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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④] 논산 지역사 자료수집과 지역 현대사 자료_박범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2.09 BoardLang.text_hits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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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월(통권 59호)

[기획연재] 
 
 

논산 지역사 자료수집과 지역 현대사 자료

 


박범(중제2분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역사 자료수집 사업의 참여
 

논산 지역사 연구를 논산포와 논산장의 역사 전개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밝혀볼 수 있다는 생각과 이제 지역사 연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며 박사논문 작성에 매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찰라, 2017년 봄, 지역사 자료수집에 응모해 보라는 선배 연구자의 권유를 받았다. 하루에 한번 이상은 항상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접속을 하지만 지역사 자료수집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2004년부터 지역별 자료 수집을, 2006년부터는 주제별 자료 수집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지역사 자료수집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업 공고에 따르면 지역에 소장된 정보 자료를 축적하고 기초 자료 수집을 통해 지역사에 대한 관심을 재고하면서 지역사 편찬 및 서술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본 사업의 취지였다. 개별 연구 과제에 대해서는 익숙해 있었지만, 체계적인 자료 수집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이 전무했다.

내가 있던 건양대 충남지역문화연구소의 소장님과 상의해 본 결과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지역별 자료 수집의 경우 읍면동 단위로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2017년 당시에는 충남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지역별 자료 수집이 매우 저조한 상태였고, 다행히 논산시의 읍면동은 아무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신청해 보기로 했다.

신청하기에 앞서 우선 자료 소장처와 목록 및 수량 정보가 확보되어야 했다. 신청서에는 해당 내용이 모두 사전 조사되어 있어야 했다. 우리는 두 방향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하나는 논산시청을 통한 공공기록물을, 다른 하나는 논산시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소장 자료를 조사하고자 했다. 양쪽 모두 오래 논산 지역에 거주하신 소장님이 진행하셨다. 지역사 자료는 예나 지금이나 연구자가 도와달라고 해서 해당 소장처 및 소장자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랜 기간 지역에 거주하신 소장님의 인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시청 기록물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나는 논산시청 기록물을 전담하게 되었고, 개인 기록물은 소장님께 맡으셨다.

논산시청 기록물은 공식적으로 지자체에서 근무하는 기록연구사를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부분 문화유산은 학예연구사를 통해 사업이 진행되었으나 시군청 서고의 기록물은 모두 기록연구사의 담당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논산시청 기록연구사와 협의를 통해 자료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갈등을 빚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국가기록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보통 기록연구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말하고, 역사연구자는 소장 자료 전체 목록을 달라고 요구한다. 기록연구사는 특정 주제가 정해지면 해당 자료를 찾아주려 하지만, 역사연구자는 목록을 통해 스스로 자료를 선별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논산시청 기록물 전체 목록이 필요했다. 국가기록원의 경우 전체 목록이 이미 DB화되어 있어서 홈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지만, 지자체 기록물은 전혀 외부에 공개되어 있지 않고, 정보공개청구를 통해서만 확보가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기록연구사를 통해 1965년 이전에 생산되어 논산시청 서고에 소장된 목록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걸 통해 어떠한 자료를 선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장님과 시청의 고위공무원 간에 이미 합의가 된 사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록 엑셀 파일을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공공기록물이기 때문에 외부 반출이 불가능했고, 모든 촬영은 논산시청 서고 내부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사진 촬영이 익숙하지 못한 나는 삼각대와 조명을 구매하고, 카메라로 직접 촬영을 하면서 자료의 이미지를 확보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카메라를 노트북으로 연결하여 마우스 클릭을 통해 촬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 이듬해 사업에서부터였다. 2017년 사업에서는 정말 하루종일 서서 촬영을 했다. 일주일에 2일 이상 몇 달을 촬영하다보니 몸은 점점 아파왔다. 특히 무릎이.
 
