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기사
기획연재
[도시 화석을 찾아서 ④] 학교를 거닐며 만나는 순천대의 역사_강성호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2.31 BoardLang.text_hits 189 |
|
웹진 '역사랑' 2024년 12월(통권 58호)
[도시 화석을 찾아서] 도시 화석을 찾아서 4: 학교를 거닐며 만나는 순천대의 역사
강성호(순천대)원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대를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건널목을 건너면 열린 광장이 나온다. 열린 광장은 학생들이 버스킹이나 축제 부스 등으로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장소이자 학교 안팎을 연결하는 전이 공간이다. 열린 광장에서 보면 왼쪽은 체육관과 농구장, 그리고 운동장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열린 광장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그늘 정원'과 맞닿아 있다. '그늘 정원'은 무더운 날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수목원이다. '그늘 정원'은 가지에 가시가 달린 꾸지뽕나무, 소나무보다 잎이 길고 거친 곰솔 나무, 정원수로 각광을 받고 있는 화백 나무 등이 어우러져 아름드리 숲을 이루고 있다.
순천대의 그늘정원
우리가 가장 먼저 살펴볼 사진은 순천대가 '순천농업전문대학'인 시절(1979~81)에 촬영한 정문 풍경이다. 여기 위치는 대략 '그늘 정원'의 입구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순천대 정문은 원래 그늘 정원 입구였다가 어느 시점에 현재 위치로 확장·이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정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아름드리나무가 일렬로 서 있다. 정문의 위치 변화는 학교의 공간 구조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우리가 학교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보려면 학교 공간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늘 정원의 입구는 순천대 역사에서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순농(順農)’의 시대를 기억하다그늘 정원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비석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세 개의 기념비는 학교 역사를 증언하는 '도시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기념비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이 비석은 1979년에 학교 동창들이 세운 <송재철 교장 송덕비>이다. 1945년 11월에 부임한 송재철 교장(1901~1974)은 순천대의 학제 개편과 운동장 확장, 그리고 학교 시설 확보에 앞장서면서 해방 이후 순천대의 기틀을 마려하는 데 노력한 인물이다. 해방 이후 순천대는 6년제 실업중학교인 '순천농림중학교'로 탈바꿈하면서 농업과 외에 임업과와 축산과를 추가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송재철 교장이었다. 미군정시대(1945~48)의 학제는 국민학교 졸업 이후 중학교 과정(6년제) 또는 사범학교(6년제)로 진학하는 코스로 이루어졌다. 중학교 과정은 일반중학교와 실업중학교로 나눠지는데, 순천대는 실업중학교 중 하나로 개편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송재철 교장은 현재 박물관 일대에 있었던 계단식 논을 운동장으로 바꾸었다. 이를 위해 그는 광산에서 쓰는 철길을 가설하고 운반 수레를 이용해 땅을 바꿔나갔다. 당시 순천대는 운동장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학생 수가 늘어난 만큼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박물관 일대는 학교 운동장으로 수많은 행사와 운동대회가 열렸었다. 그리고 송재철 교장은 향림사의 협조를 받아 향림사 뒷산에 있는 나무를 교문으로 옮겨 심었다.1) 현재 그늘 정원이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이다. 당시 학교 교문 주변은 아름드리 숲을 이루어 순천의 피서지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송재철 교장은 조경의 측면에서 순천대를 재건하는 데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송재철 교장의 이야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러면 가운데에 서 있는 <우석 김종익 기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천대의 역사에서 김종익이라는 인물은 빼놓을 수 없다. 순천대는 1935년 5월 15일에 3년제 '순천공립농업학교'로 개교식과 입학식을 거행하면서 출발했다. 중요한 점은 순천대의 시작이 우석 김종익의 기부로 가능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남도청은 지역민이 4만 5천 원을 부담하면 공립농업학교를 설립해 주겠다는 방침을 내걸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순천 지역에서는 1933년 12월부터 공립농업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힌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 4만 5천 원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약 10억에 상당하는 거금이었다. 모금 운동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 1934년 7월 26일 김종익은 4만 5천 원을 기부하였다.2)
우석 김종익(1886~1937)은 수많은 재산을 육영사업에 쏟은 사업가이자 교육가이다. 대지주의 아들인 김종익은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사회 공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 아끼지 않았다. 1937년 5월, 임종을 앞둔 김종익은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사업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내놓은 재산은 순천고등학교와 순천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우석 김종익 기념비의 앞면에 새겨진 글귀(“미래에 투자하여 생리를 열음이여 멀고 긴 눈으로 세대를 살찌우다”)는 '다음 세대'를 위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 알았던 김종익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은 1935년에 순천공립농업학교 제1회생으로 입학한 송병수 선생이 작성한 것이다.
