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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총독부 축우정책과 축우자원의 식민지적 개발_노성룡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0.31 BoardLang.text_hits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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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0월(통권 56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총독부 축우정책과 축우자원의 식민지적 개발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08)
노성룡(근대사분과)연구의 계기한국 근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기로 했을 당시 기존 사회경제사 연구들이 지나치게 생산력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산력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데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특히 내가 연구 대상으로 하는 농촌 사회의 경우 생산력만큼이나 공동체의 존속, 가족의 수요, 농촌의 생활양식, 전통적 사회관계망, 생태학적 다양성 등 비생산적인 요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따라서 생산력을 중심으로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사회의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회경제사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생산력 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경제적·사회적 요소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러한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이 가지는 성격과 특징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데 놓여야 한다고 믿었다. 생산력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 속에서 사회경제사를 재구성한다면 그동안 기존 연구가 보지 못한 조선 사회의 다양한 측면들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선 사회의 생산방식을 이해하기 적합한 소재, 축우생산력 중심의 시각을 해체하고 인간의 구체적 삶을 통해 사회경제사를 재구성한다는 내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떻게 연구를 설계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고민 끝에 조선 농촌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적 생산방식과 조선 사회의 전통적 생산방식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연구를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생산방식을 둘러싼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회의 갈등은 사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양자의 견해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내 문제의식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연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위와 같은 갈등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소재로서 축우정책 선택했다. 당시 조선 농촌에서는 축우의 생산, 개량, 사육 방식을 둘러싸고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농민 사이에 커다란 격차가 존재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축우의 생산성과 상품 가치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방식을 재편하려고 했지만, 축우 사육경제의 안정성과 사용 가치를 더 중요시하던 조선 농민들은 전통적 생산방식을 고수하고자 했다. 따라서 축우정책을 둘러싸고 양자는 생산현장에서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했다. 이처럼 축우는 생산방식을 둘러싼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농민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소재였다. 비판적 사료 읽기를 통한 조선 축산의 특징 읽어 내기우선 법령집과 정책 자료를 중심으로 축우정책의 큰 틀을 그리기 시작했다. 축우정책을 시기에 따라 크게 1910년대의 축우개량정책, 1920년대 축우증식정책, 1930년대 유축농업정책, 1940년대 전시축산정책으로 구분하고 각 시기의 핵심적인 정책 목표와 정책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 다음은 각 시기의 정책들이 실제 생산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최일선에서 기술지도를 담당했던 일본인 축산기술자들이 남긴 다양한 기록을 수집·분석했다. 법령과 정책 자료를 통해 축우정책의 시기를 구분하고 정책적 목표를 그려내는 작업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일본인 축산기술자들이 남긴 기록으로부터 조선 사회의 특질을 읽어 내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사료비판을 통해 그들의 식민지적 편견을 조금씩 거둬내고 그 속에서 본질을 찾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업이었고, 나도 모르게 금새 빠져들었다.
일본인 축산기술자들은 근대적 축산기술을 조선 농민에게 이식·지도하는 방법을 통해 축우정책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생산현장에서 조선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고, 대부분의 사업은 정책적 목표를 거두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정책 실패의 원인에 대해 축산기술자들은 생산성이 높은 근대적 생산방식을 거부하고 낡은 생산방식을 고수하는 조선 농민의 무지와 타성을 문제로 지적했다. 나는 이러한 텍스트 속에서 익숙한 시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건 당시 일본인 축산기술자는 물론 동시대 조선인 맑스주의자, 심지어 해방 이후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해 온 생산력 중심의 사관이었다. 나는 이러한 생산력 중심의 사관을 걷어내고 조선 농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일본인 축산기술자가 남긴 기록들을 다시 읽어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식민지적 편견이 가득 찬 텍스트 속에서 조선 사회의 작동방식과 조선 농민들의 생활양식들이 조금씩 그려 나갈 수 있었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축우개량사업이었다. 좋은 소란 무엇인가? 축우를 바라보는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농민의 시각 차이식민지 축산정책의 핵심은 축우개량에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재래의 조선우(朝鮮牛)를 우량품종으로 개량하여 높은 생산성과 상품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당시 일본에서 크게 발전하고 있던 이종개량(異種改良) 기술-서양품종과 재래품종을 교배하여 우수한 개량종을 만드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조선에 이식했다. 특히 농업연구기관인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스위스산 품종인 시멘탈(Simmental)과 조선우를 교배하여 개량종 생산하는 실험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연구 결과 개량종은 재래종에 비해 체중 및 체격 조건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역(役)‧육(肉)‧유(乳) 3가지 부분이 겸용이 가능한 다용도 품종으로 높은 생산성과 상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러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축우개량정책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축우개량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적극적인 정책 추진에도 불구하고 축우개량정책은 조선 농민에게 외면받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높은 생산성과 상품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 농민들은 개량종을 거부했을까? 개량종은 생산력과 상품성이 뛰어났지만, 많은 사료를 소비하고 관리가 까다롭다는 점에서 생산 및 유지 비용이 상당히 높았다. 대부분의 조선 농가는 가난했기 때문에 개량종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개량종은 보통 1정보 미만의 작은 토지를 경영하는 소농으로 이뤄진 조선의 소농적 농업환경에 적합한 품종이 아니었다. 재래종 축우 한 마리로 보통 1~3정보의 토지 경작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선 농민에게 우량한 개량종의 사육이란 도리어 축우 사육경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선택이었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농민은 어떤 소가 좋은 소인지에 대해서 시각을 크게 달리했다. 조선을 개발-수탈해야 하는 일본 제국주의에게 좋은 소란 높은 생산성과 상품 가치를 지닌 소였다. 반면 농촌에서 장기간 삶과 생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 조선 농민에게 좋은 소란 축우사육경제와 농가경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안정성과 사용 가치를 지닌 소였다. 생산력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본 제국주의는 소가 조선 사회에서 가지는 경제적·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더 우량하고 더 많은 소를 생산하는 것이 근대적이고 진보적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이 그 자체로 합리적·효율적·보편적이라고 할지라도 조선의 농업환경이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세운 축우정책의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향후 연구 과제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박사논문에서는 축우정책을 둘러싼 생산 현장에서의 갈등을 통해 압도적인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 제국주의가 정책적 목표 달성에 실패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생산방식과 기술체계가 가지는 한계를 구명했다. 또한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생산력 중심의 사회경제사를 환경, 생태, 사회, 문화 등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조선 농민들의 생산방식과 생활양식들을 생산력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다시 재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근대 사회경제사, 그중에서도 농업사 및 농촌사회사는 2000년대 이후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연구를 오늘날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여지가 상당히 크다. 따라서 소재를 축산으로 한정하지 않고 농업, 임업, 농촌금융 등 조선 농민의 삶과 밀접한 분야들로 연구를 확장해 갈 것이다. 역사가는 항상 역사의 현재적 의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과거에 오늘날 자신을 투영한다. 생산력 중심의 역사관 역시 당시 시대적 고민의 산물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 앞에도 엄청난 난제들이 쌓여 있다. 환경 오염, 생태학적 위기, 부의 불평등, 저출산 등 과연 이 체제가 지속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그 어느때보다 팽배하다. 모든 생물은 무한히 팽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무한히 팽창한다는 걸 전제로 살아간다. 19세기 절정에 달했던 제국주의가 20세기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처럼 무한히 팽창하려는 체제는 결국 스스로가 쌓아 올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과거 조선 농민의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사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되묻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연구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상력을 열어 두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