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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경 톺아보기③] 신라왕경 톺아보기③: 왕경인의 먹거리_이동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2.02 BoardLang.text_hits 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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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1월(통권 57호)
[신라왕경 톺아보기③] 신라왕경 톺아보기③: 왕경인의 먹거리이동주(고대사분과)먹는 방송, 소위 '먹방'이 미디어 콘텐츠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각양각색의 음식을 탐닉하거나 이색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방송이 눈에 띈다. 일부 프로그램은 오지에서 직접 재료를 채집해 요리를 하고, 때로는 맛의 우열을 가리는 대결을 펼친다. 음식은 이제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생존 수단을 넘어 사람들 간 소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장으로 확장된 모양새다.
사실, 음식은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며 발전시킨 문명사의 중심에 있었다. 농업과 가축 사육이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음식은 각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에 따라 최적화된 방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음식은 생존의 핵심 문제였다. 특히 날씨에 따른 식자재 변질 문제는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신라 왕경에서는 소금을 활용해 식자재를 보관했고, 이는 발효라는 독특한 식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오늘날 우리는 냉장고 덕분에 식재료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여름에도 시원한 얼음을 손쉽게 즐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이런 저장 기술이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왕경은 국가의 중심지로, 지방에서 공납된 다양한 물자가 집결했다. 자료에 따르면, 강원도 고성에서 공납된 식해가 왕경에서 소비되었고, 때로는 술게임으로 흥을 돋우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흔적을 바탕으로 왕경인들이 즐겼던 음식 문화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탐구를 넘어 현대 음식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조각난 흔적들을 조합해 가면서 왕경인들이 즐겨 먹었던 먹거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점심은 아무나 먹나“오늘 점심 뭐 먹을까?” 이는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 해본 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으레 “그냥 아무거나” 혹은 “대충 때우지”라는 말이 돌아온다. 이러한 대화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식사가 단순한 허기 해결이나 시간 절약의 차원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신라 사람들이 들었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냥’은 세상에서 가장 불성실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부사가 된다. 고대사회에서 점심은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점심이라는 용어는 중국 당나라에서부터 확인된다. 이때 점심은 정삼(鄭傪)이라는 관리의 부인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 간단히 요기를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1)
새벽이라는 시간대가 이채롭다. 그런데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 이를 좀더 부연하여 경사(京師)에 양곡이 귀하여 상찬(常饌)을 고쳐 소식(小食)이라 했다.” 하였고, 당나라 정삼(鄭傪)이 강회(江淮)의 유후(留後)가 되자, 부인이 말하기를 “당신은 점심(點心)을 드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후세에는 이른 새벽에 소식(小食)하는 것을 점심으로 삼았다고 하였다.2) 중국에서는 가볍게 먹는다는 의미로 점심을 사용한 것 같다. 이에 반해 신라에서는 점심을 낮에 먹는 음식이라 해서 주선(晝饍)이라 불렀다. 신라인들에게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섭취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행위였으며, 더 나아가 공동체의 질서와 문화가 담긴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신라인들이 점심을 먹은 기록은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A-1: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3)
A-2: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4) A-3: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지금의 명주(溟州) 태수(太守)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5) A-4: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6)
A-1에 따르면, 김춘추는 백제 멸망 이전에는 하루 세 끼를 섭취하며, 한 끼에 쌀 한 말과 꿩 세 마리를 소비했다고 한다. 백제 멸망 이후 점심을 생략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섭취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김춘추가 대식가였음을 강조하면서도, 고대 사회에서의 당시 식사 문화와 신분 간 격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A-2는 신문왕이 태자 시절 이견대에서 신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대나무를 얻은 후 다음날 기림사 서쪽 냇가에서 점심을 한 기록이다. A-3, 4은 강릉 태수로 부임한 순정공이 현재의 강원도 임지로 이동하는 와중에 점심을 한 기록이다. 신라 시대 점심은 대부분 간단한 허기 정도를 달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루에 아침 혹은 아침, 저녁을 모두 챙겨 먹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은 항상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안정적인 식사를 보장받는 것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식사의 빈도와 양은 곧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문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라의 고위층들이었고, 이들은 풍족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평민들은 기본적인 식사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서기 79년 백호관 회의에서는 여러 유학자들이 모여 계급별 하루 식사량을 제한하였다. 즉 황제는 4번, 제후는 3번, 관리는 2번, 평민은 필요할 때 먹으면 된다고 규정하였다. 비록 선언에 그치고 말았지만 유학적 통치이념으로 무장된 유학자들이 도출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분제사회에서 식사횟수를 통해 위계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이었던 셈이다.
