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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를 고대의 시선으로 ⑥] 근초고왕의 바다 도전기, 그는 정말 바다의 영웅인가?_임동민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2.09 BoardLang.text_hits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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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월(통권 59호)

[기획연재] 
 
 

근초고왕의 바다 도전기, 그는 정말 바다의 영웅인가?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한국사의 영웅적인 인물은 역사 관련 콘텐츠에서 주인공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 인물은 기록의 부족으로 인하여, 역사 콘텐츠로 만들어진 사례가 많지 않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21세기 이후 백제사의 인물을 단독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역사 드라마가 2편 정도 제작되었다. 
 
첫 번째 작품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SBS에서 방영한 ‘서동요’(연출 이병훈)이다. 이 작품은 무왕의 성장 과정 및 선화공주와의 연애 이야기에 주목한 드라마였다. ‘서동요’는 고증에서 몇몇 문제를 노출하였지만, 극의 완성도나 이야기의 개연성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최고 시청률 21.4%를 기록하면서,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물론, 드라마 방영 이후 발굴된 익산 미륵사지 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후 ‘사택씨’가 확인되어, 선화공주와의 사랑 이야기가 퇴색된 측면이 있지만, 이것은 드라마 방영 당시 열기와 상관없는, 나중의 일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2010년 말부터 2011년까지 사극의 명가 KBS에서 방영한 ‘근초고왕’(연출 윤창범, 김영조)이다. 제일 중요한 근초고왕 역은 배우 감우성이 맡았다. 그는 2006년 SBS 드라마 ‘연애시대’의 성공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많은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배우였다. 하지만 큰 기대와 달리, 드라마 ‘근초고왕’은 최고 시청률 12.9%를 간신히 기록하였을 뿐,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만 드러냈다.
 
이 드라마는 이문열의 역사소설 ‘대륙의 한’을 원작으로 하였다. ‘대륙의 한’은 1995년 발표한 대하소설이며,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으로 오욕의 세월을 견딘 백제의 넋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문열은 백제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백제 역사의 영광인 근초고왕이 왜구를 무찌르고, 고구려를 제압하고, 서해를 건너 요서를 경략하였다는 이야기에 주목하였다. 저자는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80년대부터 약간씩 이야기를 출판하다가, ‘대륙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완결을 지었다고 한다. ‘대륙의 한’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백제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근원을 대륙에서 찾고 있으며, 이곳을 상실하면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잊고 말았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근초고왕이 바다 건너 요서 지역을 경략하고 백제의 무대를 대륙으로 넓혔을까? 정말 영웅적인 그의 활약이 사실이고, 대중들이 그의 이야기에 큰 공감을 표하였다면, 드라마 ‘근초고왕’은 왜 실패한 드라마로 인식되고 있을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드라마 ‘근초고왕’, 소설 ‘대륙의 한’은 모두 근초고왕을 백제사의 영웅이자, 바다의 영웅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해양수산부에서는 2016년 6월부터 홍보하기 시작한 이달의 해양역사인물 중에 첫 번째로 백제 근초고왕을 선정하였다. 해양수산부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서해를 제패하고 일본과 중국, 동남아까지 진출한 동아시아 해양군주라고 묘사되어 있다. 백제는 근초고왕 덕분에 한국, 중국, 일본까지 세력을 떨친 강력한 해양제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백제 근초고왕에 관한 대중적인 인식은 위에서 살펴본 소설, 드라마,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해양역사인물 소개를 통해 충분히 확인되었다.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근초고왕은 고대국가 백제를 성립하고,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바다를 건너 요서, 일본 등에 진출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중적 인식과 교과서의 서술이 어느 정도 연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근초고왕은 백제를 전성기로 이끈 영웅이었을까? 바다를 통해 요서, 일본 등으로 진출한 영웅이었을까?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영웅이었을까? 이번 연재에서는 근초고왕을 둘러싼 시대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고, 근초고왕의 바다에 대한 도전을 정리한 뒤, 기존 연구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앞으로 근초고왕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살펴보고자 한다.1)
 
