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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①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3.03 BoardLang.text_hits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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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2월(통권 60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1화

 


예대열(현대사분과)

 
 
 
1. 연재를 시작하며
 
  순천 출신 대표적 소설가 서정인(徐廷仁, 1936~)과 김승옥(金承鈺, 1941~)이 어린 시절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김승옥에게 그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 방학 때 서점에서 책을 사주던 동네 형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1)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서정인의 소설 『무자년의 가을 사흘』 속 ‘용완이 성’은 어쩌면 그 사람을 모티브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4년”, “키도 우리허고 같어”, “전교에서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는 일등 짜리 천재”2) 등의 묘사는 아무래도 그와 닮은 구석이 많다.
  작가 스스로 개인적 추체험을, 혹은 평단에 의해 개인적 원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3)했다고 평가받는 두 소설가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공통적으로 떠올린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주인공은 두 사람의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선배이기도 한 조명훈(趙明勳, 1931~2006)이다.
 
  조명훈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여순사건이나 순천 지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한 번쯤 들어 봤을지도 모른다. 그는 1945년 12월 겨울방학 숙제를 위해 순천의 주요 기관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60쪽 분량의 『順天의 經濟狀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순천중학교 교사 이문규는 숙제의 수준이 중학교 1학년 학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는지, 그것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2000년대 이후 조명훈의 누이 조계자(趙桂子)에게 인계했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順天의 經濟狀況』4)은 해방 당시 순천에 있던 정당과 사회단체의 강령을 비롯하여 각 면별 경제 통계 및 시내 지도 등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지금도 지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필자는 『順天의 經濟狀況』을 처음 접했을 때 우선 그 수준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조명훈의 생애를 간략히 해설한 부분에 눈이 갔다. 
  조명훈은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순천중학교에 입학해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청운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주변의 밀고로 체포되어 학교를 퇴학당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기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군 복무 중 빨치산의 습격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에 회부 되었다. 결국 그는 연좌제로 인해 한국에서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미국 유학을 선택하게 된다.
 
  조명훈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퍼먼대학교(Furman University)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남부 특유의 인종차별과 식민주의 등 아시아 문제에 관심이 없는 학풍에 실망해, 재차 프랑스 소르본대학(Sorbonne Université)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도 암울한 조국의 상황을 대비하며 비판적 지식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군 복무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탓에 더 이상 비자가 연장되지 않아 최종적으로 독일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조명훈은 독일에 정착한 후 베를린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북한 대사관에 가게 되었고, 그것이 촉발되어 ‘동백림사건’에 연루된다. 조명훈의 삶을 쫓아다녔던 냉전의 굴레는 그로 하여금 아시아 문제에 천착하게 만들었고, 본대학교(University of Bonn)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독일 외무성 산하 ‘아시아문제연구소(Institut für Asienkunde)’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북한 관련 영문 잡지인 『North Korea Quarterly(이하 NKQ)』 발간을 책임지며, 독일의 저명한 주간지 『Die Zeit』의 칼럼리스트로도 활동하게 된다. 그는 남북 관계가 전환점을 이루던 1972년과 1988년 북한을 방문했고, 냉전 시기 남북한 사이에서 평생 경계인(境界人)으로 살며 두 체제의 모순을 지양하는 형태의 통일을 주장했다.

  조명훈의 간략한 약력을 접하고 북한사 연구자로서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순천에서부터 독일까지 조명훈의 흔적을 찾고 가족이나 친척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順天의 經濟狀況』을 세상에 알린 허석(許錫) 전 순천시장을 만나, 시장 재직 시절 독일에 있는 조명훈 가족과 접촉한 사실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허 시장은 조명훈이 어릴 적부터 일기를 썼고, 친구 김세원(金世元)이 그 일기를 장독대 등에 평생 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세상이 좀 좋아진 후에 돌려주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허석 시장의 말을 듣고 김세원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독일에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과 영사관, 한인들이 다니는 성당과 교회, 존재만 알거나 연락이 끊긴 친척과 연구자 등 가능한 곳에 모두 연락했다. 반쯤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우리 뉴스」라는 한인 언론사로부터 조명훈의 부인 방영자(方英子) 여사의 연락처가 담긴 메일이 왔다. “유익한 연구 활동, 건승을 기원합니다”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그때부터 방영자 여사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메일과 카톡을 통해 조명훈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그분의 생애사 연구가 갖는 의의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정성이 통했을까 마침 2024년 봄 방 여사의 귀국 일정이 잡혔고, 인사동에서 여사님과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방 여사는 고맙게도 남편의 환갑을 기념해 평생 쓴 논문과 칼럼을 정리해 만든 파일을 선뜻 제공해 주었다. 이후 필자는 그해 여름 방학을 이용해 방 여사와 딸 아디나(Adina Cho)가 살고 있는 함부르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 달간 체류하며 조명훈이 쓴 일기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아시아문제연구소’와 함부르크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NKQ』를 전량 복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조명훈 가족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사를 연재 형태로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1화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순천에서 겪은 열전의 경험에 관한 간략한 소개이다.
 
