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이래로 한반도 중북부와 더불어 만주․연해주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주민들은 어디서 왔을까. 초기에 건국을 주도했던 것은 압록강 중류쪽에 있던 소수의 고구려인들이었다. 그러나 이후 수백 년에 걸친 영토 확장 과정에서 예(穢)․말갈(靺鞨)․한인(漢人) 등을 포함한 여러 민족들이 ‘고구려’라는 간판 아래로 모여들었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고구려에서 살기 위해 먼 곳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3세기 중반 무렵 고작 3만호 정도에 불과했던 고구려의 인구는 7세기 중반에 이르면 69만 7천호라는 숫자로 불어나 있었는데, 이는 많은 외부인을 국가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인 결과였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이런저런 계기를 통해 모여든 여러 주민계통으로 이루어진 구성체였으며, 7세기에 이르러 수․당 제국과 결전을 벌였던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다문화 이해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림 1. 덕흥리벽화고분 연도 동벽 상단: 묘주 부인의 출행도 일부
출처: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재단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고구려가 놓인 지정학적 위치도 한몫했다. 특히 4~5세기 중국 화북 지역의 동북부에서 요서-요동-고구려로 이어지는 공간은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체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놓고 상호 경쟁 및 연합을 이루기도 하는 지역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통일왕조가 붕괴된 후 이어진 장기간의 혼란 속에서 변경에 있던 중국 군현들이 차례로 소멸하고, 4세기 초반 이래 1세기 가까이 화북에서 거대한 유이민 파동이 지속되었으며, 이를 두고 여러 정치체들이 이주민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였던 현상 등은 동북부의 고구려에게도 일정한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서 4~5세기를 다룬 것은 이 시기가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의 ‘이주’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한반도의 각 국가들도 이러한 큰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관련 정책들을 수립해갔던 정황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로 들어온 외래 이주민 문제는 한국사의 전개를 동아시아라는 넓은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당시 한반도로 들어온 외래 이주민의 흔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와 관련된 역사서의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오늘날 황해도․평안도 일대에는 4세기 이래로 약 1세기 동안에 걸쳐 고구려의 기존 장례 전통과 무관한 형태의 고분들이 지속적으로 조영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요동 지역이나 화북 동북부의 전통을 계승한 무덤들이 다수 발견되는 것이다. 4세기 초반 이래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 중국계통의 고분들이 다수 나타나는 원인은 당시 동아시아 이주민들이 고구려로 대거 유입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림 2. 안악3호분 서측 곁방: 묘주인 동수의 모습
출처: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재단
그들이 만든 고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석실을 내부에 구축한 가운데, 벽면에 화려한 벽화를 그린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벽화는 무덤에 묻힌 묘주의 생애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데, 묘주가 생전에 역임했던 관직을 기반으로 한 공적(公的)인 활동의 모습들, 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표현되었다. 그 외에도 묘주의 사적(私的)인 공간, 즉 그가 생전에 거처했던 저택의 정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고분 속에 그린 벽화의 내용도 온통 중국의 제도·전통에 의거한 것들, 예컨대 묘주가 중국의 지방관인 태수·자사를 역임하는 가운데 그 권위와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관복과 기물들을 착용한 모습, 그리고 묘주를 모시는 중국 복식(服飾)의 여러 관인들을 묘사한 모습들이 보인다. 심지어 벽면에 묵(墨)으로 기록한 문구들을 검토해보면, 묘주들 가운데는 고구려에 망명한 이후에도 이주민들과 함께 거주하는 가운데, 중국의 제도 전통에 근거한 관직들을 스스로 칭하면서 일부 이주민 집단의 대표자로 자임한 정황도 발견된다. 즉 고구려에 들어온 이주민 집단들이 자기들 고향에서의 사회․문화 전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살아간 것이다.