 
2. 근초고왕을 둘러싼 시대 배경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영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을 둘러싼 시대 배경은 모든 측면에서 주인공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한다. 주인공은 이에 용감하게 도전하여,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간다. 근초고왕이 정말 영웅이었는지 살펴보려면, 그를 둘러싼 시대 배경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이전, 중국에서는 통일 왕조 한이 무너지고, 삼국시대를 거쳐, 3세기 후반 서진의 통일기를 맞았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해양 교류는 먼 거리를 잇는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장거리의 연안항로는 중국에서 한국을 지나 일본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중원에 한, 위, 서진 등의 왕조가 있었고,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에는 낙랑군, 대방군이 있었다. 이들에 의하여 장거리 연안항로 활용에 필요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고, 삼한이나 왜의 여러 세력이 해양 교류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항로는 『삼국지』 왜전의 대방군에서 왜까지 이르는 경로로 확인된다.2) 기존 연구에서도 연안항로 중심의 해양 교류에 주목하였다.3) 최근에는 중국의 강력한 통일왕조가 황제의 덕을 널리 펴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사행 교역’이라는 형식으로 연안항로 중심의 해양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4) 장거리의 연안항로를 항해하려면 여러 기항지를 경유하면서, 연안의 해양정보를 파악하고 보급을 받아야 하는데, 중국 왕조와 군현은 장거리 연안의 기항지들을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하였다.

이러한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가 유지되고 있던 시기, 백제는 ‘마한주’의 이름으로 마한 여러 소국과 함께 서진에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5) 그런데 3세기 말부터 이러한 교섭 기사는 완전히 사라지고, 372년 근초고왕에 의한 동진 교섭 시점까지 공식적인 교섭 기록이 단절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동아시아의 급격한 정세 변화와 관련된다. 3세기 말, 서진은 여러 왕의 권력 투쟁, 이를 틈 탄 유목민족의 남하로 인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결국 316년 서진은 멸망하였고, 중국 화북지역에는 여러 유목민족이 복수의 국가를 세운 ‘5호 16국’ 시기가 시작되었다. 진 왕조는 강남 지역으로 피난하여, 317년 동진을 건국하였다. 동진은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내부 혼란을 거듭하였으며, 화북 지역의 왕조들과도 대립을 지속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 고구려는 중국의 혼란을 틈타, 313년에 낙랑군6), 314년에 대방군7)을 소멸시켰다. 서진의 혼란과 낙랑군, 대방군 소멸은 이전 시기까지 유지되던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의 재편을 의미하였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중원 왕조 중심으로 장거리의 네트워크가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고구려에 소멸된 낙랑군, 대방군은 곧바로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에 편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약 100여 년 동안 중국 문화를 유지하면서 벽돌무덤 등을 축조하고, 동진 등과의 교류를 지속하였다.8) 이 지역의 사람들은 군의 소멸 이후에도 중국계 문화를 유지하면서 강남 지역 동진과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9)
 
한강 유역의 백제는 3세기 말 책계왕과 분서왕이 낙랑태수 등의 공격으로 죽임을 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즉위한 비류왕은 41년간 재위하면서 대체로 백제 내부 체제를 정비한 왕으로 평가받는다.10) 비류왕 사후, 계왕을 거쳐,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11)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이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바로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은 백제 왕실의 초기 계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도 주인공의 즉위까지 왕실 내의 다양한 갈등을 다루었다. 과거 연구에서는 백제의 초기 왕실을 고이왕의 후손인 고이계와 초고왕의 후손인 초고계로 나눠보는 경향이 컸다. 비류왕은 초고왕의 후손인 초고계였는데, 그의 사후 즉위한 계왕은 고이왕의 후손으로 고이계였다. 계왕 사후, 다시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고이계와 초고계의 대립 속에서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 사후 아들 근구수왕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백제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즉위는 고이계에서 초고계로의 변화, 부자상속이라는 관점에서 관심을 받았다.12)
 
