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웹진기사 기획연재

[신라왕경 톺아보기②] 왕경인의 이모저모_이동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09.30 BoardLang.text_hits 106
페이스북으로 공유 X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밴드로 공유
웹진 '역사랑' 2024년 9월(통권 55호)

[신라왕경 톺아보기] 

신라왕경 톺아보기②: 왕경인의 이모저모

 

 

이동주(고대사분과)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는 도시에서 온 소녀와 시골 소년 사이에 피어난 슬프면서도 풋풋한 사랑 이야기이다. 소년의 눈에 비친 소녀는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하얀 목덜미를 드러내며 징검다리에서 세수를 하고 있다. 가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이런 모습에 매료된 소년은 소녀를 따라 징검다리에 앉아 세수를 한다. 하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물속에 비친 자신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녀의 희고 고운 피부와 시골 소년의 검은 피부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의 삶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고대의 왕경인은 어땠을까. 왕경은 농촌에 비해 자급자족성이 현저히 떨어지며 외부에 대한 의존성이 강했다. 이로 인해 왕경인들은 지방인에 비해 육체노동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웠다. 이러한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삶을 유지하며 문화의 중심성을 창출해 낸다. 노동에서 벗어나다 보니 스스로를 치장하는 문화도 경쟁적으로 생겨나고, 범국가차원에서 규제도 가하였다. 여러 고고학 자료를 보면 당나라 복식과 화장법이 신라를 넘어 일본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여기서는 현대의 시선으로 왕경인의 삶 속 이모저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쪼은 고래고기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이미 잊혔거나, 잊혀 가고 있는 전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되돌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버지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유년 시절의 배고픔과 처절함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였다. 전쟁의 여파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피난’이라는 전례 없는 공간 이동은 지연적인 사고방식을 타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람들은 낯선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토박이들에게 이방인은 낯선 존재였고, 피란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아버지가 서울 사람들을 처음 마주했던 경험은 흥미롭다. 아버지는 그들의 희고 깨끗한 피부에서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의 경험담은 내가 서울사람을 떠올리는데 고정관념을 갖게 하였다. 

동네에서 제법 부유했던 목장주는 서울내기였다. 그는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에 거리를 두었고, 이로 인해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대폿집에서 술기운이 오른 아버지는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쪼은~~ 고래고기..!!”를 읊어대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여기서 '서울내기'란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서울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지만, 웬일인지 서울사람이면 곧잘 서울내기로 불렀다. 목장주의 유난히 흰 피부와 다가서기 어려운 차가운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법 시간이 흘러 원유를 납품하는 날이면 이따금씩 마가린을 선물하기도 했고, 마을 행사에 찬조금을 내면서 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사실 ‘서울내기’란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그리고 ‘고래고기’는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추정은 가능하다. 촌사람들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거칠고 구릿빛이었던 반면, 서울 사람들은 육체노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양파(다마내기)의 속살처럼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맛 좋은 ‘고래고기’는 무슨 상관일까? 아마도 이 문구는 노래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반복적인 구절, 요즘으로 치면 라임(rhyme) 정도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서울내기’와 ‘다마내기’가 ‘~내기’로 조응하면서, ‘고래고기’는 그 앞 구절의 특정 음소(phoneme)를 반복시켜 종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림 1. HD TV 문학관 「소나기」의 한 장면(출처: KBS). 윤초시의 증손녀(이세영 분)는 소년(이재응 분)과는 달리 전형적인 도시인의 모습이다. 세련된 옷차림, 하얀 피부색은 도시와 시골을 구분짓는 가시적인 이미지이다. 
 
