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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⑤] 남해는 고대 한‧일 사이의 경계였을까? 통로였을까?: 다양한 세력들의 다원적인 해양 네트워크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2.02 BoardLang.text_hits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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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1월(통권 57호)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남해는 고대 한‧일 사이의 경계였을까? 통로였을까?

- 다양한 세력들의 다원적인 해양 네트워크 -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우리가 남해라고 부르는 바다가 놓여 있다. 한국 부산과 일본 쓰시마 사이 바다의 폭은 50km 남짓에 불과하지만, 이 바다를 건너려면 엄격한 절차에 따라, 엄연히 존재하는 ‘경계’를 건너야 한다. 한국과 일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계는 양국 사이의 실질적 국경선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고대에는 어떠하였을까?
 
3세기 동아시아의 사정을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에는 삼한의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고 나오고, 구야한국(김해)에서 바다를 건너 쓰시마로 향한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도 왜가 바다 건너 신라를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 삼국시대에도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사이에는 일정한 ‘경계’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대의 ‘경계’ 인식과 지금의 ‘경계’ 인식 사이에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중첩되어 있다. 신라 중‧하대부터 고려, 조선, 일제시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던 국가들은 일본의 정치체들과 여러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임진왜란’과 일제시기의 경험은 현재 ‘민족(nation)’의 경계 인식을 굳히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해라는 바다는 현대 한국과 일본 사람의 관점에서 당연한 국경선이지만, 이러한 경계 인식은 기나긴 역사 흐름 속에서 축적된 결과물일 수 있다. 고대의 한국과 일본에는 그러한 축적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에서 본다면, 남해라는 바다를 ‘경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 의문이 남는다.1)
  
앞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을 다룬 연재에서는 남해를 ‘경계’로 보기보다 ‘다원적 이동과 교류의 매개체’로 보려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이번 연재에서는 남해의 해양 환경과 항로를 살펴보면서, 남해를 활용한 다양한 세력들의 다원적인 해양 네트워크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남해의 특성과 항로

 
남해는 대한민국의 남쪽에 있는 바다를 부르는 호칭이며, 통상적으로 전라남도 남해안에서 부산광역시 남해안까지의 바다를 지칭한다. 남해 연안의 조류는 빠른 편이며, 황해와 만나는 전남 해안의 조류가 가장 빠르다. 남해의 해안선도 황해와 마찬가지로 리아스식 해안이며, 크고 작은 만과 도서가 긴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남해는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를 비롯하여 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다도해라고도 부른다. 복잡한 해안선과 여러 섬의 존재는 외양의 파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므로, 자연적인 포구 발생에 유리한 지형이다.
  
다만, 복잡한 해안선과 빠른 조류라는 특징은 연안항해에 장점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남해에는 얕은 바다에 진흙 등이 쌓인 천퇴(淺堆), 해면 가까이에 있는 바위인 초(礁), 간조시에 드러나는 간출암(干出巖, 여) 등이 많다.2) 이러한 해양환경이 연안항해에 미친 영향은 근현대 연안수로지를 통해 일부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남해에는 크고 작은 섬과 만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수도(水道)가 설정되어 있고, 해당 수도마다 초, 여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위험요소가 산재하여 있으며, 조류의 변화와 해양 기상 등 항해에 유의해야 할 요소들이 다수 존재하였다.3)
 
섬과 만이 많은 복잡한 해안에서의 연안 항해는 먼바다에서의 항해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육지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색한 일이지만, 항해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자연 조건에 도전한 고대인은 각 지역의 해상 세력에게 관련 정보와 경험을 얻는 방식으로 위험에 대처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연안항로를 활용하는 항해자들은 여러 기항지를 거치며 항해하는 네트워크 형태의 연안항해 방식을 따랐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육상 지표물을 보며 항해하는 남해연안항로의 범위에는 남해 동부 연안의 부산, 거제, 남해 외양도서에서 일본의 쓰시마로 향하는 대한해협이 포함된다. 대한해협 양안은 날씨 좋은 날에 양쪽 해안의 지표물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 쓰시마에는 해발 400~600m에 달하는 산이 많고, 부산과 거제에도 해발 200~500m 높이의 산이 있으며, 남해 먼바다의 섬들도 해발 200~300m 높이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상에서 육상 지표물을 볼 수 있는 거리는 ‘시인거리(지리학적 광달거리)’라고 부르는데, 이를 계산하는 식에서 중요한 변수는 관측자와 관측물의 높이이다.4) 높이에 비례하여 시인거리는 늘어난다. 즉, 남해 동부의 쓰시마와 접하는 해역은 부산 영도의 태종대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구부터 거제, 남해 외양의 도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쓰시마와 시인거리 내에 위치한다.
 