지금까지 근초고왕을 둘러싼 시대 배경을 살펴보았다.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서진의 혼란과 멸망, 낙랑‧대방군의 소멸, 백제와 낙랑의 갈등, 고구려의 성장, 동진의 등장과 16국의 성장 등 급격한 시대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원 왕조, 낙랑군과 대방군 중심으로 왜까지 이어지던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는 서서히 경색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낙랑‧대방 지역과 동진, 가야 여러 나라와 왜 등의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장거리의 네트워크는 경색을 피하기 어려웠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대외적 배경 속에서 즉위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왕실 계보의 갈등이라는 문제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3. 근초고왕의 바다에 대한 도전 – 기존 연구에 관한 비판적 접근
 
 
근초고왕은 자신을 둘러싼 시대적 한계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도전은 바다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기존 연구와 대중적인 인식에서 근초고왕을 일종의 해양 영웅으로 생각하였던 이유는 그가 북쪽, 서쪽,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대국가 백제를 발전시키는 한편, 이러한 영토 확장을 통하여 바다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였던 인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북쪽의 상황을 살펴보자. 백제는 고구려의 낙랑, 대방군 소멸 이후,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근초고왕 24년(369) 9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 지역을 약탈하였다.13) 백제는 369년 이전부터 치양을 영역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치양은 일반적으로 황해도 배천으로 비정되는데,14)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조강, 예성강 하구, 그리고 경기만 연안으로 연결되는 수운과 해운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공격을 맞아,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수곡성 서북까지 진군하였다.15) 수곡성은 일반적으로 황해도 신계로 비정되며,16) 예성강 상류에서 평양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이를 기반으로,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에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17) 이듬해인 근초고왕 27년(372), 백제는 ‘백제왕’의 이름으로 처음 동진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 30년(375)에 고구려가 다시 수곡성을 함락시켰고, 백제의 탈환 시도는 끝내 실패하였다.18)
 
백제는 황해도 남부를 영역으로 삼고, 예성강 상류의 수곡성을 두고 고구려와 쟁탈전을 벌이다가, 한때 평양성 공격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는 즉위 이후 평양성을 재차 침공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19) 그의 후손인 진사왕은 386년에 황해도 남부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20)
 
물론, 371년의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 372년 ‘낙랑태수’ 책봉 등을 고려하면, 근초고왕이 낙랑군의 옛 땅까지 모두 영역으로 확보하였을 개연성도 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근초고왕은 낙랑군 지역을 확보하여 이전 시기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다시 회복한 해양 영웅으로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보이는 전투기록은 대체로 황해도 일대에 국한되고 있으므로, 백제가 낙랑군의 옛 땅을 모두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진에서 근초고왕을 ‘낙랑태수’로 책봉한 것은 낙랑 지역의 실제 지배권과 무관한, 상징적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백제의 서쪽을 살펴보면, 거대한 황해가 중국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황해를 건너, ‘대륙’에는 요서 지역이 위치한다. 소설 ‘대륙의 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요서진출설’의 논지는 대체로 4세기 말 무렵, 혹은 4세기 중후반부터 요서 주변에서 확인되는 백제의 활동, 특히 백제의 군 설치 기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 남조의 사서에 남아있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화하여, 현재까지 막대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최근까지도 백제의 일시적 진출이나 교역로, 거점 확보로 보는 긍정론과 기록의 오류로 파악하는 부정론이 대립하고 있다. 최근의 긍정론에서는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동진 관계, 해양 활동 등에 관심을 두면서, 요서 지역을 해양활동 및 동진 관계의 거점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21)
 
