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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_기유정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2.02 BoardLang.text_hits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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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1월(통권 57호)

[나의 책을 말한다]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 

(산처럼, 2024.08)
 
 
 

기유정(근대사분과)

 
 
 

 

이 책은 1918년경부터 1930년대 중반경까지 식민당국에 의해 이른바 “조선인 군중 소요”라고 불리었던 사회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 주로 길거리와 장터, 음식점과 파출소 등 무작위적인 공간에서 조직적 매개 없이 시작되었던 이 소란들은 대부분 반드시 폭력을 수반한 채 만들어졌다 어느 순간 사라지고 있었다. 경찰과 일본인 혹은 백정과 중국인을 상대로하거나 서로 다른 마을 주민들을 대척해서 하나가 된 대중이 만들어낸 이 소란들은 식민 당국의 입장에서도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사회 현상의 하나였다. 지식인 사회 역시, 민중, 대중, 민족, 군중 등과 같은 용어들을 통해 이 주체(즉 다수자)를 각각의 이념적 스펙트럼 위에서 의미화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어, 이 시기 다수자적 주체가 갖고 있던 정치적 중요성의 인식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이 대중적 소요 사태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단 이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논리 중 하나에는 이것이 3.1을 경험한 조선인 사회의 길고도 지리한 여파였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런데 이미 3.1운동 이전에도 대중이 운집할 수 있는 공간에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소요들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했을 때, 우리는 3.1운동의 여파라는 거대한 얼개가 20-30년대 대중 소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거시적인 ‘배경’이 될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당시 대중 소요의 작동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건을 둘러싼 지엽적인 상황, 즉 행위자들의 계급적 조건이나 구체적 이해 관계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각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방식은 어떠한가? 이 같은 접근은 자칫 연구 대상을 지나치게 소재 중심적으로 만들어 상이한 사건들 안에 공유되던 공통의 주제, 이를테면 “다수자”와 그들의 싸움이 어떤 논리를 갖고 전개되며 이를 통해서 우리가 식민지 연구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억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칫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거시적인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그 행위의 내적 논리의 공통성 때문에 함께 이야기되지 않을 수 없는 다수의 사건들을 한권의 사례 연구로 묶어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특정한 구심없이 만들어진 다수의 비매개적 주체, 이 책에서 대중이라고 부르는 주체가 내적으로 공유하던 ‘행위의 동학’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기성의 논의틀에 대한 비판적 예각을 전제로 하여- 새롭게 개념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같은 시도의 과정에서 이 책은 먼저 일상의 개별자들이 대중이라는 하나의 다수자가 될 때, 그 상당부분이 의도치 않은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시작된다는 점에 가장 먼저 주목했다. 특히 당시 소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순사나 일본인을 상대로 만들어졌던 조선인 대중의 싸움을 보며 자칫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민족이나 계급 의식 같은 정형화된 -사회구조적- 관념이 실은 당시 대중 구성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려했다. 식민사회의 특수성에 의거해 우리가 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이 같은 구조인과론적 전제는 자칫 ‘사건’ 자체가 가진 내적 특이성, 즉 행위자들이 의도치 않게 만나 그들 간에 다양한(정서 비정서적) 촉발을 주고 받고, 그 위에서 특수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사건’이라는 것, 이것이 당시 대중 소요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의도를 넘어선 우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발적 마주침 앞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선택 혹은 결단이라는 이질적 요소 간의 상호 마주침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대중적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발적) 마주침이 대중 구성의 시작을 설명하는 개념에 가깝다고 한다면, 모방과 적대는 그렇게 시작된 대중의 규모가 커지고 확산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던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개념틀이었다. 여기서 당시 식민당국과 지식인 사회가 무수하게 운집한 군중을 조선인들의 “구경꾼 심리”라고 평가절하했던 것에 대해, 이 책은 무언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이 몰려든 사람들이 향하는 것을 ‘똑같이’ 보고자 만들어지던 대중의 수적 증식은 단순히 동일한 것의 반복(동일 숫자의 증식)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임계점에서 ‘차이’를 생산해내는 근원의 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의도치 않게 몰려든 구경꾼들이 순수한 모방에의 욕망에서 증식하다, 어느 순간 식민질서를 교란하는 폭도로 돌변하는 상황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서 모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소요 사례들에서 저자가 확인한 대중의 싸움의 특징 중 또 다른 중요한 하나는 그것이 절대 다원적 이해들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중의 싸움은 반드시 이쪽이나 저쪽 중 어느 한편으로 갈라진 이항의 구도를 전제하고 있었다. 이는 정치 엘리트(그것이 정치 행위자든 이념적 활동가나 지식인이든)를 정치학의 주요 주체로 두는 자유주의적 정치 철학이 “정치적인 것”의 작동을 존재론적으로든 당위론적으로든 다원성의 전제 위에서 논의하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대중이라는 주체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둘로 나뉜 진영의 어느 한편에 서서 다른 한편을 강렬하게 증오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열광(기쁨)이나 애도(슬픔)는 대중의 싸움에 정서(혹은 정동)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줄다리기와 순종의 죽음, 혹은 재만(在滿)동포의 수난을 보며 만들어진 대중이 상대를 향해 증오하고, 동지를 향해 보이던 사랑과 애도의 열광은 당시 지식인 사회가 양편의 계급적 동질성(과 화합)을 역설하며 이들을 계도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같은 적대가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면서 대중이 자기 폭력을 다음과 같은 내용성들 즉, 정치적 대의의 거부와 초헌법적 결단, 폭력의 공적 윤리성을 전제하던 대중 폭력에는 지식인과 초월적 국가(식민)권력이 유효하게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중의 이 같은 싸움에 대해 우리는 과연 ‘정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정치라고 부르게 된다면, 정치는 관념보다는 정서에, 사회 구조적 힘보다는 행위자들 간의 우발적 마주침과 그 선택에 열려있는 운동이 된다. 또한 여러 다양한 생각의 공존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편과 저편 간의 적의를 동반한 싸움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정치와 전쟁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연장에 다름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정치를 이처럼 적대와 폭력, 감성과 실천의 관점으로 접근할 경우, 우리가 1920-30년대 식민공간에서 보았던 다양한 대중 소요들은 그것이 특정 세력과의 싸움을 전제로 한 대중의 집합 행동인 한에서, 분명히 ‘대중 정치’라는 명명 위에서 불릴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걸출한 반(反)자유주의적인 정치철학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걸출한 이름들이 그 자체로 ‘정치’를 어떻게 봐야하는가에 대한 당위적 답을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문제는 열려있다. 100여년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이 대중의 소란과 매우 유사해보이는 현상이 촛불과 팬덤, 혐오과 열광의 대중을 통해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당대의 지식인 사회가 이 대중에 대해 가졌던 ‘동경’이나 ‘경멸’이 (정당)민주주의의 위기를 외치는 이들과 반대로 이에 각을 세우고 대중주의의 혁명성을 여전히 신뢰하는 논의들과 공존하는 모습을 우리는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의 소란, 그리고 대중의 반란(권력과 질서에 대한 반란이자 지배적 인식틀에 대한 반란)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