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1월(통권 59호)
[기획연재]
'황해'라는 낯선 바다, 문무왕의 도전
임동민(고대사분과)
1. 들어가며
고대 한국의 주요 인물을 선정한다면, 광개토왕, 근초고왕 등이 먼저 떠오를 것이고, 해양 인물을 선정한다면 장보고 등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인 신라 문무왕은 이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런데 문무왕의 이름은 바다와 관련한 분야에서 의외로 많이 활용된다.
대한민국 해군은 해상기동부대의 주력함으로 구축함을 운용하고 있다. 구축함의 이름은 과거부터 국민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다. 구축함은 DDH-Ⅰ,Ⅱ,Ⅲ급으로 구분되는데, DDH-Ⅰ급의 1번함은 광개토대왕함, DDH-Ⅱ급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 DDH-Ⅲ급의 1번함은 세종대왕함이다. 흥미로운 점은 DDH-Ⅱ급의 2번함이 바로 문무대왕함이라는 것이다. 한국사 전체의 해양 영웅이라면 당연히 충무공 이순신을 먼저 떠올릴 텐데, 그 뒤를 이어 ‘문무대왕’이 등장한 것이다.
또 다른 의외의 장소는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기초 행정사무를 관할하는 읍‧면‧동 단위에서 확인된다. 지난 2021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은 ‘문무대왕면’으로 면 이름을 개칭하였다. 전국적으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읍‧면‧동 명칭에 활용한 곳은 영월군 김삿갓면, 남양주시 다산동 등 몇 군데에 불과하다. 경주시 양북면은 무슨 연유에서 이름까지 고쳤던 것일까?
경주시 문무대왕면은 동해 바닷가에 인접하여 있고, 이곳에는 이른바 대왕암, 사적 「경주 문무대왕릉」이 존재한다. 이곳은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연결되는 유적이다. 「경주 문무대왕릉」에서 약 1.3km 거리에 사적 「경주 감은사지」가 있는데, 이곳도 문무왕을 위하여 창건된 사찰이다.
‘문무대왕함’과 ‘문무대왕면’은 신라 문무왕의 이야기가 해군과 지역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무왕이 어떠한 업적을 세웠기에, 해군 함정 이름으로부터 면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이 활용된 것일까?
2. 문무왕을 둘러싼 시대 배경
문무왕을 둘러싼 시대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660년 7월 13일, 백제 수도 사비로 시간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을 고려할 때, 연월일이 상세히 기록된 사건은 매우 드물다. 이날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신라의 김법민과 백제의 부여융이었다. 김법민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명을 받아 백제를 공격하는 처지였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이며, 사비를 지키다가 항복한 상황이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 수도 사비를 함락하고, 부여융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김법민은 부여융을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아래와 같이 꾸짖었다.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에 있구나”
대체 얼마나 원한이 쌓였으면, 이렇게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을까?
백제는 6세기 무렵까지 고구려와 치열한 대립에 국력을 쏟고 있었다. 이를 위해, 백제는 신라와 이른바 ‘나제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지만, 곧 신라 진흥왕에게 뒤통수를 맞고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왕의 죽음을 맞이한 백제는 ‘주적’을 신라로 바꾸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백제 무왕은 소백산맥 너머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였고, 뒤를 이은 의자왕도 신라에 대한 총력전을 벌여서, 642년에 합천 대야성까지 장악하였다.
바로 이곳,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 장군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죽었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 그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신라가 잃은 것은 왕족과 병사들뿐만 아니었다. 그전까지 신라와 백제의 전쟁은 소백산맥 양쪽을 무대로 전개되었으나, 이제 백제군은 마음만 먹으면 대구를 지나 경주까지 단숨에 쳐들어갈 수 있었다. 신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제 시선을 신라로 돌려보자. 신라는 소백산맥 남쪽의 영남 일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동해와 남해에만 발을 담글 수 있었고, 중국과의 통교를 위하여 황해에 도전하는 일은 지정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동해와 남해에서 바다 건너오는 왜적을 막아내는 동시에, 가야의 여러 나라를 차지하면서, 신라는 점진적으로 국가 차원의 해양력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이른바 ‘나제동맹’을 통하여 소백산맥 너머의 땅까지 진출하였고, 진흥왕은 마침내 백제를 배신하면서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확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서, 중국과의 해양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을 받는 위기 속에서, 황해를 건너 이루어지는 당과의 교섭을 통하여 국가의 운명을 바꿔볼 수 있었다.