중국 한대의 사례를 보면,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에 그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분찬(分餐)이라 하여 각 개인에게 따로 상을 차려주는 방식을 사용했고, 마을 제사나 친밀한 사람들 간의 연회에서는 공안(共案)이라 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심지어 자리 배치에도 엄격한 규칙이 존재했다. 자리 배치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식탁을 중심으로 북쪽이 상석, 남쪽이 말석이 된다. 가까운 지인들과 식사를 할때는 신분이 낮은자, 어린 사람, 연회 주최자는 동쪽, 신분이 높은 자, 연장자, 스승이나 빈객은 서쪽에 앉게 된다. 그리고 네명이 모일 경우 서→북→남→동쪽 순으로 앉아 위계를 정한다. 나란히 앉을 경우 오른쪽이 상석이 된다.7) 신라의 경우 세세한 규정을 알기 어렵지만,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중국과 크게 달랐다고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식사는 대충 때우는 게 아니라 예의범절로 점철된 하나의 의식인 셈이다.
신라의 경우 세부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인들에게 식사는 대충 때우는 것이 아니라 예의와 질서를 지키며 함께하는 중요한 절차였다. 또한 식탁 위의 질서와 규범은 신분 사회였던 당시 공동체 내에서 역할과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목간에 보이는 먹거리월지(안압지)는 경주의 왕궁 추정지인 월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원지(苑池)이다. 《三國史記》에는 문무왕 14년(674)에 원지가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여기서는 33,000점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호화로운 궁정생활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1. 신라 월지 전경(@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그 가운에 목간은 당시 신라인들의 육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문헌의 경우 후대인들의 정치적인 목적 아래 윤색될 가능성이 있지만, 목간의 경우 대부분 꼬리표라는 점에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목간은 연호와 간지가 확인되어 목간들은 경덕왕 10년(751)에서 혜공왕 9년(774)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8) 목간의 서식은 <년월일+作+동물명+가공품명+용기 기타>으로 되어 있었고, 동물을 가공한 식품을 담은 용기에 부착된 부찰(附札)이었음이 지적되었다.9) 그중 몇 가지 목간을 보자.
그림 2. 월지 출토 목간들. 목간에 기록된 내용은 단순한 물품 기록을 넘어, 신라의 사회 구조와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85호 목간은 발견 초기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후 적외선 촬영을 통해 명확히 판독되면서, 이 목간이 식품 꼬리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185호 목간은 「∨ □遣急使條高城醘缶」 및 「∨ 辛番洗宅□□瓮一品仲上」 으로 판독되며, 여기서 “신(辛)”은 “새로운(新)”과 같은 뜻으로, 추수한 신물(新物)을 의미하거나, ‘辛(新物)을 바친다’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해석은 제사나 의례와 관련된 문구로 신번(辛番)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185호 목간은 제수용 식품에 부착된 꼬리표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瓮一品仲上”에서 옹(瓮)과 목간의 반대면에 기록된 부(缶)는 용기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해석되며, 앞면과 뒷면에 서로 다른 내용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는 앞면을 먼저 사용한 뒤 뒷면을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고성해(高城醘)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고성해에서 언급된 “식해(食醘)”는 쌀밥에 생선과 소금을 섞어 발효시킨 음식으로, 지금도 강원도 고성의 특산품인 가자미 식해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이 목간이 가자미 식해에 부착된 꼬리표라면, 신라 왕경인들이 강원도 고성에서 들여온 식해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188호 목간은 「∨ 丙午年四月」 과 「∨ 加火魚助史三[入?]」 으로 판독되며, 병오년 4월에 가화어(加火魚), 즉 가오리 젓갈을 담은 항아리의 부찰임이 확인된다. 여기서 가화어는 훈차를 통해 가오리를 의미하며, 조사(助史)는 젓을 나타내는 용어로 해석된다. 이를 통해 동해안에서 입수한 가오리를 염장하여 저장한 정황이 드러난다.