이번 연재에서 ‘요서진출설’을 본격적으로 다룰 여유는 없다.22) 다만, 진출 배경에 대한 긍정론의 논의를 해양사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백제가 4세기 중반, 혹은 그 이후에 요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려면, 낙랑군과 대방군의 소멸, 화북 지역의 혼란 속에서 장거리 연안을 항해하여 대규모 함대를 보내야 하였다. 긍정론의 입장에서는 백제가 동진과 통하는 해양 요충지를 요서 지역에서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만약, 백제 근초고왕이 동진과 관계를 맺는데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해야만 하였다면, 당시 백제와 동진의 항로는 장거리의 황해 연안을 따라가는 연안항로인 동시에, 랴오둥반도에서 산둥반도로 직접 넘어가지 않고, 발해만 연안을 따라 요서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항로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미 선사시대부터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가 활발하게 활용되었다. 백제 근초고왕 시기에도 중국의 여러 왕조는 이 항로를 빈번하게 이용하였다. 그렇다면, 백제가 발해만 연안의 요서 지역까지 굳이 들어갈 이유는 적었을 것이다. 요서 지역은 화북 지역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육로의 중요한 요충지이지만, 항로의 관점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해양사적인 이익은 대단히 불확실하다. 결론적으로 백제의 ‘요서진출’은 남조 사서에 잘못 기록된 사건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남쪽 영역은 마한 문제와 관련된다. 근초고왕의 시기를 전후하여 마한의 명칭은 동아시아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중국 기록에는 마한 대신에 백제 사신이 왔다거나,23) 마한이 백제에 병탄되었다는 기록만 확인된다.24) 기존 연구에서는 4세기 이후 경기-충청-전라를 포괄하는 마한의 전체 영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고 보기도 하였다.25)
 
또한 『일본서기』 신공 49년 기사에는 백제가 해남, 강진으로 추정되는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전북 일대로 추정되는 세력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한다.26) 과거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120년 인하하여,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영산강 유역의 마한까지 정복한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였다.27) 하지만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늘어나면서, 현재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이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전역을 직접지배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기보다, 거점을 확보하였거나, 간접지배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28)
 
근초고왕 시기, 마한이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교섭을 진행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사료에 더 이상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초고왕이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전체를 ‘지배’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고학적으로 백제 ‘지배’의 근거로는 백제왕의 위세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활용되지만, 4세기 후반까지 ‘위세품’은 금강 유역의 북쪽 정도에 이르렀을 뿐이고,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29) 영산강 유역에서 백제 위세품은 5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4~5세기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지만, 독자적인 ‘교섭’을 하지 못하던 상황으로 생각된다.
 
지배 없이 대외교섭이 통제되는 단계는 국가의 ‘영역’으로 보기는 어렵고, ‘세력권’이라는 개념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력권 단계의 지역 세력은 대외교섭권을 박탈당하였지만 ‘교류’와 ‘내정’의 영역에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결론적으로 백제 근초고왕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전체를 영역으로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4세기 이후 마한 교섭 기록의 단절, 금강 유역 이북의 위세품 확산은 분명하므로, 백제가 마한 일부를 지배하면서, 전체를 ‘세력권’에 편입시켰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백제의 지배력 확대, 세력권 편입의 원동력은 동진과의 빈번한 교섭, 교류를 통한 중국 창구의 확보에 있었을 것이다, 이전 연재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동진 도자를 위세품으로 지방에 사여하는 것도 이러한 원동력과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남쪽 영역은 가야 관계와도 연결된다. 과거 연구에서는 백제 근초고왕의 가야 정복 혹은 영향력 행사라는 관점에서 백제와 가야 관계를 살펴보았다.30) 이러한 흐름은 『일본서기』 기록을 백제 주체로 변환하는 연구 시각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일본서기』의 사료비판 심화, 고고학적 연구의 축적은 독자적인 가야 여러 나라의 운동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주었다.31) 최근 연구에서는 『일본서기』의 고대 한국 관계 기록을 백제계 사서의 편찬 과정과 『일본서기』의 편찬 과정에서 일어난 이중의 굴절에 주의하여 보려는 경향이 확인된다. 아울러, 가야 지역에서 급증한 고고학적 연구를 고려하면, 4세기 후반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의 ‘지배’는 물론이고 ‘영향력’의 확대도 확인하기 어려우며, 영산강 유역부터 함안, 고성, 김해 등으로 이어지는 연안을 통한 해양 교류의 양상 정도를 인정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백제 근초고왕이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고 이해한 배경에는 왜와의 해양 교섭, 교류가 있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근초고왕이 영산강 유역과 가야의 여러 지역을 확보하여, 왜까지 연결되는 항로를 차지하였고, 이를 통하여, 왜와 빈번히 교섭하여 고구려 전쟁에 필요한 우방을 확보하였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비판적 관점을 고려하면,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장거리의 연안을 직접 ‘지배’하거나 ‘영역’으로 확보하였다고 볼 여지는 적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은 정말 바다의 영웅인가?
 