 
[도1] 남해 연안 시인거리 지도5)
 

 
따라서 고대에 활용한 남해연안항로는 남해 연안의 섬, 반도, 만, 큰 강 하구 등을 거치는 연안항로에 더하여, 남해 먼바다의 섬이나 거제도, 낙동강 하구, 부산 등지에서 쓰시마를 보며 대한해협을 건너, 이키, 규슈로 이어지는 경로까지 상정된다. 이러한 항로는 신석기, 청동기시대부터 두 지역 사이의 바다를 통한 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역사시대 이후, 가야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영산강 유역 등의 각종 지역 세력과 백제, 신라 등이 왜와 교섭, 교류하는 통로도 역시 주로 남해연안항로를 활용하였다.
  
이 외에 학계 일각에서는 고대부터 남해사단항로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남해사단항로는 남해 서남부 연안 지역인 고흥, 해남 등지에서 남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일본 규슈 서북부의 고토열도를 지나 아리아케해(有明海) 연안으로 연결되는 항로를 말한다. 남해 연안에서 고토열도에 이르는 넓은 바다에서 모두 관측 가능한 해발 1,947m의 한라산이 있으므로, 남해사단항로는 이론적으로 시인거리 내에서의 항해가 가능한 항로였다. 다만, 시인거리는 기상 조건이 모두 양호한 경우에 국한하여 이론적으로 계산한 결과이므로, 나침반이나 해도의 발달이 없는 상태에서, 200km에 가까운 원양을 항해하는 것은 날씨 변화에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 따라서 사단항로는 간헐적이고 모험적인 항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6)
 
 
[도2] 남해 항로 개념도7)
 
 
 

3. 남해의 터줏대감, 가야 

 
남해의 해양환경은 자연적인 포구 발생과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남해연안항로 활용에 적합하였지만, 조류, 조수간만의 차, 항해 위험요소 등으로 인하여 지역 해상세력의 도움 없이 항해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남해 연안 지역에 자리 잡고 성장하던 각 포구의 해상세력은 자연스럽게 남해 연안에서 기득권을 가질 수 있었다.
  
문헌 기록에 확인되는 남해 연안의 세력으로는 우선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포상팔국 및 가야(변한) 소국들이 있는데, 김해 구야국(가락국, 금관가야)을 비롯하여, 함안 안라국(아라가야), 고성 고자국(소가야), 사천 사물국 등에 해당한다. 특히 김해 구야국은 고고학적으로도 다른 남해 연안의 정치체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부터 포구, 창고, 고분 등을 조성한 정치체로 판단되며, 쓰시마와 이키를 거쳐 왜로 건너가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주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가야의 여러 나라가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김해 가락국, 함안 안라국, 고성 고자국 등이 남해 연안 지역에서 성장한 가야 세력이었다. 남해 연안에 자리 잡은 가야 나라들은 남해연안항로를 따라 서쪽으로 영산강 유역이나 백제, 더 나아가 낙랑‧대방군이나 중원 왕조, 북방 세력과도 해양을 통한 교류를 하였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왜와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특히 5세기 무렵부터는 함안 안라국, 고성 고자국이 남해 연안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왜의 여러 지역과 긴밀한 해양 교류를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해 연안에는 다양한 왜 계통 유물이 유입되었고, 거제나 고성 등지에는 왜 계통의 고분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산강 유역에 5세기 말~6세기 초 사이의 전방후원형 고분 조성으로 이어졌다. 이와 동시에, 가야 여러 나라의 문화는 규슈를 비롯하여 세토 내해 연안의 여러 지역과 왜의 중심 지역이었던 긴키(近畿)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서기》에는 김해 가락국, 함안 안라국, 고령 가라국 등과 왜 왕권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기록되었다. 물론, 《일본서기》는 8세기 일본 천황 중심의 고대국가를 완성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일본의 고대 가야 지역 지배(‘임나일본부’)라는 허구를 마치 사실처럼 왜곡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현재 한일 학계의 일반적인 연구에 따라, 이러한 윤색을 걷어내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왜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가야 여러 나라의 해양 활동이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일본서기》에는 백제, 가야, 신라 등지에서 왜로 이주한 ‘도왜인’이나, 왜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수 담겨있다. 또는 왜인과 백제인, 가야인 등의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혼혈인’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의 다원적인 해양 활동은 대체로 가야가 세력을 유지하는 6세기 중후반까지 문헌에 확인된다. 6세기 후반 이후에는 가야의 여러 나라가 모두 멸망하는 동시에, 백제와 신라의 대립이 격화하여, 이전과 사뭇 다른 국제질서로 변화하게 된다.8)
 
