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3월(통권 61호)
[답사기기]
계엄의 겨울을 뚫고, 가고시마 지역사와 일본 근대사를 만나다
- 2025년 겨울 한국역사연구회 가고시마 답사기
권혁은(현대사분과)
난데없이 닥친 12.3 계엄 이후 방학이어도 쉬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무작정 가고시마 답사에 참여했던 것도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혼자나 가족끼리 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 가고시마 일대를 전문가분들과(!!) 가볼 수 있다는 점에 혹했기도 하다. 한국역사연구회 답사는 10여년전 내가 분과총무를 맡았던 때 이후 처음이었다. 결과적으로 4박 5일간 잘 보고, 잘 쉬고, 잘 먹고 돌아왔다. 모두 고생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이다.
그림 1. 2월 16~20일 가고시마 답사 여정
'일자-방문순서'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가고시마와의 첫 만남
첫날, 공항이 워낙 혼잡했기에 답사팀 모두 개별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고시마 공항에서 모이기로 했다. 가고시마 현지에서 한지혜 가이드님과 이와테대학교의 양인실 선생님, 도시샤 대학교의 고영진 선생님까지 합류해 본격적인 첫날 일정을 시작했다. 나로서는 정말 오랜만의 일본이었다. 공항 밖을 나와 잠깐 맡은 규슈의 공기는 서울보다 훨씬 따뜻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사에서 준비해주신 버스를 타고 답사를 시작했다.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는 1871년 폐번치현 이전까지 사쓰마 번이었던 곳이며, 삿쵸동맹의 주축으로 유명하다. 사쓰마 출신의 인물들은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 답사는 어떻게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일개 번이 어떻게 중앙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는지, 그리고 '사쓰마 인맥'이 일본의 근대 국가 건설은 물론 식민지 조선 지배 과정에서도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여정이었다.
그림 2. 기리시마 신궁으로 들어가는 답사팀(좌)
그림 3. 기리시마 신궁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와 나라사키 료의 말
도착 후 첫 식사로 지도리우동을 맛있게 먹고, 곧장 기리시마 신궁(霧島神宮)으로 향했다. 기리시마 신궁은 540년 긴메이 천황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일본 건국 신화의 니니기노 미코토(瓊瓊杵命)를 모신다. 니니기노 미코토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로 우리 단군신화처럼 볍씨와 3종 신기(거울, 곡옥, 검), 다섯 신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공주와 혼인한다고 한다. 위가야 선생님께서 첫 스타트를 끊어 일본 건국 신화를 설명해주셨다.
신궁을 나오니 바로 앞에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와 나라사키 료(楢崎龍)의 모습을 그린 그림 팻말이 눈에 띄었다. 알고보니 기리시마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이끌어낸 사카모토 료마가 1866년, 일본 최초로 신혼여행을 온 곳으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팻말이었다. 료마는 일본 최초의 종합해운상사로 평가받는 해원대(海援隊)를 창설했으며, 료마가 사망한 뒤에는 료마와 같은 도사 번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그것을 이어받아 미쓰비시 상회를 설립했다.
아주 짧게 기리시마 신궁을 둘러본 뒤 우리는 애초 예정지였던 기리시마 신화마을에 가지 않고 활화산 섬인 사쿠라지마(桜島)를 방문했다. 사쿠라지마는 <그림 1>의 가고시마 지도에서 가운데의 동그란 섬으로 1914년 대분화 이후 오스미 반도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섬은 아니다. 가이드님의 설명으로는 불과 며칠 전에도 분출이 일어나고 화산재를 담는 전용 봉투가 곳곳에 놓여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일상에 화산이 밀접하게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첫 단체사진을 찍었다. 평화로운 첫날이었다.
그림 4. 사쿠라지마의 전면
그림 5. 사쿠라지마에서 찍은 첫 답사사진(좌)
답사팀 전원이 찍힌 것은 아니다.