 
4. 그는 정말 바다의 영웅인가?
 
 
근초고왕이 북쪽으로 낙랑군의 옛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바다 건너 멀리 요서 지역까지 확보하는 한편,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과 가야까지 영역으로 편입하였다면, 중국 왕조 중심으로 유지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강력한 형태로 회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한, 서진 등의 중국 통일왕조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륙’의 요서 지역부터,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 지역, 그리고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모두 백제라는 단일한 국가가 지배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거리 연안항로를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근초고왕의 영역 확장은 북쪽, 서쪽, 남쪽 방향에서 모두 다시 살펴볼 여지가 크다. 근초고왕은 북쪽으로 낙랑군의 옛 지역을 모두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황해도 남부를 영역으로 하면서 고구려와 대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요서진출설’에 대해서는 학계 논쟁이 남아있지만, 해양사의 관점에서 백제가 요서 지역까지 굳이 진출하여 거점을 확보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또한 근초고왕이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 가야 일대까지 ‘지배’하였다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근초고왕은 최소한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세력의 대외교섭권을 통제하고, 가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은 정말 바다의 영웅이었을까? 그가 바다를 활용한 방식은 어떠하였을까? 그가 바다에 도전하였다면,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은 기록에 비교적 명확히 남은 근초고왕 시기의 해양 교섭을 통하여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백제와 왜의 교섭은 4세기 후반 『일본서기』 신공기에 가야의 탁순국 중개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32) 사료의 신뢰도 문제가 남아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왜의 교섭이 아신왕 6년(397)부터 나타나고 있어서,33) 근초고왕대 왜와의 교섭은 금석문을 비롯한 다른 자료와의 비교 검토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하여 주목되는 자료는 칠지도이다. 칠지도의 제작시점과 제작목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남아있다. 제작시점은 백제 전지왕, 무령왕 시기로 보기도 하나, 4세기 후반 동진의 연호 혹은 근초고왕의 독자 연호로 보는 견해가 많다. 백제의 독자적 연호 활용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고, 당시 강남지역부터 낙랑, 대방지역에 이르기까지 동진 연호의 활용이 광범위하게 확인된다는 점 등을 종합하면, 동진 연호로 보아 4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는 견해가 합리적이다. 칠지도의 제작목적에 관하여, 최근 연구에서는 백제가 고구려 전쟁에 필요한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구하기 위하여 왜에 보낸 외교적 선물로 이해하고 있다.34) 이러한 당시 금석문 자료를 종합해보면,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은 고구려 전쟁에 필요한 지원을 끌어내기 위하여, 왜와 처음 교섭에 나섰다. 교섭 방식은 왜에 도달하는 연안항로에 익숙한 가야 탁순국의 도움을 얻어, 바다를 건너 왜와 통하는 방법이었다.
 
