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3월(통권 61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조선후기 公奴婢 制度의 운영과 변화 –王室ㆍ各司의 內寺奴婢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4.08))
도주경(중세2분과)
1. 왜 조선후기 노비인가
역사에서 ‘노비’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노비는 억압받고 소외받는 존재로 기억되었다. 또한 누군가의 소유였고, 사회의 가장 아래층에 속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노비를 다룬 연구들 또한 대부분 이들의 비참한 삶과 억압의 구조를 주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노비의 삶을 단순히 이러한 구도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비는 조선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으며, 국가 재정과 사회적 분업 구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 연구는 이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노비를 역사 발전에 따라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 조선 사회라는 큰 구조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며 변화했는지 따라가려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8월, 『조선후기 공노비 제도의 운영과 변화』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였다. 17·18세기 지방에 거주하며 왕실 및 중앙각사에 신공을 바치던 내시노비(內寺奴婢)를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공노비를 대표하는 범주이자, 조선후기 노비제 정책의 흐름을 가늠하는 지표였다. 1801년(순조 원년) ‘공노비 해방’ 역시 이들 내시노비를 대상으로 한 조치였다. 따라서 내시노비 정책을 중심으로 국가의 노비에 대한 이해와 지향점을 파악하면, 조선후기 노비제의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정책사나 제도사가 노비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 방법을 선택한 것은 노비제를 조선의 역사적 산물로 보고, 조선의 사회·경제 구조에서 자리매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노비제를 인간을 소유·지배하는 예속적 제도로 규정하고, 그 해체를 인간 해방의 과정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노비제 해체는 중세사회의 붕괴이자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노비제 정책 논의와 관련된 당대의 사료들을 검토하면, 노비제에 ‘주인의 억압 - 노비의 저항’이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음이 잘 드러난다.
『비변사등록』에는 1798년(정조 22) 내시노비 혁파를 둘러싼 조정 내 치열한 논쟁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 관료는 지방의 감사·수령 논의에 기반해 ‘양인과 노비는 모두 동일한 백성[均是赤子]’라는 도덕적 명분을 내세우며 노비 혁파를 적극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균시적자’란 국가에 똑같이 신포(身布) 1필을 납부하는 백성을 의미하였다. 18세기 후반 들어 노비제의 역할은 1필의 납포로 국한되었으며, 이는 노비제가 더이상 존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노비제의 쓰임이 다한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조선의 어떠한 구조 속에서 노비제가 요청되었고, 그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었는지 당대의 맥락에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신분과 노비를 국가의 사회 분업, 역(役)과 연계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마주하면서, 필자 역시 국가의 역 체제를 노비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단서로 삼아보기로 하였다.
2. 대동법과 노비역 분화
먼저 조선전기 각사노비의 입역과 선상이 고립제로 전환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왕실과 각사에 속한 노비는 소속기관에 역을 부담하였으며, 노동력을 바치거나 신공을 납부하였다. 서울은 왕실·각사 등의 다양한 행정기구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많은 부분을 각사노비에게 의지했다. 우선 서울에 거주하는 노비[京居各司奴婢]를 입역시켰으며 부족분은 지방에 거주하는 노비[外方各司奴婢]를 선상시켜 확보하였다.
17세기 대동법의 도입과 함께 서울의 노동력은 노비의 입역·선상 대신, 서울에 거주하는 이[京人]들의 고립에 의해 수급되기 시작하였다. 노비의 고립은 크게 중앙각사의 원역 고립, 공물주인의 역인 책립 등 두 가지 계통으로 나타났다. 호조·병조가 중앙재정을 통해 고립한 각사 원역은 주로 궐내나 일부 각사의 평소 사환에 그쳤고, 나머지 노동력은 그대로 각사에 남았다. 이에 대해 중앙각사는 자체 경비를 동원해 평소 사환을 고립하였으며, 공물주인에게 진배해야 하는 역(役)으로 규정해 임시 사환을 고립하도록 함으로써 대응하였다. 대동법 이전에 이미 신역과 요역, 그리고 공물역은 공통적으로 필요한 현물·노동력은 시장에서 구입하고, 그 값은 별도의 부세 체제를 마련해 거두는 방식으로 이원화되고 있었다. 대동법은 역의 분화라는 관행을 제도화하는 계기로, 공납제뿐만 아니라 신역·요역의 역 체제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대다수의 각사노비는 지방에 거주하였으므로 이들의 역은 납공으로 통일되었다. 이들이 내는 신공은 왕실과 중앙재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17세기 이래 정확한 파악과 신공 수취가 중시되었다. 내시노비라는 개념이 역사적 실체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효종 연간 시행된 노비추쇄사업은 사섬시에 납공하는 노비를 종래에 비해 2배로 늘리면서 대대적인 신공 증액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노비추쇄사업을 통해 시노비를 대거 확보했더라도, 그 성과를 계속해서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비의 재생산 문제, 왕실과 각사가 시노비를 탈점하는 문제, 노비까지도 양역 자원으로 삼고자 한 양역변통의 전개 등이 얽혀 복잡한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역변통은 진행될수록 신공을 내야 할 노비를 감소시켜 노비역 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노비의 실제 규모와 상관없이 고정된 액수의 신공을 확보하기 위한 재정 정책이 다방면으로 모색되었다.