그림 6. 가고시마 중앙역 앞에 위치한 '젊은 사쓰마의 군상(若き薩摩の群像)'(우)
사쿠라지마에도 화산 관련한 각종 기념물이 있었지만, 애초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역시나 짧게 돌아본 뒤 가고시마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 일정의 목적지는 중앙역 앞의 ‘젊은 사쓰마의 군상(若き薩摩の群像)’이었다. 이 동상은 막부 말기였던 1865년 국외 여행이 금지되어 있던 시기에 비밀리에 영국 유학길에 오른 사쓰마 출신 청년 19명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군상 앞의 안내판은 유학생 중에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이 되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도쿄대학 초대 학장 하타케야마 요시노리(畠山義成), 13세의 나이로 유학을 간 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와인의 왕’으로 불리게 되는 이소나가 히코스케(磯永彦輔)를 소개하고 있었다. 일본 근대사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어떻게 사쓰마 번에서 독자적으로 대규모의 유학생단을 꾸릴 수 있었는지 얼핏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다음날 유신후루사토(維新ふるさと)의 길을 걸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고시마 지역사와 일본 근대사
그림 7. 오오쿠보 도시미치 동상으로 가는 길의 코츠키강(甲突川) 산책 지도
갑돌, 고라이바시(高麗橋) 등의 지명은 이 지역에 조선인들이 붙들려와 정착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둘째날은 본격적으로 가고시마 시내를 둘러보았다. ‘갑돌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코츠키강(甲突川)을 따라 먼저 가고시마 중앙공원에 위치한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동상을 본뒤 ‘유신후루사토의 길’과 ‘유신후루사토관’을 관람했다. 왕복 1~2키로미터 가량 될까말까한 거리였다. 여기에 유신 후루사토의 길이 조성된 이유는, 과거 이곳이 유신삼걸 중 사쓰마번 인물인 오오쿠보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태어난 하급 사무라이 주거지인 가지야마치(加治屋町)였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마주한 오오쿠보 동상은 서양식 양복 차림으로 다음날 볼 사이고의 동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오오쿠보는 1830년 사쓰마번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죽마고우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삿초동맹을 맺은 뒤 1867년 12월 교토로 진군하여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그러나 사족 특권 폐지를 주장하던 오오쿠보와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하고, 정치적으로 패배한 사이고는 사쓰마로 귀향한다. 사실상 오오쿠보가 정치적으로는 더 성공했음에도 가고시마 지역민들이나 일본인들에겐 사이고 다카모리에 비해 덜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림 8. 오오쿠보 도시미치 동상(좌)
그림 9. 코츠키강 너머의 유신후루사토관(우)
사진상 유신후루사토관의 바로 왼쪽에 오오쿠보 생가터 기념비가 있다.
이후 우리는 코츠키강을 따라 남쪽으로 조성된 유신후루사토의 길을 걸으며 사쓰마 출신 인물들의 출생지와 기념비 등을 둘러보았다. 길의 중앙에 오오쿠보의 생가터와 기념비, 그 바로 옆에 유신후루사토관이 있었다. 오오쿠보 생가터 기념비에는 비석 건립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조선 식민통치에 참여한 여러 인물들이 있어 사쓰마번의 지역사와 일본 근대사, 그리고 제국-식민사간의 연계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뒤이어 관람한 유신후루사토관은 어떻게 사쓰마번이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지, 사쓰마번에서만 실시 되었던 사무라이들의 향중교육(鄕中敎育)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젊은 사쓰마 청년들이 영국 유학길에 오른 배경과 그 영향을 강조하는 전시관이었다. 가고시마의 소박한 인상과 다르게 전시에 굉장히 공들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가고시마에서 메이지유신을 중요한 기억으로 간직한다는 의미이리라. 다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기억은 전혀 없다는 점이, 근대화를 칭송까진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요즈음 한국의 박물관들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오후에는 19대 사쓰마번주 시마즈 마츠히사(島津光久)가 별저로 건축한 센칸엔(仙巌園)과 내부의 슈에이칸(集成館)을 둘러보았다. 우리 답사팀은 메이지유신에 집중했기 때문에 센칸엔보다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가 센칸엔 내부에 지은 기계공장, 유리공장 등인 슈에이칸과 그리고 시마즈가문의 별장을 집중적으로 둘러보았다. 감사하게도 가고시마국제대학에 계신 오타 히데하루(太田 秀春) 선생님께서 홍종욱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방문해주셔서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다.