다음으로는 동진과의 교섭을 살펴보자. 백제는 근초고왕 27년(372)에 처음 동진에 ‘백제왕’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냈고, 같은 해 ‘낙랑태수’로 책봉을 받았다. 그 이후, 근초고왕 28년(373)에 백제가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고,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전지왕에 이르기까지 동진과의 교섭 기사는 379년 실패한 사행 1회를 포함하여 총 10회에 걸쳐 확인된다.35) 근초고왕의 동진 교섭은 3세기 후반 마한 교섭기사 이후,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한반도 중남부 정치체의 중국 교섭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백제는 장기간의 경색을 뚫고, 가야, 신라 등 다른 정치체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근초고왕대 이루어진 백제와 동진, 왜의 교섭은 모두 바다를 건너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기존 연구에서는 백제와 동진의 교섭을 전통적인 항로인 황해연안항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경향이 많았다.36) 이러한 경향에서는 3세기까지 중원 왕조와 낙랑군, 대방군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가 4세기 초에 경색되었다가,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이 연안항로 요충지인 낙랑군의 옛 땅을 지배하고 낙랑태수로 책봉받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동진과의 연안항로 교통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였을 가능성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황해연안항로로 백제 한성에서 동진 건강까지 간다면, 백제의 적대국인 고구려, 동진의 적대국인 전진이 점령한 약 2,300km의 장거리 황해 연안을 항해해야 하였다. 물론 고대에 해상 공격은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적대국 연안을 멀리 바라보며 항해하였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2,300km의 장거리 연안항해는 반드시 연안 포구에 기항하여야 하므로, 적대국 연안에서의 장기간 항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 견제라는 목적에서 동진과 교섭하였는데, 이때 사신선이 백제와 동진의 가장 큰 적대국 연안을 안전하게 통과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는 경기만 일대에서 산둥반도를 향하는 황해중부횡단항로였다. 백제 근초고왕은 황해중부횡단항로의 출항지인 황해도 남부를 확보하였으며, 낙랑‧대방지역 유민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항로 활용에 필요한 경험, 기술, 정보를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항로로 빈번하게 진행된 백제와 동진의 교섭은 동진의 발전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백제에서 수용하였을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백제와 왜의 항로는 마한과 가야 지역을 거치는 장거리의 서남해안 연안항로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 근초고왕의 영역 확장에 주목하는 경향에서는 마한과 가야 연안 지역을 근초고왕이 확보하여, 장거리 연안항로를 안전하게 항해하여 왜와 교섭에 나섰다고 보았다. 그러나 백제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광활한 영역을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백제는 기존 연안항로의 여러 세력을 일원적으로 ‘지배’하지 못하였다. 근초고왕은 대체로 금강 유역의 북쪽까지 위세품을 사여하면서 간접적으로 ‘지배’하였고,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전체의 대외교섭권을 차지하여 ‘세력권’에 넣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중개를 통하여 왜에 도달하였다. 4세기 초 이후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의 경색에도 불구하고, 남해안의 가야 세력들은 연안항로를 통하여 왜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다. 백제는 가야 여러 나라의 세력 변동에 발맞추어, 우호적 관계를 맺으면서 왜까지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구조는 3세기까지 유지되던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근초고왕이 백제 중심으로 재구축한 결과였다. 다만, 근초고왕은 장거리 연안항로의 모든 경유지를 일원적으로 지배하지 못하였다. 근초고왕은 간접지배, 세력권, 우호관계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연안의 기항지를 연결하여, 네트워크의 형태로 장거리 연안항로를 백제의 국가적 의도에 맞도록 활용하였다.
 
 
5. 나가며
 
 
이번 연재에서는 근초고왕에 관한 대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기존 연구의 이해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근초고왕이 바다에 도전하였던 방식을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기존 연구의 경향과 대중적인 인식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북쪽으로 낙랑군의 옛 땅을 확보하고, 서쪽으로 황해를 건너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해양 교통의 거점을 확보하고,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마한 전역을 ‘지배’하였던 인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북쪽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고구려와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고, 남쪽으로 금강 유역의 북쪽을 간접지배, 마한 전역을 세력권에 편입하고, 가야 여러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것으로 이해된다. 요서 진출과 관련하여, 긍정론에서 말하는 해양사적 배경은 동의하기 힘들며, 근초고왕이 막대한 자원을 투여하여 요서 지역에 거점을 유지할 해양사적 이유는 부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초고왕은 황해중부횡단항로를 통하여 동진과의 빈번한 교섭에 나섰고, 이를 또 다른 원동력으로 삼아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다시 구축하여 왜와의 교섭에 나섰다.