 
논산시청 서고에서 내가 본 현대사 자료들 1, <면세일람>
 
 
조선후기 전공자로 조선후기 관련 자료만 보아 오다 지역 현대사 자료가 가득한 논산시청 기록관을 보고 있으니 어떠한 자료가 중요 자료인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래서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문을 보아도 지역사 자료에 기반한 현대사 논문은 사실상 많지 않았다. 농지개혁 관련 연구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지역 인물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으며 그 마저도 중앙정부의 정책과 관련된 논문이 대부분이었다.
 
논산시청 기록관에 소장된 자료를 하나하나 열람하면서 나의 눈에 가장 인상이 깊었던 자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면세일람>이라는 자료였고, 다른 하나는 <강경번영회자료>였다. <면세일람>은 각 면별로 작성된 리(里) 단위의 통계자료집을 말한다. 지금 현재 모든 지자체에서는 통계 자료를 지자체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명칭은 대체로 <통계연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통계일람>이라는 명칭 이전에는 <군세일람> 혹은 <시세일람>이라는 이름을 불리었는데 이는 식민지시기에 간행된 <군세일반>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시군 단위로 작성된 통계자료의 한계는 통계 단위가 읍과 면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을 단위의 통계 수치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면세일람>은 리 단위까지 통계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보니 강경읍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부에서 인구 증가의 변화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논산시청 기록관에서 처음 자료를 조사할 당시에는 1970년, 1971년, 1972년, 1974년 4개년에 해당하는 논산시 각 읍면의 <면세일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2017년 당시에는 해당 자료를 모두 촬영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이미지 자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자료가 다가 아니었다. 2019년 두 번째 논산시청 지역사 자료를 조사할 당시에 논산시내 각 읍면 주민센터 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1980년대 이전 문서들이 모두 논산시청 기록관으로 이관되었는데 이 때 강경읍주민센터에서 식민지 시기 자료를 포함하여 다수의 자료들이 이관되어 있었다. 특히 강경읍의 <읍세일람>이 1955년부터 1982년까지 모두 23개년이 남아 있었다. <면세일람>의 자료적 가치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게 된 순간이었다.
 
 

그림 1. 강경읍의 <읍세일람>
 
 
아직 <면세일람>을 통한 연구 성과는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연구 성과는 차치하고 <면세일람>의 소재 파악 조차 되어 있지 않다. 앞서와 같이 대부분의 통계자료는 시군을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통계청에서 서비스하는 통계DB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면세일람>을 통한 리 단위의 사회 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 작업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한번 충청남도 시군의 <면세일람> 자료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시군에서는 “자료 부존재”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면세일람>이 없다는 말이다. 간혹 있다고 연락이 온 곳도 1~2개 년에 불과했다. 유일하게 1개 면에서 연속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심지어 어떤 지자체에서는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여 혹시 세금 관련 자료를 찾는 것인지 되묻기도 하였다. 면세(面勢)를 면세(面稅)라고 읽은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면세일람> 자료 중 시계열이 가장 긴 자료는 아마 현재로서는 강경읍의 <읍세일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정보공개청구의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결과이다. <면세일람>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했을 때 처음으로 경험해 봤고, 나중에 <면의회>자료를 정보공개 청구를 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중에 결국엔 <면세일람>의 자료를 찾았기 때문이다. 공주시청에서는 시청 기록관에 <면세일람>이 없다고 통보하였으나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주 지역사 자료수집을 통해 이미 공주시 관내 <면세일람>이 확보되었고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자료가 올라와 있다. 공주시의 공주읍을 비롯하여 10개 읍면의 <면세일람>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개년의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주 지역사 자료수집에 참여한 연구자는 해당 읍면주민센터 서고에서 <면세일람>을 촬영했던 것이다. 추정이긴 하지만 공주시청 기록연구사가 몰랐을 가능성이 높은데, 기록연구사 자료 본청 서고에 소장된 기록물 말고 읍면주민센터 서고에 있는 자료까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일 금산군청과 청양군청에서 동일하게 지역사 자료수집을 하면서 지역마다 기록연구사의 역량과 기록물 관할 범위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논산시청 서고에서 내가 본 현대사 자료들 2, <강경번영회자료>
 
