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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3회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2)_박범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4.12.31 BoardLang.text_hits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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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4년 12월(통권 58호)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3회. 논산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2)

 
 

박 범(중세2분과)

 
 
 

강경장과 비슷한 규모의 논산장

 
강경장과 다른 모습의 논산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논산장은 강경장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작성된 《호서읍지》를 보면 강경장에서 징수하는 장시세는 1,049냥인데 반하여 논산장에서 거두는 장시세는 152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장시세로 비교해 본다면 논산장은 강경장에 비하여 작은 장시였다.

그러나 논산포구와 논산장은 지역 내에서 물자 운송의 중요한 수출입을 담당하는 공간적 기능을 했다. 1905년에 작성된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를 보면 강경으로 물품을 수출하는 곳으로는 석성, 은진, 연산을, 논산으로 물품을 수출하는 곳으로 은진, 연산, 노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지금의 논산시 행정구역에 해당하는 공간의 수출입 창구가 강경과 논산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을 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 포구에 상주하는 객주의 수도 기록하고 있는데 강경의 객주는 7호, 은진 논산의 객주는 7호, 노성 논산의 객주는 2호가 존재했다. 객주의 수로 보면 논산이 강경과 비교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논산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작성된 자료를 통해 강경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포구와 장시가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논산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당시 논산의 자연지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08년 간행된 《한국수산지》에서는 논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논산에는 비옥한 평야를 갖추고 있고, 게다가 하천을 통하여 선운의 편리함이 있다. 그러므로 그 평지 일대에서의 물산을 반출할 때 반드시 이 지역을 통과한다. 이것은 이 지역의 발전을 불러온 까닭으로서 논산은 실로 본군 일대에 그치지 않으며, 북쪽의 노성, 동쪽의 연산, 진령, 서쪽 석성 등 여러 군 일대에서 온갖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 시장에 모이는 사람의 규모는 10,000명, 적어도 거의 5,000명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으니 그 성대함이 충청도 가운데 다른 곳에 비견되지 않는 것으로서 시가의 내외를 따지지 않고 백의(白衣)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끊이지 않는다. 만약 거기서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이것을 바라보면 하얗게 빛나서 흡사 눈이 쌓인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 이와 같은 것은 충청도 가운데 논산시가 유일하다.”
 
 
위에서 설명한 논산의 풍경에 대한 모습은 1908년 조선의 수산 현황을 조사한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일본인들이 보아도 논산은 강경만큼 물산이 많이 모이며, 물산을 매매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논산장이 강경장 못지 않은 큰 시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논산군의 등장 - 논산 지역의 통합 과정

 
여기까지 논산의 성장 배경에 대한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진행한 작업은 용역 과제에 맞추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내용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은 대한제국 시기에 한번, 1910년에 한번 있었다. 1906년 지방제도 개정은 이미 많은 선행 연구 성과들이 나와 있어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방제도조사서의 청의서에 따르면 논산시 영역에서는 연산군을 폐지하고 은진군에 통합하며, 노성군을 폐지하고 석성군에 통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실시된 칙령에서는 결국 인근의 비입지만 정리한 채 그대로 두었다.
 
논산 지역의 통합 과정은 1914년에 있었다. 1914년의 군면폐합 과정에 대한 문서들은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운영하는 “내 고장 역사 알기”라는 사이트를 통해 원문을 거의 다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 용역을 진행할 당시에는 원문 서비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직접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국가기록원 내에 있는 전산에서 일일이 논산과 관련된 기록을 검색하며 모두 복사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국가기록원에서 꽤 오랜 기간을 보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부군폐합관계서류철》을 보면 지방제도 개정이 1911년부터 착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11년 10월, 조선총독부는 충청남도에 군폐합 조사에 관한 지시를 하였다. 충청남도에서는 1912년 6월, 군면폐합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충청남도장관이 조선총독부 내무부에서 보낸 문서를 보면 각 군의 면수, 호수, 인구, 전답 면접, 호세(戶稅), 지세(地稅)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충청남도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진잠군은 연산군에 통합하여 연산군이라 하고, 노성군은 석성군의 일부와 은진군의 화지산면을 통합하여 논산에 군청을 신축하고 논산군이라고 하며, 은진군은 화지산면만 제외하고 군청을 강경에 두어 강경군이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아래와 같은 지도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지도를 저렇게 활용하지 않는다. 그 동안 지도 다루는 기술이 나아졌는데 10년전에는 그걸 할 줄 몰라서 어설픈 그림판 조작 능력으로 저렇게 그렸던 것 같다. 저 지도를 그대로 연구과제 보고서를 수록하였으니, 지금 보면 조금 창피하긴 하다.
 