194호 목간은 「∨ 甲辰三月三日冶犭五藏」 으로 판독되며, 갑진년 3월 3일에 짐승(犭)의 내장을 염장한 항아리에 부착된 부찰이다. 여기서 짐승은 족제비, 담비, 개, 돼지, 사슴 또는 노루 등 다양한 동물이 될 수 있다. 짐승의 내장은 부드러운 육질로 인해 고대인들에게 선호되었으며, 공자의 석전에 내장이 달린 노루를 제수로 사용한 점을 고려하면, 제의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경인들은 장기간 저장을 위해 소금을 사용하였다. 소금은 인간의 식문화와 건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필수적인 조미료이자 보존제이다. 소금은 음식의 기본적인 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단맛, 신맛, 쓴맛, 감칠맛 등 다양한 맛을 조화롭게 만들어 음식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역할도 한다. 특히 소량의 소금은 단맛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쓴맛을 억제하여 음식의 전반적인 맛을 균형 있게 조정하기도 한다. 그림 3. 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출토된 '醎(함)' 명이 새겨진 유기(鍮器). 왕경인들이 식사 중 유기에 소금을 담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소금은 기본적인 조미료로, 음식의 맛을 돋우는 데 적합한 역할을 했다.
한편 월지에서는 왕경인이 실제 사용했던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아래 <그림 4>을 살펴보면, 숟가락의 폭이 좁은 것과 넓은 것이 구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해당 숟가락들은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자세히 관찰하면, 폭이 좁은 것과 넓은 것을 각각 종이로 묶어 놓고, 이를 다시 실로 한데 묶어 10벌씩 세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의 식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림 4. 월지 출토 숟가락(@국립경주박물관) 및 정창원 소장 숟가락(@日本 正倉院)
폭이 좁은 숟가락은 밥을 뜨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폭이 넓은 숟가락은 국물을 떠먹는 용도였을 것이다. 신라의 귀족들이 식사 과정에서 밥 숟가락과 국 숟가락을 구분하여 사용했다는 점은 당시 식사 예절과 격식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귀족들이 밥을 먹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우선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은 뒤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이어 국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는 방식이 연상된다. 당시 식문화와 사회적 규범을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음주가무에 심취한 왕경인들이 물건은 목재로 제작되었다. 출토 직후 보존 처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실로 이관되었으며, 목제 인장과 함께 보존 처리가 진행되었으나, 오븐레인지 타이머 조작 실수로 인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히도 당시 촬영된 사진과 실측 도면이 남아 있어 복원품 제작이 가능했다.
주령(酒令)은 술자리에서의 규칙을 의미한다. 예컨대 연장자가 다 마실 때까지 동석한 젊은이는 술을 마시면 안된다. 이러한 규칙을 어기게 되면 무례한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조정에서의 술자리는 주로 감독이 있었다.10) 요즘으로 치면 사회자라고하면 적당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감독에 의해 주령구가 사용되어 술자리의 흥을 돋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림 5. 월지 출토 주령구 모형 및 전개도(@국립경주박물관)
주령구의 기본 원리는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것이며, 승자는 영광을 누리고 패자는 벌칙을 받게 되는 구조를 가진다. 주령구는 14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게임이 승자와 패자의 이분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승자와 관련된 면이 7면, 패자와 관련된 면이 7면으로 균등하게 나뉘었을 가능성이 높다.11) 술 게임을 하는 이유는 술을 덜 마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령구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해석을 두고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예컨대 음진대소(飮盡大笑)나 양잔즉방(兩盞卽放), 곡비즉진(曲臂卽盡) 등은 대부분 술을 모두 마시며 지정된 행위를 수행하도록 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양잔즉방(兩盞卽放)"은 "두 잔의 술을 비워라"라는 의미로, 승자의 명령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음진대소(飮盡大笑)"는 "술을 모두 마시고 크게 웃어라"라는 뜻으로, 패자가 수행해야 할 벌칙으로 해석될 수 있다.12)
한편 함안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가야2639호에는 「羅兮(落)及伐尺幷作前(瓷)酒四斗瓮」라는 명문이 확인된다. “나혜(락) 급벌척이 함께 만든 전(자)주 네 말이 든 항아리(瓮)”란 뜻으로 해석된다. 급벌척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외위(外位)여서 주목된다. 여기서 술이름이 나오며 네말들이 항아리에 담아 보낼 때 부착한 목간으로 여겨진다. 또한 월성해자 신출토 4호 목간에는 2행에 「米十斗酒作米四斗幷十四斗瓮此本× 라 적혀있다. 쌀 10말과 술 만드는 쌀 4두. 함께 14말을 항아리에 담았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때 술 만드는 쌀이 별도로 있음이 주목된다. 고대 일본에서도 술과 관련된 기록이 목간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평성경 일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尾張国中嶋郡石作郷・酒米五斗九月廿七日”라고 적혀 있는데, 술을 빚는 용도로 사용된 쌀인 주미(酒米)가 확인된다. 고대 일본에서 술 빚는 쌀은 주로 적미(赤米)가 사용되었는데, 붉거나 보라색을 띠는 독특한 색상이 특징이다.