그림 10. 가고시마국제대학 오타 히데하루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시는 모습(좌)
그림 11. 시마즈가의 저택인 고덴(御殿)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우)
맞은편에는 사쿠라지마의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센칸엔과 슈에이칸, 그리고 시마즈가 별장으로 지어져 1871년 폐번치현 이후에는 시마즈가가 옮겨 살았던 고덴(御殿)의 규모는 일본 근대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압도적인 쌀 생산량을 자랑하고, 류큐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사쓰마번의 경제력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개 번이 무기공장을 만들고, 가스 가로등을 만들고, 하수처리시설을 가졌다니. 오타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시마즈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1,000년 넘게 대대로 사쓰마번을 통치했는데, 이는 아주 희귀한 사례라고 한다.
하루종일 돌아다녀 피로해진 우리는 센칸엔 옆의 스타벅스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스타벅스는 보기 드물게 멋진, 고풍스러운 흰색 건물이었다. 앞의 표지석을 보니 1904년 지어진 광산회사 사무실로 지역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곳이었다. 그곳을 몇 년 전 스타벅스로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2층에 앉으면 창 너머로 사쿠라지마를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이태훈 선생님의 사쓰마 출신 인물들의 역사와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들으며 피로를 풀었다. 이틀째였지만 꽉찬, 그러나 무리하지는 않은 충분히 기분좋은 일정이었다. 무엇보다 센칸엔 안에서 한국보다 일찍 핀 꽃나무를 보니 우리에게도 곧 봄이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잠시 가질 수 있었다.
그림 10. 센칸엔 스타벅스점
1904년 지어진 광산회사 사무실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셋째날 오전의 주제는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가고시마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사이고 다카모리. 가고시마 중앙공원 앞 그의 동상에서 회장님의 설명을 듣고, 이어 사이고 난슈 현창관에서 그의 일생과 묘지를 관람한 뒤 마지막으로 1877년 세이난 전쟁기 그가 사망한 종언지의 동굴을 보았다. 사이고의 동상은 오오쿠보와는 다르게 기모노 차림이었고, 역시나 오오쿠보 동상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현창관에서 그의 인생을 살펴보며 얼핏 인상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다른 메이지유신기 인물들과는 달리 평생 사진을 찍지 않아 그의 얼굴이 그림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사무라이들을 모아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고 비극적으로 자결한 마지막까지 들으니 ‘사무라이 정신’이란게 있다면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정한론’의 주창자이지만 나름대로 매력과 서사가 있는 인물이랄까.
그림 13. 가고시마 중앙공원 앞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거대 동상(좌)
그림 14. 설명중인 박종린 회장님(우)
그림 15. 사이고 다카모리 종언지
패배한 세이난 전쟁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사이고는 사진 오른쪽의 동굴에서 부하로 하여금 목을 치게 하여 자결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관련 유적들을 살펴본 뒤 우리는 배를 타고 다네가시마로 건너갔다.
그림 16. 다네가시마로 가는 배를 타러 가기 전 버스에서 먹었던 도시락
나름 고된 배 여정때문이었는지 다네가시마에서는 사진을 별로 찍지 못했다.
다네가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로켓발사장이 있는 우주센터라고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화승총과 관련된 자료를 볼 수 있는 다네가시마 철포관(種子島 鉄砲館)이었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최초로 철포가 유래된 곳으로 1543년 타고 있던 중국 선박이 난파된 포르투갈인을 통해 철포를 전래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철포관에는 전국시대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화승총과 서양의 총기류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가고시마에서 무려 왕복 4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좀처럼 외국인 관광객을 보기 힘들어서였을까, 철포관에서는 우리를 무척 반겨주셨다.
