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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과 대미외교의 전개(1948~1960년)_송재경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2.08 BoardLang.text_hits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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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월(통권 59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과 대미외교의 전개(1948~1960)

 

 

 


송재경(현대사분과)

 
 
1. 심연(深淵)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보며, 그와 나의 ‘상식’ 사이에 깊은 간격이 벌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법 독재’를 운운했다. 그는 ‘종북 반국가 세력의 척결’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며, ‘구국의 의지’를 말했다. 나는 그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내가 연구하던 과거의 ‘심연’이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현대사의 연구는 상당 부분 고통스러운 과거를 대면하는 행위이다. 분단, 전쟁과 냉전을 겪으면서 우리 안에는 심연이 자리 잡았다. 반공주의(反共主義)라는 이름의 구렁이었다. 심연은 때로 한국사회를 집어삼켜서, 인간성의 파괴까지 옹호하도록 했다. 반공주의의 이름 아래 고문과 학살, 억압과 추방이 벌어졌다. 계엄령과 군을 동원한 자유의 억압도 그 일부였다. 많은 한국현대사 연구들이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캐고, 사건의 주체와 원인과 동력을 분석했다. 다시는 한국사회가 인간성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노력이었다.

나의 한국현대사 연구 또한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의지에서 시작했다. 심연을 이해해야, 한국사회가 그 심연에 다시 빠지는 일이 없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심연의 실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붙잡은 화두가 ‘이승만’이었다.
 
 
2. 서한, 사람의 마음을 담은 자료
 
 
정용욱 선생님, 그리고 동학(同學)들과 함께 세미나를 한 자료 중 하나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이승만관계서한자료집』(이승만서한철)이었다. 자료집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 임병직, 양유찬, 로버트 올리버 등이 주고받은 서한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이 교환한 편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과 신념, 정세인식 등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귀중한 자료였다. 신문, 한국정부의 공문서, 미국 측의 각종 보고서로는 읽을 수 없는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서한들은 단순히 개인이 교환한 사신(私信)이 아니다. 일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외교문서나 마찬가지이다. 이승만이 외무부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주미한국대사, 주유엔대표에게 지시사항을 전하거나, 미국 측과 협상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외교사료관의 제1공화국 시기 자료가 심각하게 빈곤한 상태에서, 이승만서한철은 이승만과 한국의 대미외교(對美外交)를 분석하기 위해 반드시 활용해야 할 자료이다.

이승만서한철을 공부하면서, 서한 자료와 미국 측 문서를 교차 분석하여 이승만의 대미외교 전반을 해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의 외교가 ‘신화’로 포장되어 널리 알려진 상황을 바로잡고, 실제 ‘현실’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외부의 연구들 중에는 이승만의 외교술을 찬양하기 위해 극히 부분적인 단면만 엮어서 해석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단선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역사학의 시선에서 종합적인 분석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다.
 
 
3. 동상이몽(同床異夢)의 한미동맹
 
 
그렇다면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추구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자료를 보면서 우선 파악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아주 일관되게 공산/반공의 구도를 신봉하며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한국의 대미외교를 끌고 가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공격적인 한미동맹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한국이 미국의 군사기지 역할을 맡고, 한국군이 미국의 반공전선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기를 원했다. 그래야 미국이 일본 대신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정책을 펴면서 한국을 지원하고, 나아가 북진통일까지 후원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신념과 구상은 무리한 국정운영으로 이어졌다. 한국군을 최대한 강화해야 ‘반공의 십자군’이나 미국의 군사동맹으로 가치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국방정책은 정부예산으로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한국군과 경찰 병력을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군은 미국 원조와 한국정부 예산에 과부하가 걸리게 했다.
 
 
한미관계 또한 삐걱거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의 성립이었다. 19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대가로 지불하는 대신, 이승만으로부터 정전(停戰) 협조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때 이승만은 조약에 두 가지 내용을 관철시키려 했다. 첫 번째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방위를 지원하는 한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인정하는 영토조항, 두 번째는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었다. 만약 두 조항을 상호방위조약에 넣는다면 미국은 한국군이 한국의 영토인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을 주권행사로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소련 등이 한반도에 개입할 경우 그에 맞서 한국의 방위를 지원해야 했다. 요컨대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추진하려 하면 미국은 언제든지 그것을 지원해야 했다.
 
미국은 당연히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동맹이었는데, 이승만은 끈질기게 이를 고수했다. 양자의 극적인 갈등은 1954년 이승만의 미국 방문 때 벌어졌다. 이승만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로 하여금 북진통일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중전쟁과 핵무기 사용을 주창했다. 미·소의 극단적 대립과 핵전쟁을 피하고자 평화공존 논의가 나오던 당시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연설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물론이고, 미 정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싸늘했다.
 