<그림 6>은 월지에서 출토된 항아리로, 신라 시대 술을 담거나 운반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항아리는 액체를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입구가 넓게 만들어졌으며, 동체 부분은 나팔형으로 불룩하게 확장되어 액체 보관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토기는 월지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술과 같은 액체를 담아 인력을 통해 운반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항아리 목 부분에는 “사두오도(四斗五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토기를 소성한 뒤 날카로운 금속기로 새겼는데, 소비지에 도착한 후 물품을 담는 과정에서 용량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사두오도”는 “네 말 다섯 되”라는 용량을 의미하며, 토기에 담긴 액체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6. 월지 출토 명문토기(@국립경주박물관)와 술 항아리를 나르는 남자(@국립중앙박물관) 월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액체류를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인력으로 하나씩 옮겼을 개연성이 높다.
왕경인들은 매년 가을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부(部)의 큰 뜰에 모여 매일 밤 10시까지 길쌈을 하였다. 길쌈 후에는 작업 성과를 비교하여 승패를 가렸고, 진 쪽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이긴 쪽을 대접하며 사례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무와 다양한 놀이가 어우러졌는데, 이를 “가배”라 불렀다. 왕경인들은 지방 주민들에 비해 특화된 생활을 영위하며 의식주에서 더 많은 혜택을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풍족한 생활이 모두에게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왕경인들 중에도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었으며, 일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매각하기도 했다.
오늘날 음식물은 남아돌고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라는 말까지 생겨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든다. 음식이 풍족한 현실에 감사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고대인을 생각할 때 퍽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왕경인들의 물자관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주>
미주
1) 《林下筆記》 卷34, 華東玉糝編 點心; 世俗. 以小食爲點心. 不知所始. 唐鄭傪. 爲江淮留後. 家人. 備夫人晨饌. 夫人顧其弟曰. 汝籹未畢. 我未及餐. 爾且可點心. 其弟擧甌已罄. 俄而女僕請飯庫鑰匙備夫人點心. 傪詬曰. 適已點心. 今何得又請. 是唐時已有此語也. 2) 《星湖僿說》 권9, 人事門 小食點心; 昭明太子傳 京師穀貴 改常饌為小食 唐鄭傪為江淮留後 夫人曰爾且㸃心 後世以早晨小食為㸃心.
3) 《三國遺事》 卷1, 紀異1 太宗春秋公; 王膳一日飯米三斗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除晝饍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酒六斗雉十首.
4) 《三國遺事》 卷2, 紀異2 万波息笛; 王宿感恩寺, 十七日到祗林寺西溪邊留駕晝饍.
5) 《三國遺事》 卷2, 紀異2 水路夫人; 聖徳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今溟州行次海汀晝饍.
6) 《三國遺事》 卷2, 紀異2 水路夫人; 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晝鐥次, 海龍忽攬夫人入海.
7) 카키누마 요헤이 저ㆍ이원천 역, 2021, 《이천년전 중국의 일상을 거닐다》, 사계절.
8) 이용현, 2006, 《韓國木簡基礎硏究》, 신서원.
9) 橋本繁, 2007, 《韓國古代木簡の硏究》, 吉川弘文館.
10) 카키누마 요헤이 저ㆍ이원천 역, 2021, 《이천년전 중국의 일상을 거닐다》, 사계절.
11) 김태환, 2006, 「안압지 출토 목제 주사위 명문의 체계와 의미」, 《정신문화연구》29권 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재환, 2021, 「월지 출토 문자자료와 신라 궁중의 삶」,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송기호 교수 정년기념논총, 진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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