그림 3. 덕흥리벽화고분 전실 서벽: 묘주 진의 예하 13군 태수들이 와서 조회한 모습
출처: 사회과학원, 1981 『덕흥리고구려벽화무덤』, 조선화보사
고구려는 자국 영토로 들어온 이주민들을 충분히 통제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에게 본래의 장례 전통에 따른 고분을 만들고, 더 나아가 이주민 중심의 집단 구성, 또 그들의 제도·전통에 입각한 관직명을 칭하고 살도록 허용해주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고구려가 여러 국가들과 더불어 주변 이주민들을 확보하기 위한 상호 경쟁을 벌이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계 망명인들이 자체적인 문화․전통하에서 조영했던 고분 속의 독특한 지명(地名) 표기나 중국식 관호(官號) 표기 등을 이주민 집단이 처한 현실과 그들의 관념 속에서 파악하였다. 예컨대 이 지명과 관호들 가운데는 이미 중국 내에서는 행정적으로 변경되어 없어진 과거의 명칭들도 간간이 보인다. 이에 대해 해당 기록 대부분이 현실과 관계없는 묘주의 판타지(fantasy)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고구려에 온 이주민들이 고분 내부를 꾸미는 과정에서 개칭(改稱)된 명칭보다는 그들의 기억 속에 더 익숙했던 과거의 명칭들을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벽화와 묵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주민들의 보수적인 정서와 관념 속에서 살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주목되는 것은 이주민들이 무덤 속에 벽화와 문자를 남긴 의도이다. 일단 무덤 속에 배치된 여러 벽화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스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마치 무덤 속을 이동하는 사람의 시선에 맞춰서 순차적으로 배열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벽화의 중간중간에는 그 내용을 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묵(墨)을 이용해 자세한 해설문을 남긴 경우도 보인다. 이러한 표현들이 온전히 죽은 묘주를 위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엔 이미 묘주가 생전에 익히 알고 있었을 내용까지도 너무 상세하게 소개한 점이 이상하다.
그림 4. 덕흥리벽화고분 전실 남벽 입구 서측: 묘주 진의 예하 막부의 관리들(좌), 덕흥리벽화고분 전실 서벽 상단: 유주(幽州)의 위치와 치소, 예하 속현에 대한 내용(우)
출처: 고구려연구재단 편, 2005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재단
아마도 이러한 벽화의 배치와 자세한 해설문들은 단순히 죽은 자(망자)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무덤의 벽화를 관람할 누군가를 의식한, 또 그들의 동선(動線)과 시선을 고려한 세심한 기획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분이 완성된 직후 일정 기간 동안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묘주의 가족들이 고분 내부를 일정 기간이나마 외부 사람들에게 공개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통해 관람자들에게 기대하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서는 고분 속의 다양한 전시물 제작을 기획했던 사람들이 이를 관람할 외부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했던 서사(敍事)와 그 의도에 주목하였다. 고분 속의 벽화․묵서를 통해 전시된 묘주의 생전 삶과 그가 지향했던 바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은 단지 묘주의 사적인 생각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묘주 일족과 주변 이주민들이 공유했던 정서와 이념․지향․신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지(外地)에 흘러든 같은 처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는 점차 잊혀져 가는 자신들 본래의 전통과 가치관․신앙 등을 내세워서 서로 간의 사회적 결속을 확인․강화하는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에 정착한 뒤에도 한동안 이어진 이주민 사회 특유의 정서․지향이 짙게 드러나는 자료들은 4~5세기에 한반도 서북부에 정착하며 살아갔던 이주민 집단의 사회 내부 모습을 들여다보는 창(窓)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 5. 화림격이 벽화고분 중실 동벽 우측 상단: 묘주가 부임지를 이동해 가는 모습
출처: 陳永志・黑田彰・傅寧 主編, 2015 『和林格爾漢墓壁畫孝子傳圖摹寫圖輯錄』, 北京: 文物出版社
요컨대 이 책에서는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중국계 고분에서 드러난 정보를 통해, 먼저 4~5세기 당시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역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족들을 구성원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화북의 정치적 변동과 추이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가운데 관련 정책을 조율하고 적용했던 과정을 살폈다. 또한 그러한 정책을 통해 외부로부터 유입된 망명인들이 자체 전통과 제도에 근거한 장례 전통을 중심으로 집단 내의 사회적 권위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 그 예하에 있던 일반 이주민들의 삶과 그들 간의 사회적 결속이 유지된 배경 등을 아울러 논의하였다. 이를 통해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다양한 계통의 집단들과 그들이 지닌 각기 다른 전통이 유지된 고대의 ‘다채로운’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로 다룬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고고 자료들은 고구려의 전통과는 다른 상당히 독특한 외래 문화의 전통을 지녔기에 기존에는 4~5세기 당시 고구려의 지배력이 이 지역에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혹은 고구려의 특수한 유형의 지배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그러나 일국사적 관점과 국가 지배체제 구축과정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조금 벗어나서 바라본다면, 동아시아의 거대한 ‘이주’의 흐름과 그 여파, 그리고 이를 면밀히 살피는 가운데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했던 각국의 유연한 대응 방안들, 그리고 고대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다문화’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로 다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