해양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백제 근초고왕 시기를 살펴보면, 백제는 장거리 연안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지 않았으나, 다양한 방식으로 연안의 기항지를 연결하여, 3세기까지 유지되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재구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는 다양한 주체의 다원적인 교류 속에서 유지되었다. 가야, 왜 등의 세력은 4세기 이후 기존 연안항로 네트워크가 경색된 상황에서, 새롭게 동진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백제를 통해야 중국과 연결되었다. 근초고왕은 황해중부횡단항로로 동진과의 빈번한 관계를 시작하였고, 이를 근간으로 연안의 기항지를 연결시켜, 장거리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재구축하고, 왜와의 빈번한 관계를 시작하였다.

근초고왕은 4세기 동아시아 정세변동의 한계 속에서 새로운 항로를 통하여 동진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3세기까지 중원 왕조와 군현 중심으로 유지되던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근초고왕은 중원 왕조나 군현이 소멸된 상황에서 새로운 항로로 동진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한편, 백제 중심으로 기존에 있던 다원적인 질서를 재구축하였다.

소설 ‘대륙의 한’, 드라마 ‘근초고왕’이 보여주는 근초고왕은 근현대 한국사의 굴곡 속에서 상실한 주권, 국토, 국민을 백제의 시공간 속에서 바다를 통하여 되찾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백제 근초고왕은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바다를 건너 요서와 일본에 진출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영웅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근초고왕의 이미지 속에는 바다를 정복과 진출의 대상으로 보는 욕망이 녹아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욕망을 걷어내고, 고대의 시선에서 근초고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동아시아 정세변동 속에서 즉위하여,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시에, 새로운 항로로 동진과 빈번한 교섭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이전까지의 장거리 연안항로 네트워크를 회복시켜 왜와도 교섭하였다. 근초고왕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다양한 주체의 다원적인 질서를 온존하는 방식, 즉 해양 네트워크의 형태로 동아시아의 바다에 도전하였다. 근초고왕의 바다 도전기는 ‘진출’, ‘제패’, ‘해양제국’과 같은 키워드 없이, 고대의 시선에서 그리고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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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하의 서술 가운데 일부는 최근에 발표한 다음의 글을 대폭 수정, 요약한 것이다. (임동민, 2024, 「4세기 동아시아 정세변동과 백제 근초고왕에 관한 해양사적 이해」, 『2024년 하반기 한국고대사탐구학회 학술대회 ‘고대 동아시아의 변혁과 리더’』).
2) 『三國志』卷30, 魏書 列傳30 烏丸鮮卑東夷傳 倭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3) 이현혜, 1994, 「삼한의 대외교역체계」, 『韓國史學論叢:李基白先生古稀紀念 上 古代篇·高麗時代篇』, 一潮閣, 42~44쪽.
4) 김병준, 2019,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 네트워크와 사행 교역」, 『한국상고사학보』106.
5) 『晉書』卷97, 列傳67 四夷 東夷 馬韓
6) 『三國史記』卷17, 高句麗本紀5 美川王 14年(313) 冬10月 ; 『資治通鑑』卷88, 晉紀10 愍帝 建興元年(313).
7) 『三國史記』卷17, 高句麗本紀5 美川王 15年(314) 秋9月.
8) 이와 관련한 상세한 연구 동향 정리는 최근의 책이 참고된다(안정준, 2024, 『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 역사비평, 29~59쪽).
9) 임동민, 2016, 「백제와 동진의 교섭 항로」 『백제학보』17, 87~89쪽.
10) 姜鍾元, 1999, 「百濟 比流王의 卽位와 政局運營」 『韓國上古史學報』30, 92~97쪽.
11)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契王 卽位年(344) ;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肖古王 卽位年(346).
12) 이기백, 1959, 「백제왕위계승고」, 『역사학보』11 ; 이기동. 1981. 「백제 왕실교대론에 대하여」, 『백제연구』12 ; 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3)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肖古王24年(369) 가을9月.
14) 『新增東國輿地勝覽』卷43 黃海道 白川郡 ; 李丙燾, 1975, 「近肖古王拓境考」, 앞의 책.