충청남도가 제안한 이 안의 특징은 강경과 논산이 이 지역의 중심 지역으로 부각된 사실이다. 논산과 강경이 도회이기 때문에 별개로 본 것이다. 이전에는 각 군현의 읍치 지역이 중심이 되어 있었으나, 논산 지역의 경우 행정 중심지인 읍치보다 경제 중심지인 논산과 강경이 핵심 지역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충청남도에서는 강경 중심의 강경군과 논산 중심의 논산군을 행정구역 개편안을 제안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성, 은진, 노성의 옛 읍치는 더 이상 중심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충청남도의 제안을 검토한 조선총독부 내무부는 1913년 5월, 충청남도에 의견을 통보했다. 그러나 내무부의 의견은 충청남도와는 사뭇 달랐다. 내무부는 지역의 행정 혹은 경제 거점을 무시한 채, 진잠군, 연산군, 노성군, 은진군, 석성군을 통합한 하나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를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면적은 79방리, 호수는 21,385호, 인구는 98,642명이었다. 군청은 당시 강경에 있던 은진군청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다만 새로 신설된 군의 명칭을 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총독부 안은 면적, 호수, 인구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충청남도에서는 총독부안의 검토에 들어가 다시 1913년 9월, 충청남도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수정안에서는 총독부의 안을 크게 수정하지 않은 범위에서 지역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5개 군 중에서 진잠군은 회덕군과 병합하도록 하고, 석성군의 일부만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부여군으로 이관하도록 했다. 두 지역이 빠진 이유에 대해서 충청남도는 논산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총독부안에서는 없던 새로운 군의 명칭으로 논산군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군청도 논산에 두도록 하였다. 충청남도는 군 명칭의 선택 이유에 대하여 공간적으로 논산이 군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 근래 호남선의 개통으로 물자의 집산이 논산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충청남도의 의견은 논산의 경제적 기능과 역할을 중시한 제안으로 논산이라는 지명이 기능적으로 확대되면서 이제 일정 범위 이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13년 12월, 조선총독부령으로 논산군이 새로 형성되자 문제는 곧바로 불거졌다. 강경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던 것이다. 강경민들은 결의서와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정치적 행동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내용도 국가기록원 소장 문서에 매우 소상하게 남아 있다. 이 부분은 이미 관련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 조금 특이하게 생각했던 것은 반대를 했던 주체가 강경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들이라는 점이다. 1911년을 전후하여 은진군청이 이미 은진 읍치에서 강경으로 이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위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반대 인물로 조선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했다.
 
논산군이 신설되고 군청이 논산에 자리하자 나누어져 있던 두 개의 논산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은진군 화지산면은 논산군 논산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명칭 개정은 군보다는 조금 늦은 1914년 4월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때 은진군 논산리와 노성군 논산리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시키면서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석면 내 논산리 일부를 논산면에 편입한다. 이 지역은 현재 시가를 형성하고 사실상 은진군 논산과 일체가 되어 경제 기타 공공 사무의 처리상 분리하지 못하는 관계가 있으므로 합병하여 동일한 행정구역 아래 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다 보니 군면폐합지도를 보면 논산리 부분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논산리는 크게 본정(本町), 욱정(旭町), 영정(榮町)으로 편제되었는데, 이 부분은 모두 조선후기 은진군, 노성군, 연산군의 일부 영역을 합한 것이다. 해방 이후 이 시기 행정 구역 편제가 그대로 이어져서 영정은 대교동, 본정은 화지동, 욱정은 반월동이 되는 모태가 되었다.
 
 
 
 
논산 중심지의 형성 과정은 조선후기 이래 특정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그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역사지리적 개념을 넓혀갔다. 산 이름으로 시작한 논산, 다리 이름과 도로명을 통해서 인근 지역과의 연계성이 매우 강회되었으며, 장시의 등장으로 지역의 경제권을 형성하였으며, 포구의 개설과 외부 지역과의 연결망이 강화되었다. 행정리의 형성으로 일정한 영역을 논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논산은 은진군과 노성군이라는 서로 다른 행정구역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간 지명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한꼐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는 역설적이게도 1914년 조선총독부 주도의 군면폐합 과정에서 실현되었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연구용역 최종보고서에 관련 사실을 수록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논산에 대하여 더 연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논산의 옛 모습 복원 - 논산 옛지도 발간 연구 용역

 
논산시 탄생 100주년 용역 사업이 마무리되자, 우리 연구소는 논산시청으로부터 새로운 용역을 받게 되었다. 바로 고지도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사실 많은 지자체와 문화원에서는 각 지역의 고지도를 수집하여 영인하는 작업을 많이 수행하고 있었다. 논산의 경우 조선후기 행정구역이 은진, 노성, 연산, 석성의 4곳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고지도 수집 작업은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도집 발간은 연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역민들에게 옛 논산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컸기 때문에, 기존에 나와 있는 지도집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기로 하였다.
 