김법민의 아버지인 김춘추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당에 직접 들어가 교섭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나당동맹’이 맺어졌는데, 신라는 주적 백제를 물리치고 자연스럽게 영토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상대방인 당은 고구려 공격을 위한 후방 지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멸망시킨 다음 신라의 영역까지도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우선 당과의 연합에 나섰다.
김춘추는 가야계 김유신과 손을 잡아 권력을 키우는 동시에, 당과 동맹을 성사하면서 신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를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654년에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여, 660년에 마침내 당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백제의 남은 무리는 거센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 채, 661년 사망하고 말았다.
김법민은 위에서 살펴본 기나긴 대하사극의 끝에 문무왕으로 즉위하였다. 문무왕에게는 백제부흥운동의 진압, 고구려의 멸망, 당과의 관계 재정립과 같은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다.
3. 문무왕의 생애와 바다에 대한 도전
문무왕(626~681, 재위 661~681)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603~661, 재위 654~661)과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로, 655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661년 태종무열왕의 사망 이후 제30대 문무왕으로 즉위하였다.
문무왕 김법민은 아버지 김춘추와 외삼촌 김유신이 선덕왕, 진덕왕을 도와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외교, 군사 방면에서 활약을 펼쳤던 시기에 자랐다. 아버지 김춘추는 가야계인 김유신 가문과 손을 잡고, 당의 군사지원을 확보한 뒤, 마침내 신라왕으로 즉위하였다.
660년에는 드디어 당의 13만 군사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산둥반도 성산에서 황해를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태자 김법민은 직접 병선 100척을 인솔하여 덕물도(덕적도)로 나아가 당군을 맞이하였다. 김법민은 이미 650년에 김춘추의 뒤를 이어 당에 직접 들어가 교섭을 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즉위 전부터 정치, 외교, 군사의 다양한 방면에서 ‘해양’ 경험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쌓은 신라왕은 김춘추와 김법민 이외에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660년 김법민과 신라군은 당군과 함께 백제 수도 사비를 함락하였고, 앞서 보았던 7월 13일 김법민과 부여융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백제 의자왕도 항복하면서, 길고 길었던 신라와 백제의 악연은 백제의 멸망으로 끝이 나는 듯하였다. 그런데 660년 직후 백제 사비 주변의 지역을 중심으로 남은 백제군이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왜에 있던 백제 왕족의 귀환과 왜의 군사적 지원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바로 이 중요한 시점에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사망하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의 뒤를 이어, 김법민이 문무왕으로 즉위하였다. 그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는 백제부흥운동의 ‘진압’이었다. 문무왕은 재위 초반 백제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백강구(백촌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재위 10~11년인 670~671년에 걸쳐, 부흥운동 세력을 크게 진압하고,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그 사이인 668년에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문무왕의 다음 도전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찾아왔다. 신라와 당은 백제, 고구려 멸망을 위하여 군사 동맹을 맺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당이 백제, 고구려 외에 신라에 대한 욕망까지 숨기지 않게 되자, 신라 문무왕은 670년에 당군을 선제공격하였고, 이에 676년까지 이른바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는 670~671년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으나, 672년 석문 전투, 675년 칠중성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675년 천성과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나당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나당전쟁의 승리는 다양한 주변 세력과 갈등을 겪던 당의 상황도 연동되었지만, 문무왕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나당전쟁의 경과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무왕의 해양경험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였던 열쇠였다. 문무왕은 이미 즉위 이전부터 황해를 건너 직접 당에 다녀왔고, 660년에는 병선 100척을 인솔하여 덕물도에서 당군을 맞이하여 백제 멸망 과정에서 군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문무왕의 해양경험은 나당전쟁에서 수군을 활용한 당군의 보급, 증원 작전을 방어할 때 적절히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무왕은 671년 당의 백제 구원을 막기 위해 옹포를 방어하였고, 당 운반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승리하기도 하였으며, 673년에는 병선 100척으로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다. 675년 천성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는 모두 수군의 활용과 연관된 전투였다. 문무왕은 백제 옛 땅을 완전히 확보하고, 백제 주둔 당군에 대비하기 위하여, 옛 고구려 땅을 통해 남하는 당 육군을 방어하는 한편, 황해를 건너 증원하고 보급하는 당 수군을 방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작전 구상에는 문무왕 본인의 황해 경험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무왕의 바다에 관한 관심은 그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설화에서 더욱 극적으로 확인된다. 문무왕은 재위 21년인 681년,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할 것이니, 화장하여 동해 입구의 큰 바위에 장례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 큰 바위는 일반적으로 경주 문무대왕면 봉길리의 감포 바닷가 앞에 있는 대왕암(사적 경주 문무대왕릉)에 비정된다. 게다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를 위하여 대왕암 인근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는데, 금당 아래에 구멍을 내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실제 감은사지 금당 발굴조사 결과, 금당 아래에 일정한 깊이의 지하공간이 확인되어 화제가 되었다.