15)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仇首王 즉위년(375).
16) 『新增東國輿地勝覽』卷43 黃海道 新溪縣 ; 李丙燾, 1975, 「近肖古王拓境考」, 앞의 책. 
17)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肖古王 26년(371) 겨울
18)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肖古王 30년(375) 가을 7월
19)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近仇首王 3년(377) 겨울 10월
20) 『三國史記』卷25 百濟本紀3 辰斯王2年(386).
21) 강종훈, 2003,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 2015, 「『晉書』 慕容皝載記와 『資治通鑑』 晉穆帝紀 所載 ‘百濟’ 관련 기사의 사료적 가치」, 『대구사학』121 ; 정재윤, 2005, 「중국 사서에 보이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고찰」, 『한성백제 사료연구』, 경기문화재단 ; 2018, 「중국 요서(遼西) 지역에 보이는 백제의 실체」, 『동북아역사논총』61.
22) ‘요서진출’ 관련한 최근의 사료 분석과 연구 동향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백길남, 2017, 「‘百濟略有遼西’ 記事의 기술 배경과 漢人 유이민 집단 : 晉平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86 ; 정재윤, 2018, 앞의 논문).
23) 『梁書』卷54, 列傳48 東夷 序 “魏時朝鮮以東馬韓辰韓之屬世通中國 自晉過江泛海東使有高句驪百濟 而宋齊間常通職貢 梁興又有加焉”
24) 『通典』卷185, 邊防1 弁辰 “晉武帝咸寜中馬韓王來朝 自是無聞 三韓蓋爲百濟新羅所吞幷”
25) 노중국, 2013, 「백제의 영토확장에 대한 몇가지 검토」,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쟁점백제사2), 한성백제박물관 ; 이 책의 뒷부분에 실린 종합토론 내용이 참고된다.
26) 『日本書紀』卷9 神功皇后49年 春3月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 自然降服”
27)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11~514쪽 ;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117~121쪽.
28) 이와 관련한 연구사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임동민, 2022, 『백제 한성기 해양 네트워크 연구』,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71~172쪽 표19).
29) 성정용, 2001, 「4~5세기 百濟의 地方支配」 『한국고대사연구』24 ; 이한상, 2009,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 강종원, 2012, 『백제 국가권력의 확산과 지방』, 서경문화사 ; 임동민, 2022, 앞의 논문, 174~198쪽.
30) 千寬宇, 1977~1978 「復元加耶史 上中下」 『文學과 知性』 28·29·31 ;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 金鉉球, 1993 『任那日本府硏究-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 一潮閣.
31) 『일본서기』 신공기와 관련한 연구 동향 및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한 연구 동향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김태식, 2005 「4세기의 한일관계사」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1권 ; 이영식, 2006 「가야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 『한국고대사입문 2』, 신서원 ; 김량훈, 2007 「4~5세기 남부 가야제국과 백제의 교섭 추이」 『역사와경계』 65, 183~184쪽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20, 『가야 역사·문화 연구 총서Ⅰ-연구사-』 ; 신가영, 2020, 『4~6세기 加耶 諸國의 동향과 국제관계』,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유우창, 2021, 『4~6세기 가라국의 대외관계사』, 부산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32) 『日本書紀』卷9 神功皇后 46년 봄 3월, 47년 여름 4월
33) 『三國史記』卷25, 百濟本紀3 阿莘王 6년
34) 칠지도와 관련한 연구동향의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임동민, 2022, 앞의 논문, 136~139쪽).
35) 관련 사료의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임동민, 2016, 「백제와 동진의 교섭 항로」 『백제학보』17).
36) 權悳永, 1997, 『古代韓中外交史』, 一潮閣, 199~203쪽 ; 강봉룡, 2002, 「고대 동아시아 海上交易에서 百濟의 역할」 『韓國上古史學報』38 ;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 시점과 관련한 연구 동향의 정리는 다음이 참고된다(임동민, 2016, 앞의 논문 ; 2021, 「고대 황해 교섭‧교류 항로와 경기만」 『백제학보』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