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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2회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0.31 BoardLang.text_hits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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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0월(통권 56호)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2회.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1)

 
 

박 범(중세2분과)

 
 
 

논산은 어디일까

 
2013년 봄 어느 날 학위논문 작성을 위해서 자료만 보던 나에게 소장님께서 연구 용역을 함께 하자고 문서 하나를 들고 오셨다. 오직 논문을 위한 자료 연구만 하던 나에게 연구 용역이라는 일은 매우 생소했다. 소장님이 가져오신 문서는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 사업 연구용역 발주 기본 계획”이었다. 당시 논산시에서는 “논산 100주년 기념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장님께서는 그 사업에 관여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 본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14년은 ‘논산군’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에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변화된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군면 폐합 조치를 내렸고 논산 지역은 은진군, 노성군, 연산군, 그리고 석성군 일부를 통합하여 ‘논산군’을 만들었다. 물론 논산이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2014년은 논산군, 즉 지금의 논산시라는 행정구역이 만들어지고 100년이 되는 해가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논산시에서는 ‘논산의 지명 정체성과 주민의 자긍심 고양을 위한 사업 발굴 추진의 필요’와 ‘논산 100주년 기념 사업을 통한 시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방안 정립의 필요’에 의해 본 사업을 발주하게 된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하여 건양대 충남지역문화연구소에서는 논산 지명 탄생의 역사성 규명, 논산 시 승격 이후 변화와 발전, 논산 100주년 주민 인식 조사 설문 및 분석, 논산 100주년 기념 사업 제안, 타지역 도시 기념 행사 검토 등을 세부적으로 수행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사업의 결과보고서는 사실상 내용 구성이 거의 비슷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건양대학교에 재직하는 호텔관광학과, 국방경찰행정학부 교수들이 참여하였고, 역사학 분야, 즉 ‘논산 지명 탄생의 역사성 규명’은 내가 맡게 되었다.

강의를 처음 할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연구 용역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에도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누가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왜 해야 하는지만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 줄 모르니 내가 대학원에서 배웠던 논문 작성 방식과 동일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관련 연구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논산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강경을 중심으로 작성된 논문을 읽었다. 《논산시지》가 있었지만, 사실상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역사 연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간행한 시지와 군지가 있다. 그런데 시지와 군지는 연구자가 어떻게 작성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의 시지와 군지를 보면 중앙 중심의 연구 성과의 흐름 속에서 지역 사례를 조금 포함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논산시지》는 안타깝게 내가 원하는 내용을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시지는 활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모든 작업을 기초 조사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우선 연대기 자료를 모두 찾아 모아야 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을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論山’이라고 검색을 했다. 그런데 자료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검색 결과는 ‘산을 논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기사였다.

본래 지역사 연구에서 연대기 자료의 활용성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작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자료는 연대기 자료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江景’ 조차 몇 건 검색되지 않는데, ‘論山’이 검색으로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사 연구를 지역사회의 지료에 근거하여 논문을 작성하는 이유도 결국 이러한 자료적 특성에서 기인했다. 얼마 안되는 연대기 자료와 더불어 읍지 혹은 고지도를 추가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연구 주제가 ‘논산’이기 때문에 논산 그 자체에 주목하고자 했다. 논산(論山)은 말 그대로 산을 가리켰다. 그러면 논산은 어디에 위치하던 산일까.
 
 
 

이 지역에서는 논산을 대체로 논산부창초등학교 뒷산, 즉 관음사가 자리한 산으로 보고 있었다. 위 지도를 보면 유일하게 붉은 원이 있는 곳에만 논산 시가지 중에서 나무 숲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도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높다. 사실상 논산 사람들에게 논산 시가지 중에서 산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 있는 산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 중에 논산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다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논산부창초등학교 뒷산을 가리키는 고지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고지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1872년 지방지도에서 초등학교 뒷산을 가리켰고, 《여지도서》에 수록된 은진현지도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지도서》 수록 고지도를 보고 다른 곳이 논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논산의 옛 중심 시가지, 즉 조선후기부터 논산의 시가지를 이룬 곳에서 논산이라고 생각하는 산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위 지도를 보면 논산이라고 알고 있는 곳과 조선후기 논산 시가지는 떨어져 있다.
  