가야의 여러 나라, 특히 남해 연안에 있던 나라들은 남해를 통해 왜와 빈번히 교섭, 교류하면서 성장하였다. 또한 백제, 영산강 유역 정치체 등은 왜에 도달하기 위하여 가야 지역을 거쳐야 하였으므로, 가야 여러 나라는 왜와의 남해연안항로 기항지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빈번한 관계는 가야계 사람이나 문화의 왜 전파, 왜계 사람이나 문화의 가야 전파라는 다원적인 해양 교류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4. 남해를 거쳐 왜로 향한다, 백제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북쪽의 고구려와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왜와 긴밀히 연결하면서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꾀하였다. 그런데 백제에서 왜 왕권의 중심지인 긴키 지역까지는 남해를 거치는 장거리의 연안항로를 활용하여야 하였다. 4세기 후반 백제가 처음 왜와 통교하는 과정에서는 가야의 일원인 창원 탁순국이 적극적인 중개 역할에 나섰다. 이후 함안 안라국, 고성 고자국의 성장이라는 정세 변화에 따라, 백제는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해 연안의 가야 세력을 경유하여 왜까지 이어지는 장거리의 연안항로를 ‘네트워크’ 형태로 운용하였다.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왜까지 이어지는 장거리의 연안항로는 4세기 초까지 낙랑‧대방군과 중원 왕조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여러 기항지를 연계한 네트워크 형태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4세기 초 서진 왕조의 멸망, 낙랑‧대방군의 소멸 등으로 인하여,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는 중심을 잃고 경색되었다.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중국 강남지역의 동진과 빈번한 교섭, 교류를 시작하면서, 이를 배경으로 하여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재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한반도 황해 연안이나 영산강 유역의 세력들을 ‘세력권’ 내에 편입하고, ‘점’ 단위로 위세품을 내려주어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기항지들을 연결하였고, 가야의 여러 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다.
  
4~5세기의 백제 주도 연안항로 네트워크는 남해 연안의 영산강 유역 정치체부터 가야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의 다원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형태의 질서였다. 특정 국가가 모든 기항지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5세기 후반 무렵, 가야의 여러 나라 가운데 고령 가라국이 세력을 키우면서, 점차 남해 연안지역이나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이와 동시에 6세기로 넘어가면서, 신라가 점차 낙동강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창녕, 부산, 김해, 창원, 함안 등 신라에 가까운 순서로 가야 지역을 차지해나갔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남해를 거쳐 왜까지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활용하던 백제에게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였다.
  
백제는 5세기 중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의 연안 세력을 중심으로 위세품을 주고 간접지배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고, 6세기 전반에는 전남 동부 연안까지 진출하여, 이어지는 섬진강 유역 확보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섬진강 중상류의 남원, 하류의 하동 일대까지 확보하였고, 더 나아가 남해도까지 차지하였다. 6세기 이후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왜의 항로에서 중요한 요충지이자, 일종의 중간 지점으로 남해도가 종종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고령 가라국의 성장, 신라의 서진에 따른 대응으로, 점차 동진하여 남해도까지 확보하고, 이곳에서 남해의 외양 도서를 지나 쓰시마, 이키를 거쳐 왜로 향하는 변형된 남해연안항로를 활용하였다. 6세기에 보이는 백제의 대응와 왜까지 연결되는 남해연안항로는 이후 7세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9)
 
 

