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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133호) 시론] 우리의 전선_장지연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0.31 BoardLang.text_hits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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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0월(통권 56호)

[역사와 현실: 시론] 
 
 

우리의 전선

 

 

 


장지연(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0조

 
 
경향신문에 짧은 칼럼을 4주 간격으로 연재한다. 연재 기회를 얻은 김에 하나의 주제 아래 글을 모아 보고 싶어서 고민하다 “역사 리터러시 규칙”이라는 시리즈를 간간히 쓰기로 했다. ‘역사 리터러시’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문해력, 혹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갖춰야 할 문해력 정도의 의미로 사용했고, ‘규칙 제○조’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 NCIS의 보스 깁스의 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현재 제8조까지 썼는데, 깁스만큼 많은 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십진법의 10은 채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시리즈라고 마음 먹고 시작하긴 했으나 모든 규칙을 정해놓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이 ‘역사 리터러시 규칙’을 생각했을 때부터 “제0조”, 즉 모든 규칙에 우선하는, 혹은 기초가 되는 규칙은 정해놓고 있었다. 바로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규칙이다. 이 규칙을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사건이 있었다. 2023년 초 일본 여행에서 만난 택시 기사와 나눈 대화였다.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일본의 택시 기사는 대체로 정중하고 정직하며, 택시 안에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지 않는다. 이 여행 때 만난 다른 택시 기사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비가 잘못해서 호텔 뒤편으로 왔다며, 거기서부터는 미터기를 끄고 그 구역을 한 바퀴 돌아 정문 앞에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 사람과 헤어지고 호텔에서 짐을 챙겨 나와 공항을 가기 위해 탑승한 택시에서 문제의 대화가 일어났다. 

이 초로의 택시 기사는 일단 영어로 활달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먼저 말을 거는 일도 흔하지는 않은데,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영어로 이 택시기사는 곧 한국의 정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이번 대통령은 참 괜찮아요.” 
“이전 대통령은 좀 미친(crazy)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내가 지금 한국 택시를 탄 걸까, 일본 택시를 탄 걸까 구분이 안 되던 차, 이 택시 기사는 바로 한국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며 무슨 식민지 시절에 대한 사과를 아직까지 계속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은 전후에야 태어났는데, 자기 같은 사람들이 식민지에 무슨 책임이 있냐는 얘기까지 했다. 내가 긁힌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뻔뻔함과 무지함.

이 일화 때문에 규칙 제0조가 떠오르긴 했으나, 꼭 저 일화로 써야 할까, 쓴다면 어느 시점에 써야 할까 하는 부분에서는 망설였다. 실제로 경험한 것이긴 하지만, 대중의 즉자적 분노를 자극하기 너무 쉬운 일화인 것 같아서 그랬다. 이미 너무 많은 감정들이 넘실대는 연못에 굳이 나까지 조약돌을 던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또 저 규칙 자체는 일본인들만을 향한 것도 아닌 일반론이었기에 이 일화 말고 다른 일화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결국 지난 8월, 이 일화를 그대로 가지고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0조’라는 칼럼을 냈다. 해도 너무하지,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지요?”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사학계에 또 너무 익숙하고도 지겨운 전선(戰線) 하나가 그어지고 있다.
 
 

‘뉴라이트’라는 말도 아까운 전선의 상대

 
 
한국사학계와 관련이 깊은 주요 기관 세 군데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이다. 전임 기관장의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인물이 임명되는 시점인 올해, 솔직히 우리 바닥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고 있었고, 대체로 짐작한 대로 일이 벌어졌다. 

물론 ‘동북아역사’재단에 영국사 전공자를 임명하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근래 독립기념관의 관장을 보니, 이것은 파격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독립기념관 관장 임명 소식이 알려졌을 때, 학계 대부분의 반응은 이랬던 듯하다.
 

“이 사람 누구야?”
 

학위논문, 저서와 논문 목록들을 살펴본 후에는 더 황당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독립기념관 관장을 해?”
 

나는 독립기념관 관장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이 영원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것이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이니까 말이다. 다만 전문성을 좀 더 강화하고 싶다면, 학계의 관련 연구를 하는 사람이 관장인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혹은 기관이란 행정력도 중요하니, 관련 행정의 경험자가 맡는 것도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정도가 상식 아닌가? 그런데 이번 인사는 해도 너무 했다.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바닥을 또 뚫고 내려갔다.