다른 곳이 논산일 수 있다는 근거를 찾게 된 자료는 《조선환여승람》과 《조선여지일통》이었다. 《조선환여승람》과 《조선여지일통》은 식민지 시기 작성된 인문지리지였다. 《조선환여승람》은 지역사 연구 자료로 많이 활용되고 있어서 익숙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조선여지일통》이라는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식민지 시기 논산 지역과 관련된 지리지 자료를 전부 찾았던 것 같다.
 
《조선환여승람》의 논산군편을 보면 논산포(論山浦)가 소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논산포는 곧 시진포이다. 논산(論山) 아래에 있다. 상선과 물산의 이익이 많다”
 
 
논산포의 위치는 명확하게 확인된다. 그런데 논산은 논산포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고 《조선환여승람》은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에 알던 논산과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 지도를 보면 논산포와 논산이라고 알고 있던 산은 거리가 멀다. 논산은 논산포 근처 어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조선여지일통》의 논산군편에는 여러 산의 명칭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논산이 보인다. 산명(山名)으로 논산이 있는 지리지 혹은 읍지는 《조선여지일통》이 유일하다. 그런데 논산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금 군청소재지이다”
 
 
《조선여지일통》이 1930년을 전후하여 작성된 책이기 때문에 1930년 전후로 논산군청의 위치를 찾으면 된다. 그래서 식민지 시기 작성된 조선지형도를 확인해 보았다.
 
 
 
 
위 오른쪽 지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비스하는 지형도로 역사지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3차 지형도’에 해당한다. 이 지도는 1915년에 측도하여 1917년에 제판되었다. 논산군청이 식민지 시기 위치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논산군청이 소재한 이곳이 ‘논산’이 위치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논산천 중간에 보면 ◯ 표시가 된 곳이 보이는데 그곳은 바로 논산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조선환여승람》과 《조선여지일통》의 내용을 종합하면 논산포와 논산군청 사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은 당시 논산의 시가지였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지도상으로 산이라고 할 만한 곳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실제로 가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건양대학교에서 논산 시가지 까지는 자동차로 5분 밖에 걸리지 않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직접 가보니 그때서야 뭔가를 알 수 있었다. 지도에서 보는 것돠는 다르게 이곳은 사실 구릉지였다. 오른쪽 지도에서 붉은 점()으로 표시된 지점에서 논산포 쪽(◯ 표시된 곳)을 내리막길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높은 지형일까 궁금했다. 
 
국립지리정보원(현재 국토지리정보원) 홈페이지를 통해 고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지리정보원에서는 10m단위로 등고선을 표시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왼쪽의 지도가 논산 시가지의 고도를 나타낸 것으로 붉은 점()으로 표시된 지점은 해발 13m였고, 그곳에는 현재 논산제일감리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선으로 표시된 지형 안쪽이 10m이상이고 그 바깥쪽은 10m이하였다. 결국 논산 시가지가 자리한 그 구릉이 바로 논산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논산 사람들은 그곳을 산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13m 밖에 안되는 언덕에 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일대가 대부분 평야를 이루고 있어서 13m 조차도 높아 보이는 지형상의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구릉 전체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건물이 없다고 상상해 보면 논산제일감리교회의 위치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건양대에 출근할 때마다 논산 시가지를 바라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논산제일감리교회였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 지역에 살았던 옛 사람들 눈에도 그렇지 보이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어떻게 본다면 논산이라는 지명만 남겨진 채 정작 실제 산으로써의 논산의 실체는 논산 사람들에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산은 잊혀졌지만 이름은 남긴 셈이다.
 