5. 남해를 통해 철을 수입한다, 왜

 
‘왜’라는 국명은 일본 열도에 존재하던 단일한 국가로 흔히 오해된다. 하지만 고대 일본 열도에는 규슈와 혼슈 등의 여러 지역에 복수의 정치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지역 세력은 긴키 지역의 왜 왕권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일부는 《일본서기》등의 문헌 자료에 흔적을 남길 정도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왕권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 세력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은 한반도와의 해양 교류를 통한 철 자원 등의 문물 수입이었다. 이와 동시에 주로 한반도를 거쳐 들어오는 중국계, 한반도계 이주민은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왜 왕권과 각 지역 세력들은 남해를 거쳐 변한 혹은 가야의 여러 나라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왜 왕권이 긴키 지역부터 세토 내해의 연안 기항지 전체와 규슈 일대의 포구를 모두 장악하고, 남해 연안의 기항지까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주의 역사학에서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라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현재 일본학계에서 그러한 과거의 주장에 그대로 동조하는 경우는 없다. 왜 왕권은 늦게는 6세기 무렵까지 세토 내해의 연안이나 규슈 지역의 세력과 때때로 갈등하기도 하였고, 한반도 남부의 가야 여러 나라와 꾸준한 외교 활동을 통해 문물의 수입창구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왜 왕권은 남해를 통해 한반도와 연결되었으며, 일본 열도 내의 지역 세력들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남해를 통해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교류는 역시 연안항로 네트워크라는 다원적 질서로 이해될 수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백제와 왜 왕권 중심의 기존 이해를 탈피하여, 바다를 사이에 둔 양 지역 사이의 ‘해양 교류’를 ‘환해(環海)지역’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연안의 주요 기항지를 잇는 ‘해촌 네트워크’가 연안항로 활용에 필요한 정보, 물자 등을 제공하여 네트워크 형태로 연안항로가 활용되었다고 본다.10) 어쩌면, 한반도 남해 연안에 산재하는 왜계 고분 중에는 왜 왕권이나 지역 세력의 수장, 혹은 백제, 가야 등의 의도에 따라 연안항로의 기항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파견된 왜인의 흔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 왕권과 여러 지역 세력은 남해 항로의 안정적 운용이 다양한 물품과 문화의 수입과 직결되었고, 이러한 해양 교류는 자신 세력의 성장과 바로 연동되기 때문에, 남해를 통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와 각종 고고자료에 보이는 백제, 가야, 신라와 왜의 긴밀한 관계는 한반도 및 중국 계통의 물품과 문화 수입에 대한 왜의 수요와 관련되었다.
 
 

6. 남해를 둘러싼 충돌과 협력의 이중주, 신라

앞서 살펴본 나라들과 달리, 신라는 남해를 두고 충돌과 협력의 이중주를 연주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건국 이후부터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여러 차례 왜가 바다를 건너 신라를 침입하였다. 왜는 주로 여름 4~6월에 신라로 건너와 공격하고,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기를 반복하였다. 왜는 여름철 계절풍을 활용하여 일본 열도의 서부 일대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남해 동부 연안이나 울산, 포항 일대로 침입해온 것으로 생각되며, 다분히 해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왜의 침입 가운데 일부는 신라 수도였던 경주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고, 어떤 기록에는 ‘왜국’, ‘왜왕’ 등의 표현도 있어서, 왜의 신라 침입 기록 중에 일부는 왜 왕권 혹은 특정 지역세력이 주도한 공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이에 대비하여, 동남해안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왜의 배가 정박한 연안에서 직접 싸우거나, 복병이나 화공을 시행하는 등 다양한 방어전을 치렀다. 이와 더불어, 적의 본진이 남해 건너에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바다를 건너 쓰시마 등의 본거지를 치려는 계획도 2차례나 의논하였다.11)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특징은 신라와 왜가 서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가 적의 본진인 쓰시마를 공격하려고 논의한 사실은 신라의 동남해안과 왜의 쓰시마 사이에 놓인 바다를 일정한 ‘경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적대적 인식과 ‘경계’ 인식은 박제상 관련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간 눌지마립간의 동생을 구출해온 신라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왜에 갔던 미사흔(미해)을 구출하기 위하여, 본인의 목숨을 희생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바다 가운데 섬(山島), 즉, 쓰시마에서 미사흔만 배에 태워 신라로 귀환시켰다고 나온다. 신라와 왜 사이에서는 쓰시마를 접경 지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너머의 바다는 양국 사이의 ‘경계’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와 왜 사이에는 남해를 사이에 둔 충돌 기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도 왜국, 왜왕과 우호를 통하기 위한 사신의 교환 기록이 종종 확인된다.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 측 기록에도 다양한 이유에서 왜로 파견된 신라 사신, 혹은 왜에서 신라로 파견된 사신들이 기록되었다. 물론, 《일본서기》는 신라 적대인식, 천황 위주의 세계관 등으로 과장, 윤색된 기록이므로, 신라 관련 기록에도 이러한 윤색에 주의해야 한다. 다만, 신라는 고구려 위협에 따른 백제와의 협력이나, 가야로의 진출 과정에서 왜와의 협력이 필요한 때가 있었고, 7세기 백제의 위협에 따라 왜와의 외교가 필요한 순간도 있었다. 
  