문무왕과 바다에 관한 전설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신문왕은 동해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가보니 문무왕과 김유신이 용을 보내어 산 위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감은사 인근의 이견대에 행차하여 산 위의 대나무를 살펴보았고, 그 대나무로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평화를 얻었다고 전한다.
문무왕은 백제, 고구려의 위협을 극복하고, 당까지 물리쳐 이른바 ‘삼국통일’을 완수한 통치자였다. 신라는 동해, 남해를 차츰 차지하면서 점진적으로 해양력을 정비하였는데, 문무왕은 즉위 전부터 황해의 해양환경에 도전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문무왕의 경험은 나당전쟁의 승리로 이어졌다. 게다가 죽은 뒤에도 대왕암, 감은사, 이견대, 만파식적 등 문무왕과 바다를 연결하는 다양한 설화가 만들어졌다.
문무왕과 바다를 연결 짓는 설화의 ‘끝판왕’은 바로 ‘문두루비법’과 관련한 신기한 이야기이다. ‘문두루비법’ 설화는 황해의 해양환경에 도전한 문무왕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설화이다.
4. 문두루비법, 바다+불교+문무왕의 결정체
이름부터 낯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은 문무왕대 신라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의 일종이며,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외적을 물리치려는 신라인의 심성과 관련된다. 즉, 문두루비법은 바다, 불교, 문무왕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여러 조목에는 이와 관련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 있다. 지면관계상 해당 기록은 전부 소개하기 어렵고, 아래에서 요약하여 소개한다.
① 668년 당군의 신라 공격 시도를 문무왕이 알고, 병사를 내었다.
② 이듬해(669) 당 고종이 신라를 꾸짖으며 말하길, “너희는 우리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군사 50만명을 훈련시켜 벽방(薜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③ 이때 의상 법사가 당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신라로 돌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④ 왕이 군신을 모아서 방어책을 물으니,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하였다는 명랑법사가 천거되었다.
⑤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사천왕사를 그 땅에 창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⑥ 이때 정주(貞州)의 사신이 달려와 보고하길, “무수히 많은 당병이 우리 경계에 이르러 해상에서 순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랑을 불러 말하길, “일이 이미 급박해졌는데,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⑦ 명랑이 말하길,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짓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내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명랑을 상수(上首)로 하여 문두루비밀법을 행하였다.
⑧ 이때 풍랑이 거세게 일어나 당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⑨후에 절로 고쳐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고 하였는데, 지금(고려)까지 이어진다.
⑩그 후 신미년(671)에 당이 다시 조헌을 장수로 삼아 5만 병사로 공격하였다. 다시 그 법을 행하니, 배들이 전과 같이 침몰하였다.
위의 ①~⑩번 기록은 문두루비법의 설행에 관련된 내용이다. 당에서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신라가 병사를 내었는데(①), 이에 669년 당 고종이 50만 군사로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고(②), 의상이 이 소식을 신라에 전하였다(③). 그러자 신라는 각간 김천존의 제안으로 명랑에게 방법을 물었고(④), 명랑이 신유림에 사천왕사 창건을 제안하였는데(⑤), 당군이 이미 도달하였다는 정주의 보고를 듣자(⑥), 명랑이 임시로 문두루비법을 행하였다(⑦). 이로 말미암아, 풍랑이 불어 당의 배가 침몰하였고(⑧), 신라는 문두루비법을 행한 자리에 사천왕사를 지었다(⑨). 671년 당 조헌의 5만 군사 침입도 문두루비법으로 다시 물리쳤다(⑩).