 
‘서울내기’라는 이미지는 병약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와 도도하고 새침한 인상을 떠올리게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초등학교 동창 진희와의 일화를 소환해보고 싶다. 서울내기 진희는 군인의 딸이었고, 유난히 하얀 피부에 공부도 잘했던 모범생이었다. 나의 고향은 후방 지역이었으나, 전략적 요충지였던 탓에 군부대가 밀집한 군사도시이다. 지금은 많은 부대가 사라졌지만, 사관학교와 탄약창, 보급대 등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군 정기 인사 시즌만 되면 한 반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주요 지휘관의 보직 임명을 9시 뉴스에서 보도할 정도로 군의 위세가 상당했던 시절이었다. 

서울내기 진희의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는 토박이 친구들인 덕순이나 춘자-믿기 어렵겠지만 실제 동창의 이름이다-의 검게 그을린 피부와는 확연히 대조되었다. 특히 진희가 벨벳 소재의 드레스와 서양 귀족부인이나 쓸 법한 모자를 착용하고 등교하는 날이면 학급 전체가 들썩거리곤 했다. 그러던 진희가 아버지의 전출 명령에 따라 강원도로 전학을 갔다. 그날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소나기」에서 소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소년이 느꼈을 법한 상실감 정도였다면 과한 표현일까. 그러나 며칠 뒤, 마치 거짓말처럼 진희가 돌아왔다. 군 인사 교대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떠나는 날 눈물로 가득했던 환송회가 무색해졌고, 진희 역시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기뻤던 나머지, 그날의 감정을 「돌아온 최진희」라는 제목으로 일기에 남겼다. 담임 선생님은 종종 잘 쓴 일기를 골라 친구들 앞에서 읽어 주셨는데, 내 일기가 낭독되던 날 화로를 뒤집어쓴 것 마냥 얼굴이 타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진희는 여느 서울내기와는 다르게 새침데기는 아니었다. 계란물을 입힌 분홍 소시지를 친구들에게 곧잘 나누어 주었고, 늘 "어머, 얘. 이게 뭐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기 뭐꼬~!, 이 머시마야...!"를 남발하던 억센 사투리를 쓰는 토박이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나긋한 말투였다. 가정상황을 묻는 설문 조사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가정형편을 ‘중’으로 체크해서 제출하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정형편이 모두 중산층 일리 없다고 하시며, 텔레비전, 라디오, 전축,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 등등 물건을 읊으며, 있는 사람은 손들라고 하셨다. 모든 것에 손을 드는 진희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 기억이 있다. 당시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라고 정의되었는데, 진희를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서울내기 진희. 풋사랑 같았기에 강렬했고 그래서 뇌리에 박혔다. 
 
 

고대 왕경인의 이미지

 
2013년 당시 경주 소재 매장문화유산 조사전문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경주시 교동 94번지 일원 천원마을 진입로 확ㆍ포장 공사를 위한 문화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 목곽묘와 통일신라시대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다. 놀랍게도 목곽은 부식되지 않은 채 온전한 모습으로 노출되었다. 그간 목곽묘에 관한 조사는 많았지만 실물 부재 자체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목곽 부재의 규모는 길이 230cm, 너비 90cm인데, 습지라는 환경이 보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목곽 안에는 두개골은 함몰되었지만 온전한 형태의 인골과 다수의 토기류가 확인되었다. 이전에 다룬 탑동 21-3번지 유적 역시 조사구역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로국 단계의 분묘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1) 
 
때론 자연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한다. 고인골이 출토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울대 의대 법학연구소는 조사단,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과 공동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파편화된 인골 접합에 성공하게 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1,500년 전 신라시대 여인이었다. 엉덩뼈와 온머리뼈 형태분석 결과 인골은 30대 후반의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온머리뼈 형태분석으로 인종적 분류로는 아시아인, 넙다리뼈를 이용한 키 예측에서 154.9(±4.6)㎝ 정도의 신장으로 추정되었다. 아울러 치아와 치조골 상태는 전반적으로 건강한 상태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얼굴복원에 성공한 연구진이 내놓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여성의 얼굴은 현대 여성보다 전체적인 머리가 앞뒤로 길고, 좌우로는 좁은 마름모 형태였다. 또 이마는 뒤로 많이 경사졌고, 얼굴뼈 윗부분은 현대 여성보다 좁은 것으로 분석됐다. 얼굴 모양은 전반적으로 갸름했다.
 