 
 
 

논산은 어떻게 부를까

 
논산 지역사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렇게 망각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논산의 명칭이었다. 논산은 한자식 지명으로 ‘論山’이라고 표기하지만, 부를 때에는 ‘논산’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산시에 오게 되면 ‘놀뫼’ 혹은 ‘놀메’와 같은 상호를 가진 가게를 매우 쉽게 접하게 된다. 논산 사람들은 논산을 ‘놀뫼’로 불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구글을 검색해 보자. 놀뫼신문, 놀뫼유치원, 놀뫼타운, 놀뫼새무알금고, 놀뫼로타리클럽, 놀뫼농원, 놀뫼장학회, 놀뫼백일장까지. 모두 논산시에 있는 명칭들이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인물은 논산시의원과 논산문화원장을 지낸 류제협 선생님이다. 그는 논산이라는 지명 유래에 대하여 여러 주장들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 중에는 노성현(논산시 노성면 일대)에 있는 노산에서 유래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어느 유명 철학자의 견해, 연산현(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옛 명칭 중 하나인 황산이 연산이 되고, 연산이 고어로 ‘느르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이 ‘놀뫼’로 발달하여 한자화된 결과 논산이 되었다는 국어학자의 견해 등을 제시했다. 그런데 류제협 선생님은 이들과는 다르게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에 기록된 ‘답산교(畓山橋)’라는 다리 명칭에 주목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도 논산의 농촌지역 노인들이 논산을 ‘논미’ 혹은 ‘놀미’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논산장에 간다’는 표현을 ‘논미장 간다’라고 하였고, 논산과 강경을 함께 부르는 표현으로 ‘논미 갱갱이’라고 했다. 그러면 ‘논미’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동국여지지》 은진현 항목에 ‘답산교’가 기재된 것을 그가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답산교’에서 답(畓)은 ‘논’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답산’은 ‘논뫼’라고 부를 수 있고 이것이 후에 ‘논산’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면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놀뫼’는 어디서 온 것일까. 줄곧 논산에서 지낸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부터 논산에서 활동한 문인들, 주로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문학 작품에 논산을 ‘놀뫼’로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놀뫼가 논산의 옛 이름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1990년대에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지명 연구에 매달리면서 ‘놀뫼=論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놀뫼는 만들어진 전통인 셈이다.
 
나도 류제협 선생님의 글을 읽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답산과 논산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변화 과정이 있었는지를 자료를 통해 찾아보고자 했다. 답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역사에서 많이 활용하는 《조선지지자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지지자료》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인문지리 정보를 수집하여 만든 책으로 여기에는 인민지리의 명칭이 한자와 그 발음인 언문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입석리(立石里)라고 쓰지만 실제 마을 이름은 ‘션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설 립(立)에 돌 석(石)자 이니 입석(立石)은 ‘선돌’인 셈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논산이라는 명칭은 노성군조에서 보인다. 노성군의 마을 명칭 중 하나인 ‘논산리(論山里)’의 항목 하단에 ‘논미’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논산은 당시에 ‘논미’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미’라는 명칭은 은진군조에도 등장한다. ‘장대리(場垈里)’ 항목 하단에 ‘논미’라고 기재되어 있다. 장대리의 ‘장’은 논산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도 논산리였으나 19세기 중반 논산리가 장대리와 반월리로 분리되면서 한자어 지명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논산 사람들은 이곳을 ‘논미’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논미’라는 호칭이 자료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1910년에 측도되어 1912년에 제판된 소위 ‘2차 지형도’에도 동일한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논산 지역의 지형도를 찾아보면서 3차 지형도와는 다르게 2차 지형도에는 각 지명의 한자와 함께 일본어(가타카나)가 기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지형도를 제작하면서 지명의 한자와 호칭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확인하고 실제 호칭을 기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논산(論山)’이라는 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놀미(ノル メイ)’라고 써 놓았다.
 
‘논미’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한자어가 ‘畓山’이었을 때나, ‘論山’이었을 때나 ‘논미’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다만 답산은 논의 뜻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고, 논산은 논의 음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시기 작성된 자료로는 한계가 있었다. 개항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 지명의 변화를 고려해야 했다.
 