이승만의 신념과 협상 방식은 때로 그의 측근이나 한국정부 내 고위관료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꼭 북진통일을 뒷받침하는 내용이어야 할까? 공식 조약으로 미국의 방위 공약을 얻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때문에 임병직, 변영태 등은 미국과 협상에서 타협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승인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승만은 고집스럽게 그의 신념을 한국정부의 외교정책에 투영시키려 했다.
 
결국 양자의 갈등은 비정상적인 동맹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53년 10월 1일 변영태와 덜레스 국무장관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이 있었지만, 1954년 11월 18일에야 조약의 발효(發效)가 이뤄졌다. 조약 합의에서 동맹 수립까지 무려 1년 이상 걸린 것이다. 게다가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한국정부를 통제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미군사령관의 한국군 작전통제권 보유가 바로 그 핵심 수단이었다.
 
이렇듯 이승만 개인의 반공 세계관과 한미동맹 구상은 한국정부의 대미외교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한미관계의 주요 갈등요소를 제공했다. 당대 미국의 트루먼·아이젠하워 정권도 반공주의를 내세웠으나, 이승만 식의 극단적인 대결을 추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4. 이승만의 ‘3개 전선론’과 미·중 갈등
 
 
동맹을 둘러싼 한미 간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끈질기게 자신의 구도를 아시아에서 관철시키려 했다. 바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3개의 전선에서 중국 대륙을 향해 진격하는 미·중 전쟁이었다.
 
이승만이 주장한 3개 전선론 시초는 1949년의 태평양동맹이었다. 국공내전의 상황 악화를 계기로 하여, 장제스와 이승만은 태평양동맹을 추구했다. 양자의 이해는 국공내전 지속과 한반도 무력통일에 있었다. 장제스는 제주도에 공군기지를 설치하여 산둥반도 등을 공격하기를 원했고, 이승만은 그 대가로 한국군이 북진할 때 장제스 측의 공군 지원을 얻는 데 관심이 있었다. 양측의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중국의 전쟁과 한국의 전쟁을 연결시키려는 기본 구상은 이때 만들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장제스 측이 중국대륙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고, 양자는 합의했다. 이때 한반도/타이완/베트남의 세 방면에서 중국대륙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3개 전선론이 등장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이루고, 장제스는 대륙반공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분단되어 있던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54년 이승만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등장한 미·중 전쟁은 결코 돌발적인 발언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추구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이승만은 심지어 핵전쟁까지 불사(不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 내 극우세력의 관심과 지지를 얻었지만, 대미외교의 측면에서는 참사에 가까웠다.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중국과 전쟁을 공공연하게 옹호할 리가 없었다. 1950년대 내내 그의 주장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미국은 반공의 보루인 한국을 계속 지원했지만, 결코 믿을 수 없는 동맹으로 대우했다. 미군은 한국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통제하고자 했다. 미군의 노력은 빛을 발했는데, 미국 측은 1954년 9월 한국군이 이승만의 지시 하에 단독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정황을 곧바로 포착해 경고로 막을 수 있었다. 이승만의 공격적인 동맹 구상이 오히려 통제를 위한 성격의 동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상에서 일부 소개한 바, 나의 박사학위논문은 이승만 개인의 한미동맹 구상이 어떤 식으로 한미관계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미·중 갈등을 추동하려 했는지 해명하려 시도했다. 앞으로는 냉전사와 미중관계의 측면에서 연구를 확장하려 한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움직임이 미중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시아의 냉전 구도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보다 큰 그림에서 분석하려 한다. 또한 한국사의 측면에서는 이승만의 냉전적 외교가 국내정치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파고 들려 한다.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연구를 끌고 나가려 한다.
 
 
5. 과거가 현재를 돕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다
 
 
소설가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1980년 5월 광주를 이야기했다. 그녀가 열두 살에 광주 사진첩을 몰래 읽으면서 시작된 화두였다. 한강은 처참하게 살해된 시민과 학생들의 사진을 보며,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그러다가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설로 준비하면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을 발견했다. 한강이 발견한 순간 중의 하나가 2024년 12월 3일의 계엄령에 맞선 사람들이 아닐까. 과거 공포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고,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그러모아 국회로 모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역사가의 책무 중 하나는 죽은 자의 이야기를 산 자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산 자들이 더 나은 사회를 살 수 있도록, 과거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과거에 매몰된 이분법적 시각, 반공주의적 시각을 극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그랬듯이, 여전히 아직도 반공주의 시각에서 미국을 도와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발상은 강고하게 한국사회 일각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에 기반 한 외교는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 이제는 과거의 일로, 역사가 평가할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