세 번째 기념비는 1985년에 개교(開校)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전면은 “개교 50년 기념비”를 새겼고, 뒷면은 학교 연혁을 기록하였다. 하단에는 전설 속으로만 존재하는 난봉(鸞鳳)이 기상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동안 순천대는 7~8번의 학제 변화를 겪었다. 순천대 역사가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평균 7~8년마다 지금 우리에게 낯선 학교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천대가 공립농업학교(1935)로 출발해서 농림중학교(1946), 농림고등학교(1951), 농림고등전문학교(1965), 농림전문학교(1974)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순천대가 반세기 가까이 농업산업을 이끌 젊은 영농인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전문대학 제도의 도입(1977)으로 순천대는 1979년에 '순천농업전문대학'으로 출범하고 말았다. 이후 순천대는 1982년에 4년제 국립대학으로 승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에 개교 50주년 기념식이 열리면서 <개교 50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개교 50년 기념비>는 '순농(順農)'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학교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반세기(1935~1981) 동안 순천대는 '순천+농업/농림'인 학교명에 착안해 '순농(順農)'으로 불렸다. 1951년에 학교 학생들이 종합체육대회 축구대회에 우승하여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면 학생들이 매우 큰 깃발을 펼치고 있는데, 깃발 양 끝에 '순농'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순천대가 '농림고등전문학교'인 시절(1965~73)에는 순농제라는 학교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농제는 농림전문학교(1974~78)와 농업전문대학(1979~81) 때까지 아홉 번이나 열렸다.3) 순농제의 명맥은 현재의 '향림 대동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1973년부터는 《순농》이라는 교지가 발간된 바가 있다. 이 당시 순천대는 “생각하는 농민” 또는 “생각하고 실천하는 새 농민”이라는 정체성을 교육 방향으로 내걸고 있었다. 그만큼 순천대는 농업 교육에 진심이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말이 '순농'이다. 그런데 이 '순농'은 1982년부터 순천대가 4년제 국립대학으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4년제 국립대학 시절에 세워진 <개교 50년 기념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순농의 시대'를 기리는 기억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순천대의 역사를 간직한 '낙우송'이제 그늘 정원에 벗어나 약학대학 앞에 우뚝 솟은 고목 한 그루를 살펴보자. 순천대 학생이라면 모두가 아는 '낙우송'이다. 언뜻 메타세쿼이아와 비슷하게 생긴 낙우송은 침엽수이면서 낙엽이 지는 특이한 나무이다. 학교에서 단체 버스를 타거나 약속 장소를 잡을 때 낙우송은 만나기에 좋은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현재 이 낙우송이 언제 심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학교 역사에 밝은 분들은 제1회 졸업생이 낙우송을 심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4) 여기서 '제1회 졸업생'은 1935년에 순천공립농업학교 학생으로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한 15명을 가리킨다.5) 낙우송이 학교 교목으로 선정된 시기는 1991년 4월이었다. 어쨌든 이 고목은 순천대 역사와 함께 하면서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학교를 지키고 있다.
이 사진은 1972년 5월 19일에 순천경찰서 순경 장영규가 촬영한 것이다. 현재 이 자료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순천경찰서는 지역 내 중요 시설물의 위치, 연혁, 모습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마도 지역사회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용도로 작성했으리라 보인다. 덕분에 지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1970년대 순천의 역사를 파악하는 일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사진을 보면 멋들어진 나무 조경 사이로 둥근 화단이 있다. 이 둥근 화단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둥근 화단 뒤에 건물 한 채가 있고, 또 그 뒤로 우뚝 솟은 나무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 우뚝 솟은 나무는 순천대의 교목인 낙우송이다.