몹시 피로하다. 이런 일들이 20년째 반복이 되면서, 작용-반작용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권의 결정들을 뒤집겠다며 더 큰 반동이 일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지점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권의 학문에 대한 개입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저런 인사도 개탄스럽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니 자꾸 법률이나 제도를 들고 나와 못을 박으려는 반작용이 일어난다. 학문의 영역이 자꾸 법과 제도에 침범받는다.

또한 어느 정권에서건, 그 정권이 좋아하는 학문 - 과연 그것을 학문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 의 성향이란 것이 빤히 드러나자 이 틈을 이용해 이익을 챙겨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난무한다. ‘사양지심(辭讓之心)’, ‘예의염치(禮義廉恥)’ 같은 모토가 사라진 시대답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걸맞지 않은 자리도 냉큼 차지하는 사람들, 각종 사업에 기생해 떡고물을 뜯어 먹는 브로커들까지. 전자는 수준도 점점 더 떨어진다. 어떤 이들은 이젠 ‘뉴라이트’라는 말도 아깝다며 그냥 ‘매국노’라고 부르자고 할 정도다. ‘뉴라이트’에 사이비 역사학까지 결합한 저 집단은 그 안에서 또 자기모순이 폭발하면서 아주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후자인 브로커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작은 용역들 몇 개를 하며 이런 브로커들을 접하고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뚜렷한 직책도 없는 이들이 공무원들을 절절 매게 만들고 용역의 성패를 좌우한다. 몇 천만원밖에 안 되는 작은 용역도 이런데 중앙정권 차원에서 깃발을 들면 어떻겠는가. 도대체 얼마나 더 성명서를 내고 서명운동을 해야하는 것일까. 끝이 나긴 하는 것일까. 도대체 저 같잖은 소리들을 반박하기 위해 학계의 에너지를 얼마나 더 써야하는 것일까. 연구를 축적하고 축적해서 역량을 키우고 또 키워도 모자란 이 시점에.
 
 

‘문송합니다’라는 전선

 
 
정치만이 문제가 아니다. 학문적으로도 너무나 위축되어 있다. 비단 역사만이 아니라 인문학, 더 나아가서는 상경계를 제외한 문과 계열의 모든 학문이 위축되고 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밈이 처음 돌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약간의 불쾌감 정도로 치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정말로 문과 계열 학문들이 무엇에 쓸모가 있냐, 그건 그냥 교양이 아니냐, 그걸 왜 온갖 대학에 전공으로 두어야 하느냐는 인식이 일반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 있어 보면, 이공계쪽 교수들은 정말 문과 계열 학문이 무엇에 쓸 데가 있는지, 혹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그러면서도 교육부에 각종 보고서나 신청서를 낼 때가 되면 문과쪽 교수를 찾는다). 돈과 효용으로 계산하는 데 익숙한 상경계열 역시 마찬가지다. MBA를 따고 금융 쪽 일을 하는 친척 어른에게서 “나는 역사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무례하다는 것이랄까. 나는 적어도 그 사람 면전에서 “그딴 게 무슨 학문이에요?”라고는 안 하는데.

이들은 문과 계열의 학문을 ‘교양’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책 몇 권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통섭’이라는 주제로 큰 명성을 얻은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이기적 유전자》와 리처드 도킨스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여기에서 최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가 새로운 학설을 낸 것이 아니라 해밀턴의 어려운 연구를 잘 풀이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논문 매 페이지마다 복잡한 수학 공식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해밀턴의 연구를, 도킨스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풀이하여 “인문학 책 읽히듯이 쓴 거에요.”라고 한 것이다.1) 부지불식간에 “인문학 = 교양”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인문학 쪽을 건드리는 데 아주 과감하다. 주간지인 《시사인》에서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가 세계문명사를 주제로 연재를 시작한 것을 보며 기가 찼던 바가 있다.2) 책 몇 개 읽고 세계문명사를, 빅 히스토리를 쓸 수 있다는 그 자신감에 박수라도 보내야 하는가. 정작 역사학자들은 이제는 20세기 전반처럼 한 사람이 세계사 통사, 아니 세계사는 둘째 치고 한 나라의 통사를 쓸 수 있는 시대도 지났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말이다.3)
 