 
지금보다 얼굴의 형태가 상당히 갸름했던 것으로 분석된 것이다. 아울러 뼈의 탄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 밀이나 쌀 등의 곡물류를 주로 섭취했고, 육류 섭취는 거의 하지 않은 상태여서 佛子에 가까운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한 것도 드러났다.
 
 

그림2. 경주 천원마을 진입로 부지 유적에서 출토된 신라 여인 (출처: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 파손된 두개골을 3차원 스캔 기술, 컴퓨터 디지털 모델링 기법을 통해 얼굴 복원에 성공하였다. 
 
이 신라 왕경의 여인은 육류와 같은 단백질 섭취가 충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다소 마른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식단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안정적인 육류 공급 체계의 부족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녀가 월성 인근에 매장되었고, 부장품이 구비된 목곽에 안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왕경 내에서도 어느 정도의 위계를 가진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여인은 화장이나 복식 면에서 상위 그룹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신라에서 미의 기준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신라는 중고기 말부터 당나라와의 교섭을 통해 중국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649년 김춘추는 고유한 의관제를 파기하고 당의 의관제를 채택하였다.2) 이듬해 신라 연호 太和를 대신하여 당의 연호인 永徽로 개원하였다.3) 진덕여왕 5년(651) 신라의 朝貢使 沙飡 知萬이 唐服을 입고 축자에 정박하였다. 일본 조정에서는 마음대로 복장을 바꾼 것을 불쾌하게 여겨 책망하여 쫒아보냈다고 한다.4) 신라를 강타한 唐風의 속도에 일본 조정은 충격에 빠졌던 것 같다. 

문헌을 보면 신라 진평왕과 성덕왕, 원성왕대에 당나라로 미녀를 보낸 기사가 확인된다.5) 신라는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인간선물을 보냈던 것이다. 대부분 사양의 방식으로 신라로 되돌아왔지만 독특한 향내를 풍기는 김정란은 당에 남았다. 실제 향기는 미인이 갖춰야 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미녀의 조건으로 여덟 가지 요소가 강조되었다. 먼저, 玉指素腕은 옥처럼 가늘고 긴 아름다운 손가락과 흰 피부를 의미하고, 細腰雪膚는 가는 허리와 눈처럼 흰 피부를 가리킨다. 蛾眉靑黛는 누에 같은 모양의 짙고 푸른 눈썹을, 明眸流盼은 맑은 눈동자로 흘겨보는 것을 뜻한다. 또한 朱脣晧齒는 붉은 입술과 흰 치아를, 肌香佩薰은 피부에서 발산되는 향기와 향낭을 착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烏髮蟬嬪은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색과 매미 날개 같은 귀 밑머리를, 雲繫霧環은 머리를 장식하는 계와 환을 말한다. 신라 미녀 김정란은 아마 향낭을 차고 다녀 온몸에 향기가 났던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깨끗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오래전부터 아름다움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당나라의 대표 미녀 양귀비는 개원의 치로 대표되는 현종 연간을 살았다. 눈에 띄는 외모와 뛰어난 춤, 노래 실력을 갖춘 그녀는 17세에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후 현종은 총애하던 무혜비를 잃고 외로움을 느끼던 중, 고력사의 소개로 당 장안의 미녀 양귀비를 만나게 되었다. 연회장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춤, 노래에 매료된 56세의 현종은 22세의 며느리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양귀비의 미모는 당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고 할 정도로 극적인 羞花로 표현된다. 꽃이 그녀를 시샘하고 부끄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資質豐艶이 있다.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뜻으로, 양귀비의 외모가 둥글고 통통한 체형에 성적 매력이 뛰어났음을 나타낸다. 현종의 후궁들은 그녀를 조롱하며 肥婢, 즉 비만한 계집종이라 낮춰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양귀비는 흰 피부와 통통한 체형을 가진 여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3. 다양한 헤어스타일의 당나라 여인들(출처: 중국 시안박물관, 촬영: 이동주)은 미적 감각을 뽐내며 그 시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피부를 밝게 보이기 위해 석회분을 사용하였고, 건강하고 생기 있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붉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혈색을 표현하였다. 풍성한 머리를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가발을 활용한 것이 눈에 띄는데, 특히 세 번째 여인의 화장법은 동시대 일본 鳥毛立女屏風 속 여인의 모습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그림4.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사진 1, 2, 출처: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鳥毛立女屏風(사진 3, 출처: 日本 正倉院)은 당나라 복장을 한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토용은 채색을 통해 입체감을 강조하였으며, 일본의 鳥毛立女屏風 속 여인은 가채를 착용하고 붉은 화장을 한 뒤, 푸른 안료로 입술 양쪽과 미간에 점을 찍어 관능적인 매력을 더하고 있다.
 