 
두 번째로 논산시청 서고에서 눈에 들어온 자료는 강경번영회 관련 자료이다. 현대사 전공자가 아니니 번영회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상은 요즘 시장번영회처럼 이익단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시기 지역 번영회 관련 논문으로 유정환 선생님의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지역통치체계 재편과 유지집단의 활동-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 사례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104, 2017)가 있었다. 이 논문을 통해 괴산군 지역번영회 조직이 박정희정부 시기 유지집단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강경번영회 자료도 정확하게 이 시기 자료였다. 그래서 이들이 강경의 유지집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경번영회자료는 강경읍에 있던 단체인 강경번영회에서 논산시청에 제출한 문서군으로 탄원서 혹은 청원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논산시청 기록물로 남게 되었다. 이 자료는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확인된다. 청원서의 대체적인 내용은 “강경군”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강경은 여느 지역과는 다르게 논산시 내에서도 지역성이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공공기관이나 교육시설이 일찍이 논산시의 다른 지역보다 가장 먼저 설치되어 있었다. 최초의 학교도 강경에 있었고, 최초의 교회도 강경에 있었으며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처음 설치된 지역도 강경이었다. 논산시청은 1914년 부군폐합 당시 강경에서 논산으로 옮겼지만, 경찰서와 법원은 지금도 강경에 있다. 명칭도 한동안 강경경찰서,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이었으며 논산경찰서와 논산지원으로 명칭이 바뀐 것도 1996년의 일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알고 있다면 강경번영회의 강경군 설치 운동에 일정한 역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강경군을 설치하고자 하는 논의는 식민지 시기에도 있었다. 1923년 1월, 강경 주민들의 반발로 논산군청을 강경으로 이전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반면, 그 해 12월에는 강경군을 설치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조선총독부는 첩보로 입수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는 전라북도 익산 일부 지역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강경군 설치 문제를 비밀리에 전라북도지사에게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전라북도는 강경군 설치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에 반대하며 이를 극비리에 보고하기도 했다. 해당 내용은 국가기록원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수면 아래로 잠든 강경군 설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문서상 1961년이었다. 강경번영회가 주장하는 강경군 설치 논리는 식민지 시기와 다르지 않다. 강경번영회는 부여군 일부, 논산군 일부, 익산군 일부를 통합하여 강경군을 만들어 달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지도까지 만들어 첨부했다. 이들은 강경읍에 관공서가 많아 주민의 편의가 좋다는 점, 인근 지역이 모두 강경의 생활권에 포함된다는 점, 강경에 근대 시설이 많아 시로 승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으나 강경군 설치는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그림 2. 1961년 강경군 신설 계획도
 
 
 
논산시 지역 현대사 자료 수집의 고고학
 
 
2019년 여름, 두 번째 논산 지역사 자료수집을 진행하던 중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충남 지역에서 지역사 워크숍을 진행하니 발표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년간 충남 지역의 지역사 자료 수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의 성과에 대한 지역사 공유 차원에서 발표를 부탁한 것이다.
2019년 8월, 충청남도의회 회의실에서 “충남지역의 지역사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지역사 워크숍이 개최되었다. 박사논문을 마치고 지역사에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진행한 지역사 자료 수집에 대한 정리도 필요한 시점이었고 내 나름대로 지역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연구자에게 지역 현대사 자료 정리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앞서 소개한 두 자료를 활용하여 강경 지역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논산 지역 역사 연구의 현황과 활용-행정기관 자료를 중심으로”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하게 되었다.