더 큰 문제는 과학자들이 역사를 건드리며 만들고 있는 그 서사가 이미 상당히 낡은 데다 위험하다는 점이다. 구태의연한 동양/서양의 이분법도 그렇지만, 과학문명의 진보를 당연한 것으로 설정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낡은 서구 계몽주의 발전 신화를 반복하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기술의 혁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도 그러하다. 사실 이 과학기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다.

여기에서 어려운 점은 이런 것이다. 인문학은, 역사는 단지 교양이 아니며, 오랜 기간의 학습과 연구가 수반되어야 하는 전문 지식이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원래 어느 학문이건 진짜 전문 분야 얘기를 하면 못 알아듣는다. 근현대 100여 년 동안 각 분과 학문의 지식 축적이 이미 상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거의 모든 학과가 학부 4년만으로 전공에서 필요한 기초 교육을 다 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분과별로 축적된 지식의 두께가 상당하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이공계 분야와 역사학 사이의 차이점은 이공계 분야의 어려운 얘기는 원래 어려우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양해하는 분위기인 데 비해, 역사학 분야의 어려운 얘기는 너네가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고 욕한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얘기를 우리가 왜 알아야 하냐는 반문까지 나온다는 점이다. 지금 우주 개발을 하고 인공지능으로 한 발짝이라도 앞서 나가야 하는 때, 우리가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같은 걸 알아야 할 이유가 뭐냐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 한숨부터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해보자.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이라는 예시를 들었을 때, 한국사 연구자임에도 ‘나도 그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연구 분야가 세분화되고 심도가 깊어지면서 우리 바닥 안에서의 내부 경계의 벽도 높아지는 것도 문제다. 
 
 

전선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이런 전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어떤 전술과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명쾌한 생각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무슨 대단한 방안을 턱 내놓을 주제가 아니라 여러모로 주저된다. 다만 몇 가지 지점들은 제시해보고 싶다. 

첫째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사이비 역사학이나 ‘뉴라이트’의 발흥을 두고 이전 세대의 민족주의적 사관과 교육이 문제라는 진단을 많이 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교육 속에 성장한 세대 거의 전체가 제대로 된 지식소양은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국수주의적 정서는 공유하고 있어 사이비 역사학이나 ‘뉴라이트’의 암묵적인 지원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사이비 역사학의 추종자들은 국사 교과서에서 그러한 내용들을 배운 것이 아니라 각종 미디어와 위서들을 통해 아름아름 주워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만이었다면, 이전의 교육과 서사에 대한 학계의 반성과 재교육이 시행된 200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는 무언가 달라졌어도 달라졌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대에서는 사이비 역사학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는 조금 덜한 듯하지만,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2000년대 이후의 역사 수정주의 흐름, 세계 각국의 국수주의 발흥, 주변국의 패권주의 등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2000년대 이후의 젊은 세대 중에는 민족주의고 뭐고를 떠나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기도 못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점이다. 무지(無知)는 그 자체로 위험하다. 사고력 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정서, 위대한 과거에 대한 추앙 등은 이것이 옳건 그르건 간에 위대한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블의 영화 <블랙 팬서>(2018)와 《대쥬신 제국사》(김산호, 1994 동아출판사)4)의 세계관이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우리의 민족주의적 사관이나 교육만 깨면 작금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정서는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체의 맥락에서 특수한 양상으로 발흥하긴 하지만, 그 바탕에 흐르는 세계적인 저류가 있다. 이 지점을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문제 해결은 지난할 것이다.