지도집은 크게 두 종류의 형태로 구분했다. 하나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를 하나의 주제로 하고, 다른 하나는 근현대에 제작된 근대 지도를 수집하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고지도라고 하면 전자를 가리키는데 사실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수장하고 있는 곳에서는 많은 근대 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그래서 두 자료를 모두 확보하기로 하였다.
 
지도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기존의 고지도를 지도 원본에 어떠한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책을 제작하였다. 그러므로 약간의 해제만을 넣어서 고지도를 보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했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고지도를 보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지도에서 어떠한 우리 지역의 지명이 나와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아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사실 위와 같은 방식은 역사연구자들에게는 그렇게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다. 이미 해당 지명에 대한 역사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민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지역민들은 자기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이 얼마나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지역민들을 위한 지도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자로 되어 있는 지명을 모두 한글로 표기해야 했고, 해당 지명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도 함께 첨부해 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지도집에 단순하게 여러 종류의 고지도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2013년 이전 연구 용역의 성과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지도를 편집했다. 그래서 논산의 산, 다리, 도로, 포구, 시장을 각각 고지도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
 
 
 
 
이와 같은 방식의 고지도 활용은 지역민들에게 실제로 우리 지역에 어떠한 공간 지명이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본 고지도에서 확대된 부분을 강조하여 실제로 어떠한 지명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논산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질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 단순하게 일방적으로 고지도를 제시하고 스스로 알아서 찾아야 하는 불편함을 덜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지도 수집을 진행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고지도 보다는 사실 근대지도였다. 그 동안 조선후기 고지도만 보아온 나에게 근대지도는 또 다른 지역사회의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수집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근대지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하나의 수확 중 하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제시대에 간행된 주제별 지도 등 다양한 형태가 남아 있었다. 근대 지도도 고지도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했는데, 하단에는 원본을 작게 배치하고 상단에는 논산 지역을 크게 확대하여 보여주었다.
 
근대지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지적원도였다. 지적원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2013년 용역사업을 통해 국가기록원을 출입하면서였다. 지금은 국가기록원에서 제공하는 “지적아카이브”라는 사이트를 통해 원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당시에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논산면과 강경면에 해당하는 모든 지적원도를 출력하여 확보했다. 역사지리학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지적원도를 활용하지만, 프로그램을 활용할 줄 몰랐던 나는 출력한 지적원도를 모두 형광펜으로 색칠했다. 하천은 하늘색, 길은 분홍색, 대지는 노란색, 철길은 보라색을 썼다. 논과 밭은 칠하지 않았다. 내가 궁금했던 건 논산과 강경의 시가지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색칠한 지적원도를 모두 이어 붙이고 다시 그것을 스캔하여 이미지 파일로 만들었다. 그 결과가 아래와 같다.
 
 
 
 

드디어 보이는 논산의 상권 : 논산의 18~19세기 성장 배경과 시장권의 발달

 
두 차례의 용역 사업을 통해 나는 논산 지역의 역사상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떠한 자료를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지역사를 연구논문으로 작성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2015년 11월, 조선시대사학회에서 홍성군청과 함께 “홍주 1,000년 기념 사업”이 일환으로 학술세미나가 진행되었는데 그중 발표 주제 하나를 맡게 되었다. 발표연구자들은 충청남도의 각 지역을 맡아 지역사의 여러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나는 논산 지역을 맡아, “조선 후기 논산 지역의 영역 확대와 역사적 변화”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용역 보고서에서는 주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주제의 일관성을 갖추고 내용을 체계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논산의 역사지리였다.
 