이상에서 살펴본 기록은 『삼국유사』의 다양한 조목에 남아있는데, 아마도 문무왕 이후 신라인에게 널리 전해졌던 설화로 생각된다. 즉, 문두루비법은 당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문무왕이 명랑법사의 신통함을 활용하여, 바다에서 외적을 물리쳤다는 신비한 사건으로 신라인에게 기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문두루비법의 역사적 현장에는 사천왕사라는 중요한 사찰이 들어섰고, 이 사찰은 『삼국유사』를 기록한 고려시대까지 명맥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두루비법 관련 기록에 등장하는 벽방, 조헌 등은 다른 사료에 전혀 보이지 않으며, 당군의 침입을 극적으로 알렸던 ‘정주’라는 지명은 대략 10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는 표현이며, 670년 당군 50만, 671년 5만이라는 숫자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 물론, 50만은 당의 정규군 전체로 볼 여지도 있고, 5만은 671년 당군의 활동과 관련시켜 볼 여지도 있으나, 실제 전황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왜 문무루비법 기록에는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거나, 후대의 지명이 나오고, 침입한 당군의 숫자가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일까? 다음 장에서는 문두루비법에 관련한 의문을 풀면서, 무엇이 과장되었고 무엇이 실제 문무왕의 활동이었을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5. 문두루비법의 실상과 과장
문두루비법 기록의 실상과 과장을 살펴보는 과정은 기록의 전거자료를 유추하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문두루비법과 관련한 다양한 기록들은 대체로 문무왕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자료를 기본으로 하면서, 특히 명랑법사와 관련한 전기, 몇몇 사찰의 기록을 전거자료로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랑의 생애를 기록한 『삼국유사』 명랑신인조를 살펴보면, 기록 끝에 고려 현성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고려 태조가 건국할 때 해적(海賊)이 출몰하니 명랑의 계통을 이은 승려가 비법으로 물리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태조는 현성사를 창건하여 이 종파의 토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현성사는 고려시대 신인종의 사찰로, 태조 왕건이 창건하여, 불교 의식의 한 갈래인 문두루도량을 여는 사찰이었다. 고려는 각종 국가적 위기를 맞이할 때, 현성사에 문두루도량을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명랑의 문두루비법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신라 문무왕대 명랑이 정말 고려 신인종의 초조(初祖)였는지, 그가 신인종이라는 종파를 개창하고, 그 뒤로 여러 제자가 법통을 계승하였는지 여부는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다만, 고려시대에 현성사를 중심으로 그와 같은 인식이 존재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태조 왕건 시기의 ‘해적(海賊)’ 위협은 앞서 살펴본 문두루비법과 어떠한 연관을 가질까? 이러한 의문은 ‘정주’라는 10세기 이후 지명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932년 후백제는 고려의 ‘정주’를 공격하였는데, 이곳은 현재 개풍군에 해당하며, 예성강 하구에 위치하여 경기만 연안과 조강 하구를 아우르는 해양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태조는 궁예 휘하에 있던 시절부터 수군을 활용하였는데, 후백제와 해양에서 대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백제의 ‘정주’ 공격은 수도의 해양방어를 위태롭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아마도 고려 초 신인종 승려들이 ‘해적’의 출몰에 따라 문두루비법을 설행한 사건은 이러한 고려와 후백제의 대립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외적에 대항하여 문두루비법을 설행한 고려 신인종 승려는 신인종의 전설적인 인물인 신라 문무왕대 명랑의 활약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신의 종교적 효용성을 키우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벽방, 조헌 등의 인물과 50만이라는 당군의 숫자 등은 명랑의 전설적인 활약을 강조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에서 후대에 과장,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과장은 고려시대 현성사의 문두루비법이 갖는 종교적 영험함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명랑의 문두루비법 기록에 ‘정주’와 같은 10세기 이후 지명이 남은 것은 이러한 과장의 과정에서 들어간 흔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명랑의 문두루비법 기록 전체가 과장,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문무왕대 문두루비법과 관련한 기록은 『삼국유사』 여러 조목에서 나타난다. 또한 이 시기 당군의 침입과 신라의 대응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어느 정도 확인된다. 신라에서는 당군의 침입에 따른 공포, 불교의 힘으로 극복한 이야기 등이 광범위하게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정말 명랑의 비법으로 인하여 670년과 671년에 당 수군이 바다에 침몰하는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존 연구에서는 671년 1월 말갈군의 신라 공격, 당군의 이동과 옹포 방어 기사를 토대로, 첫 번째 문두루비법이 설행된 670년에 실제 당 수군의 이동을 추정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671년 10월에는 신라가 당의 선박 70여 척을 공격하여 장군과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고 익사자를 무수히 발생시킨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 수군의 활동 루트는 아마도 산둥반도 일대에서 출항하여 경기만, 황해도 일대를 거쳐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로로 추정된다. 문두루비법 설행 당시, 당군의 근접을 보고한 ‘정주’는 예성강 하구의 경기만 연안 지역이므로, 당 수군의 활동 지역과 연결된다.