지역사 자료를 가장 많이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 중 하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학자료센터”였다. 이곳에서 ‘논산’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무논산천(無論山川-산천을 논하지 않고)’이라는 용어가 대부분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자료 하나하나를 지난하게 찾아보던 중 《이재난고》에서 실제 논산 지명이 확인되었다.
 
 
 
《이재난고》는 조선후기 학자였던 황윤석이 남긴 유고(遺稿)이다. 책은 일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기 이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황윤석은 영조~정조대를 살았던 인물로 《이재난고》에 논산이라는 지명이 기재된 것은 1786년(정조 10) 12월 3일자 일기이다. 당시 황윤석은 서울에서 고향인 전라도 흥덕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 논산을 들렀다. 그는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 지역과 관련된 사실을 기록했다. 12월 3일자 기사에는 은진현에 성삼문의 유허가 남아 있으니 효종대 이후 송준길과 송시열의 상소로 사당의 건립을 주장했고 영조 초반 은진현감 이도선에 의해 사당이 건립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당 건립에 논산장의 장세(場稅)가 지급된 사실을 적었다. 이때 ‘給論山논미市貰’라고 표현한 것이다. 황윤석도 논산을 ‘논미’라고 부른 것을 이 지역을 지나면서 알게 되었고 이것을 주로 달아 표시했던 것이다. 이미 ‘논미’는 18세기 중반 이래 불렀던 호칭으로 보인다.
 
논산의 위치와 명칭이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점차 연구 용역 사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연구들은 좋은 연구성과를 도출해야 하면서도 그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료를 찾아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즐거움을 조금 맛보기 시작한 것도 이쯤에서였다.
 
 

논산 지명의 확장

 
기본적인 고증 작업이 끝난 이후 다음으로 찾아본 것은 고지도와 읍지였다. 여기에는 무수한 논산 관련 명칭들이 확인된다. 다리 이름을 뜻하는 논산교(論山橋), 도로의 명칭을 뜻하는 논산로(論山路), 포구를 가리키는 논산포(論山浦), 장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논산장(論山場), 마을 행정구역으로 사용된 논산리(論山里)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군현명(郡縣名)이나 면명(面名)이 아닌 이상 다양하게 동일한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논산과 같은 은진현에 속해 있는 강경의 경우도 이렇게 사용되지 않았다. 강경의 경우 강경포와 강경장으로만 사용되었지 강경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강경이 속한 면 명칭은 김포면(金浦面)이었다. 행정구역의 영역을 보면 김포면 전체가 사실은 강경인데, 면명으로 강경면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논산이라는 명칭의 사용을 보면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기를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수많은 명칭 중에서 논산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논산포는 하나의 포구가 아니었다. 논산천을 중심으로 북쪽 하안과 남쪽 하안에 각각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두 포구 모두 논산포라고 불렀다. 1799년(정조 23) 5월, 호서암행어사였던 신현(申絢)의 보고서를 보면 강경포와 논산포가 서로 갈등을 벌이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논산포는 ‘이성(尼城) 논산(論山)’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다 보니 번역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고전번역DB에서 제공되는 일성록 번역본에는 “강경은 이성(尼城)ㆍ논산(論山)과 포구는 같지만 길은 다릅니다.”라고 하여 이성과 논산을 등치시켰다. 본래 이 구절은 ‘강경은 니성의 논산과 같은 포구이지만 길은 다릅니다’라고 해야 정확하다. 논산포가 이성과 은진 두 곳에 모두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는 배경을 모르면 잘못 번역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연구 용역을 수행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논산포와 강경포의 관계에 대한 깊은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논산포가 어떻게 존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은 19세기 이후 점차 포구가 성장하여 일정한 도회(都會)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고전번역DB에서 문집을 검색하다 보니 흥미로운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1817년부터 1819년까지 연산현감을 지낸 김려(金鑢)라는 인물이 남긴 문집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논산에 위치한 연산현 세곡창고의 모습 시로 남겼다.
 