 
2. 조명훈의 생애사 전반부 - 열전의 경험
 
  조명훈은 1931년 순천시 저전동(楮田洞) 39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아 동네에서 신동으로 꼽혔다. 그는 1945년 3월 순천남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순천중학교(6년제)에 입학했다. 해방기 좌우 갈등은 순천중학교에도 불어닥쳤다. 좌익 학생들은 지하 활동을 벌였고, ‘국대안(國大案)’ 반대를 명분으로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조명훈은 당시 좌익 학생들 편에 서서 각종 투쟁에 참가했다. 그는 중학 시절 선배의 권유로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했고,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을 즐겨 읽었다. 그는 중학 시절 이미 “스트라이크에 앞장섰고 진보적인 발언을 도맡아 한 탓”에 주위로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조명훈이 진보적 사상을 갖게 된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학교 1학년 ‘인민 숙제(방학 숙제)’를 하면서 쌓은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1945년 12월 23일부터 31일까지 겨울방학 숙제를 위해 순천군청을 비롯한 지역 내 사회단체를 돌아다니며 일종의 ‘필드 워크’를 진행했다. 그는 순천의 주요 기관을 일일이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順天의 經濟狀況』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중학생 조명훈은 보고서 발간 목적을 “우리 향토 순천의 형편을 알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편찬해 놓고 보니 매우 실천적인 숙제”였다고 자평했다. 그는 조사 경위와 통계 자료 등의 옆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두었는데, “어라야 나도 바쁘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잘 공부하여 조선 건국의 주춧돌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을 때는 “감개무량”해 했다. 
 
  조명훈이 중학생 시절 마르크스주의 책을 탐독하거나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당시 조사 과정에서 싹튼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순천의 농업 상황을 조사하며 군청 서기 정상채(鄭相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정상채는 조명훈에게 “농업 호수를 보아라. 소작 호수가 제일로 많지 않느냐. 이것은 일본인 지주의 소작이 상당히 들어 있다. 그처럼 일본인은 우리 손으로 해주어야 먹어. 자기들은 편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 적이 있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조명훈은 정상채의 말이 인상 깊었는지 보고서 「끝말」에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나는 이번 인민 숙제로 사회라는 것은
무언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 나는 이번 숙제가 없었으면
自作, 外作, 小作 호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물론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몰랐을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다.
 
 
  또한 조명훈은 해방 직후 순천에 생겨난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강령과 규약을 수집하고 지도에 그 위치를 표시하였다. 그가 조사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공산당, 민주당, 애국당, 인민당,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위원회, 노동청년동맹, 청년추진동맹, 프로예술동맹, 학도대, 소년군 등 총 12개였다. 그는 12개 정당·사회단체 강령을 분석해 이념과 지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민주당=청년추진동맹 → 대한민국임시정부지지
② 인민위원회=농민위원회=공산당=학도대=노동조합=노농청년동맹=인민당 → 인민공화국 지지
③ 애국당-소년군-프로예술동맹 → 각자 독특

  당시 중학교 1학년이 보기에 이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정치 세력들이 각당·각파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조명훈이 바라봤던 해방 당시 정치 인식은 사뭇 날카로웠다.
 
 
각 당파를 돌아봐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단 한 곳도 튼튼한 당파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단원도 흐지부지하고 “강령이 있다냐” 하고
그때 서야 힘들게 찾아서 준 데도 있었다.
… 신탁 관리까지 나왔는데 12단체는 그대로 있다.
최후 목적이 같은 단체는 전부 통합하면 오죽 좋을까.
… 내가 각 단체를 조사해 볼 때 간판들은 크지만,
속은 사무실 한 칸인데도 많이 있었다.
이렇게 전부 세계에 조선은 당파가
많이 있다고만 알려주는 것과 같다.
또 강령이 좋지 않은 데는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실제 그 행위는 강령과 적합할까?
 