크게 두 부분으로 정리했다. 하나는 논산 지역사 자료 수집의 고고학이었다. 지역사 자료수집도 나름의 역사성이 있었다. 논산의 근현대 지역사 자료수집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 자료수집은 2004년 지표 조사였다. 충남대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2004년 5월부터 10월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조사표를 보면 논산시청의 행정자료실, 호적과, 새마을과, 농지관리과 등의 공무원과 접촉을 하였으나 모두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했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논산시의 예총, 새마을지회, 논산문화원, 교육청도 방문하였으나 모두 없거나 다른 곳으로 이관했다고 하였다. 결국 당시 지표조사는 교육기관에서 학적부 자료와 졸업앨범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러한 내용은 결국 행정기관에 대한 자료의 이해가 조사원 뿐만 아니라 시청 담담당자 또한 마찬가지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근현대 지역사 자료가 본청 및 읍면 서고에 쌓여 있었으나 이들은 그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료수집은 2009~2010년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대대적으로 희망근로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국가기록원에서는 그 일환으로 본 사업을 진행했다. 추진 목표와 방향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지역 민간 기록물 중 가치있는 것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지자체에서는 54개 단체에서 참여했고 당시 충남에서는 공주시, 보령시, 서산시, 논산시가 참여했다. 논산시에서는 기록연구사 중심으로 팀이 구성되었다. 특이한 점은 당시 확보된 42,438건 중에서 지자체가 이미 서고에 보유하고 있던 기록물은 전체 기록물 중  65%나 차지한다는 점이다. 나쁘게 말하면 자신들이 이미 소장하고 있으면서 새로 발굴했다고 신고한 셈이고 좋게 말하면 논산시에서 조차 읍면에 산재한 행정기록물의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사는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전문성이 전혀 없는 조사자로 구성되었으며 지속성과 체계성을 가지기 어려웠다. 당시 신문을 보면 담당 논산시청 과장은 “논산시에서 기록물을 디지털화하고 시 홈페이지에 공개할 예정이며 책자로도 제작하여 각급 학교에 배포해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논산시 계획”이라고 말했으나 홈페이지에 없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당 내용은 국가기록원에서 제공하는 “내고장 역사찾기 사업” 사이트에서 확인가능하다.

세 번째 자료수집은 2017년 내가 있던 건양대 충남지역문화연구소 팀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행정자료는 기록연구사의 협조 아래 1970년대 이전 기록물을 확보하여 선별하였고, 민간자료는 개인의 명단을 조사하여 현지방문을 하였다. 연산면에서는 전주이씨 익안대군파의 후손 자료, 가야곡면에서는 1950~60년대 합동저수지 관리원의 행정 자료가 메인 자료였다.

네 번째 자료수집은 2019년과 2020년에 진행된 논산시 농지개혁 자료였다. 내가 논산시청 기록물 엑셀 목록에서 본 가장 많은 자료가 바로 농지개혁 자료였다. 그러나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농지개혁 자료는 국가기록원에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에는 입수 경로가 소개되어 있는데 논산시 자료의 경우 1998년, 1999년, 2009년에 이관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국가기록원이 이전된 논산시 농지개혁 자료는 모두 406건이었으며 대부분은 상환대장과 통계대장이었다. 그런데 논산시청 엑셀 목록에는 아직도 300건이 넘는 자료가 현존하고 있었다. 아마 논산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던 문서는 국가기록원으로 이전하고 남은 자료와 읍면주민센터에서 소장된 자료가 논산시청 서고에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읍면주민센터 서고에도 논산시청 서고에 이관되지 않는 자료들이 있었다. 논산시 농지개혁 자료 수집 사업을 2년동안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정말 너무 많았다.
 
 
논산시청 기록연구사와 인연
 
 
여기에서 소개하지 않았지만, 지역 단위에서 진행된 현대사 관련 주제들이 여전히 지금도 지자체 서고 혹은 기록관에 남아 있다. 정말 내가 현대사 전공자였다면 여기가 신세계구나 싶었다.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가 규장각 서고를 눈으로 직접 들여다 본 느낌이랄까. 기록연구사와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다 보니, 논산시청 기록관을 편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기록관 내 서고에 꽂혀 있던 기록물을 간소화된 행정절차로 열람할 수 있었고, 어떤 기록물이 있는지 서고 대부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날엔가 기록관으로 들어가는데 기록관 입구에 글씨가 새겨진 걸 발견했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논산시청 기록연구사 선생님도 나름의 기록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신 것인가. 사실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때 물어볼 걸.
 