3. 양역과 노비역의 균일화 과정
18세기 후반 이후 노비역의 운영은 양역변통과 같은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양역에서 역총을 고정하며 『양역실총』을 간행하고 군포를 감하는 균역법을 시행하듯, 노비역에서도 노비 비총제와 신공 감필을 시행하였다. 노비 비총제는 역총의 정액화에 해당하는 대책으로, 중앙에 납부해야 할 신공의 총액을 고정한 것이었다. 중앙에서 추쇄관을 파견하는 대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노비를 파악하여 수공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노비역 운영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중앙의 재정 수요를 충족할 수 있고 지방은 상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노비총을 고정하였다. 시노비 비총제는 영조 21년(1745) 경상도에 시범적으로 도입되었으며, 동왕 41년(1765)에는 충청‧전라도, 동왕 50년(1774)에는 전국에 확대 실시되었다. 내노비 역시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정조 2년(1778) 내노비 추쇄관을 혁파하고 내노비 비총제를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신공 감필과 비공 폐지도 이루어졌다. 역 체제는 모든 백성을 역원으로 포섭하여 균질적인 존재로 재편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지향점은 군포와 신공이 1필의 부담으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영조 26년(1750) 시행된 균역법은 모든 군포를 1필로 줄여 감했으며, 동왕 31년(1755)에는 내시노비 감공을 통해 노공은 1필, 비공은 반 필로 줄여 감했다. 그 후 동왕 50년(1774)에는 비공까지 폐지함으로써 노비역은 남정 1명당 1필의 포를 납부하는 부담이 되었다.
노비의 신공을 줄이는 조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노비역 운영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먼저 감공과 함께 왕실‧각사의 줄어든 신공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균역청의 급대 조치가 수반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감공을 계기로 신공을 통해 걷던 재정의 42.1%에 달하는 29,914냥, 비공 폐지를 계기로 19.4%에 달하는 13,776냥이 균역청의 지원금으로 대체되었다. 노비역 가운데 61.5%가 균역청 재정으로 대체된 것은, 나머지 39.5%인 27,339냥만이 노비 개인으로부터 거두는 신공으로 남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노비역은 비총제와 급대를 겪으면서 구체적인 개인과 무관한 추상적인 재정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양역과 노비역의 부담이 1필로 동일해지면서 양인과 노비 역시 균질적인 백성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이다. 균역법과 감공은 백성들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줄어들며 균등화하는 흐름을 반영하며, 대동(⼤同)과 균역(均役)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제도적으로 관철시킨 조치로 이해된다. 양인과 노비는 신분에 상관없이 동일한 역을 지는 균시적자로 재편되었다. 역 체제 운영에 있어 역원이 부족한 곳이 있다면, 양인과 노비 신분에 상관없는 차정이 가능해졌다.
4. 떠오르는 새로운 노비제 운영 주체, 군현과 노비
군현은 노비를 파악하고 신공을 거두는 일차적 책임을 진 곳이었다. 그런데 노비역의 재정으로서 성격이 강화되고, 양인과 노비가 같은 역을 지는 존재로 수렴하자 군현의 노비역 운영 양상도 크게 바뀌었다. 노비의 개별인신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신공을 거두는 대신, 정해진 신공 총액에 맞춰 부세를 거두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조 연간 군현에서는 다양한 관행을 통해 신공에 대응하였다. 크게는 인족징, 두목 및 별차배에게 책납, 기금의 식리를 통한 신공 대납, 노비보를 통한 신공 대납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기금과 노비보는 이때 새롭게 등장한 관행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금의 경우, 수령이나 특정 개인의 ⾃備穀, 백성의 갹출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식리를 통해 얻은 경비로 궐액이 된 신공을 대납하였다. 개별인신과 완전히 무관한 부세 운영 방식이었다. 노비보는 군현 차원에서 설치한 사모속의 일종으로, 양인이나 노비를 가리지 않고 모집하여 수세한 후 그것으로 궐액이 된 신공을 대납하는 것이었다. 정조 연간 3차에 걸쳐 제기된 내시노비 혁파론은 군현의 신공 대응 관행을 제도화하는 흐름 속에서 논의되었다. 주로 감사나 수령이 노비보 등을 근거로 노비 혁파론을 제기하면 조정에서 입장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요컨대 내시노비 혁파는 노비역의 재정으로 전환을 완료한 사건이자, 양역과 노비역의 명목을 없애 역을 완전히 균질화한 시도로 이해된다. 내시노비 혁파는 노비제 해체를 보여주는 단초이기는 하나 그것이 노비의 신분 상승 시도에 따른 해방이었다기보다, 역 체제가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라 재정원으로서 성격을 강화하며 모든 역을 균일화하는 흐름 위에서 중앙과 지방, 국가와 노비의 상호 대응이 빚어낸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 노비를 그저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냈을 뿐이고, 필자는 그 삶의 구조와 움직임을 따라가고 싶었다. 노비라는 창을 통해 조선 사회의 운영 방식과 변화를 담담히 설명하는 것이 목표였다. 여전히 그 마음으로 이 연구를 마주하고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이번 연구는 국가와 제도 분석에 머물렀지만, 언젠가는 그 틀 너머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까지 담아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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