 
  그렇지만 조명훈은 예의 학생답게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보다는 자신의 본분인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그는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평가 말미에 “그런다고 우리는 임시정부 지지도 아니요, 또 인민공화국 지지도 아니다. 우리 학생은 참으로 공부 하나다. 정치 방면에는 아무 접촉도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보고서 「결론」을 다음과 같은 영어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Whatever talent a man may possess is of no use to him unless that talent is the servant of his character.
Men who would succeed must be abreast of the times. 
재능을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성격에 맞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아야만 한다.
 
 
  어릴 적 조명훈의 꿈은 한글학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과 성격을 고민하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성공을 갈망하던 소년의 꿈은 여순사건을 거치며 무너지게 된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지자 “명훈이가 가담하지 않으면 누가 가담했겠느냐”는 주변의 밀고로 잡혀갔다.
 
  여순사건 당시 가담자 색출은 객관적 기준 없이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과 강요된 자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조명훈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다행히 조사 후에 별다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아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1949년 3월 여순사건 관련 혐의로 순천중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서울의 중앙중학교로 편입했으나, 여순사건 관련 퇴학 사실이 밝혀져 다시 쫓겨나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순천사범학교에 대거 포진해 있던 목포 출신 진보적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49년 10월 목포중학교로 편입했다. 
 
  조명훈은 1951년 7월 6년제 목포중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입시에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던 만큼 입학도 하기 전에 군대에 징집되었다. 그런데 여순사건에 연루되었던 불행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또다시 찾아왔다. 그는 군 복무를 하던 와중에 빨치산에 대한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영창 신세를 져야만 했다. 다음 일화는 조명훈이 군 감옥에 가게 된 이유이면서 동시에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 부대가 그때 광주(光州)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제가 보초를 선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 앞으로 두 사람(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빨치산이었다)이 걸어왔는데
수상한 사람인 것 같아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저들끼리 우리말로 뭐라 뭐라 하며 지나갔어요.
우리말을 듣는 순간 내 동포다 싶어 총을 못 쏘고 말았지요.
그러나 이들 빨치산이 부대를 습격하는 바람에
부대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나는 보초를 제대로 서지 못했다며
바로 군법회의에 회부 되었지요.
검찰관이 묻기에 내 동포이기에
총을 쏠 수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판장이 “마지막으로 묻겠다.
만약 적이 너의 존재를 알고 총을 쏘았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사람들 보고 총질하지 말고
대화로 하자고 제의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재판장 이하 전 방청객들이 깔깔 웃더군요.
사실 저는 종교인도 아니고
다만 내 동포들이고 비위가 약해 못 쏘았을 뿐입니다.
 
 
  이처럼 조명훈은 대학 생활을 하기도 전에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두 번의 투옥을 겪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개인적으로 슬프고 불행한 일이었으나, 후일 그가 두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냉전과 분단 문제를 연구하고 활동하는 데 심연의 시좌(視座)로 자리 잡게 된다. 그는 군대 영창에서 풀려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여순사건 연루자에 병역미필자였기 때문에 더 이상 한국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고향에서 임시로 영어 교사를 하며 유학을 준비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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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서정인에게 그 사람은 영리하고 공부 잘하던, 그래서 여순사건 때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상징으로 남아있다. 정미경, 2020 「금기어가 된 여순사건 -소설가 김승옥」 『시선 10·19』 3, 10쪽; 박찬모, 2019 「‘이상주의자들’을 위한 기억에 대하여 -「무자년의 가을 사흘」의 소년, 소설가 서정인」 『시선 10·19』 2, 70쪽
2) 서정인, 2021(초판1994) 『무자년의 가을 사흘』, 문학동네, 304쪽
3) 김승옥, 1980(초판1964) 『무진기행』, 민음사, 작가의 말; 김미자, 2010, 「서정인의 원체험과 문학적 표현 양상」 『현대소설연구』 44, 44쪽
4) 조명훈 지음, 이홍기·허석 해설, 2007 『해방직후 순천중학교 1학년이 쓴 순천의 경제 상황』, 순천시민의신문
5) 이상의 내용은 예대열, 2024 「열전의 경험과 냉전의 경계 월경 -순천 출신 재독 정치학자 조명훈(趙明勳)의 생애사-」 『제주 4·3, 여순 10·19의 책임을 위한 연대』, 온샘, 242~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