그림 17. 연구위 간사 심규보 선생님이 찍어주신 다네가시마 철포관 전시물 모습
아쉬운 '전쟁 기억'과의 마주침
넷째날은 원 일정에는 없었던 가고시마 근대문학관을 먼저 들른 후 지란(知覧)의 무가주택과 특공평화회관을 방문했다. 가고시마 근대문학관에는 가고시마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주목한 인물은 개조사를 창립한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였다. 백남운 선생이 그의 서생으로 있었기에 그의 전시에서 백남운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들린 지란은 본래 시마즈가문의 한 갈래인 사타(佐多) 가문이 통치했던 지역이라고 한다. 1318년 시마즈가문 4대 당주인 시마즈 타다무네(島津忠正根)의 셋째 아들 타다미츠(忠光)가 사타정(佐多町)에 파견되면서 사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1358년에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로부터 지란정을 하사받았고, 사타가문의 4대째에 이르러 지란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가 둘러본 무가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고, 사타 가문의 18대인 시마즈 히사미네(島津久峯), 1732~1772)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림 18. 전쟁중 격추되어 떨어진 특공기를 전시한 모습
그림 19. 전시된 가미카제 특공대원 중 답사팀이 발견한 조선인들
이들 외에도 10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무가저택과 아주 가까이 있는 지란특공평화회관을 관람했다. 내 연구 영역과 가장 가까운 2차 세계대전시기를 다룬 곳이기에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장소였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기리는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는 특공대원들의 사진들이 모두 걸려 있었고, 그들이 전쟁 승리를 다짐하며 써 내려간 각종 혈서, 머리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특공대원들의 사진 속에서 약 10여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가미카제 특공대는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이 패배 직전의 상황에서 충돌로 미군 항공모함을 난파시키기 위해 만든, 전술적 가치가 거의 없던 부대였다. 설명을 맡으신 이상호 선생님께서는 특공대원의 일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하다고 이야기하셨지만, 전시품들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전시 내용도 특공대의 희생과 충성심만을 부각했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특공회관 관람을 마무리한 후 우리는 단체로 이부스키로 이동한 뒤 가이드님께서 강력히 추천하신 모래찜질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가는 중간에 이케다 호수에서 본 카이몬다케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사쓰마의 조선인들, 그리고 귀환
마지막 날은 오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호텔에서 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가고시마 서쪽의 히오키시(日置市) 다이야마 신사(玉山神社) 일대가 오전의 방문지였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왔던 도공 및 기술자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다이야마 신사는 1708년 이들이 단군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한 건 의외로 신사로 가는 길에 세워진 마지막 도리이 앞쪽의 비석이었다. ‘戊辰役從軍記念碑’라고 쓰여져 보신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이었는데, 그 글씨를 막부쪽이었던 도호쿠현 출신이자 2번이나 조선 총독을 역임했던 사이토 마코토가 썼기 때문이었다. 여러 선생님께서 사이토 마코토의 장인이 그의 해군병학교 시절 교장이자 사쓰마번의 해군유력자 니레 카게노리(仁禮景範)였고, 그의 딸과의 결혼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고 설명해주셨다. 역시나 사쓰마 지역사-식민지조선사 간의 만남이었다.
그림 20. 사이토마코토가 글씨를 쓴 보신전쟁 참전희생자 기념비
다이야마 신사를 둘러본 뒤 우리는 1598년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자 사쓰마 도기의 명성을 널리 알린 심수관의 심수관요(沈壽官窯)와 역시 끌려온 조선인이었던 도공 박평의의 후손인 박무덕,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심수관이란 심당길의 제12대 후손 심수관(1835~1906)이 만든 개인 가마로, 그로부터 후손들은 대대로 심수관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 대대로 사쓰마 도기를 생산하던 심당길의 후손들은 제12대 심수관에 이르러 사쓰마번이 폐지되자 개인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 생산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도기를 출품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서양으로 사쓰마 도기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심수관요의 전시관에서는 19세기 말 서구 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일명 ‘B급’이라 출품하지 않은(혹은 동일하게 여럿 만든 뒤 출품하지 않아 남은) 화려한 도기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림 22. 심수관요를 만든 심당길의 제12대 후손 심수관
그림 23. 심수관요 전시관에서 본 박람회 미출품 도기들
이어서 바로 인근의 도고시게노리 기념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우리는 일정을 마무리했다. 조선인의 후예로 두 차례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종전협상을 담당했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재판에 넘겨진 후 금고 20년형을 선고받은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조선인의 후예로 원래 이름이 박무덕이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나름의 아이러니를 수확한 셈이다.
점심으로 우동과 치킨난반을 먹은 후 우리는 가고시마공항으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답사기에는 구체적으로 쓰지 못했지만 4박 5일간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날씨와 풍경과 함께해 행복했고, 거의 매일 밤 뒤풀이를 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따로 준비할 것 하나 없이 버스만 타면 하루가 훌륭한 일정으로 꽉꽉 채워진다는 사실이 가장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무거웠던 머리를 살짝 비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편하면서도 알차기가 어려운데 이번 답사는 그 양립불가능성을 성취한 여행이었다. 모두 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주신 연구회 선생님들 덕이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