따라서 문두루비법 기록이 보여주는 역사적 실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670년과 671년, 신라를 침입하려는 당 수군의 활동, 혹은 수군의 활동 첩보가 실제로 있었다. 신라 문무왕은 이러한 정보를 빠르게 취득하였고, 명랑의 불교 의식을 통하여 국가적 위기와 당의 침입에 대한 공포심을 이겨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공격은 성공하였고, 당 수군의 활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물론, 명랑의 문두루비법이 큰 풍랑을 만들어 당의 선박을 침몰시켰다는 기록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당 수군이 활동하였던 경기만 인근 해역은 수심이 낮고 조류가 매우 빠르며, 조수간만의 차이가 극심하고, 갯벌, 천퇴, 간출암 등 크고 작은 항해 방해요소가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660년 당의 13만 대군이 산둥반도에서 경기만 덕물도(덕적도)를 향하여 항해한 경험은 있었지만, 이때 당 수군은 곧바로 금강으로 향하여 백제 수도를 공격하였다. 670년, 671년에 경기만 일대로 들어온 당 수군은 다양한 항해 방해요소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를 방어하는 신라 문무왕은 신라왕으로 매우 드물게, 직접 황해에서 해양 경험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당 수군의 침몰과 패배는 이러한 해양 환경의 이해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 수도 경주에서는 문무왕의 주도로, 명랑의 주관 아래에 문두루비법이 행해졌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불교의 힘을 빌려, 당 수군의 침입이 가져다주는 공포심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신라군은 경기만의 해양 환경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황해를 건너 쳐들어온 당 수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문두루비법 기록은 이상의 역사적 사건을 설화화하는 방식으로 남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6. 나가며
황해는 신라에게 낯선 바다였다. 신라는 동해를 건너 쳐들어오는 왜적을 방비하면서 동해라는 바다에 눈을 먼저 떴고, 남해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를 확보하면서 남해라는 바다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진흥왕 시기까지, 신라는 황해라는 바다에 발을 담그지 못하였다. 물론, 고구려, 백제를 거쳐 황해를 활용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신라 스스로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바로 황해라는 해양 환경에 적응하였을까? 진흥왕이 553년 한강 하류까지 차지한 이후, 중국 왕조와의 첫 교섭은 564년에서야 이루어졌다. 11년은 낯선 바다에 적응하기 위
한 시간이었다. 그 후 신라는 본격적으로 황해에 도전하여, 결국 당과의 군사동맹까지 맺었다. 문무왕의 성장 과정은 신라가 황해라는 해양 구조에 익숙해지던 시기였다.
심지어 문무왕은 즉위 전부터 황해를 건너 당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660년에는 직접 병선 100척을 이끌고 당군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문무왕 본인이 직접 황해의 해양 환경을 경험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신라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국왕의 해양 활동이었다. 이러한 문무왕의 해양 경험은 백제부흥운동의 진압, 고구려 정복, 나당전쟁의 승리라는 그의 업적에 가장 큰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인을 비롯한 고대인에게 바다는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바다를 건너 당시 최강국이었던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공포가 겹쳤다. 문무왕은 황해 해양 경험을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당의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불교라는 종교의 힘을 빌려, 신라인의 공포를 진정시키는 한편,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불교의 신비한 의례를 통해서 수도 경주의 신라인이 지녔던 공포심을 해소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또한 문무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켰다는 설화는 대왕암, 이견대, 감은사, 만파식적과 같은 물질문화와 결합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이어졌다. 신라인들은 문무왕을 바다 건너오는 외적을 막아내는 신처럼 여겼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바다라는 강고한 구조를 마주할 때,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종교적인 믿음에 의지하였다. 문두루비법 기록이나 이후 다양한 해양 관련 설화들은 문무왕과 신라인이 어떠한 마음으로 황해라는 바다에 도전하였는지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문무왕은 실제로 황해 해양환경을 숙지하고, 적절한 수군 전략을 펼쳐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였다.
문두루비법을 비롯하여 문무왕과 바다를 연결 짓는 각종 설화는 액면 그대로 믿기에 어려움은 있지만, 신라인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라인은 문무왕을 바다에 도전하여 신라를 지켜낸 통치자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무왕의 군사적 업적은 상당 부분 황해의 해양 환경과 관련된다. 이러한 실상과 과장, 믿음이 어우러져, 바다와 관련한 문무왕의 설화가 탄생하여, 전승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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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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