 
논산시청 기록관 입구 논산시청 기록관
미정리된 기록물 정리된 기록물
그림 3. 논산시청 기록관과 내부 기록물
 
 
한 번은 기록연구사가 문의를 한 적이 있다. 논산시청 기록물을 논산시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어떠한지 물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논산시청 기록물을 국가기록원처럼 해제집 정도로 책자를 내는 것이 어떤가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기록연구사는 해당 과업이 학예연구사의 업무와 겹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기록물 책자는 몇 년 뒤에 문화재팀에서 지역사 자료 발간 사업의 일환으로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 연구비가 적어 정식 책자로 내지는 못하고 보고서로만 가지고 있다. 강경읍사무소에서 생산된 식민지시기 자료와 강경읍의회 자료, 강경읍사무소 소장 1960년 이전 행정 자료가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얼마 되지 않은 비용으로 자료를 입력해 주신 선생님들께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기록연구사의 제안에 따라서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일부 자료를 정리하여 해제를 달고 넘겨주면 기록연구사는 이를 재정리하여 논산시청 홈페이지에 올렸다. 지금도 기초 자치단체에서 기록물 서비스를 하는 것을 논산시청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보니까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최초이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논산시청 기록연구사는 현재 논산시청에 없다. 이직을 하신 모양이다. 이후에 금산군청과 청양군청에서도 자료수집을 하면서 기록연구사를 알게 되었는데 모두 이직을 했다. 기록연구사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록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논산시청 기록연구사의 경우 열쇠 관리와 주차 관리도 하고 있었다. 기록관에 내려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기초 자치단체의 기록연구사의 처우와 현실이 그 정도인 것 같았다. 청양군청의 경우 지역사 사업 중간에 이직을 해서 나는 이직한 사실도 학예연구사를 통해 나중에 알고 나서 난처한 일도 있었다. 아무튼 지자체 기록관에 소장된 지역 현대사 자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록연구사와의 인연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2019년 8월, 국사편찬위원회 제1회 지역사 워크숍
 
 
발표 내용의 두 번째는 논산시 행정자료를 통해 현대사 연구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물론 현대사 전공자가 아니라서 모든 것을 자료로만 설명했다. 크게 4가지였다.
 
  1) <면세일람> : 통계로 본 강경 동리 마을의 변화상
  2) <강경번영회자료> : 강경의 행정구역 개편 시도
  3) <농지개혁자료> : 농지개혁 문서와 논산군의 행정 사무
  4) <읍의회자료> : 강경읍 지방의회의 기능과 역할
 
몇 년간 논산시청 자료를 수집하면서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내용은 위와 같이 네 가지 주제였다. 물론 당시 발표한 내용을 학술논문으로 투고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내용은 섣부르게 소개하기에는 아직 설익은 내용이 너무 많다. 다면 지역 현대사 연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만 엿보고자 한다. 올해 이러한 논산 지역 현대사 논문을 투고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용이 방대하므로 여기에서는 <면세일람>과 <강경번영회자료>만 소개하고자 한다.
 
<면세일람>을 보면 리 단위의 통계 정리가 항목별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관련 자료는 상주인구, 연령별인구, 산업별 인구가 있고 종교와 문화 항목에는 라디오 대수, TV 청취 현황, 전등 사용이 있다. 농업 분야가 가장 많은데 경지 면적, 업종별 농가 호수, 경작규모별 농가호수와 면적, 미곡작부별 수확고, 채소류 수확고, 자급비료생산현황, 농지분배상황이 있으며 축산에는 주요 가축의 사육수를 리 단위 통계로 정리했다.
 