신라는 큰 틀에서 왜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왜에서도 백제, 가야와의 우호관계 속에서 신라를 적대적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충돌 속에서도 양자의 필요에 따라서 협력을 위한 인적 이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있었다. 신라와 왜 사이는 부산이나 낙동강 하구에서 최단 거리로 쓰시마로 건너간 이후, 이키와 북부 규슈를 거치는 전형적인 연안항로로 연결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신라 유적에서 왜 계통의 문화나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숫자는 적지만 일본 내에서 신라계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신라와 왜는 남해를 통하여 충돌과 협력을 반복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7. 나가며
 
남해라는 바다는 대략 1만 년 전, 후빙기의 도래와 해수면의 상승을 기점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남해라는 지리적 시간은 만여 년을 변함없이 흘러왔지만,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적 시간은 빠르게 변화하였다. 
  
현재의 대한민국, 일본국 사람들은 남해를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진 ‘경계’로 인식하는 듯하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도 남해가 지금처럼 ‘경계’로 인식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가야는 남해 연안의 여러 포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터줏대감으로, 왜로 건너가는 남해연안항로의 중요한 기항지에서 활발한 해양 교섭과 교류를 이어갔다. 백제도 고구려와의 대립이라는 국가적 목표 속에서 남해를 통하여 왜까지 연결되었다. 이것은 가야의 여러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장거리의 연안항로를 네트워크 형태로 운용하면서 거둔 결과였다. 다만, 백제는 가야의 성장과 신라의 서진이라는 시대 변화 속에서, 점차 섬진강 하구와 남해도까지 진출하여, 남해 외양도서에서 쓰시마로 향하는 경로를 활용하였다. 왜의 왕권과 각 지역세력은 철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창구로서, 남해를 건너 한반도 남부 일대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신라는 남해 너머의 왜와 충돌하는 일이 잦았으나,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필요한 경우 협력을 위해 남해를 건너는 일도 있었다. 본론에서 모두 다루지 못하였지만,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들은 백제 ‘세력권’에 포함되어 대외교섭의 독자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왜의 여러 지역과 독자적이고 다원적인 해양 교류를 한동안 이어나갔다.
  
대체로 6세기 중반까지는 가야 여러 나라,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 백제 왕권, 왜 왕권, 왜의 지역세력 등 다양한 주체의 다원적 질서가 유지되었다. 다양한 주체의 다원적인 관계는 남해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특정 국가가 연안 전체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복수의 세력이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된 연안항로를 통해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다원적인 질서는 6세기 중반 이후 변화를 맞이하였다.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면서,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가야를 압박하였고, 김해 가락국이나 고령 가라국은 모두 신라에 멸망하였으며, 백제는 섬진강 하류와 남해도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남해 연안을 양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연안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강화해나갔다.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서도 왜 왕권이 점차 성장하면서 여러 지역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남해를 사이에 둔 양 지역은 중앙집권적 영역지배를 추구하는 국가12) 사이의 ‘경계’로 서서히 변화하였다.
 
현대인들에게 남해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변함없는 ‘경계’처럼 여겨지지만, 고대를 살았던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은 남해를 통하여 상호 소통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을 비롯하여 다양한 왜계 고분이나 문화가 남해 연안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한반도 계통의 문화도 일본 열도 각지에 확산되었다. 게다가 두 지역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오고 가는 사람의 이동도 문헌과 고고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완성되어 일원화된 연안 지배체제를 갖추기 전까지, 남해 연안의 여러 세력은 서로 다원적인 소통의 창구로서 남해를 활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사이의 남해라는 바다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민족(nation)’ 사이의 ‘경계’ 인식만으로 살펴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대의 남해는 두 지역 사이의 활발한 해양 교섭과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였다.
 