둘째로는 전선에서 싸울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에게는 최전선에 나가 싸울 만큼의 스피커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최전선에 있는 이들은 유명 학원 강사 출신들이다. 이들이 역사학 분야의 교양서 시장과 방송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에, 이들에게 스피커가 주어진다. 어떤 학문 분과도 이런 외연에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역사학 분야는 유독 심하다는 느낌이다. 학계 외연에서 활약하는 이들은 대체로 만사에 숙맥인 학자들이 못 하는 부분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그러나 이들의 영역이 너무 과도한 것은 문제가 있다. 이들이 철 지난 담론에 근거해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채질하거나, 말단의 재미에만 편승한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역사연구회 회원들이 저술한 《시민의 한국사》를, 출판사에서 이런 이를 동원해서 광고하고, tvN의 프로그램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이런 강사 출신이 주 강연자고 전문 연구자는 옆에서 들러리를 선다. 그런 속에서 어느덧 이들은 자신들이 ‘역사학자’라고 자처하는 데 거침이 없으며, 미디어는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있다. 자괴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더구나 심심치 않게 “역사학자들 글이 재미가 없어요.”라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업인 사람들인데, 이런 말을 듣는다니! 여기에서 재미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정말 글이 잘 안 읽힌다는 기초적인 차원의 문제도 있지만, 글의 구성이나 패턴이 빤하다든가, 현 시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뜻도 있다. 연구의 실력은 차치하고서도 소통에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이건 SNS건 소통 창구를 가지고 제대로 소통하는 사람들도 드무니, 발언권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내가 못 할 것 같으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후학들을 키워주든지 길을 열어줘야 한다. 젊은이들의 도전적 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꼰대 자세는 물론이거니와 젊은이들은 참신할 것이라며 말로는 칭찬하나 사실상으로는 방임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셋째, 엄중함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대화 스타일이 있다. Chat-GPT의 첫 충격이 가해진 후에, 대학교수들이 모여 AI가 글쓰기를 점령할 것이라며, 미국은 어떻고, 어디는 어떻고 대학에서 이래서 골머리고 어쩌고 하면서 “하이고, 나는 이제 모르겠다.”는 수준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책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실험해서 쓸모를 확인해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연구 후속세대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교수 정도 돼서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가? 

누구나 다 역사학, 특히 한국사는 필수라고 생각하던 요순 시절이 있었다. 뭔가 글을 쓰기만 해도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학문의 필요성, 전문성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다. 글은 아무나 다 쓴다. 이제는 어떤 주제를 연구하건 내 주제가 왜 현재 한국 사회에서, 또 세계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어려운 언어’로도, ‘쉬운 언어’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 함부로 모든 것에 ‘쓸모’를 묻느냐고 저항해야 한다. 예전에 ‘쓸모’라는 말은 주로 땅과 같은 부동산이나 자원과 결합했다. 그런데 요새는 사람에게도 쓰고 지식에도 붙여 쓴다. 왜 사람과 지식에서 쓸모를 가려야 하는가? 쓸모를 묻지 않아야 할 대상에 대해 쓸모를 묻는다는 것은 폭력이다. 이런 점을 성찰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을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한 바 있다. 작금의 역사전쟁은 다가올 미래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다. 누가 봐도 미래가 불투명해보이기에 그 방향을 놓고 치열하게 투쟁이 벌어지는 시기가 지금이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과정에서 ‘역사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무력화되고 있다. 이것은 모순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전쟁을 벌이려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학문적 엄정함이나 회의・성찰 같은 주저하는 태도라든가 맥락과 방향을 계속 점검하는 통찰 따위는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사회와 소통해나가야 한다. 던져지는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고 의제를 주도하며 이끌어 갈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모두가 각자의 지극히 전문적인 공부를 현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미 있는 콘텐츠로 던질 수 있는지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미주>
 
1) [정말 읽었니?#5] 최재천 교수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https://youtu.be/SyGKk2a6OWs?feature=shared accessed 2024.08.26 14:25~14:30 사이를 보면 된다.
2) 《시사인》,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시리즈.
3)  하버드 중국사의 책임 편집을 맡은 티모시 브룩이 이런 소회를 기술한 바 있다(티모시 브룩 저/조영헌 옮김, 2014, 《하버드 중국사 원・명》, 너머북스. 8~9쪽).
4) 대쥬신제국사는 <라이파이> 시리즈 등으로 명성을 얻은 만화가 김산호가 그린 만화로 《환단고기》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동이와 중화족의 대결이라고 보며, 동이의 일파인 숙신을 부르는 말에서 ‘쥬신’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한때 군부대의 정훈교육에도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