 
 
그림 4. 1961~1982년 강경읍 각 동리의 인구 추세
 
 
논산군 전체로 보면 사실 통계자료가 잡히는 1967년이 가장 인구가 많았고, 그 이후부터는 인구 유출현상이 줄곧 발생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경군은 논산군과 추세가 달라 1974년에 정점을 찍고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같은 군내에서도 읍면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경읍의 동리 별로도 차이가 난다. 강경읍과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 곳은 산양동, 황산동, 태평동, 남교동이었으며, 동흥동, 북옥동, 염천동, 대흥동은 강경읍 평균보다도 늦다. 강경읍 평균보다 빠르게 인구가 유출된 곳은 채운동, 채산동, 중앙동, 홍교동, 서창동이 있었다. 사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왜 동리별로 다르게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오른쪽과 같이 각 동리를 지도와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강경읍 평균보다 일찍 인구가 유출된 지역은 대개 강경읍의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강경읍 평균보다 늦게 인구가 유출된 지역은 강경읍의 중심지이거나 신시가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지역은 논산군의 평균과는 전혀 다른 인구 추세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리별 변화를 통해 매우 세밀하게 인구의 유동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면세일람』에 수록된 동리별 기초 통계 자료를 통해서 여러 가지 지역상황의 추세를 파악해 낼 수 있다. 라디오 보유 대수의 변화를 시기별, 마을별로 확인해 본다거나, 각 동리별 가축 사육의 변화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가를 추정할 수도 있다. 『면세일람』을 통해 마을 단위의 변화상을 추적해 보는 것도 지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강경번영회자료>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1990년대 초반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자 강경번영회에서는 다시 논의를 주장했다. 이번에는 익산시 망성면을 강경읍에 통합해 달라고 하면서 망성면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청원했다. 논산시의회의 회의록을 보면 청원서를 받아 만장일치로 건의문을 채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건의문은 충청남도로 이관되었는데, 충청남도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결과 자료를 받아볼 수 있었다. 이 건의문이 전라북도와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충청남도에서는 중앙정부에 문의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더 이상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1988년 11월 11일자 『중앙일보』에 “안방은 충남, 마당은 전북”이라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를 보면 같은 생활권이라고 하더라도 논산군과 익산군으로 행정경계가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기사 그대로 “이상지대”가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망성면의 16개 부락 600여 가구, 3천여 명의 주민들은 강경읍과 한 마을 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도계(道界)가 달라서 편의시설은 강경을 이용하지만, 민원과 관청의 일은 먼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조선후기식 행정구역의 불합리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발표 내용 말고도 지역사 연구에 대해서 또 하나 느끼게 된 것은 워크숍 현장에서 였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의 취지는 향토사연구자와 학술연구자 사이에 학술교류의 장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지금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지역사 워크숍을 매년 지역을 돌아가면서 개최하고 있었다. 2019년 충남에서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발표를 향토사연구자가 하면 토론은 학술연구자가 하고, 발표를 학술연구자가 하면 토론을 향토사연구자가 하도록 배치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가 무리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내 발표에서는 천안 지역의 향토사연구자 선생님께서 토론을 하셨는데, 사실상 동문서답이었다. 결국 지역사에 대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토론이 끝났다. 예산과 홍성 지역 향토사 연구자의 발표에 대해서는 신임 한국역사연구회 회장님께서 토론을 맡으셨는데, 학술연구자를 대하듯 토론을 하셨다. 결국 향토사연구자는 마음이 상했는지 종합토론을 하기도 전에 워크숍 발표장을 떠나버렸다. 물론 지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향토사연구자와 학술연구자 간에 교류를 일정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본다면 과연 생산적일 수 있는지를 매우 회의적이다. 각자의 역할이 존재하므로 그 역할에 맡게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더는 발표와 토론을 바꾸어가면서 워크숍을 진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2021년 다시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 워크숍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는 “강경”이 주제였기 때문에 강경의 현대사 자료 중에서 <읍세일람>을 본격적으로 통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주제의 통계 수치를 엑셀로 입력하고 이를 지도로 보여주는 작업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QGIS였다. 당시 아직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몰랐기에 QGIS를 다룰 줄 아는 후배 연구자에게 제작을 부탁했는데, 그 필요성은 너무 절실하게 느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프로그램은 바로 QGIS라는 생각이 이때 처음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