 
논산 해창 포구의 물길은 구름처럼 이어져
산의 흐름은 끊어졌어도 물의 기운은 나누었네
해창 고을 일상은 하릴 없이 방탕한데
주막 앞은 말이 새도록 취한 기생 뿐이네
 
 
시에 붙어 있는 주석에는 당시 행수 1명과 병방 1명이 번갈아 가며 논산에 위치한 연산현 세곡창고에 근무를 하면서 연산현의 세곡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논산을 “물길 위의 큰 도회”라고 기록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는 도회를 이루는 공간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논산은 논산천을 중심으로 북쪽 시가지와 남쪽 시가지로 나누어졌다. 지금은 모두 논산천 남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 논산천은 지금과는 달랐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지금의 논산천은 1930년대 하천개수사업을 통해서 물길이 변해서 생긴 하천이었다. 옛 논산천을 기준으로 논산을 보면 포구와 장시, 그리고 마을이 분리되어 있었다. 2개의 논산포, 2개의 논산장, 2개의 논산리가 존재했던 셈이다.
 
사실 이러한 행정구역의 존재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이를 잘 보여준다.
 
 
 
 
위 지도는 1914년에 작성된 아산군의 군면폐합지도이다. 붉은 선으로 된 지명은 시포리(市浦里)인데 위쪽은 삼북면 시포리, 아래쪽은 모산면 시포리이다. 두 마을은 면을 경계로 붙어 있는데 명칭은 동일하다. 본래 모산면은 조선후기 천안의 비입지였다. 그래서 군현 경계가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같은 이름의 동리명이 남아 있었다. 노란 선으로 된 지명은 신흥리(新興里)인데 왼쪽은 신흥면 신흥포, 오른쪽은 삼북면 신흥리이다. 신흥면 신흥포는 본래 수원의 비입지였다. 시포리와 동일하게 군현 경계가 달라 동일한 명칭의 동리가 있던 셈이다. 논산리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
 
노성현과 은진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작성된 근대정부기록류에서 다수 발견된다. 《충청남도래거안》과 《충청도관초》에는 논산포에 본격적으로 일본 상인이 침투하여 조선의 상권을 위협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노성현 논산리 소재 논산포에서 일본인과 관련된 사건은 노성현감이 보고를 하고, 이 일본인이 은진현 논산리 소재 논산포에서 사건을 일으키면 은진현감이 사건을 처리했다. 같은 논산포라고 지칭한다고 하더라고 행정구역이 달라지면 사건을 처리하는 지방관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행정 처리에서는 명확하게 구역이 설정되어 있었으나 생활권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논산교를 중수하면서 세운 석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논산문화원에서 편찬한 《논산금석문대관》에는 논산시 안에 남아 있는 비석과 그 비문을 탁본하여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논산교 관련 석비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 1846년(헌종 12)에 세워진 석비, ‘논산석교중수비’가 눈에 들어왔다. 중수비문에는 석교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시주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반월리에서 195냥, 장대리에서 190냥, 노논산(魯論山)에서 132냥을 납부했다. 반월리와 장대리는 앞서 언급한 은진현 논산리가 분동(分洞)된 것이고, 노논산은 노성현 논산리를 가리켰다. 이러한 모습은 행정구역 상 거주 주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도, 생활권 혹은 문화권은 사실상 같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현재 저 비석은 실물이 없다. 저 비석의 실물을 보기 위해서 책에 근거하여 논산대교 부근에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는데 없었다. 아마도 논산대교를 다시 건설하면서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논산금석문대관》이라는 자료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의 관심은 강경포와 강경장이었다. 연구논문이 여러 편 나올 만큼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포구와 또 다른 장시로서 논산포와 논산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논산에는 포구와 장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강경과 매우 가까운 곳에 포구와 장시의 존재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논산장은 강경장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군면 폐합 조치가 이루어질 때 이 지역의 군 명칭으로 최종 승자는 결국 ‘강경’이 아닌 ‘논산’이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당시 전국에서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들은 강경 주민이었다. ‘강경군’이 아닌 ‘논산군’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개항기 이후 자료에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내가 이 연구를 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