낙우송 앞에 자리한 건물은 순천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 본관이다. 이 건물은 1935년 개교 즈음에 지어졌으나 1951년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촬영한 학교 본관의 모습으로서 당시 유행한 사진엽서에 실린 것이다.6) 사진 하단에는 '순천공립농업학교(順天公立農業學校)'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고, 왼편에 오벨리스크 모양의 길쭉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각기둥에 사각뿔 형태'의 안내판에는 일본어로 “학교는 거룩한 인생 도장이다(學校は聖なる人生道場なり)”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번에는 두 개의 사진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자. 첫 번째 사진은 1982년에 순천대 교정의 풍경을 담았다. 사진 한 가운데 나무숲 사이로 건물 하나가 보인다. 바로 1954년에 다시 지어진 학교 본관이다. 1972년에 장영규 순경이 찍은 사진도 이 건물을 피사체로 한 것이다. 건물 뒤로는 낙우송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순천대가 '농업전문대학'에서 '4년제 국립대학'으로 승격하던 시기에 학교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약학대학 건물(2호관)의 뒤로는 허허벌판에 논밭만 덩그러니 있다. 70주년 기념관 자리에는 3호관과 6호관 건물이 있었다. 이 중에서 6호관은 운크라(UNKRA) 원조를 받아 1957년에 지어진 건물이다.7) 그리고 박물관 일대는 운동장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1987년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향림축전 한마당 잔치의 광경을 촬영한 것이다. 향림축전 한마당 잔치는 대학 구성원이 각각 준비한 초청 강연회, 전시회, 써클제, 가장(假裝)행렬, 일일 찻집 등을 선보이는 학교 축제였다. 이 사진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낙우송 일대의 풍경이다. 사진 한 가운데에 많은 양의 흙과 모래 등을 밀어내는 불도저가 눈에 띈다. 도로 양옆에는 아스팔트 가루가 쌓여있다. 아마도 도로포장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불도저 뒤로는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가운데 지붕이 볼록 솟아오른 건물이 있다. 이때도 (구) 본관 건물은 사라져 버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구) 본관 뒤편에는 순천대의 교목인 낙우송이 있다.
두 사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1982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오면서 학교 공간의 외연이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변화는 학교 정문의 위치 변화이다. 두 사진에서 정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87년 사진에서 현재 정문과 이어지는 도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정문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논밭이었던 약학대학(2호관) 건물 뒤편으로는 학생회관(1985년 준공), 사범대학 1호관(당시 사범교육관), 기초교육관(당시 인문사회관), 사범대학 3호관(당시 기초과학관)이 공사 중이거나 준공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순천대가 4년제 국립대학 승격으로 학과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교육시설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 광장의 탄생순천대의 변화는 학교 시설물 증가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1985년에 국가의 통제를 받았던 학도호국단이 사라지고 총학생회가 출범하면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순천대에서 열리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는 5·18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가 격렬하게 이어진 시대였다. 순천대 학생의 시위는 1985년 '4·19 추모식'과 '5·18 희생자 분향소 설치'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8) 그러면서 순천대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광장'을 만들어냈다. 그 출발은 1986년 4월 18일에 총학생회가 개최한 '4·19 26주년 기념행사'였다. 이날 행사는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자는 취지로 분향식, 기념시 낭송, 마당극, 토론회 등이 진행되었다. 중요한 점은 당시 《순천대학보》가 4·19 26주년 기념행사의 개최 장소를 '2호관(농학관) 앞 광장'로 보도했다는 사실이다.9) 2호관은 현재 약학대학 건물을 가리킨다. 즉, 낙우송과 약학대학 건물 사이의 마당이 '2호관 앞 광장'이었던 것이다. 《순천대학보》는 1986년 10월 6일에 열린 함석헌 초청 강연회도 '2호관 마당'에서 열렸다고 보도하였다.10)
1987년에 이르면서 '광장'의 위치는 바뀌었다. 이때부터 순천대 학생들은 학생회관(E1) 앞 마당을 '민주 광장'으로 명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회관(E1)은 1985년 9월 9일에 준공식을 마친 상황이었다. 문헌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건 1987년 3월 19일에 열린 총학생회 및 여학생회 출범식을 계기로 학생회관 앞 마당이 '민주 광장'으로 변모한 것이다.11)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학대학(2호관) 뒤편과 학생회관 사이의 공터를 가리킨다. 이곳은 학교 공간의 외연 확장으로 많은 학생들이 왕래한 중심지에 해당한다. 위 사진은 1992년 1월 24일 민주 광장에서 열렸던 등록금투쟁 위원회 발족식의 광경이다.12) 현수막 아래에 '민주 광장'이 표시되어 있다. 민주 광장은 순천대 학생들이 공간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형성한 '장소'라 할 수 있다. 민주 광장의 상징성은 학생운동의 경험이 녹아들면서 더욱 강해졌다.
