어 전방후원형 고분이 축조되었다는 입장이다. 네 번째는 무덤 조성 주체를 왜계 백제관료, 즉 백제에서 관직을 받고 활동하는 왜인으로 보거나, 백제 왕권의 강한 의도 속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조성되었다는 입장이다. 세 번재와 네 번째 견해는 재지수장설에서도 차용되지만, 왜인설에서 많은 선택을 받았다. 즉, 왜인이 이주하여 전방후원형 고분을 만들었더라도, 그 배후에는 백제 왕권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많은 역사학, 고고학 논쟁이 그러하듯이, 자료가 축적되면 될수록, 논쟁이 해결되기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전방후원형 고분에 관한 연구도 피장자의 정체성과 백제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견해가 제출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은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유형을 나눠 보는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약 16기인 전방후원형 고분이 모두 같은 주체, 같은 이유,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아래와 같은 기준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먼저, 유형 1은 연안의 외곽 지역에 주변의 재지세력이 거의 없이 단독으로 조영되는 경우이다. 이때 무덤의 형태는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백제를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전문도기의 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형은 해남 용두리 고분에 해당한다. 이곳은 재지세력의 협조, 백제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조영되었지만, 주변 재지세력의 밀집도가 적으므로, 왜인의 이주 가능성이 존재한다. 유형 1의 전방후원형 고분 조성 주체는 머리말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쓰다 같은 사람을 상상할 수도 있다.

유형 2는 연안의 중심 지역으로, 주변 재지세력의 유적이 많은 곳에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가진 무덤을 만들면서, 일부 요소에서 차이를 보이는 사례이다. 두 번째 유형의 유적으로는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을 상정할 수 있는데, 영산강 유역의 오래된 중심지인 영암 시종 지역 남쪽에 인접하여 만들어졌고, 무덤에서 왜 계통의 요소가 분명히 확인되는 동시에, 시신을 안치한 돌방의 조성방식이 약간 독특한 사례이다. 유형 2의 조성 주체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강남(야스오) 같은 사람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유형 3은 연안의 외곽 지역에, 오랜 전통의 재지세력 권역 내에 조성되는 경우로, 무덤은 전형적인 전방후원형 고분의 모습인데, 백제를 거쳐 유입된 전문도기가 출토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함평 마산리 표산 고분군을 상정할 수 있는데,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진 재지세력의 유적 내에 전방후원형 고분 1기가 만들어진 사례이다. 이곳은 영산강 유역 문화권의 중심지는 아니지만, 전통적인 재지수장의 근거지로 생각된다. 따라서 왜 고분 문화에 친숙한 동시에, 백제와도 일정한 관계를 가진 재지수장이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형 3의 조성 주체는 소설 속의 준하 같은 사람을 상정해볼 수 있다.

유형 4는 영산강 유역 내륙 재지세력의 권역 안에 조성한 경우로서, 무덤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의 모습인데, 백제와 연관된 금동관, 금동신발이 출토되거나, 다원적인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함께 나오는 사례이다. 이것은 함평 예덕리 신덕 고분으로 상정되는데, 무덤의 주인공은 젊은 남성으로, 주로 무기류가 많이 부장되었고, 왜 계통의 유물과 백제 계통의 유물이 함께 나오는 동시에, 재지문화와의 관련성도 깊게 보이는 사례이다. 유형 4의 조성 주체는 앞의 소설에 나오는 형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 분류는 대단히 시론적인 수준이므로, 학술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앞으로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다원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즉,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성 주체, 방식, 목적은 단일하기보다 다원적이었다. 

기존 연구에서도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다원성에 이미 주목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전방후원형 고분의 이해를 위해서는 백제와 왜의 왕권 외에 영산강 유역, 가야, 규슈의 개별 지역 세력들을 전부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고, 전방후원형 고분을 변방 지역의 자치적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있었으며, ‘지배’, ‘민족’ 같은 개념보다 여러 지역의 활발한 교류를 전제로 전방후원형 고분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기반으로, 최근 연구에서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왜의 다양한 지방 세력이 이주하는 동시에 현지 재지세력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거나, 왜계 백제관료가 백제와 왜에 ‘양속’하여 외교적 역할을 하면서 조성하였다거나,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환해’ 네트워크 속에서 재지세력이 조성하였다거나, 북부 규슈 왜인의 이주와 토착 세력의 자발적 수용과 백제의 영산강 유역 회유책이 모두 맞물려 전방후원형 고분이 만들어졌다는 견해 등이 제출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들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해양사의 관점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은 다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과연 영산강 유역과 일본 규슈 사이의 바다는 ‘민족’의 경계였을까? 백제, 신라, 왜라는 고대국가가 영역적 지배를 강화하기 이전까지의 바다는 다원적인 이동과 교류의 매개체였을 것이다. 이 시기 바다를 통한 이동은 우호적인 기항지를 거쳐 항해하는 ‘네트워크’ 형태로 추정된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해양 네트워크의 요충지에서 다원적인 교류를 지원하고 관리하던 집단이 활발한 문화 수용 및 인적 이동 과정에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5. 나가며

 
이번 연재의 서두에서 언급한 소설의 가상 주인공 다나카는 해남의 마쓰다, 영암의 강남(야스오), 함평의 준하, 형탁을 만났다. 소설 속의 마쓰다, 강남, 준하, 형탁은 각각 백제, 영산강 유역, 왜 사이의 해양 네트워크에서 다원적인 집단의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인물로 상정되었고, 이들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가정해보았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외형적으로 왜 계통이 분명하지만, 부분적으로 재지세력의 고분 문화 전통을 이어가는 동시에, 백제 계통의 유물이나 다른 지역의 유물도 부장하였다. 다원적인 성격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다원적인 정체성을 가졌던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잘 어울리는 무덤이지 않았을까?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을 만든 사람들은 주로 규슈 지역과 연결되는 해양 네트워크 속에서 바다를 건너다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우리에게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바다는 엄연한 국경선이 지나는 ‘경계’이지만, 과거 전방후원형 고분의 주인공들에게 바다는 다양한 지역의 다원적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바다의 다원성은 전방후원형 고분이 소멸하는 6세기 이후부터 점차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부터 한반도 남부의 연안은 백제와 신라라는 고대국가의 영역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나중에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일본 열도의 규슈 연안도 왜 왕권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나중에 ‘일본’의 영토로 변화하였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다양한 주체들이 다원적으로 교류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6세기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자취를 감춘 이유도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