고지도와 읍지의 자료는 연대 순으로 정리해 보니 논산 → 논산교 → 논산로 → 논산장 → 논산포 → 논산리의 순서로 명칭의 영역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지리학의 용어로 표현하는 ‘육로 결절지’에 해당했다. 논산교와 논산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대체로 지역 도로 체계는 읍치를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읍치와 연결되는 방사형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의 대로 체계가 한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결되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은진현은 그렇지 않았다. 은진 읍치의 방사형 도로와 논산 중심의 방사형 도로가 함께 존재했다.
 
육로 결절지에는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므로 자연스럽게 장시가 형성되었다. 논산장은 은진현, 노성현, 석성현, 연산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매우 이상적인 장시 공간이었다. 여러 연구성과를 통해 논산장을 중심으로 하는 장시망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논산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논산천을 활용하여 해로 결절의 기능도 확보했다. 바로 논산포가 개설된 것이다. 논산포는 육로 결절지로서 논산장의 물산이 해상으로 이출될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맡았다. 연대기 자료에서 논산포가 18세기 말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강경포와 경쟁할 수 있는 상대로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의문점이 들었다. 조선 3대 포구이자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강경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논산포와 논산장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중국의 전통시장은 연구한 스키너의 연구 가설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키너의 연구 가설은 고차 중심지와 저차 중심지가 매우 균질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강경장과 논산장은 모두 고차 중심지로 보였던 것이다. 이때 강경장과 논산장을 계속 비교해 보면서 지역사회의 역사지리적 특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대부분 지역은 그 중심이 읍치에 있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장시망과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펴본 바로는 18세기까지는 여느 군현과 같이 각 읍치가 중심지 기능을 하였으며 19세기 이후가 되면 논산이 부각되면서 강경과 연결되는 새로운 물자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연산현과 노성현의 세곡창고가 논산에 위치하면서 그 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논산천의 수계 문제였다. 강경에서 논산을 연결하는 수로는 논산천이었다. 그런데 논산천을 수운으로 이용하기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우선 곡류의 형태로 구불구불하였으며, 수심이 매우 얕아 만조 시에만 배의 운행이 가능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논산천은 수운의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908년에 간행된 《충청남도 도세일반》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논산포가 처한 곳은 상류가 얕아 선박의 출입이 편리하지 못한 바 지방에 이익이 보급되지 못하니 현재 상황은 각 객주의 재원이 적고 논산포로부터 강경포까지 뱃길이 구불구불한 곳을 직선으로 파서 선박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면 장래에 발전할 희망이 있으나 거액의 비용을 지출할 방법이 없다”
 
 
 
 
논산의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성 논산과 은진 논산, 그리고 은진 강경이 관계를 설명해야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노성현 논산은 은진현의 논산 및 강경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은진현의 논산과 강경의 갈등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은진현감이 조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논산석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성 논산과 은진 논산은 협력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노성 논산, 은진 논산, 은진 강경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1886년 8월, 강경 바로 남쪽의 황산포에 여각이 개설되어 논산과 강경으로 이동하는 상선을 붙잡아 이익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세 포구가 확보한 공동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황산포가 전라도 여산부의 행정구역이라는 점이라 조정도 쉽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강경-논산 중심의 시장권은 갈등관계에 있던 황산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발전했다. 1901년 9월경 충청도 해안에 있던 소금 상인이 금강을 타고 논산 지역으로 오다가 임천 부근에서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의송(議送) 문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문서에는 강경포 12인, 논산포 12인, 황산포 12인으로 구성된 서명을 통해 이들이 이제는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용역 사업에서는 몰랐던 것 중 하나는 황산의 중요성이었다. 황산은 《통상휘찬》과 일본영사관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문서를 통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겨울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결빙(結氷) 기간이 되면 논산포는 물론 강경포도 이용이 불가능했다. 강경포는 금강이 아닌 강경천변을 포구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산포는 그렇지 않아 금강에 포구에 있었다. 그러므로 결빙기간 동안 논산장과 강경장에 물화를 공급하는 기지는 황산포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기 시작한 곳도 황산포였다. 그러므로 강경-논산 시장권의 입장에서 황산은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논산은 조선 후기 노성현의 논산포와 은진현의 논산포를 병합한 것이고, 강경은 조선후기 은진현 강경포와 여산부 황산포를 병합하여 만들어진 시가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역사성을 가지면서 일정한 협력관계와 갈등관계가 시장권의 변동에 따라 조정관계 혹은 협력관계가 될 수 있으며, 나중에는 최종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시가지 혹은 지역 중심지는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지역 중심은 늘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역사적 층위가 누적되면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논산과 강경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지역사가 왜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하는가를 알게 해준 경험이었다.
 