1997년 2월 25일자 《순천대신문》에 실린 그림이다. 학교 내 상징적인 공간들을 소개하고 있다. '학생운동의 산실'로 민주 광장을 설명하고 있다.
학교 내 다양한 조형물에 얽힌 역사흥미로운 건 '종합대학교'에 대한 열망이었다. 농업학교로 시작한 순천대는 4년제 국립대학 승격 이후 다시 국립 종합대학으로 완성하려는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특히 순천대는 1987년부터 '종합대학교로의 도약'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종합대학 승격'은 학교 민주화 투쟁의 핵심 구호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1987년 11월 3일 순천대 학생들이 조직한 '군부독재 종식과 자주적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위원회'(일명 자민특위)는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13) 이들에게 종합대학 승격은 학교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학교 구성원들의 열망과 노력은 순천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행사가 1991년 8월 20일에 열렸다. 현재 도서관 앞 조형물은 순천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승격기념 조형물'의 조성은 지역사회와 중지를 모은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순천시가 주관하고 순천교육청이 후원했다고 한다. 그만큼 지역사회에서 순천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일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승격기념 조형물'은 새싹이 대지를 뚫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 위에 솟아있는 높은 좌대에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이 조형물은 조선대학교 교수인 박상호가 제작하였다.
현재 생명산업과학대학(B4) 2호관 앞 화단에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서 있는 석등이 있다. 어느 날 학교 교정을 걷다가 이 석등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석등에는 '구국농업의 선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순천대의 역사에서 농림고등전문학교-농림전문학교-농업전문대학으로 이어지는 14년여간은 '농전 시대'라고 부른다. 이른바 '농전 시대'의 교풍은 구국 농업, 즉 “농업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농업의 장래를 맡아나갈 전문 농업인을 배출하는 게 학교의 목적이었던 시절의 당당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리고자 1980년 순천농업전문학교 제5회 졸업생들은 졸업 기념물로서 석등을 하나 남겼다. 그것이 바로 '구국 농업의 선봉'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석등이었다.
일찍이 학교 역사에 관심을 두고 관련 자료를 수집한 배인휴 교수는 이 석등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석등은 퍽 이사가 잦았다고 한다. 원래 이 석등은 당시 학교의 중심지였던 (구) 도서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구) 도서관은 현재 70주년 기념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 석등은 인문사회관, 즉 현재의 기초교육관 한쪽 귀퉁이로 자리를 옮겼다.14) 이 석등은 한 군데에 안착한 다른 조형물들과 달리 이리저리 쫓겨났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미주>
1) 순농·순천대학, 《개교 50년사》, 1985, 98쪽.
2)「농업학교설립비 사만오천원을 自擔」, 《조선중앙일보》 1934년 8월 6일자. 3) 국립순천대학교, 《사료로 엮은 순천대학교 70년사: 본사편》, 2005, 143쪽. 4) 국립순천대학교, 《사료로 엮은 순천대학교 70년사: 자료편·일화편》, 2005, 519쪽. 5) 순농·순천대학, 《개교 50년사》, 1985, 71쪽. 6) 순천시, 《정겨운 순천의 옛 사진》, 2007, 133쪽. 7)「향림골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별곡: 운크라의 원조건물 제6호관」, 《순천대신문》 제206호, 1995.11.1. 8) 임성운 엮음, 《순천대학교 민주화운동사 1981~1995》, 심미안, 2012, 14쪽. 9)「4·19 26주년 기념행사 열어」, 《순천대학보》 제78호, 1986.4.30. 10)「향림골에 펼치는 젊은 지성의 잔치」, 《순천대학보》 제82호, 1986.10.6. 11)「총학생회·여학생회 출범식 가져」, 《순천대학보》 제85호, 1987.4.10.; 임성운 엮음, 《순천대학교 민주화운동사》, 16쪽. 12)「기성회 예산편성, 학생참여 창구 부족」, 《순천대신문》 제166호, 1993.3.29. 13)「종합대 승격 공청회」, 《순천대신문》 제91호, 1987.11.5. 14)「향림골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별곡Ⅳ」, 《순천대신문》 제208호, 199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