신라 왕경에서 당풍이 과열되는 지경에 이르자 국왕이 나서서 직접 금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국왕의 금령은 문헌에 제법 상세하게 남아있다. 복식에서부터, 탈 것, 기물, 주거까지 모두 신분에 맞게 규제를 가하였다.
 

흥덕왕 즉위 9년, 太和 8년에 하교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존비가 있으니 명칭과 법칙도 같지 않으며 의복 역시 다르다.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서, 다만 신이하고 진기한 물품을 숭상하고 오히려 비야(鄙野)한 토산품을 경시하니, 예절이 점차 잃어가는 참람함에 이르고 풍속은 언덕이 평평해지듯이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옛 법칙에 따라 분명한 명령을 내리니, 만약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6) 
 

실제로 이 교서의 뒷부분에는 당시 신라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외래품이 열거되어 있다. 아랄 해와 타슈켄트에서 생산되는 보석, 페르시아산 고급 모직물을 비롯해, 캄보디아⋅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나는 각종 물품도 보인다. 당시 왕경인들이 외래품에 대한 선호 경향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왕경에 거주할 수 있는 특권

 
신라 사회에서 왕경은 아무나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왕경인과 지방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 존재했으며, 이는 사회적 위계와 권력 구조를 반영하였다. 이러한 격차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제시한 '아비투스(Habitus)'란 개념을 통해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7)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구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별 지어 진다."고 보았다. 이는 수십 년, 때로는 수세대에 걸쳐 경험과 문화가 누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므로 쉽게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왕경인과 지방인의 장벽은 단순히 사회적 차별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문화와 경험의 차이에 기인한 매우 견고한 메커니즘이었다. 이러한 아비투스의 차이에 의해 사회이동은 자연스럽게 제한되었고, 서로 다른 아비투스를 공유한 왕경인과 지방인 간에는 의사소통조차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라의 관등체계는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지방인은 외위로, 왕경인은 경위로 나뉘어 있었다. 경위는 6부인에게 수여된 17등급의 관등을 말한다.8) 
 
물론 왕경인들도 골품제에 따라 각 계층 간 신분이동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공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왕경인은 지방인보다 거주 면에서 특권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인 중에도 왕경에 거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경우가 확인된다. 예를 들어, 중원경 사량 출신인 강수는 그 아버지가 석체 나마였으며, 유학에 뜻을 두어 스승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효경》, 《곡례》, 《이아》, 《문선》 등의 유학적 서적을 통해 학식을 쌓았고, 당나라 사자가 전달한 외교문서를 막힘없이 해독하여 무열왕의 환심을 샀다. 왕은 그를 강수선생이라고 높이며 예우했다.9)

강수가 사망한 후, 그의 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신들이 이를 듣고 왕에게 요청해 조 100석을 하사하려 했으나 그녀는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는 강수의 관력으로 왕경에 거주할 수 있었으나, 남편의 부재로 인해 그 거주 권한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들은 신라 사회에서 왕경과 지방 간의 구분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에 의해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왕경 거주 자체가 특권이었으며, 이는 곧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왕경인들은 당대의 문화와 권력을 누렸으며, 이러한 특권을 통해 지방인과의 차별을 더욱 공고히 했다.