 

우연히 찾은 살인사건 : 1899년 논산리 박조이 치사 사건

연구가 많이 진행된 강경보다는 논산에 더 초점을 맞추다 보니, 논산포에 거주한 인물들의 삶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논산사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규장각에 소장한 한 검시 문안에 논산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위 자료는 1899년 5월에 발생한 노성현 광석면 논산리 박조이 치사 사건을 조사한 자료이다. 사실 대부분의 검안 연구는 살인에 대한 원인, 살인 동기, 살인과 관련된 재판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사실 검안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나는 살인 사건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가 죽였는가는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다. 검안을 읽어가는 내내 나의 관심은 여기에 등장한 논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검안 자료가 지역사 연구에 매우 유용한 점은 피지배층, 보통 사람들의 삶의 유형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검안 문서에서 이 사실에 주목했다.
 
이 사건은 14세였던 부인 박조이가 27세였던 남편 지삼득에게 사망한 사건이었다. 남편 지삼득은 노성 논산포의 논산천 근처에 거주하면서 5두락 규모의 농사를 지었다. 사건 당일 지삼득은 이앙을 하고자 아침 식사 전에 논에 가서 물을 가두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주는 아침을 먹고 《동몽선습》으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내가 그 모습을 보자 발로 책을 차버리고 비가 오는데 농사일은 하지 않고 한가하게 방에 누워 있다고 핀잔을 주었다. 화가 난 남편이 아내에게 목침을 집어 던졌는데 그만 그것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나는 흔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다툼에는 관심이 없었고 내가 눈이 갔던 것은 증인들이었다. 이 사건에는 여러 명의 증인이 등장하는데 첫째 인물은 사건을 신고한 박운국이었다. 그는 박조이의 외삼촌으로 원래 전라도 만경 사람이었다. 사건 발생 6년 전에 광석면 논산포로 이주하였다. 그는 선상(船商)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당시에도 전라도에서 구매한 갈치를 은진 논산포에서 방매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건너편 노성 논산포에서 어느 뱃사람이 자신을 부르며 조카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어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를 통해 노성 논산포와 은진 논산포가 매우 가까웠으며 각기 포구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범인 지삼득의 지인도 많이 등장한다. 양인(良人) 안화중은 나이 37세로 충청도 영동군 사람이다. 3년 전에 논산리로 와서 이임(里任)을 하고 있었다. 양인 김문선은 나이 29세로 농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고, 그의 형은 소금상인으로 소금창고에서 주로 일을 하였다. 또한 양인 박성학은 나이 22세로 지삼득과 의형제였는데 논산포구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박성학은 본래 전라도 용안 사람으로 그의 아내는 친가로 보내고 본인만 혼자 다른 생계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장사에 고용인이 되어서 물건을 판매하고 대신 품삯을 받아 생활하는 처지였다. 요즘 말로 하면 기러기 아빠인 셈이다.
 
 
 
 
위에서 소개한 박조이 사망사건은 규장각에 소장된 수많은 검안 문서 중의 하나로 취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 가치는 달라진다. 논산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이면서 현재까지 찾은 바로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논산이 아닌 타 지역에서 건너와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연구논문의 마지막에 굳이 이 사건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은 논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 시기에도 타 지역에서 논산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중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임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상업뿐만 아니라 농사도 함께 짓고 있었고, 노동을 팔아 품삯으로 살아가는 한편, 지금처럼 주말부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본 19세기 말 논산의 풍경은 강경과는 또 다른 모습의 도회지이자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2015년 <조선시대사학보>에 “18~19세기 논산의 성장 배경과 시장권의 발달”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고, 검안자료의 경우 논산 관련 검안 자료를 추가하여 2018년 <충청학과 충청문화>에 “검안으로 본 20세기 초 논산포의 모습과 풍경”이라는 논문을 낼 수 있었다. 두 논문을 쓰면서 나는 석사논문, 그리고 후에 박사논문보다 논문 쓰는 즐거움을 몇배 느껴본 것 같다. 석사와 박사 논문은 학위를 받기 위한, 학술논문을 쓰기 위한 공부였다면, 논산 지역사 논문은 역사 논문 쓰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주었다. 쓰는 내내 즐거워 보기는 처음이었고, 그것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논산 지역사 연구를 논문까지 써 가면서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2017년 어느 날 선배의 추천을 받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지역사 자료 수집에 응모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역사 자료수집 경험은 나를 이제 본격적으로 근현대사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사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연구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지역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