 
 
<미주>
 
1) 고대 남해의 ‘경계’ 인식에 관한 이번 연재의 전반적인 구상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여 수정한 것이다(임동민, 2024, 「《일본서기》와 고대 동아시아의 ‘경계’ 허물기」, 《역사비평》147).
2) 국립해양조사원, 2018, 《우리바다 우리해양지명 2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제주도》, 11~72쪽 ; 국립해양조사원, 2018, 《우리바다 우리해양지명 3 전라북도, 전라남도》.
3)  海軍本部水路官室, 1952, 《韓國沿岸水路誌 第1卷 東岸 南岸》, 海軍本部水路官室, 229쪽.
4) 시인거리(視認距離)는 지리학적 광달거리라고도 하며, 아래의 공식에 따라 계산되는데, 지표물과 관측자의 높이에 비례하나 기상조건에 따른 변수가 많다. 
D=2.074(√H+√h) D:지리학적 광달거리(NM(해리)), H:해발고도(m), h:관측자 해발고도(m))
5) 시인거리는 태종대(해발250m), 거제도 가라산(해발580m), 홍도(해발300m), 쓰시마 미타케(해발479m), 야타테야마(해발648m) 등을 기준으로 계산하였다. 거제도 가라산의 시인거리는 54NM(100.1km)이고, 쓰시마 야다테 시인거리는 56.9NM(105.4km)이다.
6)  이상의 남해 항로에 관한 연구사와 논쟁의 정리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되며(정진술, 2009, 《한국의 고대 해상교통로》, 한국해양전략연구소 ; 김낙중, 2016, 「서남해안 일대의 백제 해상교통로와 기항지 검토」, 《백제학보》16 ; 박재용, 2017, 「백제의 대왜교섭과 항로-5∼6세기를 중심으로」, 《백제학보》19), 관련 서술은 다음의 논문을 대폭 수정, 요약한 것이다(임동민, 2023, 「서남해안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통해 본 백제 한성기 가야와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109 ; 2024, 「《일본서기》 계체기 ‘다사진’ 기록을 중심으로 본 6세기 백제-왜 항로」, 《《일본서기》 웅략기~흠명기를 통해 본 동아시아 국제관계》, 한국역사연구회 제170회 공동연구발표회 발표자료집).
7) 임동민, 《백제 한성기 해양 네트워크 연구》,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18쪽 도면을 토대로, 남해의 항로를 수정, 보완하였다. 항로를 표시한 선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도식적으로 그렸으며, 세부적인 항로는 사용 주체, 시점, 배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8) 이상의 가야 소국과 포구에 관한 설명은 다음의 논문이 참고되며(임동민, 2023, 「서남해안 연안항로 네트워크와 가야의 포구」, 《선사와 고대》73), 《일본서기》와 고대 한일관계 서술은 다음의 논문을 수정, 요약한 것이다(임동민, 2024, 「《일본서기》와 고대 동아시아의 ‘경계’ 허물기」, 《역사비평》147).
9) 이상의 서술은 다음의 논문을 대폭 수정, 요약한 것이다(임동민, 2023, 「서남해안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통해 본 백제 한성기 가야와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109 ; 2024, 「《일본서기》 계체기 ‘다사진’ 기록을 중심으로 본 6세기 백제-왜 항로」, 《《일본서기》 웅략기~흠명기를 통해 본 동아시아 국제관계》, 한국역사연구회 제170회 공동연구발표회 발표자료집).
10) 高田貫太, 김도영 옮김, 2019, 《한반도에서 바라본 고대 일본》, 진인진.
11) 바다 건너 왜의 본거지에 대한 공격 시도는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유례 12년(295) 기사에 보이고, 쓰시마 공격 시도는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실성 7년(408)에 보인다. 그 외에 왜의 침입 기록은 《삼국사기》권1~권3의 신라본기 기록에 다수 확인된다.
12) 이와 관련하여, 초기국가의 중층적 지배 구조가 6세기 중엽 이후 중앙집권적 구조의 국가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는 최근의 견해가 참고된다(박대재, 2023, 「한국의 ‘고대’와 초기국가」, 《한국고대사연구》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