한편 합천 대야성의 함락은 신라 전체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당시 군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었다. 그는 부하 검일의 아내를 탐했고, 이에 분노한 검일은 백제의 윤충에게 투항하여 주요 정보를 제공했다. 이후 검일은 백제군을 도와 성내의 창고를 불태워 혼란을 일으켰다. 대야성은 이내 혼란에 빠졌고, 투항을 통해 목숨을 구걸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품석은 결국 처자와 함께 자결했다. 품석은 부하의 아내를 탐할 정도로 훌륭하지 못한 지휘관이었지만, 그에게는 죽죽과 용석 같은 보좌관이 있었다. 13 관등 사지였던 죽죽은 남은 병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 끝까지 항전하려 했다. 이때 용석은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자고 제안했지만, 죽죽은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대나무라 지은 이유는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품을 지니라는 뜻이었다며, 용석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죽죽과 용석은 품석의 행실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음에도 끝까지 그를 보필하며 싸웠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히 상관인 품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국가의 이름으로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죽죽으로 작명했던 사연과도 부합한다. 성이 함락될 위기(추운 겨울)가 와도 죽음을 맞을지언정(꺾일지라도), 항복하지 말라(굽히지 말라). 이러한 맥락에서 두 화랑의 맹세가 적힌 임신서기석의 내용이 떠오른다. 두 화랑은 충도(忠道)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더라도 반드시 이를 실천할 것을 결심했다. 죽음에 초연했던 죽죽과 용석, 어쩌면 이 둘 역시 화랑도 출신이지 않았을까.

죽죽과 용석의 장렬한 전사 소식은 선덕여왕에게도 전해졌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겼으며, 죽죽에게는 9 관등 급찬을, 용석에게는 10 관등 대나마를 추증하였다. 또한 그들의 처자에게는 포상을 내려 왕도(王都)로 거처를 옮겨 살 수 있게 하는 특혜를 베풀었다.10)
 
이는 지방민 출신으로서 군공을 세워 경위를 받았고, 유가족들은 왕경으로 거주지를 옮길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이는 국가를 위해 죽은 자에게 격에 맞는 포상을 내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신라를 위해 죽으면 국가가 무한한 책임을 진다는 믿음을 지방인들이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왕경인들은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주>
1)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6, 《경주 교동 94-3 일원 유적》 -천원마을 진입로 확ㆍ포장 공사부지- 발굴조사 보고서.
2)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5 眞德王 三年, 春正月, 始服中朝衣冠.
3)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5 眞德王 四年, 是歲, 始行中國永徽年號.
4) 《日本書紀》 卷25, 孝德天皇 白雉 二年, 是歲, 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 着唐國服, 泊于筑紫. 朝庭, 惡恣移俗, 訶嘖追還.
5)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4 眞平王 五十三年, 秋七月, 遣使大唐, 獻美女二人.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聖德王 二十二年, 春三月, 王遣使入唐, 獻羙女二人. 一名抱貞, 父天承奈麻, 一名貞菀, 父忠訓大舎. 給以衣着·器具·奴婢·車馬, 備禮資遣之.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羙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6) 《三國史記》 卷33, 雜志2, 色服, 車騎, 器用, 屋舍.
7) 삐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2005, 《구별 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8) 전덕재, 2002,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인》, 태학사.
9) 《三國史記》 卷46, 열전6 强首.
10) 《三國史記》 卷47, 열전7 竹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