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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②_예대열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04.03 BoardLang.text_hits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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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3월(통권 61호)

[기획연재] 
 
 

냉전시대 경계인의 고군분투기, 조명훈 평전 2화

 


예대열(현대사분과)

 
 
 
 
 여순사건 연루에 군 영창 생활. 조명훈은 한국에서 더 이상 꿈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진정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것일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소재한 퍼먼대학교(Furman University)가 서울대 앞으로 학교 소개 책자를 보내왔다. 조명훈은 동봉된 재학생 명부 중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Pauline)과 이름이 같은 학생에게 눈이 가 입학을 주선해 줄 수 있는지 편지를 띄워 물었다. 폴린이 그 편지를 대학 당국에 보여주었고, 학교는 “이렇게 잘 쓴 영문 편지는 처음 본다”며 장학금 지급 약속과 함께 입학을 허가했다.
 
 조명훈은 1954년 9월 퍼먼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외국에서 온 정치학도답게 ‘Cosmopolitan Club’과 ‘IRC(International Relation Club)’에 가입했고, 학교 대표로 600여 대학이 참여하는 전미 IRC 컨벤션에 참석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해 지질학 수업 발표가 “강의실 속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고 학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퍼먼대의 교육은 조명훈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대학이 위치한 그린빌(Greenville)은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도시였던 만큼 인종차별은 물론 ‘메카시즘’의 상처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후일 미국 생활에 대해 “지성인에겐 마지막 나라라는 생각이 들 만큼 사막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퍼먼대를 떠나며 학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많은 교수님들과 동료 학생들을 통해 제가 그리는 그림이 매일 그려지고 있습니다. …
이 그림은 이제 거의 완성되었지만,
화가는 그림을 원근감 있게 보려면 어느 정도 멀리서 바라봐야 하므로
유럽에서 마지막 손질을 하려고 합니다.
현재 제 그림에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배경 어딘가에 아시아 모습이 없다는 점입니다.
제 미국인 친구들 중에서 아시아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아시아인의 고통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깊은 무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명훈이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떠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그가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파리는 동양에서 온 청년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파리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파리를 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밤처럼 새까만 흑인 사내가 백인 여자와 열렬히 키스를 하고,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공산당 기관지 『루마니테(L’Humanité)』를 읽고 있는
거리에서 나는 파리야말로 온 인류의 수도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내가 좌익사상에 눈뜨게 된 것은 파리에서였습니다.
 
 
조명훈은 파리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비로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감각적으로 체험”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장학금을 받지 못해 가난한 고학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유학생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100달러 한도 내에서 공식적으로 환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조명훈은 바꿀 돈이 없어 다른 유학생에게 그 권리를 파는 대신 수수료를 받아 생활했다. 그때 배당된 환전 권리를 산 사람이 ‘동백림사건’과 관련 있는 작곡가 윤이상이었다.
 
 조명훈과 윤이상은 힘든 타지 생활이었지만, 파리의 자유를 만끽하면 할수록 조국의 암울한 상황과 대비되어 함께 술 마시며 울분을 토하고는 했다. 그들에게 프랑스 혁명이 벌어진 “1789는 우리의 선구자”처럼 느껴졌지만, 그와 대비된 조국의 “해방, 38선, 전쟁, 민족, 통일”은 눈물 흘리게 만드는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조명훈은 병역미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더 이상 체류 연장이 되지 않아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랑스보다 비자 문제가 자유로운 서독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았고, 1958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59년 3월 부활절 휴일을 맞아 서베를린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서베를린으로 여행을 가려면 동독 세관을 지나야만 했다.
 
 서독 여행객들은 신분증만 있으면 동서독 국경을 바로 통과할 수 있었지만, 조명훈은 한국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 세관원에게 제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실랑이 끝에 동독 세관원이 “그러면 ‘백림’에 있는 당신들 대사관에 내가 전화를 걸어서, 당신 사정 좀 들어 달라고 부탁해 보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조명훈은 동독 세관원이 말하는 ‘백림’이 동베를린이고, “당신들 대사관”이 북한 대사관이라는 것을 사증이 나온다는 마음에 들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명훈은 동서독 국경을 통과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여행을 모두 마쳤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 건드렸다. 윤이상이었다. 그들은 없는 돈에도 함께 잔을 기울이며 암울한 조국의 미래를 논하던 파리에서처럼 바로 술집으로 들어가 회포를 풀었다.
 
 그 자리에서 조명훈은 ‘평화공존’을 주제로 한 자신의 학위논문 주제를 얘기했다. 서방 세계 자료들은 많이 구했으나 공산 측 자료들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고민이었다. 그러자 윤이상이 북한 대사관에 가 보면 자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조명훈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조명훈은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꿔 윤이상을 따라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으로 향했다. 조명훈은 남북한 현실과 대비되는 동서독 상황,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 논문 자료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등을 갖고 북한 대사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은 조명훈을 공관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한식으로 가득 찬 음식상을 내왔다. 조명훈은 오래간만에 먹는 한식이라 그런지 술과 음식을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는 생전 처음 인삼주를 먹고 토할 때까지 마시다 의식을 잃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윤이상은 사라졌고, 이후 ‘동백림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때까지 그를 만나지 못했다.
 
 조명훈의 관심사는 대부분 대학원생이 그렇듯 논문을 위한 자료 수집과 집필 준비였다. 북한 대사관 직원은 자료를 제공해 주지는 않았으나, 직접 동베를린으로 오라거나 생활비를 보내 주면서 그와의 관계를 이어 갔다.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조명훈은 북한 대사관 직원이 보내 준 돈에 고마워하면서도 차츰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명훈은 북한의 의도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만남을 이어 가지 않았다. 1959년 봄부터 여름까지 지속된 관계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이렇게 끝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67년 7월 ‘동백림사건’이 발생했다. 중앙정보부는 유럽에 거주하는 교민과 유학생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 사건의 배경에 조명훈의 일화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직도상에도 조명훈은 ‘주모자’로 낙인찍힌 윤이상과 사건의 실체를 청와대에 ‘밀고’한 임석진 사이에 위치할 만큼 중요 인물로 그려졌다.
 
 
1958년 4월경 당시 서독 슈투트가르트 신문사에 근무 중인 조명훈으로부터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
북괴의 경제 관계 문헌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同人에게 前示 박일영(朴日英, 북한 대사관 직원)과의 관계를 말한 후
같이 가면 만나서 얻어준다고 하여 박일영을 찾아가 同 조명훈을 소개 접선케 한 다음 식사를 대접받으면서
북괴의 발전상, 공산주의 이론 등의 교양을 받음으로써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 (…)
 
 
그림 1. 동백림사건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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